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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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의 역사도 이제 제법 오래되었다. 

 초창기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서프러제트가 일어났던 건 19세기 초였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흐르다 보면 이념 역시 그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상황은 늘 유동적이고 아무리 어제 새로운 것이라 하여도 내일이 되면 곧 낡은 것으로 바뀌어져 버리니까. 때로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늘 옛 것만 고집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황이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현실을 왜곡하며 옛 것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런 걸 사람들은 종종 독선이라 부른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듯, 그런 이념의 독선 또한 많은 폐해를 남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허다하게 그걸 보아왔다.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이 그러하고, 나치즘과 스탈린이 그러하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나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들에게서도. 이념은 어디까지나 삶의 유용성을 증진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하지, 삶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남의 삶을 유린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이념 보다 삶이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작품을 만났다. 바로 2019년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란 소설이다.





 5부에 13쳅터 그리고 에필로그 하나. 


이러한 형식을 가진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모두 12명의 인물이 저마다 화자가 되어 등장하며 그들의 위치는 대등하다. 중심과 주변의 나뉨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념적으로, 인종적으로, 계층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두를 여는 인물인 엠마가 연출하는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를 기점으로 하여 한데 모아선 독자 앞에 펼쳐 보인다. 마치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 무대 중앙에서 일인극을 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소설을 매개로 저마다 다른 행로로 뻗어나가는 12개의 선들을 보게 된다. 앞서 5부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다만 군집의 의미만 띨 따름이다. 그러니까 관계가 깊은 인물끼리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단 뜻이다. 1부엔 아프리카계 흑인이자 레즈비언인 엠마와 그녀의 딸, 야즈 그리고 엠마의 레즈비언 친구 도미니크가 등장한다. 2부엔 오직 엠마가 가장 친한 친구들끼리 만든 '언퍽위더블'의 자매인 셜리와만 관계가 있을 뿐인 캐럴과 그녀의 엄마 버미, 친구 라티샤가 중심을 이룬다. 3부엔 엠마의 이성애자 친구이자 캐럴에게 큰 상처를 준 교사 셜리, 그녀의 엄마 윈섬 그리고 처음엔 싫어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젊은 선생님들 때문에 저절로 동지가 되어버린 퍼넬러피가 전면에 나선다. 4부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메건/모건 그리고 그녀/그의 할머니 해티, 그 해티의 엄마 그레이스가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듯 이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흑인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저마다 다른 계층과 생각 그리고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고발하는 게 중심이 아니며 그처럼 부조리한 사회에 내던져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개인으로 내던져졌을 때 이들은 내면의 강한 신념엔 너무나 안 어울리게 불안하게 흔들리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나 도미니크가 그렇다. 그녀는 엠마조차 반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였지만 우연히 한 눈에 반한 은징가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의존적이 되며 급기야 구타마저 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2부의 캐럴 역시 친구 라티샤가 초대한 파티에 갔다가 성폭행을 당한 뒤론 속세의 성공만이 자기 존재를 보장해주리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엄마 버미는 셜리가 나이지리아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 불만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나이지리아 문화 때문에 심한 핍박을 겪었고 오직 혼자 힘으로 성공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홀로일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지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쩌면 그래서 두드러지게 가족이 묘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부 모두 가족이 등장한다. 주로 모녀 관계로 나타난다. 서양 속담에는 조물주가 전생의 원수들을 모녀 관계로 태어나게 한다는 게 있는데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에 나오는 모녀 관계는 상충한다. 큰 틀에서 모두 페미니스트인 엠마와 야즈조차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실천하는 방식도 다르다. 캐럴과 버미도 그렇고 셜리가 레즈비언인 엠마와 가까워지는 게 영 못다한 윈섬의 관계도 그렇다. 소설 전면에 등장하진 않으나 성전환한 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메건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가족이란 종종 서로 다른 이들을 그저 하나의 묶음으로 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선명하게 타고난 정체성이 있고 어떤 대상을 봤을 때 그것을 규정한 오래도록 전통으로 자리잡은 가치관이 있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에겐, 특히 후발 세대의 경우, 타고난 것보다는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이 시야와 신념의 형성에 더 커다란 영향을 준다.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이 소설에서 가족이란 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념 범주를 비유한 것이라면 후발 세대의 이러한 행태들은 페미니즘 또한 오래된 옛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만큼 달라진 세월과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더구나 소설 속 12명이 가진 생각, 처한 위치가 다양한 것처럼 페미니즘 또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서 확장되지 않으면 이 모두를 포용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1부의 완전히 페미니즘적 지형(엠마와 도미니크는 자신을 따돌리는 백인과 남성 중심 주류 사회에 수류탄을 던지는 사람들이다.)에서 2부, 3부가 거듭될 수록 점점 더 비 페미니즘적 지형(투사에서 그냥 보통 여성으로)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원래 페미니즘 역사에서 엠마가 위치한 흑인과 레즈비언은 버려졌었다. 마찬가지로 성전환자 역시 오래도록 운동의 바깥에 있었다.(최근 우리나라에도 성전환자가 그 이유로 입학한 여대에 가지 못하거나 그걸 이유로 강제 전역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서서 입학을 불허해야 한다고 외치거나 불합리한 처사에 침묵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페미니즘의 지형 안으로 편입되어 갔다. 이와 똑같이 셜리와 버미, 퍼넬러피 또한 포용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 중심주의에 쩔어있다고 해서, 설령 적대적이라 하더라도 내쳐선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 여성 코트니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인용하여 야즈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중요해진다.


 코트니는 록산 게이가 '특권 올림픽'을 하지말라고 경고했으며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특권은 상대적이며 전후 사정을 따져 살펴야 한다고 썼다고 대답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야즈.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모든 게 어떻게 귀결되느냐는 거지, 마약쟁이 싱글맘과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이동주택 주차장에서 자란 백인 힐빌리가 오바마보다 더 특권을 누리나? 고통에 시달린 시리아 난민 보다 중증 장애인이 더 특권을 누리나? 록산은 불평등을 논하기 위한 새 담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p. 98)


 나 또한 여기에 동의하며 이런 취지로 작가가 가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그러하듯이 아무리 나와 다른 이라 하여도 껴안아야 한다는 뜻으로. 또한 가족이라면 내 마음에 아무리 안 들어도 싫다고 내치기 전에 허심탄회한 대화부터 시작하지 않겠는가? 록산이 담론을 더 강조했듯이! 가족이란 유대의 설정은 그 둘을 다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소설은 단독자가 아닌 연대를 강조한다. 4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여전히 세상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차별을 지양하는 페미니즘적 신념이 필요한 곳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메건/모건처럼 다른 성정체성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는 이들, 오직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하녀밖에 될 수 없었고 딸을 낳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그렇게 온갖 차별의 집중 포화를 당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같은 여성들조차 그런 이들을 쉽사리 보지 못한다. 셜리는 캐럴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오직 흑인 아이들을 백인처럼 성공시키겠다는 교사의 신념에 빠져 그걸 보지 못했다. 셜리의 엄마 윈섬은 흑인 하녀에게 봉사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에겐 타고난 환경, 자라면서 주입 받은 가치관 때문에 그 너머나 상대 삶의 깊은 속살을 보지 못하는 판막이가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아직도 제 목소리를 찾지 못하고 무관심의 그늘에 있는 그들에게 관심의 빛이 도달하여 대화의 참여자로 만드는, 그렇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 지평의 확장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전투 중심의 페미니즘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 연극이란 무대를 등장 인물들을 한데 모으는 중심점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연극은 바라봄, 즉 주시의 대상이니까. 


 어쨌든 내가 소설을 통해 느낀 것들을 이리저리 두서 없이 써보았는데그래도 소설이 뭘 말하려 하는가에 대해선 부족하나마 전해졌으리라 믿는다.(마구 쓰다가 문득 올려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기에 뜬금없는 전개이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말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작가가 원했던 대로(비록 내 식으로 이해한 것이긴 하지만)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지 몇 자의 단어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설령 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바로 눈 앞에 선 이의 삶부터 깊이 헤아려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혐오와 배척의 주먹을 들 게 아니라 존중 속에서 공존을 위한 담론 창조에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념을 위한 신념은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인 것이라 하여도 결코 그걸 지닌 사람의 인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은징가처럼 자신이 당한 비극만 생각하고 피해자라 여겨 아무에게나 막대해도 좋다고 여긴다면 그건 지닌 신념이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 내세우는 진보보다 살아가는 태도 전체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아닌 삶의 중시, 주장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의 중시.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새겨들어야 할 귀중한 조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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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6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들어본 적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이었군요 꼭 그런 것만 나타내지 않겠지요 여자 남자 성으로 나누기보다 저는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긴 게 페미니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희선

에일로이 2021-03-14 03:45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소설이긴 한데 저는 페미니즘 보다 삶적인 차원의 중시라는 게 더 와 닿더군요. 희선님 말씀대로 자신과 다르다 하더라도 먼저 존중과 대화의 대상으로 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는 페미니즘도 그런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