괴담의 테이프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미쓰다 신조로군요.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로 무섭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니, 저는 확실히 공포 장르를 영화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 보다 는 책으로 읽을 때 더 무서움을 느끼네요. 아무래도 책은 다른 것들과 달리 한 가지 감각을 별도로 더 요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촉각 말이죠. 읽기 위해선 만져야 합니다. 손으로 책을 만지고 또 계속 페이지를 넘겨야 합니다.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뭔가 음험한 것이 도사린 그것을 말이죠. 영화는 멀리 떨어져 가만히 보기만 하면 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죠.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듣는 시늉만 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영화를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경우 모두 얼마든지 나와 상관없는 구경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책은 혼자 진행되지 않습니다. 나의 적극적인 행위를, 달리 말해 참여를 요구합니다. 저의 실제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흐릅니다. 무서운 것을 저 스스로 초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것, 내가 거기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 그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책이 다른 매체보다 더 공포감을 낳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몰입도 다른 것들 보다 훨씬 크구요. 물론 기억도 책으로 만난 공포는 오래 남지요. 이런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공포 소설이 나오고 또 그것을 자주 즐겨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만화도 비슷하네요. 문득 이토 준지의 만화들을 얼마나 힘들게 페이지를 넘겼던가 하는 게 떠오릅니다. 그림 때문에 손을 대기도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궁금하여 그것을 보려고 애써 손을 대어 끝까지 읽어버리는 저는 아무래도 이 장르에 매혹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을 나오자마자 만났습니다. 이 작가의 공포 소설엔 뭐라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마음을 잡아 이끄는 매력이 있어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손에 잡게 됩니다. 지금까지 각종 매체로 허다하게 공포물을 접해 온 저입니다. 소재에 있어서도, 내용에 있어서도 '와, 이거 정말 새로운 걸!' 하는 것은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최근엔 영화 '제인 도'를 보면서 그런 걸 느낀 적은 있습니다만. 물론 미쓰다 신조의 소설도 그렇게 새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나오면 기대하게 됩니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야기 자체 보다는 신조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 분위기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경계의 허뭄' 입니다. 여기서 경계란 허구의 이야기와 지금 제가 있는 실제 현실 사이에 놓은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조의 이야기는 자주 그것을 허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근대 초기의 소설들이 취했던 장치를 씁니다. 영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근대 초기 소설들을 보면, 수기의 형식을 빌린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수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게 바로 공포 소설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이나 에드가 알란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을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소설들의 수기는 대부분 누구의 목격담, 증언으로 이뤄집니다. 그렇게 지금 재현되고 있는 이야기가 공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란 것을 독자에게 납득하도록 만들죠. 다시 말해 수기의 형식은, 특히나 이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얼른 헤아리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초래하는 공포를 다룰 때 이 때문에 가지게 되는  독자가 한낱 망상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을 '있음직한' 사실로 만들어 피해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있음직함' 때문에 소설이 원래 노리던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킬 수도 있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정녕 어떨 때 공포를 느끼는가 하는 게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소설 속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낄 때라는 게 말이죠.


 '경계의 허뭄'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의 스크린처럼 저편의 이야기와 이편의 내 삶의 절대적으로 나뉘지 않고 그 공포의 침입을 막아주는 스크린이 찢어진 것처럼 내 삶으로 침범하여 흘러든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이야기 속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듯이 말이죠. 상기해 보시면, 무서운 이야기가 정말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아, 저 일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겠구나!' 깨달을 때 말이죠. 미쓰다 신조도 그런 수기 형식을 빌려 왔습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아주 일신 상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양(어쩌면 정말 있었던 일 일수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여기도록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읽다보면, 미쓰다 신조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음직한' 느낌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저는 특히 두 단편, '괴담의 테이프'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괴담의 테이프'는 마지막 장면 연출이 정말 압권입니다. 마치 자신의 자살을 생중계 하기라도 하듯 자살하려는 사람이 자살할 때까지의 상황을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한 테이프가 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데, 원래 그것을 오래도록 모으고 그 중 특별히 세 편을 골라 책을 쓰기로 했던 저자가 그 세 편을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오고는 실종되고 마는데, 나중에 실종된 그 작가가 미쓰다 신조에게 이제는 자신이 직접 고백하는 자가 되어 자살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옵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연출이 저는 정말 좋더군요. '괴이'의 공포는 정체 불명에서 나오는데, 그 정체불명을 온전히 남겨두어 현실감과 무서움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연출이었습니다. 분명 공포의 효과에 조예가 많은 작가라 그런 연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독자에게 더 큰 한 방을 주기 위해 다른 방향을 취할 것이거든요. 독자의 눈 앞에 괴이의 전모를 밝히는 것 같은.


 이런 '적절한 물러남'(저는 작가의 그런 연출을 이렇게 부르고 싶네요.)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역시 결말 부분인데요. 솔직히 이 에피소드는 살만 좀 제대로 붙이면 얼마든지 장편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무대도 적절하며, 미스터리도 꽤 넣을 수 있거든요. 저 역시 읽으며 '아, 좀 더 긴 이야기로 읽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미쓰다 신조는 이 좋은 이야기를 그냥 단편으로 마무리 지어버립니다. 후반 부분을 풀어가면 충분히 무서운 쪽으로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물러나는 것이죠. 그래서 역시 현실감과 그 현실감에서 오는 공포를 얻습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픽션을 현실처럼 만드는 능력 말이죠. 실제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여 '괴이'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능력. 정말로 그 방면에 있어서 미쓰다 신조의 능력은 최상 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무서운 것이죠. '괴이'가 책 속의 이야기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내 삶 속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에.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잡다하게 길게도 썼네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이 갖는 매력을 꼭 한 번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그건 모르겠지만.

 '괴담의 테이프'는 어떤 조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미쓰다 신조는 미스터리 작가인 동시에 공포 소설 작가입니다. 두 방면을 그는 다 걸어가고 있지요. 이번 '괴담의 테이프'에선 그 둘이 조우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두 번째 단편, '빈 집을 지키는 밤'은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할로윈'으로 대표되는 슬래셔 무비의 신조식 호러 변형판 같고, 그 다음의 '우연히 모인 네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의 호러적 변형 같습니다. 이렇게 미스터리에서 익숙한 소재들이 호러의 세계로 재탄생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번 단편집은 지금까지 말한 점들이 넘치는 책입니다. 권태로운 일상의 균열을 일으킬 공포를 만나고 싶다면 '괴담의 테이프'를 한 번 돌려보시라 권해 드리고 싶네요.


 '괴담의 테이프'는 개인적으로 더 무서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테이프들엔 모두 괴이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 출현의 신호가 하필이면 빗소리 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주구창창 비가 내렸습니다. 이야기와 현실이 이런 식으로 일치하니 좀 오싹 하더군요. 역시 무서운 것은 이야기만으로 안 됩니다. 그것이 현실 속으로 마구 침범해 들어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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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2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면서 사진 속 책 맨 앞에 그림은 자세히 못 봤습니다 마지막에 빗소리가 나고 무언가 나타난다고 한 걸 보고 위로 올리다 책 맨 앞 그림을 보니 오싹했습니다 노란 우비 쓴 사람?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노조키메》에서는 책을 읽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면 그만 보라고도 하죠 책을 볼 때는 그런 말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른 다음에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수기형식이 무섭게 만드는군요 다른 사람 소설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미쓰다 신조 소설만 조금 봤어요 공포소설... 미쓰다 신조 소설을 보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것만 봐야 할지, 다른 것도 생각해야 할지... 책을 보면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할 때가 많아서...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 듯합니다 알 수 없는 건 그것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희선

ICE-9 2017-08-26 02:48   좋아요 0 | URL
희선님, 잘 지내시고 계시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 일단 이렇게 안부부터 묻게 되네요^^
표지의 노란 우비 사람은 여자로 다섯번째 단편에 나오는 ‘괴이‘인데, 늘 비가 내릴 때마다 나타나 희생자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존재입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미스터리를 읽을 때는 이것저것 다른 거 많이 생각하는데, 공포 소설은 정말 다른 거 생각 못하겠더라구요.^^ 이야기 자체에 마냥 압도되어서... 그런데 영상으로 보면 아무리 무서운 것이더라도 어느 정도 객관적 관람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책은 잘 안 되네요. 특히 이렇게 미국식 호러가 아니라 일본식 호러는...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 조금 생각 중입니다. 여하튼, 저도 이렇게 이런 소설은 아무 생각없이 읽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