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을 때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그녀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 그가 '열차 안의 낯선 자들'로 데뷔했을 때가 1950년이었다. 아시다시피 그 때는 그녀의 정체성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을 남들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시기였다. 드러내면 대놓고 배척을 당했다. 그런 편협과 억압의 시기를 그녀는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회 스스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시대의 공기가 실은 얼마나 무지와 적의로 오염되어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늘 사회 속에서 함께 섞일 수 없는 '타자'로 존재해야 했던 그녀는 그런 오염이 점점 보편이 되고 냉전 시대를 빌어 진리가 되려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작품으로 옮겼다. 언젠가 거대한 파국을 가져올 지도 모를 불길한 시대의 대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의 개인적인 질병과 불안은 내 세대의 그것이 좀 더 고조된 것일 뿐.'


 그러므로 영국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두고 '우려의 시인'이라 부른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앞서 인용한 작가 내면의 고백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나 하고 몇 개를 읽었는데, 주인공 범죄에 대해 경찰이 대응하는 게 좀 미숙하고 허술하다는 평가가 보였다. 나 역시 그것이 이 소설의 주된 단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스릴러 장르가 가지는 공식에 한정시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릴러라기 보다 시대의 주류적 경향과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이가 그 신념을 단념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 전면화 된, 한 마디로 생생한 심리 드라마적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온 것은 60년이다. 냉전 시대가 가파르게 고조되고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소련은 전무후무한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색출하는 '메카시즘'이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라면 여기저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시험 받는 시기였다.

 어디서나 그녀를 범죄자에다 괴물로 규정하는 주장과 구호들을 만나야 했다. 단죄의 손가락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신념을 더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실제로 그녀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성애자인 척 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대표작 '리플리'가 위장하는 자의 심리를 그토록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실제 경험이 눅진하게 녹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엔 늘 '리플리' 처럼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보는 게 나타난다.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부터가 그러하다. 어쩌면 그만큼 내면의 고통이 컸다는 방증이고 아니면 절대로 사회가 자신의 진실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표현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런 시간을 거쳐왔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나오기까지 10년이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그 10년 간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고민이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로 재현되었다.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진 신념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성'이라는 것에 맞춰 살고 싶다는 타협이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가 오매불망 사랑하는 애너벨이 바로 전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구애하는 에피 브래넌이 후자다. 애너벨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혹은 관철해야 하는 신념의 상징이고, 에피는 포기를 통해 얻어지는 현실의 안정과 달콤함의 상징이다. 당연히 데이비드 켈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분신이다. 그의 고민은 곧 작가 자신의 고민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집념과 마지막 선택은 작가 자신의 의지 관철이요 선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주인공 내면의 심리가 세밀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는데, 분명 작가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내면을 알고 싶습니까? 그러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으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심리 묘사 상세하고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생각해 보면 심리 묘사 자체가 그런 평가를 낳지 않는다. 아무리 상세하고 생생하게 심리를 묘사해도 그 묘사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쓸데없이 장황하고 뭘 보여주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반응만 낳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심리 묘사를 읽을 때, '와, 어떻게 이렇게 묘사하지? 굉장한 걸!' 하고 느낄 때는 언제나 나도 언젠가 가졌던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거나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이런 마음도 가능하겠다 생각될 정도로 재현하고 있을 때다. 즉 묘사가 보편적 공감을 얻고 개인적 체험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묘사의 수준이 세밀한 것을 넘어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던 것까지 선명하게 표현할 때 그러하다. 이 소설의 심리 묘사는 정확히 바로 이런 차원을 담고 있다.


 어쩌면 이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너벨을 향한 주인공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서 '거기서 어떻게 보편적 공감을 가진다는 말인가?' 하는 반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주인공의 심리를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고수하려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맞춰 본다면,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들도 늘 하기 마련인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번민과 갈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상과 신념 그리고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은 늘 우리도 바라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면에서 주인공과 우리는 그리 다르지 않다. 보편적 공감은 바로 거기서 우러난다. 우리도 한 때는, 아니 어쩌면 지금도 나만의 모습과 이상 그리고 신념을 쫓았거나 그러고 있으니까.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범죄 소설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자들을 위한 응원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내처 걸어가라는 등의 토닥임이다. 그랬기에 제목 역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걸어가면서 당하는 고통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토록 달콤한 고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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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 님 글 읽다가 문득 히치콕이야말로 천재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열차 속의 이방인‘을 히치콕이 영화화‘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남자 배우를 실제 게이를 섭외하죠. 아주 유명한 일화인데...
이걸 보면 히치콕은 하이스미스가 은밀하게 감추고 싶었던 것을 간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blog.aladin.co.kr/trackback/myperu/6971840 ( 마침 제가 쓴 리뷰가 있군요.. )

ICE-9 2017-08-28 18:3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확실히 히치콕은 그런 감이 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분명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텍스트를 엄청 깊게 헤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역시 타인의 작품에 대해 좋은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작품도 잘 만드는 것 같네요^^

2017-08-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8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