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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아이들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그들을 훔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훔치는 일은 또 다른 사업이다.
그 아이들을 무엇에 썼을까?
괴물을 만들었다.
왜 괴물을 만들었을까?
웃기 위해서였다.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중에서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주위 사물들의 온기를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d. 소설 속에서 그만 고유명사인 이름이 없다. 그래서 제목이 '웃는 남자'인가 보다. 대문자 D를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리면 웃는 입이 되니까. '하지만 소설에선 소문자 d로 표기되잖아?' 하고 굳이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그는 사물의 온기를 참을 수 없어한다. 계기가 있었다.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신성한 존재인 아내 dd가 죽었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온 상실. 그로 인해 그의 세계는 모든 의미를 잃었다. 어릴 때 그가 살았던 아버지의 목공소처럼 무의미한 잡음만 가득한 소음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존재가 아닌, 존재의 흔적만 보여주는 소리들로 넘쳐나는. 소설에 나오진 않으나 그가 사물의 온기를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온기는 존재에서 온다. 존재는 자신의 실재를 따스함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지금 자신은 존재의 잔향만 남은, 비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손으로 전해지는 사물의 온기는 기만이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려 한다. 무의미한 것들이 자신에게 의미의 환영을 심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p. 20)
이처럼 이 소설에서 '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d가 처음 세들어 살았던 목2동 505번지의 소유주, 김귀자 할머니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도 소리가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이로써 작가가 소리를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소리는 '사이렌' 이다. 6.25 전쟁 중 피난을 하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그녀는 아직도 전쟁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 때 사이렌 소리를 듣고 주저 앉아 버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전쟁을 경고하는 게 아니라 실은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알리는 것이었다. 파국의 도래가 아니라 김귀순 할머니가 살고 있는 여기가 더없이 좋고 안정적이라는 것의 확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역시 d가 느끼는 사물의 온기처럼 그 소리가 기만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세계가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은 폭격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p. 23)'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에 사이렌 소리가 아무리 과거와 절연된 현재를 말해도 자신이 '과거의 여전한 현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사이렌 소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일깨울 뿐이다.
소리가 그러하기에 d는 '웃는 남자'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은 아니고, '공각기동대 TV 시리즈'에 나왔던 '웃는 남자'다. 그 '웃는 남자' 심볼 주위엔 J.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왔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
말 그대로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 d는 인간의 마음이 턱에 있다고 생각한다.(p. 26) 그것은 있는 힘껏 앙다문 턱이다. 하나의 강력한 의지로 된 마음이다. 나라도 기만의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의지. 그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까지 되어 자신의 세계를 고립시킨다. 홀로 떨어져 녹슨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진 오두막처럼 속지 않기 위하여 세계와 간격을 둔다. 이제 그렇게 살 것이었다.
결국 '웃는 남자'는 어떤 이야기인가? 단적으로 소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만의 사이렌에 불과했던 소리에서 상실의 통증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그만 놓쳐 버렸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다. 소리의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곧 존재에 대한 집착이다. 존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게 되면 잔영이라 하더라도 마냥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삶에서 그것들은 서로 넘나들거나 섞여든다. 추억이 그렇고, 그리움이 그렇듯이. 때로는 실재의 잔영이, 그 그림자가 삶의 속을 더 채우기도 한다.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d는 여소녀의 가게에서 그런 것을 찾는다.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d의 아버지가 했던 목공소와 여러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다 같이 소리를 모으지만, 목공소는 오로지 소리를 집적할 뿐이나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소리를 내보낸다. 그 곳은 고립이 아니라 흐름의 장소이며 이는 여소녀의 가게가 있는 세운상가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여소녀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d는 상실로 무의미가 가득한 진공의 간격을 느끼지만, 여소녀는 그 진공에서 오히려 가득한 빛과 신호를 본다. 여소녀에게 그 곳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수많은 가능성이 태동하는 자궁인 것이다. 여소녀도 d와 같은 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막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귀를 열어준다. 존재에 집착하지 말고 잔영을 음미하라고. 존재의 확산인 잔영. 바로 그것이 d가 매일 같이 여소녀의 가게에서 듣게 되는 음악이다. d는 여소녀와 박준배를 통하여 그것을 체득한다. 멈춤이 흐름이 되자 소리가 음악이 되었다. 진정한 소통이 열리는 순간, d는 비로소 진실의 온기를 느낀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처음이라 내가 이 소설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난 그저 소설이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뿐. 그렇게 작가 역시 여소녀처럼 내 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고 보면 모든 글은 음악이다. 그것은 열기마저 지니고 있어 귀를 막아도 들리게 만든다. 소리에 공명한 마음이 여운의 진동을 못 이겨 자신만의 악보를 적어나간다. 그렇게 흐름이 된다. 진공에 또 하나의 빛과 신호가 홀연히 떠오르듯. 문득 작가의 다른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들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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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는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다. 책에는 '웃는 남자' 말고 후보로 오른 다른 작품이 6편 더 실려 있는데, 면면을 보자면 김숨, 김언수, 윤고은, 윤성희, 이기호 그리고 편혜영이다. 하나같이 이름 꽤나 들어본 작가들이다. 모든 단편을 '웃는 남자'처럼 리뷰하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안되겠다. 간단하게 다들 '읽어볼만하다'는, 어쩌면 하나 마나한 말을 총평처럼 남기고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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