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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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타고난 정체성 하나 때문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포로 바뀌어 버리는 일이 인류 역사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흑인 노예 제도가 횡행하던 미국의 남부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랬을 것이다. 자녀나 형제 혹은 부모가 다른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도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했을 것이며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등으로 쏟아지는 채찍 세례를 감내해야했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거리는 물론이고 백인의 눈을 감히 쳐다봤거나 사소한 말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린 그걸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무단 통치할 때 태어난 소년과 소녀 또한 일본군에 의해 언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1930년대에 그들이 독일을 통치하자 거기 사는 유태인은 삽시간에 독일인이 아니라 다만 유태인이 되어버렸다. 1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들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독일을 위해 군인이 되어 그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런 사실들은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나치에게 중요했던 건 유태인이 뭘 했느냐가 아니었다. 그냥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 중요했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우리는 성별이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나치에게 유태인이 그랬다.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 대상이었고 체포되는 족족 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소설, '여행자'는 바로 그런 일상을 담는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자국 내 유태인이 외국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국경을 모조리 폐쇄해버린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에서 우리는 질버만이라는 유태인과 동행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위해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 때 동료 군인이었던 베커와 함께 꽤 벌이가 잘 되는 사업체도 운영 중이다. 질버만은 베커와 함께 역에서 자기가 타고 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때 그는 그저 도박 중독에 빠져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베커를 탐탁지 않아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타게 될 기차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 되리라는 걸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물론 그는 바보가 아니다. 공공연히 유태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는 건 뼈져리게 알고 있다. 곳곳에서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는 걸 허다하게 보았으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아리안인으로 보이는 외모라 그러한 기습적인 체포에선 살짝 비켜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모 때문에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얼마나 유태인을 혐오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가득 체험하고 있었다. 외모만 보고 자신을 그저 아리안인이라고 여긴 독일인들이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태인에 대한 생각들을 숨기지 않고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무래도 질버만 또한 독일을 떠날 것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과 아내를 위한 비자 발급을 부탁한 상태다. 그러나 아들은 그걸 쉽사리 구하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 질버만의 집이 유태인 체포를 위해 돌아다니는 청년단원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제 집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질버만은 계속 기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제목처럼 '여행자'가 된 것이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p. 214)

 

 그러나 낭만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그가 여행하는 건 원해서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까. 그는 단 하룻밤도 몸을 편히 의탁할 수 있는 집이 없는 존재요, 맘 놓고 발들 디딜 수 있는 땅이 없는 존재다. 단골로 이용했던 호텔은 유태인이라 더이상 방을 내줄 수 없다고 하고 아내가 피신한 아내 오빠 또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단 하루만이라도 재워달라는 질버만의 간구를 차갑게 거절한다. 간신히 국경을 넘어 벨기에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벨기에 경찰은 망명을 요청하는 질버만을 묵살하고 독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믿었던 친구 베커는 자신은 당원이고 질버만은 유태인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헐값에 사업을 양도 받는다. 이제 자신의 자랑이던 사업에서마저 쫓겨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뤘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가정, 사업, 친구, 평판 그 모두를.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로. 어디서든 그를 맞이하는 건 냉혹한 차단의 손바닥 뿐이다. 


 그야말로 그는 인간 영역에서 순전히 배제된,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독일엔 인권을 위한 법이 있지만 질버만을 위한 건 아니다. 기차에서 만난, 처음으로 연애 감정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시민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며 시민의 윤리를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독일인의 눈에 그는 더이상 시민이 아니다. 


 "어쨌든 난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버릇을 고칠 순 없어요. 나는 시민으로 태어났고 시민으로 죽을 겁니다. 도주하긴 하지만 시민이에요. 그건 확실합니다."(p. 281)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불과하다. 조르지오 아감벤을 통해 호모 사케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것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여행자'를 읽고서야 비로소 호모 사케르적 상황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자기가 직접 겪었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상황도 현실적이고 묘사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압권인 것은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다.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적인 손해를 보는 건 싫어하는 그야말로 소시민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질버만의 내면 고백을 읽다보면 그냥 내 눈 앞에 질버만이라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것이다. 그렇게나 구체적으로 또 피부에 와닿게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고(이 소설은 정말 몰입감이 대단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태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그야말로 호모 사케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불가능한)에 대해 여실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고발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후자에 대해선 픽션이지만 이 소설만큼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상황을 생생하게 체득시켜 주는 것은 또 없기에 아무래도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려내고 있는 것과 똑같이 동시대 독일에서의 유태인 삶을 그려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소설만큼 이 소설도 정치와 우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어떤 정치 현실을 만드느냐에 우리 일상의 명암이 결정된다는 것도 확연하게 깨닫도록 한다. 질버만은 자기보고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항변한다. "난 독일인이야. 세계 대전 때는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사람이라고!"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정체성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다. 그는 아리아인 여인과 결혼했고 종교 또한 기독교였다. 유태인은 그에게 그냥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필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그는 나치가 아니었으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것이었다. 그것이 설마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만드리라고는 가장 무서운 악몽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는 바람에.


 그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너희 외국인들이 여기 앉아 있구나.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평온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해서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게 너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겠지. 너희 고국에서는 신임투표할 때 감독관이 옆에 기관총을 두는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너희는 그저 독특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사람들이 너희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까. 내게는 위험으로 가득한 원시림이 되어가는 이 호텔도 너희에게는 안락한 공간이라서, 평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돼.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는 제3제국에서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겠지(p. 52 ~ 53)


 질버만도 그런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계층이, 이웃이 비민주적인 처사로 낙인이 찍혀 사라질 때 무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은 전혀 침해받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사업상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다주어 모른 척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둘 내버려 두다 보면 어둠의 수면은 차츰 차츰 차 올라서 결국 자기마저 삼켜지게 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독재의 권력 앞에선 그 어떤 일상의 평온도 아주 얇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을 뿐이니까. 지금도 벌어지는 미얀마 국민이 처한 일상이 그걸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미얀마를 통해, 또 소설 '여행자'를 통해 우리는 뼈가 저리도록 깨달아야 한다. 누구나 '질버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별안간 자신이 호모 사케르가 되고 모든 일상이 파멸과 죽음의 암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국경을 초월하자는 의미에서 사회란 말을 일부러 빼버렸다.) 가장 작고 약한 자가 당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처사에 무심해선 안되면 오로지 사익 추구를 위해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결코 내 일상과 유리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 일상의 평온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움직임이다. 소설 '여행자'는 이러한 각성을 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열차의 존재감으로 도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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