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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하나의 리뷰를 빚어내는 동기는 다들 다르겠지요

  제게 있어서는 책을 읽다가 문득 들게 된 의문이 종종 리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있어 리뷰란 그런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가는 과정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그런 의문은 사실 작품 자체 내에 있다기 보다는 작가가 왜 하필이면 그렇게 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궁금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금 소개하려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물의 잠 재의 꿈'이 특히나 더 그랬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 은 알려진대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입니다

  시리즈에서 잠깐식 등장하곤 했던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의 이야기죠. 물론 나쓰오가 아버지 얘기를 썼다는 것이 저의 의문은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다른 곳에, 그러니까 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2부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쓰고 난 뒤 바로 1년 뒤에 그녀의 아버지 얘기인 '물의 잠 재의 꿈'을 내어놓았나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천사는 94년, 물의 꿈은 95년에 나왔습니다 .) 작가에게 있어 1년이란 참으로 짧은 시간 아닐까요? 그것도 연속된 시리즈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로 부터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를 해온 나쓰오로선 그렇게 오래된 시대의 분위기를 상세하고도 세부적으로 살리기 위한 자료 조사만으로도 1년으론 벅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로 하여금 이런 의문을 들게 합니다. 혹 '물의 잠 재의 꿈'은 애시당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쓸 때 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보면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은 참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한 소녀라는 점. 그리고 그 소녀가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같은 점은 그렇게 객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들에게도 똑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점도 같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어 여기까지만 말하려 합니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행운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두 권을 나란히 읽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모습들이 더 잘 보이게 될 테니까요. 

 이 둘이 가진 비슷한 측면이 그렇게 많다면 이것은 애초 부터 두 작품이 모두 나쓰오의 머리 속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무리가 없진 않겠지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을 더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나쓰오가 미리 같이 기획을 했다면 그건 분명 독자들에게 나란히 보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1년이라는 짧은 시차를 두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그리고 그렇게 유독 나란히 보이고 싶었다면 나쓰오는 이 두 작품 모두를 가지고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오래동안 이 두 작품을 함께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확신 같은 것도 들고 해서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확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쓰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듣기 위해선 이 두 작품 모두를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러니까 두 작품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당신은 정말 행운인 것입니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94년에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64년에 일본은 동경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그건 2차 대전의 패배로 잿더미에서 시작했던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어 서서히 재건해가던 일본이 드디어 고도 성장의 시대로 돌입했던 60년대의 장밋빛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은 정확히 바로 그 1년전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동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고 일본의 미래에 대해 온갖 장밋빛 전망이 넘쳐나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30년 뒤의 일본의 모습을 나쓰오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30년의 공백이 저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30년은 바로 일본이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던 그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 선진국 진입, 미국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엄청났던 경제 대국. 미국 국민에게 있어 루즈벨트 시절이 일종의 유토피아로 남아있다고 한다면 일본인들에게는 아마 저 30년이 그러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부터 일본의 거품경제는 급속하게 몰락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물의 잠 재의 꿈'은 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그 출구에 서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 나왔던 94년은 급속한 거품의 붕괴로 전후 최초로 대대적인 뱅크런이 일어나 은행이 도산하기도 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물의 잠'이 나왔던 95년 1월엔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었죠. 

 

 여기서 이 의문은 이제 보다 본질적이 됩니다

 나쓰오는 왜 하필 아버지의 얘기를 그 입구에 그리고 딸의 얘기를 그 출구에 세웠던 것일까 하고 말이죠. 일본 최대의 풍요로운 시기였던 그 30년을 마치 괄호치듯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거기엔 당연히 작가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의문이 좀 더 근원적으로 명확해지면서 저는 드디어 두 작품이 펼쳐보이는 내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에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하나는 '소카 지로'라고 하는 폭탄 테러범이 일으키는 사건과 다른 하나는 무라노 젠조의 죄책감으로 작용하는 '다키'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혀 다릅니다. '소카 지로'는 일본 사회 초유의 관심사이지만 '다키' 살인 사건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무라노 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오로지 '소카 지로'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키가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거절해 버린 것이고 결국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뒤엎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죠.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서도 똑같습니다. 무라노 미로도 여기의 무라노 젠조 처럼 하나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와타나베의 죽음입니다.(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와타나베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동일하게 언론쪽 일을 합니다.) 그녀가 살해당할 때 미로는 자신이 끌렸던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렇게 젠조와 미로가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충실할 때 그들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결국 초래해버린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30년의 시차를 두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의 하나의 방증이자 사실 그 불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자 함입니다

  즉 거기에는 하나의 무관심이 있습니다. 저마다 보다 더 큰 것을 쫓느라 한 개인의 삶엔 무관심한 것이죠. 나쓰오는 무리노 미로와 젠조의 반복된 죄책감을 통해서 30년 동안이나 일본이 고도성장을 거쳤지만 결국엔 파국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결과가 아니었겠느냐고 은밀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시는 시리즈의 최종작 '다크'에서도 반복됩니다. 나쓰오는 버블의 확장으로 겉으로는 가장 풍요로웠던 80년대의 일본의 가장 가까웠던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 학살'을 가져옴으로써 그 바로 이웃한 나라에서 죽음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풍요로움에만 취했던 일본을 질타합니다. '다크'에서 미로는 '김'이 들려주는 광주에서 학살당한 무수한 시체들이 마구 매장당하던 그 거대한 검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살아돌아왔는지에 대한 생존담을 들으면서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절감합니다. 그 광주의 거대한 검은 구덩이는 '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젠조의 고향이자 다키가 살던 곳인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시궁창 악취가 풍기는 스미다 강을 건너자마자 갑작스레 번화가가 자취를 감추며 거리의 불빛도 쓸쓸해졌다. 어둑한 불빛이 오랜만에 옛 집에 있던 곳으로 가는 자신을 맞이하느 가족들의 영혼 같았다. (P.110) 

  이 문장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핵심이자 작품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번화가가 사라진, 거리의 불빛 마저 쓸쓸해진, 시궁창 악취로 가득한 스미다 강의 어둑한 저 편은 앞서 사카이데 파티가 열렸던 '하야마마치'와는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바다 냄새가 강렬해졌다. 차는 하야마마치에 들어섰다. 무라노는 길 왼편에 차를 세우고 사카이데가의 위치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물을 것도 없었다. 해변에 포드며 뷰익 등 외제차가 줄줄이 서 있는 집이 보였다. 아마 저 속이 사카이데이리라. 황실 옆의 값비싼 땅에 위치한 저택 주변에는 높다란 담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정원과 맞닿은 해변을 전용 해수욕장 처럼 이용하는 듯 했다. 저택 옆쪽 산에는 수 그루의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P.88) 

   이렇게 나쓰오는 문장의 배열 까지 섬세하게 똑같이 맞추어 가면서 그 둘의 묘사를 강렬하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것도 후각 시각을 총동원해서 말이죠. 어둔 밤과 환한 대낮, 악취가 나는 강과 푸른 바다, 불빛 조차 쓸쓸한 거리와 외제차로 빽빽한 거리. 거기다 물어 물어 찾아가야 하는 다키의 집과 한 눈에 척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카이데 집과의 대비는 그야말로 나쓰오가 이것을 통해 중심이 되는 공간과 그로 부터 밀려나 무관심속에 버려진 공간을 말하려하고 있음을 무엇보다 확신케 합니다. 그렇게 소카지로에 의해 사회적으로 밀려난 관심 밖의 존재들은 그렇게 공간적으로까지 밀려난 어둡고 냄새나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젠조는 그 스미다 강의 건너편으로 갈 때 오랜 옛 집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더구나 쓸쓸한 불빛들 마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들의 영혼처럼 보입니다. 이 묘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로도 그렇지만 젠조 역시 그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업이 있지만 '특종꾼'으로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정규직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고용하는 이른바 비정규직입니다. 거기다 자신을 거기로 끌고들어왔고 절친 고토와 함께 잘 뭉쳐서 일하던 '군단'는 지금 거의 와해직전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꾸만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늘 집 밖을 떠돌아 다니는 그에게 그 어디서도 안식을 가질수가 없는데 그 밤 다키를 데려다 줄 때 그는 비로소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것 같은 안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나쓰오가 현재의 일본이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디에 눈을 돌려야 하는가 혹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곳은 바로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그렇게 나쓰오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둠을 그들의 목을 잡고 억지로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쓰오는 그 어둠, 그 안에 억눌린 약자들의 삶 이야말로 진정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크'에서 미로가 결국 젠조를 죽이러가는 것은 그 30년을 지워버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나쓰오가 가장 일본의 고도성장기였던 그 30년에 대해 내리는 직접적인 평가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이 아무리 풍요로운 것이었다 해도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방치한 만큼 그냥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며 '물 속으로 익사당한 잠'이며 문자 그대로 '다크'한 지옥일 뿐이었다는 거죠. 

  제목 '물의 잠 재의 꿈'은 사실 소설 속에 나오는 두 개의 죽음을 그대로 상장화한 것과도 같습니다. 익사당한 다키는 그야말로 '물의 잠'(사실 여기엔 또 하나의 죽음인 '요시코'가 있으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적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그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이며, 재의 꿈 또한 죽은 자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죠. 소설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들'입니다. 물의 잠을 자게 된 인물도 재의 꿈을 꾸었던 인물도 정말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에 피해자들이고 누군가의 의해 그 꿈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나쓰오는 이 둘에게 죽음과 박탈을 가져다 주었던 주체들을(그 둘에게 있어 죽음을 준 자와 박탈을 준 자는 서로 다릅니다.) 비슷한 존재로 묘사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둘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나쓰오는 언급하지 않은 또 하나의 죽음까지 더해서 모두 셋에 대한 피해자의 계보학을 써내려 갑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계보학적 접근을 취하는 것은 그 궁극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그저 원인이 아니라 그것을 일으키게 한 하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장본인'인 것입니다. 나쓰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그렇게 해서 궁극적 장본인을 밝힙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30년 동안 고도 성장기간을 거쳤으면서도 변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본이 파국적으로 전락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수많은 약자들의 죽음을 또한 초래한 존재이기도 하니 당연히 범죄자입니다. 때문에 나쓰오는 그들을 당연히 소설 속의 범죄자들로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또 똑같습니다. 이렇게 자꾸만 드러나는 이러저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저는 어쩔 수 없이 원래 이 모두가 나쓰오의 계획 속에 있던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결국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에서 등장하는 범죄자는 똑같습니다. 물론 존재론적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나쓰오는 두 작품 모두에서 그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로 명확하게 하나의 계층만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부러 바로 하야마마치와 스미다 강 건너편을 병치시킨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계층 자체만을 단순히 공격하기 위해서 나쓰오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열린 과일을 가장 많이 따먹은 계층이기 때문에 상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으로 부터 오는 과일을 먹어치웠다는 것은 곧 계속화된 성장일로를 걷던 그 30년 동안의 일본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쓰오가 그 계층을 범죄자로 잡은 것은 바로 그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 자체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일본 자체가 그들의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었고 결국 그 죄업은 부메랑이 되어 일본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의 결말은 조금은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다크'에서 결국 그 해피 엔딩의 요소가 거꾸로 젠조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는 것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의 잠 재의 꿈'이 나왔던 95년엔 앞에서 얘기했듯이 전후 최대의 지진이라 불리었던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그것은 안그래도 거품이 붕괴됨과 동시에 나날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일본에 내리는 모든 게 끝장났다는 파국적 종지부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대지진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여기에 어떤 운명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도 만듭니다. 아마도 나쓰오는 그것을 일종의 '신벌'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소설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 처럼 말이죠. 

  놀라운 소설입니다. 더구나 어떻게 이렇게 두 개의 작품으로 그렇게 하나는 30년 동안의 일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다 다른 하나는  출구에다 세워 둠으로써 30년 동안 '그렇게 풍요를 구가했던 일본이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오욕 뿐인가'를 되돌아볼 생각을 했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나쓰오가 이렇게 두 개의 작품을 나란히 세상에 내어놓았던 것엔 보다 깊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 그것을 밝히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척 수다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인 깊이인지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정말 마음에 드는 시리즈인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니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가장 먼 이웃이기도 한 일본을 보다 깊이 음미할 수 있을만한 작품으로도 감히 추천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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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뭐를 좋아하냐고 물을때 선뜻 대답하기 곤란해지곤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일본 여류 장르소설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아무 갈등없이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늘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둘은 바로 '화차'의 미야베 미유키와 '무라노 미로'시리즈의 기리노 나쓰오이다. 다들 '사회파'로 묶일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그렇게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미야베 미유키는 풍경화가에 가깝고 기리노 나쓰오는 초상화가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그렇게 같이 범죄를 그리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그 범죄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데 중점을 둔다면 그에 반해 기리노 나쓰오는 그 범죄를 일으키거나 추적하는 사람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둔다. 읽고나면 가슴에 왠지 모를 톱밥을 씹고 있는 듯한 씁쓸함이 나는 것도 같지만 미야베 미유키에선 그것이 머리로 이해함에서 온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선 마치 활자가 그대로 주먹이 되어 가슴을 내리친 듯 멍든 가슴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떨림 가운데서 온다. 그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우리의 시선을 희생자 보다는 범죄자에게 맞추기 때문이며 반면 기리노 나쓰오는 범죄자 보다는 희생자에게 더 시선이 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유키에게선 잡기 위한 추적이 되지만 나쓰오에게선 찾기 위한 탐문이 되는 것이다. 추적이나 탐문이나 그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는 동일하다. 언제나 쫓는자 혹은 찾고자 하는 자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추적하는 자는 쫓기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고, 탐문하는 자는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한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미유키의 추적에서 타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 되는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 범죄자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사회의 모습이다. 반면 나쓰오의 탐문에서 그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되는 것은 오로지 그 개인 뿐이다. 그 개인이 당했던 생생한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당해야 했던 그의 처지 뿐이다. 그런데 나쓰오는 언제나 그 처지가 그리 특별하지 않게 그린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얼마든지 때에 따라서는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그가 특별히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나빠서도 착해서도 아니며 가진게 많다거나 적어서도 아니요 사회적 서열에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언젠가는 죽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 분명한 고독한 그런 보통의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에게서 범죄는 사회적 모순이 들끓는 용암이 가장 얇은 지층을 찾아 뚫고 나오듯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만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 범죄란 그저 그런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채우며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발악이 된다. 단순한 욕망의 충족만은 아닌 어떡하든 이 삶이란 것에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함의 표현이 된다. 그래서 아주 괴물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아임 소리 마마' 조차 그 주인공이 살려고 발악하고 발악하다 끝내 물에 빠져 익사할 때는 왠지 처연함마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나 그 밝고 어둠엔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아예 어둡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에게 있어선 그 어둠을 창 밖에 두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는 그 어둠 속에 완전히 함몰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어둠에선 우리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어둠에선 쉽싸리 빠져나올 수 없다. 이 둘의 우열은 사실 나누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어둠의 매력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선 기리노 나쓰오에게 손을 더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작품에 담는 것도 작품을 통해 바라보는 것도 다르므로 결국은 해와달 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작가들이다. 대낮엔 태양의 하프소리를 듣고 심야엔 달빛의 피리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소슬한 바람이 대나무 잎새를 서걱거릴 때, 개다리 소반 위 호롱불 흔들리는 불빛처럼,  그렇게 지워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지워지는 가느다란 피리소리를, 팔배게를 하고 누워, 호롱불 그림자가 천장에 그려내는 비틀거리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들에서 그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면 그래도 - 이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꼽고 싶다. 

  개인적으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다크'를 아주 충격가운데 읽었고 - 이것이 정말 작가가 되기 전에 그냥 평범한 주부로만 살았던 여자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고 정말 놀라기도 했고 이런 어둠을 품고 어떻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새삼 일본 여자가 제일 두렵다는 이토 준지의 말이 가슴에 팍 와 닿기도 했다 - 그것이 만들어내는 블랙홀과도 같은 어둠에 매혹된 탓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 그녀의 다른 소설 '아웃'이나 '아임 소리 마마' '잔혹기' '암보스문도스' '그로데스크'를 다 읽어 보니 역시나 무라노 미로 시리즈야 말로 기리노 나쓰오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내가 기리노 나쓰오에 대해서 읽고 혹시나 그녀를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그 시작은 무조건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난 마지막 '다크' 부터 읽었고 그 때는 앞의 시리즈가 번역이 안된 탓에 어쩌다 보니 아직 1권도 읽지 못한 지경에 이렇게 2권부터 읽게 되었지만 당신은 운좋게도 이미 1권이 번역되어 있으니 순서대로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거기다 '다크'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 '물의 잠 재의 꿈'까지 덩달아 나와주었으니 이건 팬으로서 하는 말이지만, '무라노 미로를 벗하라!'는 신의 계시나 다름없다. 

  내용에 대한 언급 없이 오로지 이렇게 추천의 말만으로 리뷰를 끝내는 경우는 전혀 없는 나인데 이것만은 예외로 해야겠다. 입은 근질근질하지만 무라노 미로 만큼 그저 읽고 어둠에 푹 잠겨, 느껴야 할만한 소설은 없는 것 같으니 억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 밖에.(하지만 이래놓고 못 참게되면 언제 여기로 다시 돌아와 마구 입을 놀리게 될 지 모르겠다. 어쩌면 '물의 잠 재의 꿈'에서 같이 얘기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장 그르니에 '섬'의 서문에서 알베르 까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여기에 인용하고 싶다 

  "나는 정말 부러워한다. 이 책을 이제 처음으로 펼쳐서 읽게 될 당신을!" 

   나 역시 알베르 까뮈와 똑같은 심정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1권 부터 차례대로 읽게될 당신을 너무도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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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입소문이 굉장하길래 읽어 본 이 소설은, 

놀랍게도 제목 그대로 1인칭 고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소설이었다.  전체적으로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각 종교적인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장이 화자를 달리하면서 1인칭 고백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이라 여겨졌다. 얼른 짐 톤슨의 '내 안의 살인마(킬러 인사이드 미)'가 떠올랐다. 그 소설 처럼 이 소설 역시 한 살인마의 내면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니 그건 아니지 싶었다. 읽어보니 이 소설은 그것과 아예 달랐다.                                                                                    

 '내 안의 살인마' 역시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처럼 분명히 한 개인의 내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 내면은 결국은 괴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내면이다. 따라서 여기엔 별다른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왜,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하는 그 괴물의 형성과정을 관찰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이고 우리는 미스터리에서 읽을 때 기대하는 어떤 쾌감을 맛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그 점에서 완전히 반대다. 여기선 내면의 탐색 같은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각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고백의 주된 역할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 각각이 범죄이자 단서이며 추적이자 해결이 되는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미스터리 소설에서 지문을 모조리 생략하고 오로지 대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다. 그렇게 모든 고백은 최종적으로 '복수'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 안으로 편입된다. 그것도 유기적으로. 그래서 '내 안의 살인마'와는 달리 여기서 독자는 '복수의 완성'에서 비롯되는 짜릿한 미스터리적 쾌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1인칭의 고백은 읽는 독자에게 상당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귓가에 전하는 것 처럼 들리므로 3인칭의 객관적 시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상상의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버린다. 귓속말은 우리도 모르게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렇게 좁혀진 거리감은 우리를 더욱 소설의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다. 더우기 마치 일기를 읽는 것 처럼 내밀한 내면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은 남의 것을 엿보고 싶은 은밀한 관음증적 욕망까지 충족시켜주므로 우리는 더욱 더 소설 속 화자가 하는 말에 빨려들어갈 수 밖에는 없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은 일단 1장의 시작에서 모리구치의 고백을 듣는 순간, 중간에서 그만두기가 무척 힘이든다. 등장인물들의 말들이 마치 지구가 달을 잡고 있듯이 대단한 인력으로 우리의 신경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처 끝까지 읽게 된다. 결말을 보고나서야 겨우 인력에서 헤어나고 우리는 그제야 작품을 음미할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의 몰입도는 상당하다. 앞서도 말했듯,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이미 우리에게 몰입을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도 정교한 기교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한 해를 마치고 종업식이 거행되는 한 교실을 배경으로 종업식날 으례히 따르게 마련인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와 당부로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그지없이 평범한 풍경. 이 속에서 담담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가는 모리구치 선생님의 말로 소설의 1장, '성직자'는 시작된다. 하지만 모리구치의 평범한 선생님의 말에서 서서히 자신의 딸 마나미를 지금 있는 학교에서 사고로 잃었던 일로 이어지면서 고백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딸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했으며 그 범인들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우리 반에 있다는 충격적 발언이 터져나온다. 

               영화 '고백'의 포스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그렇게 편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일기를 훔쳐보는 것 역시 고백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고백을 듣는 것은 일기를 몰래 보는 것보다 훨씬 불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기를 몰래 보는 것은 '나'라는 주체를 감출 수 있지만 고백을 들을 때는 내가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가 은폐되는 것과 노출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보거나 들은 고백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몰래 일기를 보았을 때 오로지 관음증적 쾌감만을 얻을 수 있는 건 그 고백을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척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고백을 들으면 더이상 그 고백을 모른척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고백은 듣는 이에게 어느정도 말하는 자의 책임을 나눠주게 마련이다. 나는 고백을 들은 이상 책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고백은 듣는 이에게 선택을 강요하니까. 그렇게 노출된 나는 결국 두 가지중의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공감하거나 무시하거나... '공감'은 물론 책임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무시'는 관계의 파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항목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물릴 수도 없다. 이미 내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백은 피할 수 없는 강요된 초대이다. 고백을 듣는 순간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난감한 그 자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던져진 공을 받는 것 처럼 일방적이다. 당신은 다시 고백한 자에게 그 공을 던질 수 없다. 그렇게 일단 초대된 이상 당신의 자의의 여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고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렇게 잔잔한 수면 위에 내던진 거대한 바윗돌 처럼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안온했던 아이들의 일상을 폭력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겨버린 모리구치 자신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고백의 폭력은 고백을 한 자에게 완전히 묶어두는 것인데, 정작 그 주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가진 독특하면서도 진기한 측면이다. 정작 응답해주어야 할 그 대상이 사라지다니! 지금까지 고백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묘한 구성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제2장 순교자에서 미즈호가 모리구치에게 이런 원망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 

  저는 그런 선생님이 약간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손으로 벌하는 일을 택했다면 제대로 책임을 지고 그 후에 두 소년이 어찌 되는지도 지켜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p. 59) 

   그런데 그 고백의 주체가 사라짐으로 인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보여주어야 할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이제 아이들 스스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거기에 응답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정답을 알려줄 사람이 사라지는 바람에 저마다 자기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꼴이랄까? 그렇게 2장 순교자에서 5장 신봉자까지, 미즈호 나오키 나오키의 엄마 그리고 와타나베는 자기 방식대로 거기에 응답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답하니 거기에 드러나는 건 온전히 자기의 모습 뿐이다. 마치 모리구치의 고백이 큐피트의 화살이 되어 나르시스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힌 것 같다. 그렇게 모리구치의 고백은 스스로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나르시스가 된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자기 속에 묶어두는 고백의 폭력이 완전히 거꾸로 작용해버린다. 모리구치의 고백으로 그들은 오히려 그들 내부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1장과 2장에서 5장은 그야말로 별개이다.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저 발단에 불과했을 뿐, 그들을 더욱 사로잡는 건 모리구치의 고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가진 문제일 뿐이다. 거기서 모리구치의 고백은 어떤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 더욱 더 매달리게 되는 계기 말이다. 마치 고백의 폭력적인 힘이 그들 스스로 문제를 감춰놓기 위해 씌워 놓았던 외피를 찢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고백의 폭력적인 힘으로 그들은 벌거벗듯이 노출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해부하고 그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끝내 찾게된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들이 끝내 찾게되는 본질을 살짝 종교의 외피를 씌워 각 장의 제목으로 붙여 놓았다. 각 장에서 그들 스스로 겪게 되는 결말은 어쩌면 그래서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까지 거침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완벽한 이 소설에서 '고백의 폭력성과 그 주체의 사라짐으로 인해 나타나는 역설적 고백의 힘'이나 말하고 있는 이 리뷰는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미스터리적 쾌감을 듬뿍 맛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 말하기엔 부족하다고 느껴졌으니까. 이 소설엔 '고백'이 개인에게 미치는 가능한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꽤 풍부한 여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나름 거기에 천착하며 이렇게 리뷰를 써 내려 왔지만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리뷰를 읽고 오히려 미나코 가나에의 '고백'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지나 말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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