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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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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언급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 이렇게 세 가지다.



 읽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깥 일본 사회 동정에 소세키가 예민하게 반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도련님'은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다. 후발 주자로서 서양 제국주의에 잔뜩 움츠려 있던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시대적 분위기가 거기엔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사소설'의 대표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사소설'이란 작가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오로지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 하는 경향이 많다.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도 어느 정도 사회 동향과 담장을 쌓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번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오해라는 것이다.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아주 민감하게 연동하는 작가다.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인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후'는 '도련님'처럼 어떤 외부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쓰여진 연도를 감안하면 바로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후'는 1909년에 연재되었다. 1909년은 일본에게 중요하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아주 중요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주권을 상실해 1909년에는 거의 명목상의 권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게 강제 병합된다. '그 후'는 바로 그런 시기에 쓰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이런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건 그대로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후'를 기점으로 이후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인공이 남의 연인을 빼앗아 오는 설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말로 나쓰메 소세키는 '그 후'를 시작으로 내내 그런 설정을 가져왔다. '문'도 그렇고 '마음' 역시 그러하다. 물론 '행인'은 이와 정반대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후'를 기점으로 내내 계속된 나쓰메 소세키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행인'은 그 노선을 더욱 강조하는 작품이다. 간단히 설정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일단 '행인'은 대학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내가 동생과 바람을 피는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그래서 철저히 감시한다. 더구나 아내가 정말 정절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까지 한다. 이 정도로 대학교수는 비정하며 이기주의적인 인물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 일본의 모습을 대학교수로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는? 바로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이다. 즉 '행인'은 당시 일본 소유가 된 조선을 행여나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이유가 있다. '행인'이 연재 되던 1913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을 보면 그 때가 얼마나 용광로 같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식민지 조선이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그 후다.



 주인공은 다이스케다.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부유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생활엔 아무런 걱정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다. 그는 늘 불안하게 일상을 감각 하지만 백수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심장이 약해서라고 여기고 있다. 하루는 예전 친구인 하리오카가 찾아온다. 그는 결혼과 함께 지방으로 떠났는데 뜻하지 않게 회사 비리에 연루되어 자기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사직을 하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도쿄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아주 친했던 사이라 다이스케는 반갑게 맞는다. 하리오카에겐 미치요라는 아내가 있다. 다이스케도 결혼 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 때는 미치요에게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어 하리오카와 미치요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미치요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뜻하지 않게 아버지로부터도 혼사가 들어온다. 자신이 사업상 도움을 받는 이의 딸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원래 다이스케는 요네자와 효노부가 쓴 '빙과'의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처럼 '에너지 절약주의자'로 구태여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하려고 애쓰는 따위의 성격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는데 그 사람과 결혼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치요가 눈에 밟힌다. 결국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선택한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연이 끊어진다. 아버지, 형, 형수 그리고 하리오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린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는 그녀가 결혼한 3년 동안 자신에게도 혼사가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고 내내 혼자 살았다고 하면서 그 시기가 다름 아닌 그녀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당신이 어디까지나 원 없이 복수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진정으로 바라는 일입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을 불러서 굳이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실은 당신에게 당하는 복수의 일부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이미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죄를 짓더라도 당신 앞에서 참회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p. 269)


 그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복수를 당한다. 아담이 야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는 오직 하와만 있을 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 고된 노동의 형벌을 받았듯이  다이스케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오로지 홀로 책임져야 한다. 소설은 일자리를 구하러 집을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으로 끝난다.


 표면 상으로 이 이야기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다. 다이스케가 주로 대립하는 것은 두 사람인데 하나는 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하리오카다.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백수로 지내는 다이스케를 영 못마땅해 한다. 본인은 성실성과 열정만으로 커다란 부를 얻은 사람으로 다이스케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다이스케에게 자신만 위해 살지 말고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그게 국민의 의무라는 말까지 한다. 하리오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내와 다이스케의 사이를 알기 때문에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리오카는 이런 말을 했다.


 "자넨 비웃고 있어. 그러는 자넨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자넨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이야. 달리 말하면 의지를 발전시킬 수 없는 인간이겠지. 의지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야. 인간이니까 말이네. 그 증거로 항상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난 내 의지를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려고 하고 내 의지 덕분에 이 현실 사회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네. 거기에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거야. 자네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지. 그러다 보니 관념 세계와 현실 세계를 따로따로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런 엄청난 부조화를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무형의 큰 실패가 아닐까?"(p. 102)


 여기에 다이스케는 잘 반박하지 못한다. '도련님'을 읽고 아버지와 하리오카의 대사를 읽으면 아버지와 하리오카가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실성과 열정. 시대의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 그것이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 특성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도련님'에서 주인공은 지인이 애인을 빼앗기자 그를 대신해서 복수까지 해주려 한다. 말하자면 그 주인공은 다이스케와 정반대의 인물인 것이다. 즉 여기서 다이스케를 가장 맹렬히 공격하는 대표적인 두 사람은 모두 '도련님' 주인공의 도플갱어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렇게 '그 후'를 '도련님'과 마주한다. 왜?


 '도련님'과 '그 후'를 나란히 놓고 보면 정말 커다란 변화가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도대체 그토록 적극적인 주인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렇게 수동적인 주인공을 전면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건 바로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 변화 때문이다. 러일전쟁 직후만 해도 일본은 부푼 희망 속에 있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강국이 되었다는 증거였고 이제 일본의 앞길에는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일본은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약속된 장밋빛 미래는 여지없이 시든 꽃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후'는 그런 일본의 현실적인 모습을 다이스케의 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이스케는 당시 전형적인 일본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상황도 경제 상황도 성에 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메이지 이념은 사라지고 모두가 오로지 현실적인 이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도덕도 없고 신념도 없고 꿈도 없었다. 오로지 재력과 권력만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날로 파시즘화 되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생각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거기에 물들거나 아니면 완전히 따로 존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모든 일본 지식인들에게 떨어진 선택의 기로. 여기서 다이스케는 전자를 선택한다.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았던 현실 일본 특성에 스스로 물드는 것이다. 하리오카가 노동의 의미가 먹고 사는 데 있다고 하자 다이스케는 그건 신성한 노동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자신은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다이스케가 그런 노동을 하려고 전차를 타는 것을 본다. 그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의미심장하다.


 담배 가게 입구의 노렌이 빨갰다. '대방출'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도 새빨갰다. 전신주도 빨갰다. 빨간 페인트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갰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 (p. 325)


 그는 물들고 빨간 한 가지 색깔이 된다. 물론 이 빨간 색은 욱일기가 그렇듯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기로 한다. 결국 고유한 자신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국주의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되었던가? 바로 미치요 때문이다. 그가 미치요를 원했고 하리오카로부터 빼앗아왔기 때문이다. 즉 다이스케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바로 미치요 때문이고 일본제국주의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 후'는 한 마디로 불길한 예언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 본질은 탐욕이고 그에 따라 조선의 강제 병합은 기필코 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예언의 소설인 것이다. 우리는 다이스케의 미래를 '문'에서 보게 될 것이다. '문'에 나오는 부부는 여러모로 다이스케와 미치요 커플의 판박이다. '문'의 주인공 역시 다른 남자의 여자를 빼앗았고 남자는 거기에 큰 상처를 입어 만주로 떠나 버린다. 주인공은 만주를 두려워하는데 그건 만주로 떠난 여자를 빼앗긴 남자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만주의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뒤로 더욱 만주와 그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분명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보면서 일본마저 패망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후반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불안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선생님도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며 아름다운 부인과 단둘이 은둔해 살아간다. 그가 스스로를 죄스럽다고 여기게 된 이유는 지금의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서 빼앗았고 그(이 남자는 오로지 이니셜로 표기되는데 공교롭게도 'K'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님은 메이지 천황이 죽은 날 할복한다. '마음'은 말하자면 '그 후'부터 시작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사유하는 나쓰메 소세키 경로의 최종판이다.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의 관계의 헤아림이 그만큼 깊고 거기에 대한 죄의식도 크다. 


  소세키는 메이지 정신에 입각한 일본만의 진정한 근대를 추구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의 일본은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거기엔 메이지의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공생은 없었고 오로지 지배와 착취 그리고 탄압만이 가득했다. 예민한 지성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다가올 비극을 내다봤다. 그는 그것을 '그 후'부터 일련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나 죄의식을 안고 사는 자로서 글로나마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그렇지만 '그 후'가 남기는 여운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시대의 폭압 아래서 홀로 분투하는 고독한 영혼의 그림자가 짙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적 상황과 아픔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다 그대로 집어넣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이후로 갈수록 더 깊어졌다. 감히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역사보다 더 섬세하고 사려 깊게 1910년대의 일본과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려준다고.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이어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역사적 차원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이것이 새로운 번역과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문'을 기다리는 커다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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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0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E-9 2014-12-18 01:56   좋아요 0 | URL
이 새벽에 아무개님 댓글을 발견하네요.
저야말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리뷰를 읽고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말만큼 절 기쁘게 하는 것도 없어서요.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아무개님의 마음에도 드는 작품이길 바라겠습니다^ ^
 
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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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는 나쓰메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관두고 아사히 신문의 전업작가가 되어 '우미인초'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한 작품이다. 1907년, 6월에서 10월까지 '우미인초'를 연재하고 2개월을 쉰 다음, 1908년 1월부터 4월까지 연재했다. '우미인초'는 꽤나 인기를 얻어 백화점에선 '우미인초'란 이름을 붙여 목욕가운을 팔았고 귀금속점에선 '우미인초 반지'를 팔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춘원 이광수가 '우미인초'에 영감을 받아 근대 최초의 장편 소설이기도 한 '무정'을 썼다. 다소 불안한 가운데 시작했던 첫 연재 작품이 성공을 거둔 탓인지 소세키는 두 번째 연재물에선 더욱 과감하게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문학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렇게 해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세계에서 가장 이채로운 빛을 발하는, 때문에 가장 소세키답지 않은 소설로 늘 손꼽히는 '갱부'가 태어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열 아홉의 청년이 죽을 결심을 하고 가출한다. 게곤 폭포나 아사마 분화와 같은 유명한 자살 명소를 찾아 가려고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갱부가 되지 않겠느냐며 접근해 온다. 호기롭게 가출은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더없이 막막하고 외로웠던 그는 별 생각도 않고 그만 승낙하고는 사내를 따라 광산으로 간다. 평생 서생으로만 살아온 탓에 정식 광부는 되지 못하고 조수가 된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정반대인 거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갱부가 되어 남으리라 생각하고 버티지만 결국 폐가 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게 끝이다. 소설은 전혀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점에서 문득 끝난다. 더구나 그 때까지 끌어온 이야기도 이거다 싶은 줄거리가 없을 정도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에 이 갑작스런 종결은 더욱 황망하다. '기승전'만 있고 '결'은 없었던 '풀베개'와 똑같다. 소설은 딱 절반을 잘라 전반은 사내에게 이끌려 광산까지 오게되는 과정을, 후반부는 광산에서 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게 전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완결이 아닌 과정의 소설이다. 결말의 지점에서 마치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오로지 그 하나의 끝을 위해 존재해 온 것인 양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결말을 없애버려 소설의 모든 부분이 저마다 존재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소설인 것이다. 즉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죽음과도 같은 결말 위에서 독자 자신이 거쳐왔던 소설의 시간을 과거로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시간을 지금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재로 만들어 참여하게끔 만든다. '갱부'는 소세키의 그런 의도로 쓰인 소설이다.


 이것은 소세키의 문학관과 연결된다. 앞서 '갱부'는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으로 더욱 밀고나간 작품이라 했다. 그렇다면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건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다. '하이카이적인 것'이란 쉽게 말해 하이쿠를 탄생시킨 원천 같은 것을 말한다. 하이쿠는 바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봉건 체제가 몰락하면서 발전한 '하이카이렌가'가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더불어 점점 형식화되자 바쇼는 그에 반발하여 그것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쿠'가 되었다. 즉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란 형식 자체가 전무했던 본래의 하이쿠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소세키는 평생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서양의 근대에 맞서 일본적인 것을 수호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의 인물이다. 이는 곧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보다 거대한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예로 '도련님'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계 보다는 국수주의에 물들어 점점 제국화 되어가는 일본에 반발해 나온 작품이었다. 그가 하이쿠를 문학의 이정표로 가져온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서양 문학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선망을 가졌던 서양 문학이 곧 종말하리라 예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바쇼를 절망하게 했던 도쿠가와 체제의 '렌가'와 같았다. 그것은 너무 형식적으로 굳었고 그 규격화되다시피한 획일적인 형식 탓에 스스로 아무리 리얼리즘이라 표방하고 있었어도 존재하는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쇼가 그 '렌가'는 렌가가 아니라고 보았듯이 소세키도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의 강의에서 소설가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자신의 심리적, 감각적 체계를 통해서 '비아(非我)'인 세계의 객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서양 문학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지 못했다.


 일단 '나'가 사라져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이룩된 3인칭 관찰자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품이 특정한 상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어디나 널리 통용되는 보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협소한 한 개인이 보고 느낀 것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칭의 이동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시켰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문학은 쉽게 진리를 말하고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로까지 자처하면서 스스로 권위를 쌓아나갔다. 그러자 작가는 독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진실로 작가와 독자는 화자와 청자라는 차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대등한 개인들의 관계일 뿐이었으나 작가와 문학이 진리의 대변자로 자임하면서 독자는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버렸다. 그 수도사처럼 독자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신과도 같은 작가가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해석하는 게 전부였다. 문학이 진정 근대를 이룩한 계몽의 산물이라면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대화와 토론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독자가 할 수 있는 건, 누가누가 작가의 뜻을 제대로 찾아내나와 같은 정답 맞추기 밖에는 없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서 문학 수업에서 자주 들었던 '밑줄 좍'이야 말로 실은 문학이 죽었다는 선포에 다름아니었다. 문학은 그 형식이 권위가 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했을 때 이미 수명이 다했던 것이다.


 서양 문학은 개인을 '개인'이 아니라 '대중'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이 아닌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내 식대로 사는 게 아닌 '보편'적인 방식으로 살게 만들었다. 서양 문학은 개인의 자유와 거기에 뒷받침된 가능성을 보편의 굴레로 구속했다. 그렇게 '국민'을 만들고 개인을 '국가'아래 종속시켰다. 문학이 국민국가의 도래를 가져왔다고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했던 건 이런 이유였다. 당연히 문학의 진정한 사명인 세계의 객관적인 진실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문학이 독자에게 주입한 것은 기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쉽게 보편의 탈을 썼고 '누군가'의 눈과 판단은 '우리'의 눈과 판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눈과 내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이식되어버린 남의 눈과 머리로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소설과 동시에 탄생했다. 사실은 문학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소세키는 그것을 보았다. 문학이 결국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세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의 산물임을 밝히는 것. 그 개인조차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실수도 하며 인간적으로도 좀 모자란 한계 많은 존재로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대변자이니까. 둘은 서양 문학의 규격화되다시피한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그러한 형식으로부터의 이탈이야말로 문학의 진정한 모습이다. 셋은 결코 보편이나 진리를 자처하지 않는 것. 섣불리 다 안다고 주제넘게 나대지 않는 것. 어디까지나 이건 불완전한 한 인간의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래야 독자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카이적인 것'의 실체다.(물론 소세키의 제안에 따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바로 이 '하이카이적인 것'이 '갱부'에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갱부'를 읽다보면 참 많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바로 홍상수의 영화 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그 영화에서 고현정이 분했던 인물은 자꾸 자신을 나무라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이 대사에서 '나'를 '세상'으로 바꾸면 그대로 '갱부'에서 소세키가 독자에게 정말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될 것 같다. 즉 '삶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불확실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섣불리 다 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마라.는 것.



 사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내내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의 진심은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가 분한 인물인 '문호'의 입을 벌려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폭발했던 적이 있다.


 니가 어디서 줏어들은 게 널 고질(홍상수식 조어로 극중에서 문호에게 '교수님 저질 같아요.'라고 말하자 문호는 그럼, 너는 고질이냐? 고질이 뭐냐? 라고 대꾸한다.)로 만드는 게 아냐. 너 책 많이 읽었어? 니가 읽은 그 책들이란 거 있지. 그게 다 죽은 새끼들 찌꺼기야. 니가 믿는 것들이란 다 그런 새끼들의 자기 정당화야. 아전인수야. 알아? 딱 니가 아는만큼만 갖고 애기하는 거야. 마. 우리가 뭘 아니? 뭘 확실히 아니? 왜 꼴값을 해. 씨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통렬하다. 바로 이 말을 나쓰메 소세키는 '갱부'를 통하여 할 수만 있다면 독자나 당대 일본 사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해주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세키는 진심으로 문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갱부'를 과정의 소설(소세키 스스로는 반복적으로 '갱부'는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소설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쓴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때?'하는 식으로.


 '갱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하이카이적인 것'은 바흐친이 소박한 농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밝혀냈던 것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다름아닌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라 정의한다. 쉽게 말해 옛날 조선 시대의 한 장터에서 양반을 조롱하는 마당극을 보고 있는 민중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기존 권위를 풍자하고 해학하여 실추시키고 자신 역시 그 세계에 대등한 참여자임을 각인시킨다. 풍자와 웃음은 그들의 무기이며 연대를 위한 끈이 된다. 마당극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곳곳에서 구경꾼들의 이런 저런 말들도 오고간다. 마당극은 한껏 열려있다. 그런 화자와 청자 사이의 넘나듦이 무한히 가능한 공간이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세계가 있으며 그 모든 세계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마다 존중받아야 하 개체로서.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란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갱부'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작품이다.


 '갱부'는 1907년에 쓰여졌다. 시점을 생각하면 소세키가 '갱부'에 투영한 태도가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바야흐로 일본은 파시즘적인 제국의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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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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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나비, 흰 꽃에

  조그만 나비, 조그만 꽃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기나긴 근심은, 긴 머리카락에

 어두은 근심은, 검은 머리카락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부질없이, 부는 태풍

 부질없이, 사는가 속세에

  흰 나비도, 검은 나비도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나쓰메 소세키의 네번째 장편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바로 이 신체시에서 나온 것이다. 한 여인이 이 구절을 노래로 부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시처럼 태풍 속에 있지 않다. 그녀는 부르조아의 자녀로 태풍으로부터 안전하다. 막강한 재력과 권세가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르는 이 시는 그냥 시다. 현실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말들의 무더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들은 그녀와 비슷한 부르조아인 나카노는 시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않는다. 그가 말하는 건 그저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는 것 뿐이다. 삶의 태풍으로 부터 안전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볍다. 사진 한 장의 두께만큼 현실의 무게는 얄팍하다. 얄팍하기에 모든 것이 아름답다. 전쟁의 참화를 찍은 사진도 얇디 얇은 2차원의 평면이 되면 예술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들에게 닥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아름답다. 울타리 너머의 관찰자로서만 만날 수 있기에 어여쁘다. 하지만 지금 태풍 속에 휩싸여 있는 나비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삶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닐 것이다. 그건 오로지 길고도 어두운 근심일 것이다.

 태풍의 날카로운 손톱에 언제 어느때 날개가 짓이겨질지 모르는 그들은.

 

 그런 나비들이 소설에 있다. 이 소설은 주로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말한 나카노라는 남자다. 다른 둘은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라는 나카노의 친구인데, 바로 이들이 그런 나비들이다. 그렇게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등장인물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근심 나아가 절망이나, 누군가에게는 그저 진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하다는 감각에는 모르핀과 비슷한 것이 있다.

 갑각류와도 같이 피부에 살갑게 와닿는 감각이 없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살갗을 떨리게 하는 진짜 경험들이 그대로 휘발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도 전혀 뜨겁지 않은 브라운관의 화재 장면처럼. 아무런 진정성이 없다. 그러니 영화의 여주인공이 곧 화마에 휩싸일 위기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안심하고 여배우의 코가 성형인지 아닌지 신경쓸 수 있는 것이겠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나비들에겐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브라운관 속 태풍일 뿐이다. 조용한 재즈가 흐르고 있는 방에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기대어 와인을 마시며 보는 텔레비젼 속의 태풍은 리포터가 위기라 떠든다고 한들 그 무게감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어쩌면 한 순간의 흥미 이상도 되지 못할 존재감. 그저 잠깐 피어났다 내리는 비에 곧 떨어지고야 말 꽃잎과도 같이 쉬이 잊혀지게 될 것이니 무엇하려 마음에 담아두겠는가? 하니, 제아무리 나쓰메 소세키가 절박하며 썼다고 하더라도 심드렁해질 수밖에.


 그러니 이 소설의 주역은 울타리 바깥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나비들이다. 소세키는 그들을 위하여 '태풍'을 썼다. 그 역시도 도야 선생만큼이나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일본에 대해 절망했고 스스로를 태풍 속의 작은 나비일뿐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니 결국은 자신을 위로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나비들을 위한 소설이다.


 삶의 무거움에 짓눌리고, 삶의 비루함을 느끼며, 삶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을 위해. 그 때도, 오늘도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험난한 태풍 속에 내던저져 언제 뜯겨나갈지 모르는 작은 날개를 힘없이 끌어안고 버터야만 하는 나비들...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을...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중 가장 인기 없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참 보기 힘들었다. 지금 나온 현암사 판본이 국내 초역이니 말 다했다. 그래도 그 오랜 기다림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렇게 근사한 장정으로(실물은 사진보다 더 근사해 보인다. 더욱 좋은 것은 소세키와 태풍에 대한 관련 사진들이 앞부분에 도록처럼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책엔 흔히 나왔지만 지금은 사라진 편집 방식이라 아쉬워하던 것중 하나인데 이를 다시금 되살려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고(古)소설이라 할만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책이 더욱 옛스러운 맛을 간직하게 되었다.) 재회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은 내용이다.(하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내게 불만족을 주기란 갑자기 우주에 찻주전자 위성이 나타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읽는 내내 어째 꼭 지금의 나를 위해 나와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내게 세상은 까만 밤과도 같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었구나 느끼는 중이다. 칸트는 악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들에겐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예외가 되려는 족속들이 바로 악마라고. 바로 그런 악마들의 잇단 출현을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직과 상식 그리고 진실은 비웃음 거리나 되는 바보들의 미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아바가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고 노래를 불렀다지만 그 말 그대로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THE LOSER HAS TO FALL'이라는 가사 그대로 힘없는 약자는 쫓겨나고 그들의 호소는 자신의 이권이 없으면 도통 열릴 줄 모르는 편협한 귀에 가닿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고등학생 절반이 10억을 준다면 감옥을 가도 괜찮다고 대답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그런 세상이다. 바보들의 미덕을 자신의 신념으로 끌어안고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고 난감한 세상. 그런데 소설 속 도야 선생이 꼭 이와 같았던 것이다.

 

 도야 선생에겐 신념이 있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일본에서 가진 돈이 인격을 말해주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이 말은 곧 삶이 돈을 추구해서는 초라하다는 것이다. 삶은 보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도구이며 현재 일본에 만연되어 있는 황금만능사상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그는 갓 부임한 시골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연설한다. 그게 화를 부른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 모두가 애꾸인 세상에서 두 눈을 가지고 보려는 자는 질시와 증오를 받게 마련이다. 돈이 곧 인품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그 지방의 유지들, 비슷한 사고를 가진 교사들이 주동되어 학생들을 선동하고 결국 도야 선생을 학교에서 내쫓아 버린다. 직업을 잃어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졌으나 그는 그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이 그가 가진 신념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대할 수록 그는 오히려 내부의 신념을 더욱 벼린다. 갈고 갈고 또 간다. 노력으로 공부로 더 이상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신념만으로 꿋꿋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가혹한 태풍 속에서 이대로 부서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한 이상향에 도달할 때까지 날개짓을 그치지 않도록.

 

 그는 거울이 아니라 등불이 되려 한다. 누군가의 빛에 의해 비로소 반짝일 수 있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등불. 그래서 오히려 세상마저 그 빛으로 밝힐 수 있는 등불이.

 

 여름밤의 등불이 방황하는 곤충들을 부르듯이 그 빛 속으로 홀연히 같은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고 있던 나비 하나가 날아든다. 그가 바로 다카야나기다. 소설에서 그는 중간자적 존재다. 도야 선생처럼 문학자이며 그처럼 순수한 이상을 품고 있지만 반면 나카노가 가지고 있는 성공과 인정이라는 현실적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가난한 고학생으로 생활해온 다카야나기는 언제나 나카노가 보여주는 부의 달콤함 앞에서 주눅이 든다. 문학가로서 배우고 익힌 경험으로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만 집세를 벌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번역을 억지로 해야 하고 몇 푼의 돈이 없어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없게 될 때마다 그는 새삼 돈의 힘을 절감한다. 그러다 그는 한 잡지에서 우연히 도야 선생의 글을 읽고 광명을 찾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헤아려 대답을 내놓은 듯한 그 글에서 정말 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다카야나기는 도야 선생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이 내쫓겼던 중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뿐 아니라 선생에게 선동되어 같이 선생을 내쫓기까지 했으므로 언제고 꼭 사과해야지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을 찾아간다. 정확히는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의 지표로서 그를 가까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홀로 독야청청 하여도 얼마든지 태풍 속에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이 소설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방황하는 자,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나온다. 위에서 저런 식으로 줄거리를 말했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모든 작품들이 으례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어떤 확실한 결말을 주지는 않는다. 다카나야기가 도야 선생을 만난 게 고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고민으로의 열림이듯이.

 

 소세키, 그에겐 동화의 'EVER AFTER' 따위는 없다.

 

 그의 소설 '문'처럼 지금 겨우 겨울을 넘겨 여름이더라도 그 겨울은 또 다시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렇게 삶엔 삼한사온이 있고 사계절이 있다. 어느 땐 이게 진리야 확신하더라도 또 어느 땐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못미더워하는 법. 한 번의 깨달음으로, 한 번의 의지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다. 바람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어제의 해답이 오늘은 오답이 될 수도 있고 그 오답이 또 내일은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소세키는 그의 또 다른 소설, '한눈 팔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세상에 정리 가능한 일이란 거의 없다. 한번 일어난 일은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다만 여러 모양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라고.

 

 삶은 그 마음에 무엇을 품었든 늘 시험의 연속이다. 비는 언제 내릴지 알 수가 없고 우산이 꼭 준비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산이 없을 때에도 쏟아지는 폭우를 견딜 수 있도록 그 부단한 시험을 거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연단해 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아마도 도야 선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이상형인 듯 하다. 그렇다면 다카야나기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큰 포부를 안고 돌아왔지만 태풍과 같은 일본의 현실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다모클레스의 칼'인지도 모른다. 다카야나기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흔들릴 때마다 도야 선생을 찾았듯, 나쓰메 소세키 역시 그 품은 신념이 세파에 흔들릴 때마다 마음의 중심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왕좌에 앉을 때마다 자기 머리를 향하도록 위에 칼을 놓아둬 언제 이 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자각했던 다모클레스 왕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신념을 투영시키고 선택한 하나의 모델로서 가지게 되는 소설의 의미는 비단 나쓰메 소세키에게만 한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결이 없는 소설이 바로 우리네 삶의 현실적 모습그대로인 것을 감안한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어쩌면 바로 우리 모두의 모델로써 이 소설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도야 선생의 말들은 소설로 놓고 보자면 그리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한 에세이나 연설문에 보다 잘 어울린다. 더구나 다카야나기가 직접적으로 도야 선생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잡지의 글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이런 식의 문장과 인용이 분명 소설의 미학을 그르친다는 것을 소세키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분명 이토록 무리해서 넣은 것엔 이유가 있을 터. 그건 어쩌면 소설적 재미보다 다른 것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다카아냐기라 여기는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이나 격려 같은 것을. 진정 자유로워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이며, 그리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이다와 같은 격려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개짓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데 소세키가 다가와 아직은 이르다면서 내 등을 토닥이며 저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이 책이 나를 위해 꼭 나와준 것만 같았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는 나비떼를 본 적이 있다. 아주 작고 연약한 나비들이었다. 그 먼 거리를 횡단하면서 그들 역시 더러는 바람에 날개가 짓이겨지고 파도의 몸 전체가 휩쓸리기도 했을테지만 날개짓을 멈추거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그 작은 날개로 그들은 바라는 대로 대서양을 건넜다. 그래, 우리에게 태풍으로부터 지켜줄 울타리는 없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리고 이 작은 몸이 어디에 내동댕이 쳐질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게 울타리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오늘 이만큼 왔다고 하더라도 내일 또 어떤 바람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되는 날개짓에 보다 의미를 두며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영화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가 이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세상엔 발 없는 새가 있어.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다더군. 그 새는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 때는 그 새가 죽을 때야."

 

 이왕이면 나 역시 멈추는 순간이 그 때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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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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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작품들을 거듭 읽어가다보면 작가도 세월따라 변해간다는 걸 알게됩니다.


삶의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말이죠. 나쓰메 소세키도 그러합니다. 분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같은 초기의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은 '문'이나 '한눈팔기'와 같은 후기의 나쓰메 소세키와는 많이 다릅니다. 초기의 소세키는 '도련님'의 주인공과도 같이 세계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와 당당하게 대결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임에 반해 후기의 소세키는 '문'의 주인공에서 보듯 세상 앞에서 한없이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죠. 아마도 '도련님'을 읽고 바로 '문'을 읽게되면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련님'이 1906년에 나왔고 '문'은 1910년에 쓰여졌는데 불과 4년만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마도 그렇게 된 것은 그의 네번째 소설'태풍'에 나왔던 '도야 선생'과 같은 경험을 그 역시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도야 선생처럼 자신이 옳은 신념을 가지고 올곧게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 역시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러다 점점 변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만을 절감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절감을 가져온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태풍' 이후로 내어놓은 소설들이 계속 실패한 것에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세키는 1907년, 당시 재직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합니다. 1년에 1번 100회 정도의 연재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매달 200엔을 받는 아사히 신문의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는데 당시 연봉 800엔으로써 많은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생활해야했던 소세키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죠. 또 그가 아사히 신문 입사에 대한 일종의 소감으로써 쓴 글을 보면 당시 소세키는 대학 강의라는 것에 상당히 지쳐있었던 듯 합니다. 그 글에서 그는 자신이 대학 강의를 그만둔 것을 '개'의 탓으로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꽤나 집중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바로 뒤이은 대학을 떠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 든 도서관에서의 일화를 보면 '함부로 큰 소리로 말하거나,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곤 해서 (책 읽는) 고상한 취미를 방해하는 정도가 막대했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어쩐지 소설 '도련님'에서 수학 선생이 되어 시골중학교로 부임한 주인공이 자신이 성심껏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놀려먹기까지 해서 잔뜩 반감을 갖게 되는 부분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도련님'은 흔히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인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건 이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나쓰메 소세키는 정신병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신경쇠약이었습니다. 굉장이 예민한 성격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죠. '도련님'의 주인공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물론 '도련님'의 주인공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동경제국대학 영문학 강사 시절엔 제자 한 명이 폭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그 충격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소세키의 아내도 신혼 때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집 부근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젊은 날의 소세키는 참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정이었으니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강의 환경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 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대학 강사 생활에 많이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소세키를 보다 못한 친구가 그렇게 정 괴로우면 글이라도 써봐라고 해서 썼던 게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소세키는 100% 재택근무를 보장받아 일상의 번거로운 잡사는 잊고 마음껏 자신이 꿈꾸던 문학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카프카가 가장 바랐던 생활을 그는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된 연재 소설 '우미인초'는 그러나 너무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통속적이라 소세키 특유의 매력을 다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미인초'는 우리나라의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무정'이라는 소설도 쓰게할만큼 당대에 영향력이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뒤의 '갱부'는 그만한 반응조차 받지 못했죠.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이후 내내 성공의 가도를 걸어온 그에게는 꽤 통증이 심한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존심마저 강했던 그였으니 그 아픔은 더욱 깊었겠죠. 아마도 그래서일까요? 이후 '산시로'는 변모된 모습을 보기에 됩니다. '갱부'는 언뜻 보면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슷합니다. 그 소설에서 인간 사회의 관찰자 역할을 했던 고양이를 19살의 소년으로 바꾸어 놓으면 '갱부'가 되지요. 그렇게 '갱부' 역시고 관찰자의 소설입니다. 자기가 속한 세계가 싫어서 가출한 소년이 우연히 한 갱부를 만나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긴 탄광촌으로 따라가지만 건강 문제로 정작 갱부는 되지 못하고 사무원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한 편으로 거기엔 소년이 본 탄광촌의 실상이 잔뜩 그려져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갱부'는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작품입니다. 자연주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주력합니다. '갱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산시로'는 다릅니다. 세계 보다는 '나'에 더욱 주안점을 둡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내가 어떻게 그 세계를 해석하는가, 세계가 내 마음에 드리운 잔영을 독해하는데 더욱 주안점을 두는 것이죠. '산시로' 이후로 내면의 심리묘사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반영하죠. '도련님'과 '문'이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세계에 대한 태도의 극심한 차이는 아마도 이것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은 세계를 앞에 두고도 전혀 해석을 하려하지 않는 반면 '문'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세계가 자신에게 남겨놓는 것에 대해 해석하려하니까요. 즉 후기의 소극성이란 정말 사람이 소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 특유의 성향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산시로'는 다시금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소세키의 전성기를 되찾게 해 줍니다. 그 뒤로는 '한눈팔기'도 성공하여 주욱 안정적인 문학 세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죠.





 재밌는 것은 '도련님'과 '산시로'가 좀 비슷한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원래 있던 곳에서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죠. 물론 '도련님'에게는 '산시로'와 같은 가슴 아리는 짝사랑은 없습니다만. 정말 주목할만한 이 두 작품의 차이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틀리다는 것이죠. 당대에 '모던 걸'이라 불렀던 신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산시로'에는 주인공이 동경했던 '미네코'라는 아주 매력적인 신여성이 등장합니다. 소설이 연재될 당시 그 성공이 바로 미네코 덕분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꽤나 소세키가 긍정적으로 묘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에선 전혀 그렇지 않죠. 여기서 신여성이란 존재는 세속적인 계산으로 신의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속물일 뿐입니다. 원래 고가 선생이랑 혼인을 약속했다가 그의 집안이 기울자 이내 교감 '빨간셔츠'로 갈아타는 '마돈나'라는 신여성에게 도련님의 주인공은 속물인 '빨간셔츠', '알랑쇠'에게 하듯이 경멸을 보냅니다. 이렇게나 여성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소세키 개인의 경험이 반영된 탓입니다. 소세키는 '삼각관계'를 많이 쓰기로도 유명하죠. 그랬던 것은 그 역시 '삼각관계'를 아주 뼈져리게 겪었기 때문입니다. 1895년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그야말로 '어두운 시절'이었죠. 요코야마 영자 신문에 기자로 응시했으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낙방했고 거기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을 거절하고 친한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네, 소세키는 그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삼각관계를 이루었고 결국은 패했습니다. '산시로' 이후로 '상실감'이 그토록 빼어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경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소세키는 꽤나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거든요. 그러다 돌연 미쓰야마라는 시골 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바로 그 곳이 소설 '도련님'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그 학교에서 느꼈던 것을 '도련님'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인데 그렇다면 당시 소세키가 여성, 그것도 신여성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지는 능히 짐작이 되시죠? 바로 그 경험의 반영으로 '도련님'에서 신여성은 그렇게 묘사된 것입니다.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 역시 고가 선생처럼 자신의 무능으로 여성을 빼앗겼을 지도 모르겠어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원래 의도였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세키의 실제 삶과 관련하여 조금은 중구난방으로 '도련님'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그만 이렇게 이야기 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앞서 작가의 변화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건 바로 첫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 사이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태도라는 견지에서 볼 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적인 위치를 고수하지만 '도련님'은 관찰을 떠나 세계와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Watch It'에서 'Do It'으로 변화한 것이죠. 이 관점의 변화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이건 단순히 '도련님'이 두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라거나 자전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여기엔 분명 당시 일본 사회가 처한 상황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그건 바로 1904년 일어난 러일전쟁입니다.



물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과는 그것을 쓸 때의 임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렇게 꽤나 개인적인 이유로 쓰였습니다. 애초에 작품으로 발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소설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우선 1장 정도만 쓴 것을 한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그것도 좋아서 쓴 작품이기에 '러일전쟁'이 일본 사회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는 못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도련님'은 본격적인 문학에 대한 열의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소세키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웅지'였습니다. 원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세키는 문학론을 먼저 쓰려고 했다죠. 영국에서 실제 서양 문학을 사사받았지만 그걸 일본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저 답습이 아닌 일본에게 알맞은 문학론을 정립하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좌절한 문학론이 '도련님'의 모습으로 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불화'는 사실 '빨간 셔츠'나 '알랑쇠' 그리고 '신여성'이 뜻하는 바로 '모던'이라는 근대와의 불화이기 때문이죠. '빨간 셔츠'와 대립각을 이루는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의협심이 강하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분노하면 행동부터 앞서는 데다 옳은 것은 어떤 상황이든 관철되어야 하는, 융통성마저 없는 마치 사무라이와도 같은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근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인지 바로 그 신념의 고수가 비슷하게 근대적인 가치관을 부정했던 허먼 멜빌의 '바틀비'를 많이 연상시킵니다. 근대화된 조직 내에서 그 어떤 명령에든 '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바틀비는 그 자체로 우리가 근대라는 것을 너무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를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었죠. 그렇게 무조건적인 추종만은 아닌 스스로 돌이켜보고 헤아리는 것. 소세키도 '도련님'을 통하여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소세키가 '도련님'의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많이 듣게끔 연출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이런 저런 것을 끊임없이 듣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신념이 강해서 자기에게 말하는 타자의 입장에서 헤아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과 맞춰보는 게 고작이죠. 성숙의 정도를 타자의 입장에 얼마나 잘 서 있을 수 있느냐로 가늠한다면 도련님의 주인공은 확실히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소세키도 그것을 잘 알았던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제목을 일부러 '도련님'이라고 지었겠죠. 소설에서 '도련님'은 어릴 때부터 주인공을 보살펴왔던 유모 기요가 주인공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기요는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가족도 포기한 주인공을 유일하게 따스하게 품어주는 주인공에게는 그야말로 어미새가 있는 둥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주인공은 그런 기요와 헤어져 멀리 시골까지 내려와 교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기요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애틋한 사랑 한 번 느끼지 않은 채 오직 다시 기요와 같이 살 날만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인공은 독립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영원히 보호 받기를 꿈꾸는 미성숙한 존재. 당연히 소세키는 '도련님'을 붙여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대로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소설에서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빗대어 고양이로 여겼었죠. 그래도 이제는 뭔가 할 수라도 있는 사람이라는 '도련님'이 되었으니 조금이나마 발전했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스스로를 고양이나 도련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 지금의 일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변해버렸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서양 열강이었던 러시아. 일본은 막상 전쟁을 벌이게는 되었지만 설마 자신들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그랬는데 이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건 일본에게 그들 역시도 이제 서양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한 마디로 '러일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단절이었습니다. 바로 '메이지 유신'와의 단절이었죠.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이란 본디 서양의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반 서양적이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최고지휘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알려진 대로 '정한론'을 주장했는데 그건 서양 열강에의해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조선을 먼저 개국시키고 근대화하도록 강하게 압학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100% 신뢰할 수 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라는 한 나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범 아시아주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을 오로지 아시아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그 아시아를 침략해오는 서양 열강과 싸우려 한 것이죠. 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는 이러한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깡그리 기화시켜 버렸습니다. 강자가 되었던 그들은 이전까지의 아시아 연대는 부숴버리고 오로지 일본 한 나라만의 이익 극대화에 나선 것이죠. 사이고는 실각되어 메이지 10년에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가 죽고 사이고의 정한론을 배척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만의 국력 강화를 주장하며 실권을 장악해버렸습니다. '도련님'이 쓰여진 건 그런 시기였습니다. 주인공과 산미치광이가 보여주는 모습이 '메이지'스럽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반감은 당시 일본에 대한 소세키의 반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아예 소설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하지요.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 자리에서 학생들끼리의 난투극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학생들과 미친듯이 싸웁니다. 어쩌면 그 정도로 소세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당대 사회에 대한 거부가 있었기에 '도련님'이 이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후기의 헤아림이 부족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로 점점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나라가 되어갑니다. 아무리 돌팔매질을 해도 변하는 것 하나 없는 일본. 점점 거대해져만 가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돌팔매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일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자신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후기의 작품들은 그런 이유로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분노하는 것만큼이나 그 분노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소세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문학을 통해 삭여왔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련님'은 정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글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러일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도련님'이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글이 참 길어졌습니다. 당신도 지치셨겠죠? 어리석게도 이제와서야 왜 이렇게 썼나 자문하게 되네요. 아마도 오늘날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제 마음의 뭔가를 건드린 탓이겠죠. 나쓰메 소세키로 하여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을 쓰게 한 것처럼 말이죠. 결국 책을 읽는 것이나 글을 쓴다는 것도 나름대로 견뎌가기 위한 자기 치유의 일환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지식을 얻는다거나 남에게 읽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도련님'을 읽고 글로 우려내면서 이렇게 오늘을 견딥니다. 당신도 오늘 이 까만 밤 아래 어디에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겨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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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해져가는 세상 앞에서 나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저는 나스메 소세키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읽어야지 하고 책만 사놓고...
실은 아무 지식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헤르메스님의 글이 참으로 반가왔습니다.

그렇군여, 오늘을 견디기 위해서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마침 새로 시작한 일이 다소 심심한 곳이 있어서 여유가 있을것 같기도 하네요.
저랑 같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쓰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무게. ㅠ

아래 페이퍼의 천사학을 제가 요즘 읽는데, 저는 천사학이라는 제목만으로 홀랑 구입해서 소설인줄 몰랐답니다... 그런데, 트와일라잇 종류의 판타지더라구요... 평이요, 음....... 음....... 음......

ICE-9 2013-12-19 00:3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글을 반가이 맞아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요즘 이사 준비도 있고 해서 정말 정신이 없네요. 그래서 알라딘 서재에 이렇게 마녀고양이님의 좋은 댓글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ㅠ ㅠ
요즘은 정말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날 치유하기 위해서 글을 읽고 쓰고 있는 듯 합니다. 도련님 리뷰도 너무 그 마음에 의탁해서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냥 그러고 싶네요. 어떻게든 견뎌가려는 몸부림으로... 천사학 찜해놨는데 마녀고양이님 말씀을 들으니 걱정되네요. 나중에 돌덩이같은 충격도 부드러움으로 감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읽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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