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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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리버스(Reverse)'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있다. 바로 주인공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는 데뷔작 '고백' 이후로 계속 여성이 주인공을 맡도록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젊은 남성이다. 이름은 후카세. 삶이라는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원하지 않았던 직장에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다만 무채색의 존재가 되어 조용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 그의 일상에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로 커피. 후카세는 로스팅 된 원두를 구입하여 직접 내려 마시는 것을 선호하고 더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양면으로 펼쳐야 그 매력이 잘 살아나는 것 같아서 펼쳐서 찍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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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표지 역시 커피를 메인으로 했다.

단 제목이 뒤집다는 뜻의 'Reverse'이므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커피잔을 뒤집어 놓았다. 



일본은 커피 원두의 이미지로 표지를 만들었다.

이 표지 역시 양면 디자인이다. 뒷표지는 원두로 꽉 차 있다.

일본 표지의 원두를 갈아 우리나라 표지의 커피가 된 것 같은 느낌^^.


 늘 수동적으로 끌려 가기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커피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그것도 능동적으로 구축하는 영토다. 커피가 없다면 물처럼 투명하기만 했을 그의 삶. 그러나 커피를 통해 후카세의 삶은 진한 깊이를 얻는다. 또한 커피는 후카세와 세계를 이어주는 접점이기도 하다.


시시한 특기인 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그가 있을 자리가 존재한다. (p. 25)


 커피는 소외당하기 쉬운 후카세를 직장 동료와 이어주고, 원두를 사기 위해 들르는 가게 '클로버 커피'를 통해 이웃 사람과 이어준다. 그리고 사랑도. 태어나서 여자 사람과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던 후카세는 커피 덕분에 드디어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서히 달아 올랐던 연애의 온도는 결국 결혼의 수위에 오르고, 늘 다른 사람의 사무 기기는 잘 수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인생은 잘 수리하지 못하는 것 같았던 후카세는 마침내 자신의 인생 또한 완벽하게 수리되는 기분을 맛본다. 하지만 삶은, 늘 그렇듯이 반전을 준비해두고 있었으니.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찾아간 연인 미호코에서 그는 그녀가 내미는 한 장의 편지를 보게 된다. 익명으로 미호코 앞으로 보내진 것이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p.55)


 그러자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3년 전의 사고. 그 때, 후카세가 단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히로사와가 죽었다. 대학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던 친구 다섯 명이 떠난 여행에서, 늦게 도착한 친구를 차를 몰고 데리러 가다 그만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단순 사고사로 결론났지만, 그건 후카세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들이 중대한 비밀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바로 히로사와가 술을 마셨다는 것. 그들은 같이 술을 마셨고, 히로사와가 취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차를 운전해서 가도록 떠밀었던 것이다. 쓰라린 죄책과 후회는 비밀을 저 깊은 곳에 감추도록 했다. 그러다 어느덧 묵은 과거가 되고 잘도 태연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후카세는.


 그러나 자신은 잊었어도, 과거는 잊지 않는다. 과거는 포기를 모르는 술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잡히게 된다. 후카세는 잡혔다. 그 편지로 그는 대번에 과거로 소환되었다. 그만이 아니다. 그 때 같이 갔었던 친구들마저 모두 소환된다. 선생님이 된 아사미는 자신의 자동차 유리창에 살인자란 종이가 붙여졌고, 무라이는 현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선거 사무실 유리창에 붙여졌다. 그리고 다니히라는 지하철 역 플랫폼에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려 선로 위로 추락한다. 친구들은 급히 모임을 가진다. 그들은 생각한다. 이 모든 사건은 히로사와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누군가의 복수가 아닐까?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사건을 통해 히로사와에 대해 정작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카세는 이번 일을 계기로 히로사와의 삶도 잘 알고 사건의 장본인도 찾으려는 생각에 자청하여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반전의 반전.('도로시 세이어스'의 '의혹'처럼 소설의 마지막 한 줄에 결정적인 반전이 펼쳐지는데, 놀랍다. 오랜만에 '고백' 시절의 미나토 가나에가 생각났다.)


 '리버스'까지 이르는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다시 리버스 하다 보면, 두 번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리버스'다. '경우'에선 입장이 변했다. 그 전까지는 부모의 입장에서 말을 했는데, '경우'에선 자식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식이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전회한 것이다. '리버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했다. '경우'는 주제나 분위기에 있어 작품 세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기에 중후한 계기로 생각되지만, '리버스'는 아직 판단 유보다. 이것이 '경우'만큼 중후한 변화인지 아니면 단순 변모인 지는 아무래도 후속작이 더 나와봐야 알 것 같다. '경우'도 후속작들이 보여준 일련의 공통된 특징 때문에 그것이 커다란 변화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의 비극은 단순히 뚜껑을 덮는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부패가 심해지고 악취가 퍼져 뚜껑마저 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똑같이 과거의 비극이라는 억센 손아귀는 언제든 우리를 움켜쥘 수 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 지연시킬수록 남는 것은 더 큰 상처와 후회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시와 성찰만이 온전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리버스'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소설인데, 그래서 아무래도 3. 11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 최근 유투브로 후쿠시마의 현재 모습을 본 적 있다. 문자 그대로 유령 도시가 되어 있었다. 3. 11 이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가득한 방사능과 함께 고요히 가라앉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차들의 대열이 높게 자라난 수풀에 침식되어 가듯, 그렇게. 그것은 다만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구역일 뿐이었고, 버려진 땅이었다. 아베 정부는 아마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일본 땅에서 도려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나토 가나에가 그리는 후카세는 어쩐지 지금의 후쿠시마와 많이 닮았다. 정작 고쳐야 할 것은 자신인데, 다른 것만 고치는 후카세나 정말 서둘러 치유의 노력을 해야 할 곳은 후쿠시마처럼 일본 내부에 있는데 외부 침략이 가능한 군대로 만드는 것에만 혈안인 일본 정부나 판박이처럼 보인다. 특히나 이런 부분은...


 "사람 좋은 히로사와가 나하고 똑같은 위치에 서주었던 것 뿐이야. 히로사와하고 함께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래 높은 곳에 있던 녀석을 그 호의를 이용해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던 것 뿐이야. 주위 녀석들은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데 나 혼자만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p. 253)


 대놓고 미국에 알랑방귀 끼기에 바쁜 일본 정부를 디스(diss)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부의 고통과 불안은 못본 체 하고, 강한 자에게 영합 해서라도 한사코 외부로 자신을 부풀리기에만 힘쓰는 일본 정부를 꼬집으며 '근거 없는 과대망상은 집어치워!'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말로 미나토 가나에는 후카세를 일본 정부의 은유로 만든 것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으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후카세에게 줘 버린 것은 아닐 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식간에 읽힌다. 정말 가독성만큼은 뛰어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미나토 가나에가 방한했을 때, 독자와의 대화에 나도 참석했는데, 미나토 가나에는 자기가 쓴 문장을 꼭 입으로 발음해 본다고 한다. 한달음에 잘 읽어지는 지 검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읽혀지지 않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문장을 고쳐 쓴다고 한다. 가독성의 뛰어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웠다. 미스터리한 맛도 잘 살아 있고 작심하고 준비한 반전도 성공적이라 꽤 읽을만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3기의 시작인지, 아니면 그저 2기의 단순한 변화인지 궁금한데 그래서 더욱 '리버스'와 같이 나와 그 해 최고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작품에게 준다는 야마모토슈고로상까지 받은 '유토피아'가 너무나 읽어보고 싶어진다. 듣기에 한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쓴 작품이라고 하던데, 그 지방이 혹시 후쿠시마의 은유는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3기는 현대 일본 정치에 대한 본격적인 발언인 것일까?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유토피아'를 만날 때까지 답은 미뤄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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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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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고 작가라 생각하는 하라 료가 돌아왔다. 이번엔 단편집이다. '천사들의 탐정'은 하라 료의 유일한 단편집이다. 아직도 그의 대표작(유일작이기도 하다.)인 사와자키 시리즈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당장 만나볼 것을 권해드린다. 과작으로 유명한 그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로 88년에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이 단편집을 포함하여 네 권의 장편 밖에 없다. 장편은 그 중, 2004년에 나온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를 제외하고 세 작품 모두가 발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죽인 소녀'를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나 '안녕 긴 잠이여' 어느 것을 읽어도 좋다. 시대를 까맣게 물들인 부조리와 비윤리적인 어둠에 상처받고 비틀거린 적이 있다면 다들 하나같이 쓰라린 당신의 영혼을 가만히 다독여 줄 테니까. 당신이 마주하는 지옥 앞에서, 당신 곁에 서서 같이 지켜봐줄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사립탐정 사와자키다.



 제목에 '천사들'이 들어간 이유는 도합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이 단편집에서 아픔을 겪고 비극을 당하는 자들이 모두 십대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의 어둠에 덜 물들었기에 천사인 것이다. 어둠에 덜 물들인만큼 그들은 이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에 구원의 변화를 가져올 미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단편에서 사와자키가 목도하는 것은 그런 천사들의 날개조차 꺾여버렸다는 것 뿐이다. 비정한 어른들의 시대는 그들마저 삼켜버려 결국 비내리는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무수한 깃털의 잔해로 둘러싸인 가운데 부러진 날개를 껴안고 신음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현장들을 관통하면서 사와자키는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분명하게 확인한다. 천사와 같은 아이들을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간 어른들의 무책임을.


 열여섯 살 소녀 가수가 자살하고, 열아홉 살 매니저는 공갈미수에 그쳤지만 스무 살 언저리의 소년 가수들은 대마초 파티에 어울렸다가 체포되었다. 그 일로 크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주변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흥미가 없는 듯했다. 애초에 의뢰인이 있어서 조사에 나섰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쌀쌀했던 날 밤에 잘못 전화를 걸어왔던 소녀는 결코 자살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는 내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던 셈이지만, 그런 건 자랑이 될 수 없었다.(p. 208)


 단편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면 단편의 세계가 지금 우리의 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리라. 단적으로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가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진실조차 어른들의 방관과 협잡 속에 규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OECD 국가 중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나라이고 연애과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를 넘어 이제는 집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는 '오포세대'란 말이 공공연한 유행어가 되고 있는 나라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뜯어고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어른들로 가득한 시대. 정녕 아이들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천사들의 탐정'은 90년에 나왔다. 일본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의 끝자락. 끝없는 탐욕으로 부풀대로 부풀어진 거품 안에서 그 과실에만 흥청망청 취하느라 그만 입혀버린 상처들, 낳아버린 아픔들이 차츰 드러나던 시기. 바로 그 때, '날개 잃은 천사들에게'란 작가의 말과 함께 '천사들의 탐정'은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어른들이 몰랐던,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감추려 했었던 아이들의 현재를 재현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들, 버림받고 잊혀진 아이들, 어른들의 부정을 직시하고 있는 아이들, 죽고 싶을 정도로 강한 절망을 느끼지만 호소할 때가 어디에도 없는 아이들, 멋대로 규정되어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욕심으로 희생된 아이들. 사와자키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지금 당신들의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은 돈이 아니라 바로 이 아이들이 아니냐며 외친다. 그는 의뢰를 완수한 것의 대가로 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진실과 어른다운 책임을 원했으나 어른들은 오로지 사와자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입힌 상처를 봉인하고 망각하려고만 들었다. 그러므로 사와자키가 단편들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돈에 대한 거절은 그대로 '아이들의 아픔은 이런 것으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 오로지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고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다할 때라야 치유가 가능하다'는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탐정은 언제나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다. 그가 추구하는 사건의 진실은 내부에서는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고 오직 바깥으로 나가 내부를 다시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탐정이 행하는 수사가 다양한 타인들을 통한 탐문으로 이뤄지는 것은 그렇게 계속 타자들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벽을 허물어 자신의 바깥으로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은 경계 위에 제대로 섰을 때, 문득 발견된다. 특히나 하드보일드 탐정은 현상된 비극 앞에서 사회의 책임을 추적하는 자이므로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와자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가 서야 할 경계가 하나 더 존재한다. 바로 어른과 아이의 경계이다. 그 경계에서 사와자키는 야누스적인 면모를 취한다. 어른들에겐 비난과 책임을 통감하라는 호소의 얼굴을, 아이들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처음 나오는 '소년이 본 남자'부터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털어 자신과 무관한 여자를 구해달라며 사와자키에게 의뢰해 온다. '자식을 잃은 남자'에선 비록 자신의 출생 사실조차 모르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자식이 불행한 사고를 당한 현장에 추모의 꽃다발을 놓는다.


 나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 뒤 주차장 쪽 도로로 향했다. 오가는 차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에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아버지를 대신해 흰 장미 한 송이를 길에 던졌다. 그 때 길 건너편 보도 끄트머리에 놓인 옅은 색의 예쁜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가 어린 여동생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꽃다발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p. 108)


 꽤나 쿨한 결말이지만 '자식을 잃은 남자'을 읽으면 꽤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자식을 잃은 남자'는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어 더 인상 깊게 다가오는데, 너무나 커다란 것에 눈이 현혹된 나머지 그만 정말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놓쳐버린 어른과 오히려 그런 어른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아이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작품으로, '천사들의 탐정'이 추구하는 바가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다. 이는 '선택받은 남자'와 더불어 하라 료가 '천사들의 탐정'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진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개의 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선택받은 남자'는 마지막에 나오는 단편으로, 책임을 다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사나기'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구원으로써의 미래는 바로 그럴 때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한 작가의 소설은 사회를 향한 그의 기도라고 말한 바 있다. '천사들의 탐정'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고통과 절망만 그려졌다면 이렇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그만큼이나 희망의 면모마저 누벼 놓았기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기도는 희망을 의탁하고픈 마음의 발현이니까. 하지만 일본은 이 간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하여 마치 저주처럼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결코 그 때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세월호 참사와 최근 일어난 강남역 묻지마 살인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 도어 수리 기사 사망 사건.

세 사건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을 참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강남역에 붙은 누군가의 추모 포스트잇에 쓰여진 것처럼 다만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뿐이었다는 것을.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극의 연쇄를 끊을,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단순 사고라고, 한 정신병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치부하거나 작업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라고 오히려 희생자를 공격하기 바쁘다. 교훈을 얻기 위한 성찰은 생계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우연하게 발생한 아주 특수한 사건으로만 몰아가 망각의 주문을 스스로 건다. 지옥에서조차 혀만 꼬챙이에 꾀고 있는 사람은 불길 가득한 탕에서 온몸이 구워지는 사람을 보며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하면서 안심한다고 한다. 바로 다음 차례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지옥은 청맹과니의 세상이다. 자기 몸으로 닥쳐오지 않으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렇게나 징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도 아직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심히 넘기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보자면 지옥은 다른 게 아니라 수월하게 살기엔 좋은 방관과 망각 자체가 개방시키는 것 같다.


 그런 때에, 하드보일드는 방관과 망각의 봉인을 뜯는다. 봉인으로 꼭꼭 감춰졌던 타인의 비극을 출현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립탐정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와 비슷하다. 무엇이 진정한 과오인지 모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성 세대의 가치관으로 게토가 되어버린 중심지를 떠나 스스로 변방에서 유랑을 자처하며 무시되고 망각된 아픔을 나열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라고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대가 가장 어려울 때, 하드보일드가 출몰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시다시피 하드보일드가 출현한 원점은 대공황 때였다.


 비록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장소도 틀리지만, 나타나게 된 상황은 결코 차이가 나지 않기에, '천사들의 탐정'에 나타난 사와자키의 여정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가 지옥이라는 것은 그만큼 괴물 되는 것이 쉽다는 것으로도 증명되는 것 같다.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갑질을 목격한다. 그 때 갑질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괴물처럼 보인다. 최근엔 문학 판사라며 재직 시절 꽤나 명망 높았던 판사가 변호사가 되자마자 돈의 유혹에 굴복해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 사건도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범죄를 가리려 한 행동은 과연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열했다. 그녀도 괴물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두 개의 위험에 노출된 것 같다. 하나는 언제든 무고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 다른 하나는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위험. 그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생각해 보면 하나로 모인다. 타인의 처지와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자들이 괴물이 되니까. 결국 타인의 처지와 아픔을 내 것처럼 여기고 그것에 대해 꾸준히 성찰하는 것만큼 두 개의 위험을 피할 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하드보일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력하나마.


 소설의 리뷰를 이렇게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소설에 대해서만 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우리시대엔 보고 기억해야 할 타인의 아픔이 정말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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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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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름이 진정한 정체성을 뜻한다면 그녀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나비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감추려 한다.

 사카즈키 조코란 이름을 감추려 하고 긴 앞머리에 둥근 안경이라는 순정만화 속 안경녀의 모습으로 미모를 감춘다. 왠지 필사적이란 느낌도 드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과거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역 배우였던 자신을 숨기고 싶은 탓이다. 배우로 한창 잘 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했고  아직까지도 진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역으로서의 역할은 끝났고, 여배우에 미련은 없었으며, 가업을 이을 생각도 없는 지금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 자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내지 못한 채였다.(p. 19)


[ 표지에 홀로 있는 안경  쓴 소녀가 바로 주인공 조코다.]


 그랬던 그녀가 재수까지 해서 굳이 도야마 대학에 들어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얼른 결혼해서 주조장 일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유서 깊은 추리 동호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리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로 본격 미스터리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를 그녀는 로직(logic)에 취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직에 대한 갈망은 진짜 자신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미스터리에서 로직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미리 자리잡고 있다가 탐정의 추리로 비로소 발견된다. 그렇게 조코도 진짜 자신을 언제 어디서 찾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그녀의 생각 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추리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계획조차 어긋났다. 취리를 추리로 잘못보는 바람에 그만 술만 주구장창 마셔대는 취리 동호회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취리는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뜻이다. 명료한 로직을 원했던 그녀는 이제 혼미와 무념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추리와 취리.

 여기서 작가 모리 아키마로가 이 소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드러난다.


 일단 소설의 처음. 조코는 이렇게 고백한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불명확함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있는 자유를 끌어안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영혼.(p. 9)


 추리는 터널의 바깥을 의미한다.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밝은 빛. 그건 자신이 찾아야 할 진짜 자아였고 그렇게 청춘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로직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취리는 전혀 다른 진리를 설파한다. 삶에 그런 로직은 없다는 것이다.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말은 정체성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뛰어든 경험 속에서 조성되는 것을 뜻한다. 모리 아키마로가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보낸 것은 그러니까 이런 말을 독자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조코처럼 스스로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너무 걱정은 마.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걸음들이 다 진짜 너니까. 넌 이미 너로서 완전해. 너무 불안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다섯 개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정돈된 이 소설은 조코가 바로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깨달음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그 대상이 되고 그녀를 거기로 데려가는 멘토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미키지마다. 그녀보다 두 학년 선배로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3년째 1학년이며 강의실보다 취리 동호회 아지트에서 숙취에 찌든 모습으로 더 많이 발견된다. 어디에 확실히 안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조코와 처지가 별 반 다를 바 없으나 미키지마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자신이 취해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깨어 있을 때는 착실하게 자신의 꿈을 쫓는다. 미키지마는 한 마디로 이 소설에 투영된 모리 아키마로의 주제를 형상화한 모델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코와 연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 맛좋은 사케를 들이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잔한데 사이사이 숨어 있는 경구와 같은 문장이 안주로 두툼한 참치회를 먹는 것처럼 담백하여 끝까지 흥취를 돋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보다는 마주 다가오는 삶에 무작정 부딪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취리에 전염되는 것이다. 그것도 짧게. 하기사 삶도 취하기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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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6-04-17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빼는 것은 아무리 주제를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마키지마가 너무 맨스플레인을 하기 때문이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조코가 미키지마 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또는 소설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커플로 나올 때 흔히 보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는 과장되게 이상화 되어 있고 여성은 거기에 비례하여 수동적이다. 같은 경우 미국 드라마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셜록이나 엑스파일처럼 꼭 어딘가 부족한 점을 강조해 여성 캐릭터와 균형을 맞춘다. 일본과 미국의 이 차이는 어디에서 근본적으로 비롯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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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는 투명한가? 진정 글은 독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마치 나신처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읽으면서 우리는 책에서 진실을 투명하게 길어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오로지 우리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나카마치 신의 ‘모방 살의는 먼저 그런 의문을 막 쪄낸 만두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무럭무럭 가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71년에 나온 것이었다. 무려 44년 전의 작품! 하지만 세월의 격차가 줄 수 있는 낡은 느낌은 병따개로 따는 사이다 병 말고는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갓 나온 신작만큼이나 책은 따끈따근했고 그랬기에 막 배어 문 앙꼬의 뜨거움처럼 입을 호들갑 떨게 만드는 여운도 상당했다. 과연 어떤 작품이기에 이런 말을 하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하여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7월 7일, 오후 7시. 한 남자가 3층 자신의 방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름은 사카이 마사오. 떨어질 때 이미 청산가리를 마신 상태였다. 방에 있는 뚜껑이 개봉된 사이다 병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되었다. 사카이 마사오는 사이다를 컵에 따라 마신 뒤에 청산가리로 괴로워하다 그만 창문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었다. 당시 방은 밀실이었다. 유일하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쇠는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건물 관리인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가 직접 자신의 지갑 속에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열쇠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입의 흔적은 없었고 범인에게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카이 마사오란 남자는 원래 추리 작가로 신인상까지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그 뒤 오래도록 두 번째 작품을 쓸 수 없어서 엄청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겨우 작품을 완성하고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것이 그만 바로 얼마 전에 작고한 명망 있는 작가 세가와 고타로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경찰은 그런 정황에 힘입어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과연 자살일까?’ 의혹을 품는다.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의 연인, 나카다 아키코. 다른 하나는 동료 작가, 쓰쿠미 신스케다.


 나카다 아키코는 출판사 편집자로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다는 세가와 고타로의 딸이기도 하지만 표절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혹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른 데 있었다. 그건 두 가지다. 하나는 예전에 사카이 마사오 집에서 우연히 만난 도가노 리쓰코란 여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300만엔이나 되는 큰 돈을 받기로 되어 있다'라던 사카이 마사오의 말이다. 리쓰코를 처음 보았던 날, 아키코는 그녀가 마사오에게 거금 50만엔을 준 것을 알았다. 분명 300만엔도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한 아키코는 마사오의 죽음이 그 돈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리쓰코를 추적한다. 그러다 리쓰코의 언니 마사코의 아이가 유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아키코는 리쓰코와 마사오가 같이 그 아이를 몸값을 목적으로 유괴한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마사오는 아직 300만엔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리쓰코가 몸값을 가로챌 목적으로 살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으로 아키코는 리쓰코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세밀히 파헤친다. 하지만 드러난 그녀의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철벽이다. 과연 리쓰코는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한편 쓰쿠미 신스케는 전혀 다른 용의자를 가지고 있다. 바로 계속해서 사카이 마사오의 원고를 거절해 온 부편집장 야나기사와란 남자다. 즉 사카이 마사오에게 작가의 절망을 한껏 가져다 준 장본인인 것이다. 하지만 신스케가 그 사실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은 야나기사와의 여동생이 사카이 마사오 때문에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시작이었다. 원고 거절은 거기에 대한 야나기사와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신스케는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표절 사건이 터졌다. 표절한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이 실렸던 잡지는 마침 야나기사와가 일하는 출판사의 것이었다. 표절한 작품을 미리 걸러내지 못하고 잡지에 게재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편집장은 사퇴하고 대신 야나기사와가 편집장이 된다. 편집장은 야나기사와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비로소 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야나기사와는 세가와 고타로의 열혈 팬이었다. 신스케는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던 세가와 고타로의 단편을 절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게재되도록 방치한 것은 야나기사와에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나는 표절이 드러나 사카이 마사오의 작가로서의 경력이 완전히 끝장나 복수를 완성하는 것.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염원인 편집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두 가지 목적을 야나기사와는 훌륭히 완수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사카이 마사오가 아니라 거꾸로 세가와 고타로가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을 표절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야나기사와의 모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입막음을 위해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의혹으로 신스케는 야나기사와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조사한다. 그러나 야나기사와의 알리바이 역시 리쓰코 만큼이나 빈틈이 없다. 과연 야나기사와도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모방 살의’엔 두 명의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과 두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두 명의 탐정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로 각자 찾아낸 단서를 가지고 자신만의 용의자를 쫓는다. 그런데 탐정들만큼이나 용의자들 또한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다. 설령 탐정들의 생각대로 사카이 마사오가 살해된 것이라라 해도 공범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이 둘 중에 누가 진짜 범인일까? 과연 어떤 탐정이 진범을 쫓고 있는 것일까? 탐정인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 이 둘의 입장에서 서로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런 아주 흥미로운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다 비슷한 시점에서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가 똑같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알리바이의 중대한 허점을 찾아냈을 때는 ‘와우! 이거 정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생각에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읽다보면 ‘제4부 진상’에서 일본 지진관측사상 최대이며 한신과 고베 대지진을 일으켰던 진도 7.2의 지진이 바로 나의 뇌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어왔던가' 하는 자문을 시작으로 이 글 처음에 적어놓았던 숱한 의문들이 여진처럼 덮쳐오면서 그것의 파고에 떠밀리듯 손이 저절로 앞장을 다시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스터리 장르 중에 이런 일을 꼭 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 맞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이 그랬고, '미로관의 살인'도 그랬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시리즈'는? 모두 결말에서 세차게 뒤통수를 맞고선 얼얼한 뇌리를 달래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작품 전체를 복기하게 되지 않았던가! '모방 살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서술 트릭이 존재하는 것이다. 책의 뒷 표지에 아예 '서술 트릭의 시작'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이 정도는 밝혀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추리 소설사에서 서술 트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술 트릭의 대표작 대부분이 87년 이후로 나온 것을 보면('십각관의 살인'은 87년, '살육에 이르는 병'은 92년, '도착 시리즈'를 여는 '도착의 론도'는 89년에 나왔다) 71년에 나온 '모방 살의'를 그 시작이라고 불러도 그렇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서술 트릭이 일본 추리 소설에 있어서  실은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초창기 형태를 '모방 살의'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 소설이 44년의 시간을 넘어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2012년에 대형 서점인 '분쿄도'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복간 희망 도서'로 선정된 후, 불과 반 년만에 무려 34만부나 판매된 까닭이 컸을 터인 데 거기엔 분명 이러한 역사적 의의도 단단히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술 트릭만으로 이 작품의 평가를 퉁치는 건 지극히 곤란하다. 줄거리 소개에서 밝혔듯이 여기엔 밀실 트릭알리바이의 허점 찾기 그리고 용의자 한정 하기 등,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 또한 농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난 뒤에 '모방 살의'라는 제목에서 엘러리 퀸의 대표작인 'Y의 비극'의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본격 미스터리에도 충실하며 사실 서술 트릭은 이 소설을 재밌게 만들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때문에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서술 트릭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니 단기간내에 34만부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도 이룰 수 있었으리라.



  4부인 진상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엘러리 퀸의 '독자에의 도전'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서술트릭만 생각했다면 여기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도 모른다. 서술 트릭은 무엇보다 덫 안에 놓인 치즈처럼 독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거나 혼동하게 하여 얼마나 독자 스스로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하여 오류를 일으키도록 유인할 수 있느냐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유인이 성공적일수록 충격은 더 크고 그만큼 트릭은 굉장해진다. 그러니 파편화된 진술과 모호한 서술은 서술 트릭의 동맥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독자들이 온전하지 않은 문장들로 뭔가 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공정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방 살의'도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재독해 보면 작가가 곳곳에 단서를 놓아두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아키코가 리쓰코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내놓았던 사진의 트릭을 푸는 순간 보았던 것은 가장 핵심적인 단서라 작가가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작가는 공정하게 플레이하고 있다. 그러니 저 사진처럼 거리낌없이 독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미스터리 해결 자체에만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말이다. 크흑! (앞서 떠올렸던 의문에 대해서도 나름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 때문에 책이 가진 순수한 재미가 왜곡될까봐 그만두련다. 이 책은 온전히 읽는 재미로만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본디 '문신 살인사건'의 다카기 아키미쓰처럼 순수한 애호가에서 자신이 정말 읽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 추리 소설 작가까지 된 이들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 이들의 작품은 아무래도 '작가로서의 의욕'이라는 창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독자로서 느끼는 재미'라는 수용자의 입장에 바탕을 두고 쓴다는 것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나카마치 신도 여기에 속했다. 그 역시 추리 소설에 대한 순수 애호가에서 작가가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원래 교과서 회사에 다니던 작가는 ‘쥐꼬리만한 월급과 상사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는 ‘실업 급여와 하루 600엔의 택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생활을 반 년 정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지만 영혼만큼은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 때, 그는 추리 소설의 세계를 무한정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매력에 너무나 푹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직접 추리 소설을 써 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신인 추리 소설 작가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상’에까지 투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방 살의’의 모태가 되는 단편인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였다.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정작 수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그 단편을 바탕으로 장편을 탈고했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난 '모방 살의'였다.


 실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스터리 세계에 눈을 뜨고 작가까지 되었다는 점에서 다카기 아키미쓰와 많이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문신 살인사건'에서 느꼈던 '애호가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똑같이 '모방 살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작가 개인에게 여러모로 정이 많이 가고 다음 작품이 많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의 서술 트릭이 한층 더 정교해졌다는 평을 받는 '천계 살의'가 재빨리 출간되었다. 이 책은 '모방 살의'가 나온 지 9년 후에 출간된 작품이다. 그동안 그가 또 얼마나 진화했을 지 궁금하다. 얼른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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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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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 살인죄의 공소시효 적용을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1999년 대구에서 일어난 6살 아동의 목숨을 빼앗은 황산 테러는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고 현재 공소시효가 다가오자 살인죄만큼은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 책임을 묻게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법안이 '태완이법'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이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이라도 25년만 지나면 공소시효로 검찰은 더이상 그 범죄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지 못한다. 일본도 살인죄는 우리나라와 똑같이 25년이다.


 일본도 있고 우리나라도 있으니까 얼른 공소시효라는 게 세계 보편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살인죄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는 없는 나라가 더 많다. 미국도 없고, 영국도 없으며 우리나라와 일본 법제의 근본이 되는 독일도 없다. 미국 드라마 중에 '콜드 케이스'라는 것이 있다. 장기간에 걸쳐 미해결로 남은 사건을 콜드 케이스라고 부른다. 그 기간이라는게 보통 수십년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공소시호에 걸렸을 사건들이다. 일본 드라마에도 오다기리 죠가 주연한 '시효 경찰'이란 게 있었다. 거기서 오다기리 죠는 경찰인데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시효가 만료된 범죄를 조사한다. 결국 진범을 찾아내더라도 오다기리 죠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가서 제발 진실을 알려달라고 멋적게 부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콜드 케이스'에선 그렇지 않다.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범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모두 '철컹철컹'이다. 미국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묵힐대로 묵힌 범죄라도 진실이 드러나면 모조리 처벌 받는다. 유가족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불합리한 것이 공소시효다. 살인으로 가족이나 연인 혹은 지인을 잃은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그 아픔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가 시간의 경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죄를 사해 버린다? 납득될리 만무하다.


 도대체 왜 공소시효라는 게 있는 걸까?

 형사소송법에선 그 이유를 대략 두 세가지 든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다. 장기간 미제 사건의 경우 범죄를 입증할만한 증거 찾기가 곤란하므로 수사에 드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범인도 그동안 추적을 피하느라 형벌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니 그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을만큼 받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국가가 태만하여 범인을 못 잡았는데 그 책임을 범죄자에게 가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국가가 유가족에게 얼마나 냉정한 지 잘 알 수 있다. 피해자가 당한 아픔은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는 소요되는 비용을 따진다. 증거 능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만 미드 CSI만 봐도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증거를 찾아내는 수사 과학 기술들이 발전하는 걸 잘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증거의 상쇄는 얼마든지 보완 가능하다는 의미다. 더구나 가해자의 아픔을 고려한 이유에선 헛웃음마저 나올 정도다. 유가족은 그 기간동안 가해자보다 몇 십배나 더 커다란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체포에 대한 공포보다 영원한 상실이 훨씬 더 큰 아픔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아무런 죄책마저 없다. 그들은 그저 당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오로지 가해자만 고려하고 있는 것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가의 태만 운운하는 부분은 점입가경이다. 그것이 정말 이유라면 공소시효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 태만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거나 지원을 확충하는 게 먼저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공소시효는 그 불합리성이 인정되어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추세다. '태완이법'으로 이제 우리나라도 그 흐름에 들어가는구나 여겼다. 하지만 법사위는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반대한 의원들이 대부분 변호사 출신들이었는데 그 이유로 법적안정성을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적안정성인지 모르겠다. 법적 안정성이란 국가가 내가 존재하리라 믿었던 제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가질 수 있는 불이익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공소시효를 신뢰하는 이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범죄자들이다. 즉 공소시효가 지키고자 하는 법적안정성은 주로 범죄자들을 위한 법적 안정성인 것이다. 과연 국가가 그런 자들의 법적안정성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로 유명한 시즈쿠이 슈스케의 2013년도 작품 '검찰측 죄인'도 공소시효를 테마로 하고 있다. 제목이 어딘가 낯이 익다면 당신은 분명 애거서 크리스티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리라.이 제목은 그녀의 작품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바꾼 제목이니까 말이다. 시즈쿠이 슈스케하면 얼른 카멜레온이 떠오른다. 미스터리면 미스터리, 로맨스면 로맨스, SF면 SF, 장르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데도 늘 성공적으로 변신하는 까닭이다. '검찰 측 죄인'에선 법정 미스터리에 도전했다.


 두 명의 검사가 주인공이다. 하나는 베테랑 검사인 모가미. 그는 '법률이라는 검으로 악인을 일도 양단한다'는 신조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끝가지 추포해 기필코 정의를 관철하겠다는 존재다. 다른 하나는 초짜 검사인 오키노. 모가미에 반해 검사가 된 인물로 당연히 처음엔 모가미의 신조를 따라 행동하지만 나중에 가서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인물이다. 


 소설은 이 둘의 갈등을 담고 있다. 그들에게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있다. 바로 가마타에서 일어난 노부부 살해 사건. 용의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사단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쓰쿠라. 모가미는 그의 이름을 보고 경악한다. 대학 다닐 때 그는 한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 곳을 관리하던 부부에게는 유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마쓰쿠라였던 것이다. 모가미는 유키를 누구보다 아꼈기에 그 사건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마쓰쿠라는 아주 유력한 용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그 때 법을 공부하고 있던 모가미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다시는 그런 사건에서 무력해지고 싶지 않아 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공소시효의 만료로 더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유키의 부모도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유키와 그 부모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거의 절망에 가까운 죄책감을 가진다. 너무 커서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던 모가미였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그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모가미는 생각한다. 공소시효가 지나 이미 처벌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을 이번 것으로 처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모가미는 위험한 유혹에 빠진다. 


 오키노는 모가미를 신뢰한다. 처음엔 모가미를 철썩같이 믿고 마쓰쿠라를 엄청 심하게 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정황이 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쓰쿠라만 용의자로 몰고가는 모가미를 비롯한 수사진들에게 회의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난 검사 실격이야. 그 사람은 특수부의 무리한 수사 때문에 목숨을 끊었는데도 범인상을 미리 정해놓고 철저히 억측으로 수사를 진행하려 하고 있지. 생각해보면 그게 그 사람의 대답인지도 몰라. 이게 바로 검사라는 대답. 보기에 따라서는 그게 정답일 테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임무에 의문을 품으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난 무리야. 검사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이래서 될까 고민하는 게 당연하잖아.(p. 386 ~ 387)


 그러다 결국 모가미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순간이 닥쳐오고 오키노는 이제 마쓰쿠라를 변호하는 변호사와 협력하여 그를 무죄 방면 시키려 애쓴다. 그러다 이 사건에 얽힌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게 된다.


 책은 모두 574페이지로 꽤나 묵직한 편이다. 오로지 하나의 사건만 주가 되느라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즈쿠이 슈스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공소시효를 필터로 하여 법률로 현실 속에 정의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경험시키려 한다. 캐릭터는 잘 살아 있고 법정 미스터리에 기대하게 마련인 법적인 부분의 묘사는 치밀하며 몇몇 부분은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장면까지 들어있는 터라 엔터테인먼트로도, 오늘의 법현실을 생각해보는 데 있어서도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다. 대립하는 캐릭터 모두 끝까지 페어플레이 하고 있어 더욱 관전하는 맛이 난다. 분명 두께만큼 깊이도 묵직한 소설로 무엇보다 '태완이법'의 무산이 쓰라렸다면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법을 주관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리고 있다. 그것은 법 말고 다른 건 하나도 안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가 얼마나 부유하든 권세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잘못을 했다면 응당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법은 눈을 가리기는 커녕 너무 크게 뜨고 있어서 탈이다. 아니 거기다 색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더 문제다. 요즘처럼 법이 과연 무엇일까 많이 자문하게 되는 적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모가미의 말대로 법이 칼이라면 백종원이 쥐면 누군가를 배불리겠지만 살인자에겐 흉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법이 가진 진짜 문제는 그것을 누가 휘두르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제대로 잘 휘두를 수 있는 사람과 휘둘러서는 안 될 사람을 선별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런 지원과 견제의 시스템이 가능한 법체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 말로 유가족의 눈물과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첩경이리라. 그 고민의 한 걸음을 이 책으로 내딛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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