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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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만이다. 그러고 보니 리베카 솔닛의 책은 꼭 2년 주기로 만났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뇌리에 각인시켰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읽은 2년 뒤에 우리나라에서 정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킨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만났고 또 그 2년 후에 이렇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와 해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리베카 솔닛의 책이 그것만 나왔던 것은 아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나오기 전에도 창비에서 '어둠 속의 희망'이 나와 있었고 민음사에선 '걷기의 역사'(이 책은 계속 절판이었다가 리베카 솔닛이 인기를 얻자 '걷기의 인문학'으로 제목을 바꿔 재간되었다.)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책들은 리베카 솔닛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널리 알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결이 참 달랐다. 넓게 보자면 모두 환경에 대한 책으로 지금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인식하는 '페미니즘'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이 환경 분야가 리베카 솔닛이 전력을 기울이는 쪽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왜 지금은 페미니즘 투사가 되었을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2014년 5월 23일. 미국 아일라비스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2세의 남성 엘리엇 로저가 칼과 총 그리고 차량으로 모두 6명을 살해하고 13명을 부상입힌 것이다. 저지른 짓도 저지른 짓이었지만 그 동기가 더욱 충격이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여성들과 그 여자들과 즐거이 어울리는 남자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대학 여학생 사교 모임 회원들을 대량 살인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제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동기의 핵심엔 '여성 혐오'가 있었다. 많은 주류 언론은 그러한 동기를 무시하고 그저 한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정리해버렸지만 개인들, 특히 여성들은 그럴 수 없었다. 적의와 살해의 대상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목소리들을 분출시켰다. 주류 언론의 한결같은 침묵이 그 목소리들을 더욱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발달된 SNS를 통하여 '#yesallwomen(여자들은 다 겪는다)'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그것은 거세게 흘러나왔다. 저마다 여성으로 살면서 당했던 고통, 가졌던 불안과 공포를 고백하는 물줄기였다. 


 여자들은 자신이 겪은 희롱, 위협, 폭력, 두려움을 말하기 시작했고, 서로의 목소리를 보강했다.(p. 130)


 계기가 우리나라와 참 비슷하다. 우리나라 역시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벌어진 한 살인 사건이 다시금 페미니즘에 주목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물줄기가 아일라비스타에서 일어난 비극이 결코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며 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이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걸 사방에 외쳤다. 봉기의 함성 그대로였다.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2014년은 남성의 폭력에 항거하는 페미니즘 봉기의 해(p. 120)'라고. 


 이것이 환경 쪽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발걸음을 바꾸었다. 환경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한 열정과 똑같은 크기로 페미니즘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몇십년이나 기다리고 있었고(p.124) 마침내 타오른 그 불길을 언제까지나 타오르게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이번에 나온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그런 마음의 산물이었다. 보다 인문학적이었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달리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다룬다. 앞의 책이 총론이라면 이번 책은 각론 같은 느낌이랄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1부, '침묵이 깨어지다'와 2부, '이야기를 깨뜨리다'로 이뤄져 있는데, 제목 그대로 1부는 2014년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침묵이 깨어진 것과 관련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고 2부는 그동안 여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남성의 이야기에 맞서 2014년에 출현하여 이제 하나의 점이 된 여성의 목소리를 어떻게 남성의 이야기 못지 않은 이야기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오직 이 책을 위해 리베카 솔닛이 쓴 '모든 질문의 어머니'가 서문 격으로 나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부각시켜 준다.


 아무래도 이 책의 중핵이라 할 부분은 '모든 질문의 어머니'와 1부 맨 처음에 나오는 '침묵의 짧은 역사'가 될 듯 하다. '침묵의 짧은 역사'에서는 그동안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해 온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여성들이 그 침묵을 적극적으로 깨뜨려야 하는지 알려준다.


 당신이 여자로서 어떤 노선을 취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분야로 진출한 경우 괴롭힘은 어차피 따라붙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한 내용이 아니라 당신이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괴롭힘을 끌어들인다.(p. 90)


 이런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거부하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었던 여성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지금은 과거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하는 등 변화를 일으켜 왔다. 특히 여성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상이 진전한 게 있다면 모두 그 목소리들이 만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 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p. 117)


 그리고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태도를 '모든 질문의 어머니'는 말해준다. 그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식으로 굳어진 것도 진리는 아니며 아직은 잠정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행복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무엇보다 질문이 없는 상태인 까닭이다.


 요즘 우리의 행복에 대한 집착은 이런 다른 질문들을 던지지 않으려는 방편일 지도 모른다. 우리 삶이 얼마나 광활할 수 있는지, 우리 노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우리 사랑이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를 모른 척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p. 27)


 그렇지 않아도 원래 낙원이라는 단어의 어원 또한 산크리스트어로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정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행복이든, 낙원이든 실은 누군가 '여기까지다' 하고 한계를 지어놓은 것 안에서의 안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들 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라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질문은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하나는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사실 낙원의 벽과 같다. 질문 받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주체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여성을 사회가 규정한 규격화된 정체성에 채집한 곤충처럼 고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이 흔히 받는 질문으로 들고 있는 '아이는?'  못지않게 여성이 반복적으로 받는 질문이 또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일을 하면서 육아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 질문은 오직 여성에게만 행해진다. 왜 남자는 그런 질문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또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없다. 당연히 의심을 하고 질문이 되어야 하는 사항인 것이다. 이렇게 질문은 다르게 사용된다. 여성이 받는 질문은 간접적인 정체성의 강요인 경우가 많지만 여성 스스로 제기하는 질문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벽을 초월하려는 탈주인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의심과 질문을 소중히 한다. 모두 여성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을 형성하며 지속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2부에 나오는 소설 '롤리타'와 영화 '자이언트'에 대한 글은 그 의심과 질문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습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읽어보면 바로 느낄 터인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후속작 느낌이 강하다. 그 책과 똑같이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들의 모음이며 페미니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책이 아나 떼레스 페르난데스의 그림들을 실었듯이 여기에도 리베카 솔닛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빠스 데 라 깔사다의 그림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 아직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참에 둘을 같이 묶어서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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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12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에서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서양의 세계 제패의 힘은 ˝질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데 우리는 흔히 퉁쳐 ˝이성˝의 힘을 강조하지만 좋은 질문, 의문을 갖고 제시하고 행동에 담지 않는다면 이성도 고약한 똥덩어리일 수밖에 없다는 걸 공감하게 되죠.

ICE-9 2017-09-13 20:53   좋아요 0 | URL
앗, AgalmA 님도 그 책 읽으셨군요. 저도 읽었답니다.^^ 전 알쓸신잡이 한창 방송할 때 읽어서 그런지 책에서 자꾸 알쓸신잡이 연상되더라구요. 아무튼 꽤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질문과 의문에 대해 하신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살아가면서 더욱 정답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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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핑루의 새로운 작품이 이렇게 나오다니, 반가웠다.

 작가로서의 경력만 벌써 30년이고 대만에서 아주 유명한 작가이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보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그녀의 작품은 단 두 편. 하나는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데뷔작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고 다른 하나는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의 삶을 그린 '걸어서 하늘 끝까지'이다. 둘 다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기에 '핑루'라는 이름을 뇌리에 새겨둘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작가에게 매력을 느껴 그녀의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2015년에 나온 '검은 강'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검은 강'은 그리 늦지 않게 우리에게 소개되어 더욱 기뻤다. 지금까지 나온 핑루의 소설들은 늦어도 너무 늦게 우리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은 원래 83년에 나왔다. 그리고 '걸어서 하늘 끝까지'는 95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2013년과 2014년에서여 소개되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하늘 끝까지'가 먼저 소개되어 어느 정도 반향을 얻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마저 만나지 못 할 뻔했다. 자꾸 이렇게 책과 상관없는 사설을 늘어놓은 것은 '검은 강'을 읽고나니 더욱 그녀의 작품에 대한 허기를 느끼게 되는 탓이다. 이제 또 한동안 볼 수 없을테니, 왜 이렇게 핑루의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는 거냐고 이 자리를 빌어서나마 하소연 할 밖에.


 사실 '검은 강'의 스타일은 '옥수수밭에서의 죽음'과 '걸어서 하늘 끝까지'와 많이 닮았다.

 이미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소설이 시작하여 그 이유에 대해 탐문해 나가는 건, '옥수수밭에서의 죽음'과 닮았다. 그리고 사건에 관계되는 자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을 택해 서로 번갈아가며 화자 역할을 하는 것은 '걸어서 하늘 끝까지'와 유사하다. 이처럼 '검은 강'은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핑루의 서술 스타일이 이미 데뷔 때부터 완성되었으며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들은 핑루를 말할 때 꼭 여성 작가라는 것을 밝히기도 한다. 그것은 그녀의 글 쓰는 스타일 때문으로 핑루는 자신의 글에서 철저하게 여성적인 면모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글이 어떤 성별로 다가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글쓰기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저널리즘이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도록 저널리스트로 일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작품을 형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되기도 한다. 핑루는 언제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나 존재했던 인물에 대해 작품을 쓴다. 실제 사건 그대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래도 출발은 어디까지나 정말로 발생한 사건이며 실존 인물이다.



 '검은 강' 역시 그러하다.

 이 소설은 대만의 신베이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마마하우스 커피점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커피점의 여자 점장이 단골이었던 노인과 그의 아내를 먼저 커피에 약을 타 마시게 하여 의식을 잃게 한 뒤 강으로 끌고 가 칼로 살해한 사건으로 범인이 여성이라는 점과 범행의 잔혹함 때문에 대만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그 사건을 두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소설가는 보통 이렇게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어버린 사건에 더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으로는 발을 담그지 않으려 한다. 이런 논쟁에 뛰어드는 경우, 그것이 아무리 소설이라 하여도 작품을 통해 아무래도 특정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니 어떻게든 논쟁의 불길이 자신에게 옮겨붙기 때문이다. 작가로선 얻는 것은 적고 잃을 것은 많은 행위이다. 그러나 핑루는 과감하게 뛰어든다. 이 사건의 2심 판결이 2014년 9월에 났으니, 핑루는 소설로 논쟁에 거의 현재형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괴물로 손가락질하는 자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다. 찬찬히 그리고 깊게. 이런 식의 재현이 많은 원성과 비난을 부를 것을 능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핑루는 그토록 대담하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문학적 신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여론은 때로 언론의 부추김을 입어 감정적이 되어 편향된 시야를 가지기 쉽다. 고루 다 들여다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단정 지어 버리는 어리석음으로 한 인간 또는 가족의 삶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달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고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면 지켜질 수도 있는 삶이었다. 특히나 대만은 오래도록 독재국가였다. 거기다 장제스에 의해 원래 그 땅에서 살았던 원주민이 가혹한 차별을 당했다. 누군가의 자의적 판단으로 사람들의 소중한 삶이 무참히 짓밟히는 게 허다하게 일어났다. 핑루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 삶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달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자신이 열어주어야겠다고. 여기 당신들이 쉽게 짓밟는 발 아래 그 자체로 존중되고 헤아림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겠다고.

 바로 그런 신념의 체화(體化)가 핑루의 소설이다.


 그러므로 핑루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쫓는다.

 그녀가 언제나 결과보다 이유에 천착하는 것도 사람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기 위해서다. 그는 묻는다. '왜 그녀는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녀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는가?'. 핑루의 탐침은 나침반의 자침이 언제나 북극을 가리키듯 거기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그녀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에서 쑨원과 쑹칭링의 삶을 여과없이 그렸던 것과 마찬가지다. 핑루의 작품은 언제나 전기(傳記)의 성격을 지닌다. 자신이 아는 것과 원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담고자 하는 타인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핑루는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독자가 가급적 투명하게 만나길 원한다. 작가의 시선이 독자의 시선이 되지 않도록 그는 그저 단순한 매개자로만 남으려 한다. 혹시 독자들이 자신의 시선에 오염될까봐 독자가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실제에서 그대로 가져온 정보들을 병기하기도 한다. '검은 강'도 그러하다. 우리는 여기서 챕터가 하나 끝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실제 사건에서의 목소리들을 보게 된다. 피고인이나 피해자 혹은 그들의 지인 또는 언론 보도나 댓글에서 나왔던 말들을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핑루는 비록 자신의 손 끝에서 창조된 인물이지만 그 진정한 초상은 독자 스스로 구현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그 인물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도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할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핑루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다.


 우리의 문화는 인성이라는 의제와 감추어진 동기에 깊이 파고드는 것에 흥미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의 동기를 파헤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치부하죠. 살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일찌감치 대중에게 공개 처형당해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보루 안에 안전하게 숨길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검은 강'은 비록 소설이지만 '악한 사람'을 변호하는 것, 또는 죽은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게 만들어 불필요한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 사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인성이라는 문제에 회색 지대를 남겨 출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p. 290 ~291)


 제목의 '검은 강'은 부부가 살해된 단수이허 기슭에 있는 강을 뜻하지만, 제목의 의미는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검은 강'은 핑루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중하게 여기지 않기에 타인의 삶을 편향되게 바라보는 것도, 섣불리 단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이다. 그래서 '검은 강'이다. 그 어떤 삶도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온전히 지니지 못한 채, 사람들의 무시와 단정 속에 그들의 검은 빛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검은빛은 모든 빛을 자신의 색깔로 빨아들인다. 그들의 규정이 곧 진실이 되는 것이다. 핑루는 그 검은 강에 빛의 너울을 자아내려 한다. 모두의 삶에 저마다 지니고 있는 빛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검은 강'은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타인에게 강요하려 드는 이런 선동의 시대에선 더욱 소중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다. 핑루의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어 반갑다. 그 마음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대문학이 그렇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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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01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핑루 작가의 다른 책들도 번역이 돼서
나왔으면 싶네요.

아마 잘 팔리진 않겠지만.

ICE-9 2017-09-02 02:0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로또라도 당첨된다면 마구 구입해 시장 좀 만들어 줄 텐데요.. ㅠ ㅠ
 
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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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라기 히로키의 '절망 독서'는 고정관념을 허무는 책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독서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길 겁니다. 당연히 절망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독서도 불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가시라키 히로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절망하고 있을 때야말로  독서를 통해 견뎌나가야 한다고 말이죠.


 '인생 각본'이란 용어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 용어라고 하는군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중에 자신의 미래 삶에 대한 각본을 쓰고 있다는 이론을 뜻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살 거야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인생 각본'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설정하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비전 같은 거죠. 그러나 우리네 삶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무수한 변수로 넘쳐나는 이상, 부득불 그 인생 각본을 수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자의로 수정하기도 하지만, 외부의 강요로 수정해야만 할 때도 있지요.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엇의 도움을 얻어 각본을 고칠까요?

 물론 스스로 잘 해낼 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수정해야 할 지 도무지 막막하여 아무 것도 못할 때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하고 타인의 각본을 들여다 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러한 우리의 성향을 두고 '모델론'을 펼친 바 있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그것을 모델로 하여 그를 닮아 살아가는 것으로 닿고자 한다고 말이죠. 기독교의 예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인생 각본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 모를 때 타인의 각본을 모델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 어떤 타인의 각본을 보고 어떻게 수정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게 타인의 각본을 참조해야 하는데, 저자는 그것이 절망이라면 그 절망을 제대로 보여주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목도 '절망 독서'입니다. 왜냐하면 공감이야 말로 가장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그 자체만으로 큰 구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p. 55)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가시라기 히로키는 좀 특별한 저자입니다. 왜냐하면 더없이 창창한 나이인 스무 살 때 의사로부터 평생 낳지 않는 병이란 말을 들은 난치병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계획한 모든 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난치병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에 인생 각본을 급격히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격려를 하면 오히려 이제 자신에게 없는 그의 건강함만 더 부각되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가 위안을 얻은 곳은 오로지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고뇌를 토로하는 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된 경험들이 오늘의 자신을 인정하고 내일에 지속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공감의 힘은 그가 몸소 느낀, 누적된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알고 나면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했을 때는 그 기분에 다가와주는 음악이나 이야기와의 만남이 우리를 구해줍니다. 우선은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인 기분에 푹 빠질 것. 빠질 때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극복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p. 61)


 독서가 그것을 도와줍니다.

 '절망 독서'가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절망이 곧바로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두에게는 저마다 치유에 드는 시간들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주 짧은 사람도, 아주 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를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에게 다가온 절망 역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절망 속에서 적절한 치유의 시간을 아는 것은 단 하나, 억지로 치유하려 들지 않고 그냥 자신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바다 위의 표류물이 천천히 떠다니다 언젠가 해변에 닿듯이, 그렇게 언젠가 갈림길이 나타나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천천히, 산보 하듯이. 저자에 따르면 절망은 완만한 경사의 고원을 천천히 걷는 것처럼 극복해야 한다는군요. 그래서 독서입니다. 읽는 것은 무엇보다 느리고 꾸준한 행위니까요. 한없이 느리게 흐르면서 뚜렷한 변화도 없는 절망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느리면서 서서히 사유 속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독서만큼 어울리는 것도, 기댈만한 것도 없습니다. 하여 저자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죠. '절망의 시간일수록 책을 벗하라!'고.


 당신도 절망의 시간을 보내시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절망 독서'의 문을 한 번 두드려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뜻밖의 치유 방법을 얻게 될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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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7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설의 팡세>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밀 시오랑의 글들이 제 절망을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많이 의지가 됐었죠. 책은 배움보다 제게 그런 의미가 더 컸어요. 지금은 배울 게 너무 많아 절망스러움요ㅎ;;;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1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0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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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카 고타로도 아베 정부에 대해 어지간히 화가 났나 봅니다. 이런 소설을 쓴 걸 보면.

 어떤 소설이냐구요?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란 소설입니다. 놀랍게도 자경단인 히어로 물이에요. 표지에 점잖게 앉아 있는 인물이 바로 정의의 히어로입니다. 눈만 내 놓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검은 라이더 복장을 입은 채 목검과 수수께끼의 작고 둥근 물체를 던지며 싸우죠(그 물체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이건 읽으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것도 북한의 '5호 감시제'나 다를 바 없는 감시와 숙청이 마구 자행될 정도로 한 순간에 비민주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일본을 상대로 말이죠.



 소설 속 일본에 대해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테러를 막는다며 '평화 경찰'이라는 게 창설됩니다.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은 야쿠시지 경시장(일본 경찰 계급 중 서열 4위). 그가 '평화경찰'을 만든 장본인이죠. 이름을 '야쿠자'에서 살짝 빌려왔는데 거기서 이 평화경찰이 정말은 어떤 조직인지 힌트를 주고 있네요. 이들은 실제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테러를 일으킬 만한 인물들을 잡아들이는 게 목적입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범죄 예방 시스템과 비슷한 역할이죠. 그러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선 틀림없이 이뤄지는 예언이라는 근거라도 있었지, 이들의 예방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잡아들일 뿐입니다. 일단 잡아들이고 나서 온갖 비인도적인 고문을 통해 죄를 자백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을 고발하게 만든 다음 광장으로 데려가 시민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길로틴으로 참수시키죠. 그리고 참수된 이의 입에서 나온 사람을 또 잡아들이고. 그런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이쯤 되면 '허걱!'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신다구요?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다구요? 네, 맞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엔 많은 역사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스탈린 체제에서의 소련이 그랬으며, 50년대 미국의 메카시즘이 그랬죠.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서북 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빨갱이 사냥'이나 무려 3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보도 연맹'사건이 그것이죠. 이 압도적이며 남다른 희생자 규모를 보면 이승만과 그의 위세를 등에 입은 친일파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놈들인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국부로 받들자고 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을 국부로 받들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괴물을 국부로 만들자굽쇼? 국격을 '똥격'으로 내팽개치고 싶은 겁니까?


 앗,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미친 놈들이 설치던 나라에 살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사카 고타로에게 빙의해 버렸네요. 얼른 퇴마의 주문을 외우고 제 정신을 회복한 다음 본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본을 그리고 있으니, 그러면서 히어로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으니, 분명 이사카 고타로가 아베 정부를 향한 분노에 차서 이런 소설을 썼구나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소설 속 일본은 현재 아베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것의 핵심을 조금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일 따름이니까요. 경찰 이름이 하필이면 '평화 경찰'이라는 것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다른 무엇도 아닌, 아베가 정권을 잡고 나서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만들기 위해 내내 수정하려 했던 '평화 헌법'에서 차용한 걸 보면.


 이 소설이 2015년에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해 아베는 일련의 법안들을 패키지로 통과시켰습니다. 무려 과반수의 국민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흔히 '안보 법안'이라 부르는 그 것은 한 마디로 자위대가 외국에서 수시로 PKO(평화유지활동)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법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PKO가, 일본은 평화유지활동이라고 하지만 실은 평화가 아니라 자신의 전쟁 야욕을 위한 활동이듯, 소설 속 '평화경찰'도 사회의 평화를 유지한다고 주창하지만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의 평화만 지킬 뿐이죠. 네, 맞습니다. 소설 속 '평화경찰'은 실은 아베가 상시화 하려는 PKO 입니다. 그 '평화경찰'이 소설에서 완전 싸이코패스에다 가학적 성향으로 가득한 악당으로 설정되었으니 이보더 더 PKO에 대한 비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반골 기질이 강한 '이사카 고타로'로서는 시쳇말로 빡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목검을 들고 내려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다 심하게 내려친 곳은 그것을 자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런 짓을 뻔히 보고도 가만히 있는 국민들의 정수리가 아닐까 해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알고는 있지만 아직은 내게 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이토록 비민주적인 작태를 내버려 두는 사람들. 바로 그런 청맹과니와 같은 시야와 무심함이 결국엔 소설 속 같은 비극적인 파국을 낳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이 소설은 작가에게 문학이라기 보다는 죽비와 같은 것이겠네요.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수동적인 독자들의 정신을 세차게 일깨워 보다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한.


 저도 참 달게 받았고 덕분에 잠시 졸음에 빠지듯 놓아버렸던 관심과 참여의 결기를 다시 벼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목인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도 이제 달리 보이네요. 소설에서 이 제목은 저항하려는 이들에게 시대의 순리에 따르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지금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시대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네 일 아니라고 내버려 둘 거야? 넌 화성에서 살 수 있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면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당장 너부터 뛰어들어."


 저도 화성에서 살 수 없으니 당연히 이사카 고타로가 내어주는 목검을 받아야 할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것이 과연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태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꾸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혹시 소설이 지루할 것 같은 인상을 받으셨다면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야기는 492페이지를 한달음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밌습니다. 히어로 물에서 기대하는 활극도 넘치구요. 깊이와 재미가 모두 잘 우러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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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4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켄 로치가 은퇴 선언했다가 영국의 보수 정권이 득세하자 다시 영화 만드는 것처럼^^

ICE-9 2017-09-06 14:44   좋아요 1 | URL
그런 시기에 켄 로치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든 것을 보면 나쁜 정치 환경이 예술가들에겐 때로 순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사카 고타로도 그렇게 되려나요^^
 
기다렸던 복수의 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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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을 읽으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늘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복수다. 이것이 다른 미스터리 작가와 구별되는 야쿠마루 가쿠만의 독특성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들을 그린다. 그 과거란 누군가의 범죄로 인해 혈육을 잃었거나 자신의 삶이 망가진, 한 마디로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다. 야쿠마루 가쿠의 인물들은 늘 거기에 잡혀 있다. 과거의 덫에 걸려 현재도, 미래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끔찍한 범죄 피해자들의 삶이란 그렇다. 범죄를 당했을 때 이미 자신의 모든 시간 또한 거기에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이것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복수 또한 중요해진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정의를 세우리라 기대하는 법질서가 특히나 범죄 피해자들에겐 아무런 의지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범죄가 가져온 비극의 상처는 다른 것으로 풀 수 없고 오직 가해자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결자해지(結者解之)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은 늘 이 언저리를 맴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단적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다른 범죄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피해자를 중심에 둔다고. 최근 형사 정책학에선 형사 정책을 마련하는 근간에 피해자의 삶을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피해자학'이라는 게 주목받고 있는데, 야쿠마루 가쿠는 그 '피해자학'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독자에게 범죄로 인해 커다란 상처를 받은 인물을 주시하라고 한다.

 누군가의 악의로 삶의 모든 빛을 빼앗기고 그 먹먹한 어둠 속에서 내내 신음하고 절규하고 있는 한 영혼을 보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피해자의 삶을 자주 간과한다. 범인이 체포되면 그것으로 범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끊을 때가 많다. 정작 우리가 더 많이 헤아리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범죄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의 삶인 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야쿠마루 가쿠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원래 당연히 기울여야 했을 방향으로 우리의 관심을 인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에 나온 2016년작,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그 전해에 나온 '돌이킬 수 없는'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작품이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가 나오고 그 인물이 복수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게 똑같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은 타인의 복수를 대리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제목처럼 복수를 스스로 집행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인물에게 다른 갈등을 가져 온다. '돌이킬 수 없는'는 과거를 끊고자 하는데 그럴수록 더 질기게 달라붙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거꾸로 무수하게 이제는 과거와 단절하라는 요구와 유혹이 자신에게 쏟아지지만 정작 자신이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전자는 타인의 비극을 추체험하면서 그 앞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은 없는가를 묻지만 후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비극이 낳은 무저갱 속에 갇혀버린 자에 대해서 그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책임의 형태가 좀 더 명확해지고 개인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제가 이어지기에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소설은 30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 삶이 모조리 망가져 버린 가타기리 타츠오를 대상으로 하여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다섯 명이란 첫 번째는 30년 전 사건이 일어난 볶음국수 집의 주인이자 가타기리의 유일한 친구인 기쿠치 마사히로 이고 두 번째는 가타기리를 도와주려 하는 변호사 나카무라 히사시이며 세 번째는 30년 전 사건으로 영영 헤어져 버린,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있는 가타기리의 딸 마츠다 히카리이고 네 번째는 30년 전 사건에서 기쿠치 아내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국 가타기리에게 칼을 맞아 버린 가와지리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여성인  모리구치 아야코이며 마지막은 가타기리 타츠오와 묘한 인연을 맺어버린 아라키 세이지이다.


 이 다섯 명의 고백을 통해 얼굴 한 쪽엔 표범 문신이 있고 왼손은 의수이며 그런 몸으로 30년 내내 편의점 강도를 비롯하여 갖은 범죄로 교도소를 들락날락 거린 탓에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가타기리 타츠오의 생애란 게 정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또한 그 것을 통하여 소설은 우리가 커다란 비극 때문에 오늘 살아야 할 이유를 잊어버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넌지시 일러준다.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아라키 씨 덕분에 그 친구분이 변할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다만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구나 변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87)


 그러고 보니 나도 군대 훈련소 있을 때, 너무나 힘들었는데 나약해지려 할 때마다 그런 나를 보고 실망할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각오를 새로이 하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한, 우리는 버티고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좌절할 때는 정녕 우리에게 아무도 없을 때다. 소설은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청한다. 복수를 기다리는 밤을 보내는 그가 그 밤에서 뛰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대낮의 환한 햇살을 껴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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