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난 이 작품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5월의 어느 날. 아버지 책장에서 두툼한 양장본에다 여러 권으로 된 '전쟁과 평화'를 발견했다. 그 때 내겐 두 가지가 왕성했는데,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도전 의식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그 둘 모두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로 줄에다 엄청난 분량의 그 소설을, 모르는 단어도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6월 초까지 다 읽고 말았다. '한 번 잡은 책은 무조건 끝까지 다 읽는다'가 당시의 내겐 금과옥조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을 주려 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주 어렵고 정말 글밥이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만 가득 남았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옆집에 사는 누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누나가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했다. 누나의 환심을 사려면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모조리 읽었던 것 같다. 따로 노트를 마련해 국어 공부를 하듯, 등장인물과 사건, 대사와 주제들을 정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시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걸 보면 당신도 이제 알 것이다. 문학을 가까이 하는 가장 좋고 빠른 길은 다름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걸. 여하튼 '전쟁과 평화'는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한 번은 호승심으로, 다른 한 번은 사랑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전쟁과 평화'를 세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멋 모르고 읽었고 두 번째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문학 자체로 순수하게 음미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또 손에 잡았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으로. 이번엔 '전쟁과 평화'를 그 자체로 감상하기 위하여.


['전쟁과 평화' 1권과 '톨스토이 미션 카드'의 모습]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구상하고 집필, 퇴고하는데 모두 24년이 걸린 작품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만 해도 무려 559명에 이른다. 문학동네에선 모두 네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1권의 이야기는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파블로브나 세레르가 주최한 야회로 시작한다. 이 야회는 마치 연극에서 개막을 하기 전에 미리 주요 등장인물들을 무대로 불러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앞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갈 인물들을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이기 위한 장치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 불콘스키 공작과 피예르를 만난다. 둘은 친구지만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극과 극이다. 안드레이가 유명한 불콘스키 공작의 첫째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와 결혼까지 하는 등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면 피예르는 비록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베주호프의 유일한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적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에다 용모는 뚱뚱하고 볼품이 없어서 사교계가 썩 환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위치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공평하게 둘 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던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을 맞아 왕정 중심의 구체제 수호를 위해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하고 자신도 자기가 부관으로 모시는 쿠투조프 장군(실존 인물이다.)을 따라 전쟁에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사생아란 신분과 가진 것도 별로 없어서 상류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피예르는 임종을 맞이한 베주호프가 자신을 적자로 인정하고 엄청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어주면서 상류 사회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바라던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운명은 돌연 그 표정을 바꾸고 먼저 주었던 기회가 마치 덫 안의 치즈이기라도 하듯 눈 앞에서 그들이 바라던 것이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보여 낭패를 경험토록 한다. 물론 피예르가 1권에서 그런 경험을 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안드레이 뿐이다. 그래서 1권의 진짜 주인공은 안드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권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 이후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유역과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이는 전투가 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우스터리츠 전투'란 말에서 눈이 번쩍 뜨일 것 같다. 나폴레옹의 유럽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세력에 비해 정말 약했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적을 함정으로 유도하고 자신이 창조했고 특기이기도 한 대포를 적극 사용하는 전술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대파한다. 결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함으로써 유럽에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안드레이의 운명 또한 크게 바뀌게 되니 이런 겹침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평소 안드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명예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혈육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자신이 곧 '명예의 한 순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운명이 변덕을 부려 명예는 커녕 나폴레옹의 포로가 된다.


 사실 포로가 된 게 그의 낭패가 되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낭패는 포화로 들판에 쓰러졌을 때 찾아왔다. 그 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하늘이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명예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오직 하나만 보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려왔는데 실은 이토록 공허한 것이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워졌다고 느낀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있던 콩깍지가 벗겨진 것처럼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현혹에서 벗어났으니까. 과연 그랬는지, 안드레이는 자신이 인간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겼던 나폴레옹을 직접 눈으로 대면하고 그에게 칭찬까지 받아도 심드렁하게 대한다. 이런 안드레이의 모습은 황제를 보고 그 빛나는 모습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한없이 그 권위를 동경하게 되는 로스토프와 대비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 로스토프의 모습은 각성을 하기 전의 안드레이와 같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다. 로스토프와 똑같이 안드레이 역시 황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를 만났으나 오히려 그가 본 것은 그만한 커다란 영광도 쉽게 가리지 못하는 허무였다.

 1권은 바로 이렇게, 속세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실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드라마였다.


 안드레이를 보니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안드레이에게 딸려있는 불콘스키는 사실 톨스토이의 어머니 쪽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작가였다. 아버지는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공작의 딸이었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불콘스키 공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안드레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 중 많은 부분에 톨스토이의 자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 역시 안드레이와 똑같이 장교로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5년이나.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되는 전쟁이 더없이 생생한 것도 이런 군대 경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군대에서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년 내내.

 그 전까지 톨스토이는 글과 먼 생활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내내 '전쟁과 평화'에서 나왔던 이폴리트 공작의 저택의 술 파티 못지 않게 방탕한 생활을 했다. 피예르가 거기서 한 위험한 내기도 어쩌면 톨스토이 자신 역시 했을 지 모른다. 그러다 성병에 걸렸고 병원 신세마저 졌다. 입원해 환자로 있으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톨스토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톨스토이가 방탕한 생활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일기 쓰기가 가져온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특히나 일기란 자신을 계속해서 되돌아보게 만드니까 말이다. 톨스토이에게 글은 구도의 여정이었다. 군대에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글을 통해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이 도달한 또 하나의 단계였을 것이다. 안드레이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마침내 세상이 가져다 준 현혹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엔 바로 이런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우러나 있다고 보인다.


 가장 정평이 난 톨스토이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내적 모순이 가득한 존재였으며 그 중 가장 격렬했던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모순은 '전쟁과 평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나니 탕자와 성자의 관계가 내겐 대립 보다 연속의 과정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탕자의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성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란, 방탕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 그대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유랑하는 존재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다. 현실 질서와 일상의 궤도에서 탈주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탕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탕자'로 가장 잘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되어보는 것으로 여자에 대해 글을 쓰면 '여자-되기'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쓰면 '동물-되기'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타자-되기'의 체험인 것이다. 나를 떠나 남이 되는 것. 그것은 그대로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본연의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안드레이가 거쳤던 과정 그대로 말이다.


 성자는 바로 그런 탕자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톨스토이의 삶 자체가 증거다. 그는 1878년에 영적인 각성을 하고 새로운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안나 카레리나'를 완성하고 난 뒤였다. 소설의 여정이 기반이 되어 성자의 삶이 구현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그런 '탕자의 여정'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경험토록 해 준다.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대에 거꾸로 거기에서 이탈하려는 흐름을 포착하고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누구나 정답으로 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삶에도 정답인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필 이 시점에 '전쟁과 평화'가 도래한 것은 어쩌면 운명의 손길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소설 속 나폴레옹 시대만큼이나 권력이든, 자본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시대이고 그 수렴이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는 물론이고 안에 속한자마저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수렴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탕자의 여정'을 통해 강조하는 산포(散布)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전쟁과 평화'이니만큼 '추천합니다' 같은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의 150년이 되는 과거의 작품('전쟁과 평화'는 1869년에 발표되었다.)이라 오늘날에 이런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굳이 말씀드려 본다면, 단언컨대 '전쟁과 평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에도, 아니 이런 현대이기에 더한층, 의미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작품인 것이다.


 특히나 이번 문학동네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고 거기다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예술문학출판사가 발간한 것을 원본으로 삼고 있는 데다 번역도 좋아서 더욱 읽어볼만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워서 한 번 탕자가 되어보려고 해도 그러기가 참 어렵다. 그럴 때는 '전쟁과 평화'가 딱이다. 육체는 비록 '방콕'을 하고 있더라도 내면 속에서 탕자의 여정을 거침없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부디 톨스토이가 선사하는 탕자의 여정을 깊이 체험해 보시기를. 어쩌면 안드레이가 그랬듯, 당신의 인생을 마구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을 만나볼 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미션 카드을 펼친 모습. 이렇게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느낌이 뭐랄까?, 어떤 역에 가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스탬프를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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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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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내게 마치 어릴 때 성탄절날 아버지에게 받았던 '과자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다양한 과자들이 하나로 담겨 있던 그 상자처럼 지금까지 내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부가 이 한 권에 투영되어 있었다.'  최근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을 읽은 소감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싶다. 정녕 내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와 무려 43년 넘게 그 도시의 온갖 골목을 걸어다니며 터키의 전통 음료 중 하나인 보자(boza)를 팔아온 메블루트란 남자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형 하산과 함께 6년 전에 먼저 이스탄불에 와서 정착했는데, 바로 그 형인 하산의 가족이 오르한 파묵의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의 제브데트 가족을 연상시킨다. 제브데트처럼 하산 역시 두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산을 비롯하여 두 아들, 코르쿠트와 쉴레이만은 민족주의자로 서구 문화를 동경하여 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제브데트와 거리가 있지만 잇속에 밝은 자본주의자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룬다는 점은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상주의자로 개혁 성향이 강했던 제브데트의 차남 레피크와 쉴레이만 역시 매우 다르다. 그런데 메블루트가 스스로 가장 고귀한 우정을 나눈다고 여기는 친구이자 개혁을 지지하는 쿠르드족인 페르하트는 레피크와 많이 비슷하다.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아내가 떠나버린다는 것 또한 유사하다.




 '내 마음의 낯섦'이 가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특히 메블루트를 비롯하여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아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미하를 둘러싸고 벌이는 얽히고 설킨 사랑의 행로는 압권이다. 그들 모두 정작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데, 이건 두 번째 작품, '고요한 집'과 닮았다.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두고 사랑의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선, 이스탄불 최고 미녀인 세큐레에게 똑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카라와 하산이 등장하는 '내 이름은 빨강'이 떠오른다. 쉴레이만이  갑자기 사라진 사미하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그대로 어느날 불현듯 실종되어버린 아내, 뤼야를 찾아다녔던 '검은 책'의 주인공 남편 갈립을 연상시키고,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메블루트의 모습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터키 전역으로 버스 여행을 떠나는, 소설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 '오스만'과 모든 것이 눈에 뒤덮인, 하얀 설원의 도시 카르스를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배회하는, 소설 '눈'의 주인공 시인 '카'를 떠올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마음의 낯섦'이 내게는 오르한 파묵이 여기까지 걸어온 문학적인 여정의 집대성으로 보인다고 말해도 그리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파묵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그 작품의 세부적인 것이나 하나의 문장에서 나온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이란 책에서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며,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만큼 소설의 정신에 충실한 작가도 또 없다고 하겠다. 또한 '내 마음의 낯섦'은 쿤데라의 언급처럼 그 전까지 나온 오르한 파묵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듣고 누군가 내게 '그렇다면 메블루트를 중심으로 1968년 9월부터 2012년 10월 25일까지 모두 635 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이들의 방대한 삶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대답은 과연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암흑의 포용(包容)'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어둠을 싫어한다. 그것이 불안정과 불확실함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빛을 원한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구분되어 그것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자신에게 뭐가 위험이 되고 이득이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그런 인간의 염원을 배신한다.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의 현대가 매우 유동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바다. 마치 가상화폐 시장 상황처럼 오늘의 삶은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국적이나 인종 등 태생적으로 타고난 정체성과 종교에 더욱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발밑이 허공 뿐이라고 느껴진다면 본능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듯이,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혼란과 불안이 생길 때마다 사람은 자연히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권위 있는 무언가나 늑대와 개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표식에 들러붙기 마련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쉴레이만이 속한, 우익이며 터키인 중심인 둣테페와 '페르하트'가 속한, 좌익이며 쿠르드족 중심신 퀼테페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극명하게 대립했듯이 말이다.


 안 그래도 이러한 쌍방 대립 구도는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데뷔작을 포함하여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터키 자체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동양과 서양 문명 모두에게 그 영향을 부단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의 투사(投射)이자 역사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문명의 융합체였던 오스만 제국이 남긴 유산일 것이다. 소설 '눈'을 보면 이 대립이 현재의 터키에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잘 목도할 수 있다. 터키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주의와 거기에 반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립 사이에서 도시 카르스에 가득한 눈처럼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 즐비한데도 개인은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집단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 강의실에 여성이 히잡을 쓰고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치열하게 대립할 때 정작 당사자인 소녀들은 자살을 한다. 누구도 자신을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그 대립 속에서 자살만이 유일하게 진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은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자신이 탄 버스가 사고를 당하자 오스만이 얻게 된 깨달음과 유사하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천국의 빛처럼 환영하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비된 몸과 의식.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 p.72)




 오르한 파묵이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허무주의자라거나 죽음 예찬론자라서가 아니다. 죽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삶에 있어 죽음은 광막한 암흑이다. 죽음이 무엇이고 언제 찾아올지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압도적인 불확실함이고 그로 인해 삶은 불안정하다. 죽음이란 갑자기 눈 앞에 암막이 내려진 것과 같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진 것과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피하기 마련인 그런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포용하라고 권한다. 그것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권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 얼른 '내 마음의 낯섦'을 들춰봐야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을 특히 눈여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은 메블루트의 인생을 시간 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바로 메블루트의 진정한 사랑이 될 라이하와 단 둘이 몰래 도망치는 시간이다. 


 '스물다섯 살에 고향 처녀와 함께 도망쳤다. 이것은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이었다.'(p. 17)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 오르한 파묵은 몇 번이나 아주 어두웠다고 강조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만났다', '어둠 속에서는 여자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등. 메블루트가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알린다. '암흑'이다. 물론 이렇게 할 이유는 있다. 실은 지금 메블루트가 데리고 도망치는 여인이 원래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블루트는 셋째 딸, 사미하를 사랑했다. 그녀의 순수한 검은 눈에 매혹되어 군대에 가 있는 3년 동안 내내 사랑을 갈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름을 잘못 알았다. 둘째 언니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하와 도망치는 것을 유일하게 도와준 사촌 쉴레이만의 술책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미하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메블루트가 이름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로잡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메블루트는 쉴레이만이 운전하는 트럭의 밝은 빛 아래에서야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이 사미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어둠에 있었을 때 놀랍도록 충만한 사랑이 삽시간에 식고 그는 밝은 빛 속에서 '삶이 놓은 덫' 속으로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메블루트의 삶 속으로 평생토록 지니게 될 낯선 감정이 쓰윽 들어온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을, 그 낯선 감정을 자주 떠올릴 것이었다.(p. 22)


 보시다시피,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의 전모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여인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우연이 만든 그 인연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운명이 된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p. 635)


 그러므로 그 암흑은 메블루트에게 결코 방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도 몰랐던 진정한 사랑을 찾아준 큐피드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이처럼 '내 마음의 낯섦'은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 번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건 묘사에서 어둠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또 하나를 본다.

 그건 바로 '개 짓는 소리'다. 낯선 감정과 함께 메블루트가 평생 짊어지는 감정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도망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소리로 소설에 출현하여 소설의 중요한 계기마다 등장한다. 메블루트가 처음으로 보자 파는 일을 그만 둘 결심을 했을 때, 개 짓는 소리가 궁극적인 원인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이스탄불에 와서야 비로소 생겼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모든 개가 자신을 잘 알아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 짓는 소리란 메블루트에게 '넌 이방인이야! 우리와 달라! 넌 여기 섞일 수 없어!'하고 외쳐대는 것과 같다. 아니나 다를까 메블루트가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지혜를 빌리러 찾아갔던 선지자 에펜디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개들은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을 감지하고 안다네.(...) 이 모든 수난을 겪은 개들은 이제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를 깊이 감지하고 있다네.(p.50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 개 짓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메블루트가 가지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어쩌면 내내 이방인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오르한 파묵이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진실은 정반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소설 '눈'에서 주인공 카의 말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다.


  "나에게 시를 보내는 것은 신입니다. (...) 나는 모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군, 자네를 비난하고 싶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눈' 1권, p. 186)




 메블루트 또한 두려움이 많은 자다.

 그는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과감하게 쭉쭉 뻗어나갈 때,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그 어디에도 들러붙지 않고 홀로 남은 채로 제자리를 맴돈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메블루트가 여전히 거리에서 보자를 판다며 때로는 어리석다고도 하고 또 때로는 불쌍하다고도 하지만 삶 전체를 통해 끝내 승리한 사람은 메블루트라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누구도 찾지 못한 진짜 사랑과 행복을 그는 찾았고 누렸으며, 또한 이것이 더 큰 것인데, 그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문학에서 구원은 언제나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있을 때 찾아온다. 소설 '검은 책'의 2권 후반에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듯 말이다.


한때,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될 수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임을 발견한 왕자가 살았다.('검은 책' 2권, p. 259)


 이 이야기 속 왕자가 평생 추구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느냐가 작가에겐 중요하다.

 터키 사회에 종교, 정치, 문화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대립관계처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적대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타자에게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에만 기반하여 주체를 정립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암흑과 두려움은 귀중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는다. 모두 타자의 생각에 무분별하게 섞여드는 것을 막아주고 어떻게든 먼저 자신의 생각으로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보다 더 크고 위대한 뭔가에 들러붙은 껌이 되어 기생을 통해 성장하려는 생각을 차단하여 어디로든 기울지 않고 혼자 힘으로 우뚝 서는 오뚝이가 되도록 한다. '검은 책'에 나오는 왕자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자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울리는 기억의 음악에 저항해야 한다.('검은 책' 2권, p. 272)


 하지만 여기서 오해해선 안 될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된다고 하여 오르한 파묵이 오만과 독단까지 하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파묵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원한다. 바로 그것이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묵의 주체 정립 과정은 서양 철학이 말했던 주체 정립 과정과 다르게 어디까지나 겸허(謙虛)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구분과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고 그 타자의 입장에서 그를 헤아리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소설 '하얀 성'에서 이탈리아인 기독교도 '나'와 터키인 무슬림 '호자'의 관계가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눈'의 주인공 카도 자신의 말을 들려주기 보다는 먼저 많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에게 정체성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겸허를 통한 타자 중심이기에 정체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얀 성'에서 나와 호자가 정체성을 바꿔 호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나는 터키에서, 그렇게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상대방의 나라에서 잘 살아가듯 그리고 '검은 책'에서 주인공 변호사 갈립이 아내와 같이 사라진 자신의 사촌이자 칼럼니스트인 제랄과 아주 쉽게 정체성을 바꾼 것처럼.




 이렇게 정체성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화 무상하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곳이라는 생각과 이어져 있다. '새로운 인생'을 비롯하여 그의 소설이 자주 순례에 가까운 여행을 통하여 각성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세상이기에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거나 고집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또 없다. 그것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맞이할 수 있었던 삶 속에 내재된 무한의 가능성을 그대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메블루트가 이 소설에서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수많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삶과 인간 관계 속에서 느끼는 피로와 아픔을 거리에서의 상상력을 통해 치유한다. 골목마다, 방문하는 집마다 그가 마주하는 도시의 다양한 변모가 삶에 수많은 의미와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밤에 밖으로 나가 보자를 팔 때는 창문 하나 열리지 않아도, 아무도 보자를 사지 않는 텅 빈 거리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걸으면 상상력이 가동하고 메블루트에게 이 세상에, 사원 벽 뒤에, 무너져 가는 목조 가옥들에, 묘지들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p. 436)


 아마도 이러한 가능성을 독자도 느껴보라고, 파묵은 하필이면 많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보자 장수를 주인공으로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메블루트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거나 고정된 장소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나온다. 메블루트 자신이 시골에서 올라온 이방인인 데다 그가 오래도록 살고 있는 '게제콘두' 또한 실은 소유권을 등기할 수 없는 땅이다. 나라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는 퀼테페는 시골과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이방인들로 가득하다.


 2008년에 나온 '순수 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이 '퀼테페'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스탄불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순수 박물관'에선 그러한 이스탄불의 상류층 문화를 그렸다. 그것은 중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은 '퀼테페'가 잘 보여주듯이 그와 정반대인 주변의 이야기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망각의 존재가 되어가는 보자 장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도 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순수 박물관'에서 사라진 여성 퓌순은 주변적인 존재였다.

 주인공 케말은 중심에 있기위해 그녀를 배신했고 결국 그녀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부재로 중심의 허망함을 깨달은 케말은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거기에 남은 사물을 통해 이제 중심의 의미를 거꾸로 구현한다. 이러한 케말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 나는 지금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메블루트와 같은 주변적인 사람들은 그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 '해골'의 말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스탄불의 상류층이란 중심에서 잘 보이지 않거나 쉽게 무시되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결코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2010년에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으로 번진, 후에 '아랍의 봄'이라 불리게 된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다. 그것은 그동안 억압과 차별 속에 있었던 자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래 하나의 신체 같았던 그 곳에도 실은 '계급'이라는 분열의 지점들이 있었다는 게 전면으로 드러난 것과도 같았다. 신체는 '순수 박물관'에서 퓌순의 부재처럼 낱낱이 해체되었고 이제 더이상  하나의 신체로 묶어둘 수 없다는 것도 명약관화해졌다. 이러한 외부 사정이 파묵으로 하여금 더욱 메블루트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다. '순수 박물관'에 온당히 보존되어야 할 존재이니까 말이다.





 박물관에 보존되는 존재들은 '순수'해야 한다.

 여기서 순수란 있는 그대로 즉 인위적인 가공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존되는 것은 존재에 깃든 역사니까 말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 한 사람의 43년에 걸친 긴 삶의 시간을, 그것도 놀랍도록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내 이름은 빨강'과 유사한 소설의 형식에도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처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이어 받으면서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했으며 또한 행동했는지, 자신의 육성으로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각 개인들을 보존한다. 순수 박물관에 보존되는 사물과 같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등장인물이라 하여도 작가가 서사의 주도권을 가지지 않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전시되는 사물들 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저마다 홀로 침묵한 채, 감상자의 자의적 해석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많은 소설들은 작가의 주도권 아래 등장인물들이 수렴되지만, 이 소설은 거꾸로 등장인물 각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산포한다. 그리고 그 산포(散布)를 통해 생겨난 간격 속으로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 독자 스스로 작가가 주려는 것 이상으로 메블루트가 거니는 골목과 방문한 집만큼이나 다양하기 그지 없는 삶의 결을 체득하도록 만든다. 파묵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겸허의 태도를 독자에게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감정 이입을 자제한 채, 담담히 모든 이의 삶을 서술하는 것 또한 문학 보다 더 거대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겸허의 태도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기왕에 산포란 말이 나왔으니 이제 오르한 파묵의 진짜 주제로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왜 우리가 암흑을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산포가 바로 열쇠다. 산포는 틈을 만들어낸다. 파묵에겐 그 '틈'이 아주 중요하다. 분리는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분리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연인과 이별로 분리되는 것도 피하고 싶어하며 모두에게 분리되어 외톨이로 남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또 없다. 그러나 파묵에겐 그 분리가 오히려 구원이 발아되는 장소가 된다. 소설 '눈'에서 그동안 시를 쓸 수 없었던 주인공 카가 폭설로 완전히 격리된 '카르스'에서 시를 쓰게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틈이 바로 암흑이다. 이것은 파묵의 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건 '검은 책'처럼 아내의 실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얀 성'처럼 터키 함대에게 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새로운 인생'에선 한 권의 책, '눈'에선 돌연한 정전으로 도래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낯섦'에선 때로 지진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집에서 뛰쳐나온 메블루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건 예전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죽음 역시 그 틈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예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들은 사실 이전의 삶이 가동을 멈추는 정지(停止)의 시점이기도 하다. '검은 책'에 나왔던 왕자의 말을 다시 빌어 말하자면, 기억 속에 알알이 박힌 과거의 소음들이 침묵하는 정적(靜寂)의 시간이다. 죽음은 그 정적이 극대화된 형태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이 찾고 갈구하던 것이 바로 이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말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만이 자신이 되는 것에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왕자는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말해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에만, 과거와 책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억 그 자체를 잃어버렸을 때만, 그 깊은 정적을 들은 후에만, 자신을 자신이게 할 진짜 목소리가 허락될 것이다.('검은 책' 2권, p. 276)



 이렇게 하여 우리는 왜 이 소설이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어둠으로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어둠이 예전 삶과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 걸. 그 간격으로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존 사회의 모든 소음과 현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파묵은 강조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으면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말라고. 간격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박물관에 전시된 사물처럼 정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내맡기라고.

 여기까지 오면, 이제 우리는 왜 소설에서 메블루트와 쉴레이만 그리고 페르하트가 똑같이 사미하를 사랑하고 또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사미하를 잃어버리는 것은 '검은 책'의 뤼야와 '순수 박물관'의 퓌순이 그러하듯 갑작스럽다. 불현듯 자기 삶에 드리워진 암막 같다. 그것은 소설 처음에 메블루트를 찾아온 암흑 그대로다. 그렇게 틈이 생겼다. 그런데 셋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르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려 한다. 문득 가지게 된 간격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사미하를 끝까지 찾아다닌다. 페르하트는 더 심하다. 그는 사미하와 같이 살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녀만 찾아 다녔다. 그러다 결국 사미하도 떠나가게 만들고 말았다. 한 번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시도가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그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잘못을 반복했다. 페르하트는 끝내 살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은, 살해라는 점에서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집착이 종국에는 무엇을 가져오는 지에 대한 작가의 불길한 예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블루트만은 달랐다. 그는 메우려 들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히려 그 틈에다 자신을 길들인다. 오직 메블루트만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행복을 경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틈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광장으로, 자신만이 가득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타인들을 널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메블루트가 자신을 내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의 차이'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보자 장사를 하면서, 후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이들을 단속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알지 못해 곤란을 겪는다. 페르하트는 사적인 관점과 공적인 관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가 흐르는 삶의 시간 속에서 축적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이윽고 깨닫게 된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의 의도는 의도대로, 말의 의도는 의도대로, 그냥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이다. 그 후, 그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면서 페르하트가 가르쳐준 온갖 꼼수들을 전혀 쓰지 않는다. 누가 되었건, 그저 정직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판단은 운명에 맡긴 채로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운명이라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삶의 궤도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왜 자신이 사미하가 아니라 라이하와 도망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다리는 물론 운명이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운명은 이 두 가지를 합치할 수 있다. (...) 라이하와 함께 발견한 행복은 메블루트의 인생에서 커다란 운명이었다. 그것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p. 534)


 운명은 삶이 간직한 신비다. 그것의 운행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삶에 내재된 신비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문명은 과학으로 이러한 신비를 가급적 제거해 왔다. 진리는 비밀스런 빛처럼 감춰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되었고 그러자 자기가 바로 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며 주장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그런 그들의 선동과 이데올로기로 일어난 전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지금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터키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동양에선 원래 진리는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것이었다.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고 부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소로 화답했다. 신비는 대립을 낳지 않았다.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누구도 진리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월도 배척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묵은 신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 메블루트가 말한 삶의 존경은 거대한 삶이 포용하고 있는 신비에 대한 겸허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은 '검은 책'에서 F.M. 위췬지의 말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난 바 있다.

 "동양과 서양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던 각 시기는 우연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승기를 잡은 쪽은 세계를 비밀과 이중적 의미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장소로 보는 쪽이었다. 세계를 단순하고 단일한 의미로, 신비스럽지 않는 곳으로 보는 사람들은 패배했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검은 책' 2권, p. 106)

 위췬지는 문명이 '신비'의 개념을 상실하는 것은 사고의 '중심'에서 박탈되어 그 질서를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계는 신비를 잃어버렸으며, 우리의 얼굴도 글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얼굴은 공허하고, 과거와 같이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우리의 눈썹, 눈, 코, 눈길, 표현, 공허한 얼굴은 무의미하다."(같은 책, p.107)


 얼굴을 잃어버림은 진정한 자신으로 만드는 고유한 개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연결된다. 암흑의 포용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왔던 삶의 신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런 수용을 통해 우리는 누가 가르쳐 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길어올린 자신의 고유한 모음(母音)으로 말할 줄 아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이걸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메블루트가 끝내 몰개성과 획일화의 공간인 아파트를 거부하고 끝까지 골목 순례를 선택하는 것처럼 마음에 깃든 낯섦을 낯익은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암흑을 포용하듯이,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서야 우리는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삶의 모든 어귀와 순간마다 깃들어 있는 운명과 신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신(神)'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저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아름다운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세상의 은밀한 균형을 주시하고, 인간을 더욱 더 문명화하고, 더 섬세하게 만들 신은 있습니다."

 "물론 있지."

 "하지만 그 신은 이곳 당신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밖에, 텅 빈 밤에, 어둠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눈 속에 있습니다."('눈' 1권, p. 148)


 다치바나 다카시가 우주로 나갔던 경험이 있는 이들과 인터뷰 한 바에 따르면, 한 번 우주에 갔다 왔던 이들은 한결같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광막한 우주의 크기에 압도되어 신이 아니고서는 이런 거대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기 때문이란다. 이는 곧 먼 우주에서 보면,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이런 왜소함은 우리 역시 굳이 우주를 나가지 않아도 현실 속에서 매번 경험하는 바다. 


 왜소하기에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왜소하기에 나보다 더 거대한 것에 착 달라붙어 호가호위 하듯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 왜소함이 만들어내는, 삶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암흑들을 무작정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것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함께 어울리며 천천히 동행하라고 권한다. 어떤 암흑이 삶이 감춘 또 어떤 신비와 연결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에 오스만이 본 천사처럼, 신은 자신의 것을 모두 내려놓은 순간 문득 도래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다양한 가능성들을 큼직한 자루에 넣어 산타클로스처럼 등에 지고서.

 이래도 파묵의 조언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버트란드 러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떨까?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왜소함에 직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은 당신에게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위대한 여정이다. 아니, 앞서 내가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인용한 것처럼 실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의 여정을 이룬다. 밀란 쿤데라의 말 그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특히 연속성이 강하고 전과 후의 작품들이 상호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뷰도 비록 '내 마음의 낯섦' 한 권에 대한 것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소설들을 아우르며 썼다. 덕분에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게 다 내가 느낀 파묵의 진심을 당신에게 잘 전하기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파묵을 본받아, 내 필요에 따라 그의 주제를 재단하지 않고 가급적 그가 주려고 했던 말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나름 작가에 대해 내 겸허의 태도를 보이려 한 것이니 더욱 아량를 베풀어주길 빈다.


 새벽 내내 이 글을 썼다. 그렇게 파묵과 동행했다. 문득 커피가 그리워 부엌으로 가보니 창으로 아침이 어느새 찾아와 있고 바깥 풍경이 하얀 설원으로 변해있다. 문득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카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렸던 '눈의 정적'이란 말이 생각났다. 파묵에게 있어 정적은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다. 과연 그런 것처럼, 눈 앞의 하얀 세계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한동안 틈을 두고 풍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순수 박물관'의 사물이라도 된 듯.



 [소설에서 메블루트를 매혹시켰던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여 페르하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가계 벽에 걸어두기까지 하면서 바라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묘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묘지란 대표적인 정적의 장소다.  소설 '검은 책'에서 왕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속의 고요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될 수 있는 황량한 사막에 있는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 사이에 있는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에 있던 나무를 부러워한다고도 말했다. 메블루트 또한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가고 이 그림을 바라본다. 정적을 두고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을 통해 영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자신이다앞으로 무엇이 그려질지 모르는,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순백의 영혼이다.]


 긴 겨울은 내면의 순례를 떠나기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 안내자요 동반자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권해 본다. 당신도 이 겨울의 어느 순간, 당신의 신을 만나게 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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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12-1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반칙, 헤르메스님. 이건 리뷰가 아니잖아요. 한 편의 버젓한 평론이지.....

도대체 헤르메스님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헤르메스님이 리뷰를 쓰신 책을 syo는 절대 리뷰하지 않겠습니다......

ICE-9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앗! syo님!! 이런 졸문을 감히 평론이라 추켜세워주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빨리 댓글로 인사드려야 했는데, 요즘은 너무 바빠서 이렇게나 늦었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댓글에 진짜로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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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미국에 이민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마트에서 모욕적인 인종차별을 받고는 속상한 마음에 머나먼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화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꼭 한 번은 심한 향수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정말인 것 같다면서 요즘은 어쩐지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가 된 기분이다.'라며 울컥하는 어조로 그는 말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탔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고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상이니만큼 나 또한 수상 작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를 순서대로 제대로 한 번 파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데뷔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부터 일단 손에 잡았다. 그 소설을 읽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났던 것이다. 소설에 나온 주인공이 실은 그 친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변화를 찾아 떠났지만 그건 또한 자신이 안전하게 거하고 있던 껍질이 깨어지는 것과 같아서 전보다 더 많은 타격에 당황하는 모습을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말과 같다.


 알은 세계이다.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 자는 누구든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바로 변화에 따른 파열과 통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 나가사키에서 50년대에 살다가 지금은 두 번째 남편인 영국인을 따라 영국에 와서 살고 있는 에츠코라는 여인이다. 남편도 죽고, 첫 번째 남편과 낳았던 첫째 딸인 게이코도 자살한 지금, 그녀에겐 영국인 남편과 낳은 둘째 딸, 니키밖엔 없다. 그녀는 과거 일본의 기억을 잊기 위해 영국 이름을 지어주길 원했지만 남편이 일본식 이름을 고집하는 바람에 영국 이름도 아니고 일본 이름도 아닌 니키가 되어버렸다. 이름에서 나타나듯 니키는 경계의 존재다. 영원히 거주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방랑하는 것도 아닌, 한 마디로 얼레에 아주 느슨하게 연결된 연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니키가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로 상심해 있는 에츠코를 위로차 찾아오고 게이코 때문에 에츠코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나가사키에서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어린 딸, 마리코를 떠올린다.


 때는 1950년대.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을 딛고 한국 전쟁을 기회로 한창 재건과 부흥의 기치를 올리고 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형이기도 한 나가사키. 올해 상영한 영화 '군함도'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아시다시피 2차 대전 때 원자 폭탄이 떨어진 도시다.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폐허. 하지만 현재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은 주인공 에츠코가 사치코와 한 '케이블카' 탑승과 그녀의 시아버지인 오가타 상과의 '평화 공원' 외출을 통해 두 번이나 나가사키가 과거와 완전 다른 곳이 되고 있다는 것 강조한다. 시대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질서나 가치관 그리고 상처는 빠르게 유물이 되었고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에츠코는 사치코 옆에서 완전히 변모한 나가사키를 내려다보며 오늘부터 낙관주의자가 되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결심한다. 사치코는 그런 변화를 아주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인물이었다. 창공 높이 한없이 오르기만 하는 연처럼 그녀는 새로운 삶을 손에 쥐기 위해 미국인 남자를 사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안정된 현실과 딸 마리코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려한다. 내 친구가 그랬듯.


 소설엔 이렇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사치코가 그렇고, 변하는 나가사키를 보며 과거의 상처에 얽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츠코도 그러하며 나가사키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가 전쟁으로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여 이제는 작은 국숫집을 운영하는 후지와라 부인도 그러하다. 후지와라 부인의 과거 위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은 몰락한 그녀의 처지를 더없이 슬퍼하며 그러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정작 후지와라 부인 본인은 화려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변한 현실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반면 시대가 그렇게 변했는데도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가타 상이다. 그는 과거의 질서와 가치관에 연연한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때, 군부와 결탁하여 올바른 목소리를 낸 교사들을 함부로 해직시키고 체포당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은 시대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며 스스로 정당화하고 그런 과오를 언급하며 자신을 공격한, 아들의 친구였던 시게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찾아가 따지려 한다. 그런 오가타 상이 에츠코에게 자주하는 말은 '그래도 옛 것이 좋다.'다. 영국으로 와서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결행한 게이코도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보자면 오가타 상과 에츠코 그리고 사치코를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오가타 상은 변화된 현실을 거부하고 과거만 존속시키려 하고 사치코는 그와 정반대로 변화를 위해 과거를 깡그리 지우려 한다. 이런 태도를 작가는 사치코가 전쟁 때 폐허가 된 도쿄에서 본, 자신의 아기를 두 손으로 물속에서 익사시키려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다. 사치코 역시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가려 하지 않는 마리코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고양이들을 강물 속에 익사시킨다. '데미안'에 나왔듯,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이전의 껍질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에츠코에 있어서 게이코의 자살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라고 보인다. 니키에게 영국 이름을 고집했던 에츠코의 모습이 마리코의 새끼 고양이들을 죽이는 사치코와 은연중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사키의 에츠코는 그 중간에 있다.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는 에츠코의 말은 '과거는 과거고, 미래는 미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 에츠코는 그 어느 하나도 섣불리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절충주의'다. 이런 점에서 나는 특히 소설에서 두 장면에 눈길이 갔다. 소설 후반에 강변 언덕의 어둠 속에서 에츠코와 마리코가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에 미키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이다. 마리코도, 미키도 딸의 위치에 있고 모두 에츠코와 마지막 장면이라는 점에서 둘은 상당히 닮아있는데 연출 또한 그랬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기묘한 충격 속에서 에츠코를 보는 것이다. 마리코는 공포 속에서 에츠코를 본다. 마리코가 내내 두려워했던, 자신을 강 건너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무서운 여인의 모습을 에츠코에서 봤기 때문이다. 미키는 충격이다. 자기처럼 변화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어딘가에 강하게 매여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리코는 과거를 고수하려 하고, 미키는 과거를 거부하려 한다. 이렇게 둘의 입장은 정반대다 하지만 그 순간, 에츠코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꽤 닮아있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에츠코가 절충주의이기 때문이다. 에츠코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자신과 상반되는 에츠코의 얼굴을 보고서 놀란 것이다. 에츠코는 둘 모두에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존재다. 그러나 섣불리 취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자칫하다간 파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의 껍질이 산산이 깨어지는.


 그런데 이러한 절충주의적인 태도는 사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부모님을 따라 처음 영국에 왔을 때 가졌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9살에 영국에 와서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에겐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있을 뿐이다.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변화된 현실에 무조건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거부가 허용되지 않는 강요다. 가즈오 이시구로도 그랬다. 전범 국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당한 인종차별, 자주 느꼈던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향수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자각을 지녀야 했고 그때마다 일본은, 우리 또한 그러하듯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없이 이상화된 모습으로 구현되어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왔다. 그건 지금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변화에 대한 부정을 꼬드기는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는 없었다. 적응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이시구로에게 그 속삭임에 대한 반응은 아무래도 마리코처럼 달아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응하는 것에 기를 쓰고 열을 올릴수록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 힘겨움과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절망도 했을 것이다. 이방인은 다른 사람보다 현실의 중력을 더 많이 느낀다. 자연히 그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도 클 수밖에 없다. 미키는 그런 저자의 열망이 형상화된 존재일 것이다. 마리코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마리코와 미키 모두 실은 작가의 분신이며, 그 둘을 아우르며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늘 모색하는 존재로서 에츠코가 빚어졌을 것이다.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특히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정체성과 현실이 끝없이 유동하는 현대 사회인 것을 감안하면, 오가타 상이든 사치코든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줄 수 없으며 모든 것에 자신을 열어놓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입장을 적절히 취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주디스 버틀러의 말마따나 우리의 정체성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먹고 행위를 한 것으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에츠코의 모습에 과거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이제 미래만 바라보자면서 화해를 요구하는 현재 일본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져 작가의 진심을 이해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특히나 이번 트럼프 방문 때 독도 새우에 대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오만하게 비난만 해대는 행태를 보노라면 말이다. 이런 것을 적절히 걸러서 듣는다면, 무엇보다 저자가 살아온 경험이 눅진하게 배여있는 조언이기에 한 번 찬찬히 헤아려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문득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이런 말이 나왔던 게 생각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 만약 누군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제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알고 보면 '창백한 언덕 풍경'은 무엇보다 이런 감정의 풍경이며 그것도 변화로 인한 파열이라는 치통을 먼저 그리고 깊이 앓은 자가 그때의 심경을 짙게 투영하여 그려간 풍경화다. 딱히 사건이라고 말할만한 게 일어나지 않고 전개 또한 별다른 충격 없이 담담히 진행되기에 내게는 더욱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기보다 그저 보통의 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닥쳐온 변화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것을 담백하게 풀어낸 기록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생각난 김에 다음에 만나면 바로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이다. 여기, 너와 비슷한 고통과 고민을 가졌던 한 사람이 있다고. 부디 조금의 위안과 치유를 얻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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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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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동성과 중립성 차이는 뭐죠?

 수동성은 공경이죠. 수동적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내주는 겁니다. 중립성은 초당파적이에요. 스위스인은 중립적이지, 수동적이진 않죠. 우리는 어떤 편을 들지 않아요. 우린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거울이죠.(p. 33)


  독일어로 '가정주부'를 뜻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소설 '하우스프라우'는 제목 그대로 안나라는 가정주부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원래 미국인이지만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리 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에겐 스위스의 모든 것이 낯설다.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친구도 없다. 그녀는 너무나 낯선 땅에 이식된 한 포기 식물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제 새로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식된 식물'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은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그녀는 스위스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그것을 분명히 한다. 이렇게.


 안나는 운전하지 않았다. 운전 면허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세계는 교통수단이 들고 나는 일정에 따라서 빡빡하게 제한되었다. 안나의 남편인 브루노와 시어머니인 우르줄라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곳까지 얼마나 기꺼이 데려다주려는지에 따라서. 안나의 다리가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얼마나 멀리까지 걸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하지만 안나가 가고 싶은 만큼 다리가 버텨 주는 일은 드물었다.(p. 11~12)


 이처럼 그녀는 진실로 이식된 식물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마저 억눌려 있다. 지극한 수동성의 존재. 그것이 바로 안나다. 수동성.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내면을 이루는 핵심이며,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를 이루고 있는 수동성의 집착을 오롯이 외부의 강요로 해석하는 것도 곤란하다. 어느 정도는 내부의 호응이기 때문이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 안나는 스위스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너무나 미국적인 이름을 가진 그는, 그 이름답게 안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안나도 스티브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식된 식물이라 그러지 못했다.



 소설엔 그 스티브가 이미 부재한 상태로 나온다. 안나는 잃어버린 사랑 속에서 상처를 혀로 핥고 있는 고양이처럼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상심과 절망이 깊고도 깊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려 한다. 스스로 빛을 꺼버리고 어둠이 되려 한다. 그렇게 수동성을 원한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를 배우고 다른 남자들도 만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이 수동성의 포기인 것은 아니다.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치는 그녀와 함께 독일어를 배우는 스코틀랜드인이다. 독일어와 불륜, 두 영역이 중첩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아치는 그녀에게 폭력적이다. 안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가 전혀 없는, 오직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폭력적이다. 이것은 안나가 생리 중일 때 아치가 억지로 그녀와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피가 사방에 흐르고 닦을 것이 주위에 없자 아치가 양말 하나를 벗어 안나에게 건넨다. 안나는 너무나 수치스럽지만, 자신도 모르게 '미안해'라고 말하고 안나가 양말로 몸을 닦는 동안 아치는 웃는다. 이런 관계가 어찌 능동적일 수 있으랴. 그렇지 않아도 섹스에 대해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안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았다.섹스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의 수동성과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난공불락의 욕망에서 우러난 난해한 동반자 관계였다. 그리고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p. 62)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하는 섹스. 그렇게 섹스도, 불륜도 실은 수동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독일어 역시 그렇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자의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모든 언어는 나름의 확고한 의미와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배우려는 이는 무조건 자신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 역시 '이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아치가 독일어와 불륜의 공집합인 것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다. 안나는 이식에 순응한다. 그저 하염없이 수동적인 존재가 되려 애쓴다. 삶에 그 어떤 낙관도, 희망도 없으므로. 그 결과,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이 되었다면, 조금이나마 잃어버린 사랑에 미련을 갖지 않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들이다. 커다란 비극에 이어, 더 커다란 상실이 찾아오고 그 때서야 안나는 자신이 정말 배워야 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언어를 안나가 찾아가는 정신과 상담의인 메설리 박사로 부터 듣게 될 것이다.


 작가는 독일어를 배우는 것과 정신과 상담의와 상담하는 것을 유사하게 만든다.

 안나가 새로운 독일어를 배우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말들의 진정한 뜻에 대하여 메설리 박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독일어를 습득하는 것과 똑같이 메설리 박사로부터 말의 참된 의미를 하나 하나 배워간다. 저자가 원래 시인이라 그런지, 언어가 가진 이면이 새롭게 부각되는 장면이 많다.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뜻하는 것은 타인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말은 모호한 것을 구체화 시키는 힘이 있다. 그만큼 존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다. 스티브와 안나가 만날 때, 스티브는 줄곧 빛에 대해 말했다. 스티브, 그는 안나에게 불의 존재였고, 빛의 존재였다. 안나는 스티브란 항성을 맴도는 행성이었다. 그 항성이 사라졌고, 안나는 자신에게 다시는 빛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고 자멸을 선택했다. 그러나 메설리 박사는 빛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빛이 다가와 자신이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어둠을 물러가게 하지는 못한다고, 스스로 그 어둠을 관통하여 빛을 찾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빛을 향한 걸음을 언어가 도와줄 것이었다. 자신만의 언어가. 어차피 스티브가 준다고 여겼던 빛 또한 거짓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지기도 하니.


 의식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그 결과는 고립이에요. 진짜 관계 대신에 상상한 관계만 가지게 되죠. 의식적 삶 속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될수록, 당신의 그림자는 더 검고 짙어지죠.(p. 347)


 '하우스프라우'는 자신이 놓쳐버린 것에 대한 너무 많은 미련 때문에 현재 지켜야 할 것마저 파괴해 버린 여인의 이야기였다. 상실에 낙담하여 창살 아래 갇힌 것을 선택한 결과 영원히 빛의 야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이 우리를 가두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장본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갇혔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아파한다.


 가라앉지 않을 배가 대양의 바닥에 내려앉기도 하고 로켓이 항상 재진입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랑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미래를 약속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혹은 사랑했다고 말했던 모든 남자들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간에서야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 자기를 혼동해 버렸다.(p. 397)


 섣부른 판단에 따른 수동성은 삶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오만의 표현이다. 무작위와 예측 불허로 넘쳐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재단하고 단정해선 이렇게 되리라는 자기만의 결론 끝에 나온 부동(不動)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빠져나가기가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가진 오만의 한기로 더욱 두터워지는 얼음 감옥인데, 나갈 방도를 내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만 찾고 구하고 있으니.


 행해질 수 없는 행위들이 있어요. 고치는 게 불가능한 결과가 있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너무 늦게 그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죠.(p. 238)


 '하우스프라우'는 불륜과 성애가 나오고 한 여인의 파멸을 그리지만(마지막 문장은 그녀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내게는 성장 소설로도 보였다. 견뎌야 할 겨울을 외면해선, 봄조차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맞다. 타산지석의 의미로 한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난 그 겨울을 제대로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혹시 내게도 나 자신이 만든 감옥이 있지는 않은지 찬찬이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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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8-10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동 공격성이란 단어가 있어요. 내면에 공격성이 들끓지만 그러한 공격성을 표출하기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등의 소극적인 방식으로 반항하는 성격을 말하죠. 수동성을 단순히 의지없음으로 보기 쉽지만 수동성에도 매우 다양한 플러스 알파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죠. 헤르메스님 리뷰를 읽으면 안나는 수동성에 대해 내부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다고 하시니 그녀는 수동 공격성에 더 가까운 거 같네요.

ICE-9 2017-08-10 19:31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용어가 있었군요. AgalmA 님 말씀대로 수동성 내부에도 다양한 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존재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정말로 안나의 소극성은 내부에 쟁여둔 공격성이 왜곡되어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 볼만한 좋은 지점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AgalmA님이세요^^

AgalmA 2017-08-11 02:09   좋아요 1 | URL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이에요. 헤르메스님도 읽어보시면 도움받을 정보 많으실 책이죠^^

ICE-9 2017-08-11 11:05   좋아요 0 | URL
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책 추천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죠^^

희선 2017-08-11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니, 앞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죽다니... 지난달부턴가 사람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룰 수 없는 게 없어서, 괴로워서, 힘들어서... 이 책하고는 상관없지만, 여전히 왜 그럴까 싶습니다 모든 것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났을 때 그걸 알게 되면, 그 사람 몸은 다 썩어서 이제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건 책을 보면서도 하는군요 좀 이상한 생각일까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희선

ICE-9 2017-08-13 21: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끌로드 샤브롤이 감독한 영화 ‘마담 보바리‘를 다시 봤습니다. 엠마 보봐리 역시 이 소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에 배신 당하고 더이상 믿을 것도, 기댈 곳도 없어지자 스스로 비소를 먹어 생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요. 소설의 주인공 여성의 심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운이 좋아 그런 지경까지 가 본적은 없습니다만 정말 엠마나 안나처럼 모든 것에 배신당하고 잃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을까 싶기도하네요.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 보다, 더이상 세상에 자신을 매어놓을 게 없기 때문에 훌쩍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난 뒤,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줄리언 반즈는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기 위해 이런 소설을 썼을까?'하는 것. 일단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시대의 소음'은 '혁명' 교향곡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줄리언 반즈가 주목하는 시점이 좀 심상치 않다. 연대기 순이 아니라 그의 생애 중 가장 고난에 처했던 세 시기만 뚝 떼내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작곡 활동을 했다. 스탈린의 통치에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던 이들도 반역 혐의로 처형 당하던 시절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적어도 현재의 안락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누리고자 한다면 당이 원하는 음악이 아니라 개인이 바라는 음악을 할 수는 없었다. 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살아지던가? 예술가 역시도 아무리 위험이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이상(理想)을 작품에 구현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했다.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vision)으로 형상화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꽤나 유명한 오페라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이다.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 오페라 공연 모습


여기서 그는 자신이 늘 하고자 했었던 전위적인 음악 스타일을 목초지에 양을 방목하듯 마음껏 풀어놓았다. 음악이 당연히 전보다 훨씬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 정확히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모스크바 공연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오페라 공연 도중에 불쾌감을 표시하고는 나가버렸다. 이것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다. 그 전까지 이 음악에 상찬을 아끼지 않던 소련의 모든 비평가들은 스탈린의 불만을 기점으로 모두 악평으로 돌아섰고 작곡가에 대해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에서도 곧장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며 그가 음악으로 봉사해야 할 민중을 배신하고 오직 현실과 유리된 음악의 아름다움만 추구한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당시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형식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마치 스탈린의 뜻이 소련 전체의 뜻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한 당의 낙인은 귓가 바로 곁에서 울리는 파멸의 전주곡이나 다름 없었다. 모처럼 개인의 신념에 따라 날개 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찾아 온 것은 날개를 꺾는 것도 모자라서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시는 우는 것조차 못하게 만드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 가운데 헐떡이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죽을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였다. 그는 소시민이었다.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게 어느 정도의 우유부단함과 또 어느 정도의 비겁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작곡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래, 굽히자.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그들의 뜻대로 춤춰주자.'. 이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조직의 뜻에 따라 불의인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혀야 할 때 흔히 품게 마련인 굴종의 그 언어들을 그도 되뇌었다. 그리하여 다음 작품은 철저하게 그들 아니 전적으로 스탈린 취향에 맞는 곡을 썼다. 너무나 쉬어서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교향곡 5번, '혁명'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아이러니였다. 혁명이란 무엇보다 불의의 시대에 저항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실현시키는 행위이지만 그것을 제목으로 가진 이 음악은 자신의 모든 독립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철저하게 타협하고 순응한 산물이었으니까. 이것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그의 항복 선언이요, 다시는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충성의 서약이었다. 다행히 그의 맹세는 받아들여져 그는 '므젠크스의 맥베스 부인'으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혁명'에 담긴 아이러니는 그의 의도였을 수 있다. 아이러니에는 이와 같은 힘이 있으니까.


 아이러니는 - 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 -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p. 127)


이것이 바로 소설의 첫 부분 '층계참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위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발목을 부여 잡는 두 번째의 덫이 곧 닥쳐온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나를 나로 있게 만드려는 모든 유혹을 뿌리쳤고 나락과 파멸의 빌미가 될 그 어떤 행동도, 인연도 하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커져 버린 그의 명성이 그리고 그가 인류의 자유를 구현하는 예술가라는 것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시대의 요구로 인해 또 한 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번엔 소련이 아니라 서방 세계다. 그것도 소련과 정반대의 자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선전하던 미국. 바로 거기서 열리는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 과학 회의에 쇼스타코비치가 당의 요구로 소련의 대표가 되어 거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혁명'을 쓴 대가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답례였다. 그 회의에 참석한 자신에게 어떤 질문이 쏟아질지 너무나 명약관화 했으므로. 더구나 자신과 다르게 일찌기 자유를 찾아 소련을 져버리고 미국에 망명한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보코프는 자신의 망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스트라빈스키가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지은 무조음악에 빗대어 이렇게 물을 것이 뻔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질문을.


 세계 평화를 위해 열린 문화 과학 회의에서 연설 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렇게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고유한 신념에 따라 우러나오는 외침들을 가로 막거나 깡그리 지워버리는 시대의 소음들을. 여기서 제목의'시대의 소음'이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신념에서 발현되는 개인의 목소리들을 억누르고 오직 체제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소리만 존재하도록 하는 현실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소음이라 표현한 것은 그 소리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소음은 우리의 이해를 바라지도,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지만 관철할 뿐이다. 모든 선동적인 연설과 구호가 그러하듯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녕 시를 쓰고 싶다면 모든 것들이 침묵한 밤에 자기 내면의 고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한 바 있다. 이처럼 예술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예술을 존립시키는 생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그것에 반하는 시대의 소음 속에서 번민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명성이 높아지고 그 성취가 클수록 더욱 그는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것과 시대가 원하고 강요하는 것 사이에서 예술가는 언젠가는 이쪽 저쪽으로 때로는 위태로울 정도로 갈지자 걸음을 걷게 된다. 방황은 필연적이다. 그 때도, 지금도.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바로 그러한 모습을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바로 오늘의 시대 역시 예술가에게 시대적인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석학들이 지금을 '거대한 후퇴'의 시대라 부른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강대국과 제3세계를 막론하여 곳곳에서 과거 회귀의 정황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고 가부장제 문화가 다시금 융성하려 하고 있으며 권위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파시즘이 은밀히 퍼져 나간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어떤 이는 말했다. 지금의 정세가 세계 제 2차 대전의 발발 당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짙고도 깊은 어둠의 밤이 점점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암울할 수록 사람들은 예술가들에게 원한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밝혀달라고, 암흑 속에서 상처받는 자신들의 영혼을 헤아리고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외쳐달라고 말이다. 오늘의 예술가들은 그런 부름을 받고 있다. IS의 무자비한 테러 앞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우익화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첨예해지는 인종 간, 국경 간 갈등을 마주한 가운데 받는 부름이다. 참여의 부름이요, 선봉에 서라는 부름이다. 그러나 개인이 지기엔 버거운 부담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이나 가지고 있는 신념과 겹치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번뇌와 갈등의 총량을 늘릴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 예술을 통하여 시대를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예술의 신이 부여한 엄연한 임무다. 예술의 신 아폴론은 치유와 정화의 신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를 썼던 스트라빈스키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음악의 신이 나타나 내게 음악을 위해 죽어줘야겠다고 요구하면 응해야 할 것 같다'라고.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 음반


 줄리언 반스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온전히 자기 희생을 선택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스트라빈스키 보다 훨씬 더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해 갈등하고 분투했던 쇼스타코비치에게 자신을 의탁해 소설을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반스 자신의 분신이며 '시대의 소음'은 시대가 점차 암울해짐에 따라 점점 더 부과되는 사회적 책임으로 인해 차츰 깊어져 가는 반스 자신의 내적 고민이 한껏 반영된 산물이다. 그만큼 그의 내면이 짙게 투영되어 있기에 소설 속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이 생동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반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견해는 접어둔 채, 오직 쇼스타코비치의 영혼만 충실히 재현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격한 불화를 겪고 있는 그의 내면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온전히 경험토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비록 그가 위대한 작곡가라 하여도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역시나 보통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내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이 소설이 지닌 가장 뛰어난 점이다. 쇼스타코비치를 나와 그리 먼 존재로 여겨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 문득 생각해 보면 그의 고민 역시 그렇게 멀어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살다보면 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원하는 자유가 바깥 세계와 부딪히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반스만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자신의 감정을 깊이 투영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고민도, 갈등도.


 아마도 그 때문에 줄리언 반스는 이런 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답을 주는 건 아니었으리라. 그랬다간 자신의 견해로 독자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는, 그렇게  하나의 시대의 소음만 배출할 뿐일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사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가 정했던 목표는 생각할 있는 자료들을 많이 주는 ,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고수할 없게 만드는 현실적인 난제들 속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영혼의 충실한 재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을 독자들이 온전히 경험하고 그를 통해 자기 나름의 대답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글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단단히 한 몫 한다. 3부인 '차 안에서'가 이를 증명한다. 두 번의 위기로도 모자라서 그는 다시 또 곤란을 겪는데, 이제는 당이 단 한 번도 당적을 가지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 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좀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 속에서 비참한 나날을 견뎌왔다. 그러나 인내의 결과 도래한 것은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라는 더욱 강도가 높아진 요구일 뿐이었다.  이것은 소설의 소 제목들로 암시된다. 1부의 '층계참에서'와 2부의 '비행기에서'를 지나 3부의 '차 안에서'에 이르기까지 그는 점점 더 좁은 공간 속에 갇히는 것이다. 3부는 그야말로 쇼스타코비치가 체제와 시대의 볼모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가득한 시대의 소음 속에서 원래 자신이 내고자 했던 목소리마저 변질되고 왜곡되어 이제 어느 음이 진정 자기가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본다.  '시대의 소음'을 듣지 않기 위해 개인적 구원의 열망을 담아 내놓은 음악들이 시대의 논리와 강요에 의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소음이 되어가는 것을. 너무 오래 살아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을 겪었던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소망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다.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음악이 해방되는 것 뿐이었다.


 이처럼 두 번의 커다란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내 은밀하고 소소하게나마 지속되었던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위한 투쟁은 늘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조금의 용기가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음악과 그것에 헌신을 맹세한 자신의 영혼은 구할 수 있는. 아니, 남아 있었다는 표현은 잘못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분명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당에 가입했을 테니까. 그러므로 용기가 자라났다고 해야 하리라. 어째서 과거에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났는가? 아마도 그것은 가늘게나마 부단히 이어져 온 그의 저항과 투쟁 덕분이라고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한 어떤 것이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 무엇이든 반드시 자취를 남긴다. 계속 했으면 계속한 만큼, 헌신 했으면 헌신한 만큼 그것은 삶의 성장을 위한 자양이 된다. 후반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분명 그런 것을 보여준다. 번뇌와 갈등도, 저항과 투쟁도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랬기에,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 그냥 음악이 것이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답이 질문자의 머리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p. 257)


 반스는 비록 정답은 주지 못했지만 희망은 주었다. 당신이 오늘 어떤 걸음을 걸었든, 설령 그 걸음이 패배의 궤적이라 하여도 전혀 무의미 하지 않다고 말이다. 다만 그 걸음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보지 못하고 마냥 부정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의 소음에 너무 지나치게 휘둘린 결과라는 말도 아울러.


보이저 2호


 그러고 보니, 이런 게 떠오른다. 1977년에 발사 되어 지금은 태양계를 지나 한창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2호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만날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거기엔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이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위의 문장이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시대의 소음이 소리를 잃고 한낱 활자가 되었을 때조차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음악을. 그것도 시대 만이 아니라 인간과 전혀 다른 종이 가진 문화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소음에도 방해받지 않고 진실된 소통의 순간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 음악이 말이다. 이보다 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이 옳다고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때문에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믿음에 슬쩍 투영하고 있는 반스의 낙관에 기꺼이 판돈을 걸고 싶다. 오늘을 이루는 모든 걸음에 절대 무가치 한 것은 없다고 믿으련다. 고민도, 갈등도 모두 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음에 귀를 막듯 섣불리 해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모든 음이 제대로 연주될 때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어떤 음이 나쁘다고 해서 생략하고 좋은 음만 연주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작곡된 음악도 소음이 될 뿐이다. 삶도 다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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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만 생각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테지만, 식구가 있다면 그러기 힘들겠죠 쇼스타코비치도 자신보다 식구를 생각해서 스탈린이 바라는 음악을 썼군요 그런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죠 한번 어느 한쪽을 고르면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쇼스타코비치를 탓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건 음악가만 그런 건 아니겠군요 쇼스타코비치를 보고 만약 자신이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을 하겠네요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


희선

ICE-9 2017-08-01 03:18   좋아요 1 | URL
무언가를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포기하고 굽히는 일은 현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저 역시 살면서 수차례 겪었구요. 그런 굴종의 경험을 그동안 좋지 않은 것으로만 여겼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니 이제 달리 헤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어떤 패배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패배일수록 쉽게 이뤄진 것은 없어서 거기에 반드시 과정이 있고 또 어려운 것인 만큼 치열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내게 충실한 시간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모두 무용한 것으로 버려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대의 소음‘은 그런 시간일수록 더 헤아림의 탐침을 깊이 내리고 오래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제게 넌지시 묻고 있더군요. 반성의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 패권주의자 !!!

7월을 5분 남기고 쓰시다니 반칙입니다.

ICE-9 2017-08-01 19:39   좋아요 0 | URL
아니, 월마트급 사장님께서 겨우 구멍가게 지분 밖에 안되는 저에게 패권이라 하시면 ㅠ ㅠ
구멍가게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도 24시간 영업을 하는 것이죠...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