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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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무려 7년이라니!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이 소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타인의 비극을 한낱 자신을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짜임새와 만듦새에 거장의 아우라가 물씬 느껴졌기에 얼른 다음 작품을 만나길 고대했는데 7년이 지나 이제야 나온 것이다.


 제목은 '빛의 현관'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된 소재는 '집'이다. 주인공인 아오세 미노루는 건축가다. 거품 경제 시절, 무척 잘나갔던 그는 흠모하던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예쁜 딸 하나까지 두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경제가 붕괴하자 그도 함께 몰락해 버렸다. 거기에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과거의 잔향 속에 매몰되어 자존심만 부린 탓에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현재 그는 혼자다. 그에겐 집이 없다. 

 한 곳에 언제나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아오세가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소망. 어릴 때도 그는 집이 없었다. 댐 건설을 위해 콘크리트 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댐 건설 현장을 찾아 떠돌아다녀야했다. 그런 아오세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자연과 새를 만나게 함으로써 머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없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것도 아오세 마음에 또아리 틀고 있는 강한 정주의 욕망을 허물진 못했다. 건축가가 된 것도, 아내 유카리와 완벽한 가정을 형성하고자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욕망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집이 허락되지 않았다. 저녁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 줄 '빛의 현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오세에게 유키노 가족이 의뢰해 온다.


 "전부 맡기겠습니다.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p. 12)라는 말과 함께.


 유카리가 바라던 집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던 아오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집을 만든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북향의 빛(노스라이트)으로 가족의 삶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집을. 이러한 아오세의 진심어린 노력이 통한 것일까?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북향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아 뛰어난 건축물을 소개하는 '200선'에 'Y주택('Y'는 아마도 요시노의 이니셜이리라)'이란 이름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 


 소설은 아오세가 다른 부부에게서 주택 설계 의뢰를 맡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부부가 아오세를 지명한 건, 'Y주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오세는 'Y주택'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곧 월셋집을 정리하고 이사할 것이라 말했던 요시노가 아예 단 하루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설계사무소의 소장이자 대학교 친구인 오카지마와 함께 시나노모이와케에 있는 그 집을 직접 찾아가봤지만 있는 건 오직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보이는 의자 하나 뿐이었다.


 이 사실은 아오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Y주택' 그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자기 소망의 구현이었고 유카리와 이루지 못한 집에 대한 대리 보상이었다. 천지 사방에 자기 몸 하나 깃들 곳 없는 그가 비록 타인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겨 놓은 둥지였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오아시스처럼, 그 집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외롭고 남루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그런데 그 집마저 버려졌다니. 이건 그에게 두 개의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유카리와의 집을 상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때 키웠던 구관조 '구로'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규타로를 대신해 사왔던 '구로'. 그 새도 어느날 둥지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도 구로를 찾으로 나갔다 목숨을 잃었다. 상실, 상실, 상실. 그렇게 그는 늘 놓치고 버려짐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으리라.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그래서 알아야했다. 요시노 가족이 왜  'Y주택'을 버렸는지를. 유랑과 상실만 반복하는 궤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이름에 우리가 기대하는 미스터리는 여기서 작동한다. 실마리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다. 


브루노 타우트(1880 ~ 1938)


 의자의 출처를 쫓다 브루노 타우트의 삶까지 알게된 아오세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 건축가를 피해왔다는 걸 자각한다. 히데오는 그 이유를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오세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건 브루노 타우트의 삶이 아오세의 것과 닮아있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했다. 그 뒤로도 계속 떠돌아다녔고 결국 타국에서 죽었다. 아오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타우트에겐 집이 없었다. 아오세가 그렇듯이.


 그러므로 히데오가 하필이면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를 가져와 아오세로 하여금 대면하게 한 것은 더이상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내 유카리와 그의 딸 히나코에 대한 것도. 자기가 놓아버린 모든 것들을.


 그는 내버려 두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용기가 없어 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했다. 자기가 나서서 자신만의 집을 직접 만들기 보다는 남의 집을 통해 대리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집을 가질 수 없었다. 달라져야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직시하고 거기 놓여 있는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뛰어들어야했다. 타우트의 의자는 그 출발을 위한 신호였다. 의자를 보고나서 아오세가 요시노를 추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의자라는 소품을 배치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 홀로 있는 의자란 무엇보다 묵상을 위한 장소가 아니던가.


 '빛의 현관'은 단적으로 집을 상실한 아오세가 다시 그 현관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시노 일가의 실종 미스터리는 그 귀환의 주된 안내자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물음이란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는가?'로 이건 태도와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집이란 진정 무엇인가?'로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태도에 대해선 이미 말했다. 바로 직시(直示)요 돌입(突入)이다. 아오세가 자기 발로 직접 뛰며 요시노 일가의 미스터리를 뒤쫓는 것 자체에 이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누군가에 기대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손과 발로 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데오가 아오세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아오세가 오카지마와 더불어 'Y주택'을 찾아갔을 때처럼 누군가와 같이 그 일을 했을 때는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걸 얻을 수 있었을 때는 오직 혼자 했을 때였다. 


 '빛의 현관'은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홀로 자기 손으로 직접 열어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집이란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로 여기기 쉽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집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관건인 문제로 말이다. 그러나 히데오는 소설을 통해 분명하게 말한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히데오는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길잡이로 초대한다. 그것이 바로 오카지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요시노 일가 못지 않게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는 까닭은 아오세가 실존했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를 매개로 요시노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오카지마에 대해서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를 매개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게끔 히데오가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세가 요시노의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타우트의 의자를 통하여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오세가 오카지마라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공모전 출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후지미야 하루코 기념관의 스케치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였다.


 오카지마가 그토록 공모전에 힘을 쓴 것은 아오세처럼 자기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집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도 아오세와 똑같았다. 그 역시 집이라는 둥지가 없는 자였던 것이다. 아오세는 현재의 오카지마가 잘난 척하기 바쁘고 허세나 곧잘 부리던 과거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다는 걸 알고 놀란다. 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알게 되는데, 그 또한 가족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오세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어딘가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집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이렇게 다소 모호하게 쓴 것은 여기와 연관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이니 양해해주시길.)


 바로 이 오카지마의 선택에 소설의 주제가 나타나 있다.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한 히데오의 대답이 말이다. 어쩌면 브루노 타우트와 후지미야 하루코가 가지는 공통점에서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둘 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살았지만 그 타향 또한 얼마든지 집이라 여기고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 이들이었으니까. 이처럼 타우트와 하루코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이와 관련하여 요코야마 히데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작 '64'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거주 보다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 그런지 우리는 종종 집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곤 한다. 그냥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을. 집은 삶의 현장이고 그 속에서 오랜 시간 어우러지며 영글어지는 경험의 총체(總體)다. 


 예전에 아주 유명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선 등장인물이 사는 방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의 방에 들어가는 건 곧 그라는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히데오가 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집이란 곧 사는 사람의 존재인 것이다. 오카지마의 기념관 구상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화가 유족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기념관에 찾아온 관객들이 그 방문을 통해 하루코라는 존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오세 역시 'Y주택'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거기에 북향 깊이 스며든 아버지와의 추억과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타우트는 머나 먼 일본에서 애초에 자신이 건축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을 평범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함으로써 마음을 이어나갔고 하루코는 세상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해 몇 백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누구보다 크고 굳건한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집은 그런 마음들에서 비로소 존재했다. 오직 그런 마음의 터전 위에서라야 진정한 집은 온전히 건축될 수 있었다. '빛의 현관'에서 뻗어나오는 들어오는 이를 소중히 감싸는 따스한 빛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의 열기였다.


 집을 그저 집이라는 기호로 보는 이에겐 집은 결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를 위한 마음으로 집을 지으려는 이에게만 집은 기꺼이 자신의 두 팔을 벌렸다. 이는 전작 '64'에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진짜 비극은 서로 타인의 삶을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 단순한 기호로만 봤던 것에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64' P. 566)


 놀랍게도 이러한 기자들의 행태는 '빛의 현관'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오카지마를 파국으로 내몬 신문 기자의 모습이 그러한데, 오카지마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예단을 정당화 하는 정보만 취사 선택한다는 점이 이와 똑같다. '빛의 현관'엔 사물을 그저 기호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타우드와 하루코는 물론이고 기념관을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하루코라는 존재 자체라고 보았던 오카지마도 그렇고 북향의 빛을 그저 기호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으로 여겼던 아오세도 그렇고 구관조 '구로'를 한낱 기호로써의 새가 아니라 아오세라고 여겼던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곧 삶이요,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아오세는 새로운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롯이 헤아릴 수 있도록.

  '고객님 가족만을 위한 집을 지읍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p. 471)


 이처럼 '빛의 현관'은 '64'에서 경찰 조직을 가지고 보다 방대한 규모로 세공했던 주제를 '집'이라는 존재로 보다 한정해선 더 집중시키고 또한 '집'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곳보다 살아가는 존재를 더 깊이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인만큼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왜 '64'에서도 그렇고 '빛의 현관'에서도 그렇고 타자를 헤아린다는 것에 대하여 천착하는 것일까? 역시나 그건 '원전 사태'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소설에서 버려진 'Y주택'을 보고 떠올렸던 것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원전 사태 이후 후쿠시마에 버려진 집들이었다. 


[원전 사태 4년 후의 후쿠시마 풍경 중에서]


 어쩌면 히데오도 같은 풍경을 보고서 이런 집에 빛을 다시 가져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빛의 현관'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아오세가 거품 경제의 붕괴로 모든 걸 잃어버렸던 것도 '원전 사태' 재난의 비유로 보인다. 이러한 현재의 아오세들에게 소설은 전하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마지막 문장이 둥지를 지을 재료를 입에 꼭 물고 날아가는 제비를 묘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방법으론 그럴 수 없다. 거품 경제 시절에 아오세와 오카지마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삶을 그저 이윤과 교환 가능한 단순한 기호로 보는 한은 말이다. 집의 진정한 부활은 오직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귀 기울여 깊이 듣고 헤아릴 때 도래한다. '빛의 현관'은 이 교훈을 독자의 마음에 차분하면서도 세심하게 각인시키는 여정이다.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고양이 털처럼 뺨에 비비고 싶은 현관의 빛은 무작정 남에게서 받으려 할 때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주려할 때 생성된다는 걸.


 봄의 따스함을 절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영하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처지라 그런지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말이다. 시린 손을 홀로 아무리 비벼봤자 온기는 조금도 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을 보듬고 애정으로 감싸줄 때라야 온기는 비로소 찾아온다. 밤늦게 찾아올지도 모를 객손을 위해 계속 현관의 등을 켜두는 것과도 같이 그런 온기를 먼저 나서서 나눠주는 손이 세상에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덧붙여, '빛의 현관'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작인 '64'와 주제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같이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7년 전에 쓴 '64'에 대한 리뷰를 여기에 링크해 본다.


https://blog.aladin.co.kr/748481184/644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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