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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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언급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 이렇게 세 가지다.



 읽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깥 일본 사회 동정에 소세키가 예민하게 반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도련님'은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다. 후발 주자로서 서양 제국주의에 잔뜩 움츠려 있던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시대적 분위기가 거기엔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사소설'의 대표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사소설'이란 작가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오로지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 하는 경향이 많다.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도 어느 정도 사회 동향과 담장을 쌓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번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오해라는 것이다.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아주 민감하게 연동하는 작가다.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인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후'는 '도련님'처럼 어떤 외부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쓰여진 연도를 감안하면 바로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후'는 1909년에 연재되었다. 1909년은 일본에게 중요하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아주 중요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주권을 상실해 1909년에는 거의 명목상의 권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게 강제 병합된다. '그 후'는 바로 그런 시기에 쓰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이런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건 그대로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후'를 기점으로 이후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인공이 남의 연인을 빼앗아 오는 설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말로 나쓰메 소세키는 '그 후'를 시작으로 내내 그런 설정을 가져왔다. '문'도 그렇고 '마음' 역시 그러하다. 물론 '행인'은 이와 정반대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후'를 기점으로 내내 계속된 나쓰메 소세키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행인'은 그 노선을 더욱 강조하는 작품이다. 간단히 설정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일단 '행인'은 대학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내가 동생과 바람을 피는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그래서 철저히 감시한다. 더구나 아내가 정말 정절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까지 한다. 이 정도로 대학교수는 비정하며 이기주의적인 인물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 일본의 모습을 대학교수로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는? 바로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이다. 즉 '행인'은 당시 일본 소유가 된 조선을 행여나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이유가 있다. '행인'이 연재 되던 1913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을 보면 그 때가 얼마나 용광로 같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식민지 조선이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그 후다.



 주인공은 다이스케다.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부유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생활엔 아무런 걱정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다. 그는 늘 불안하게 일상을 감각 하지만 백수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심장이 약해서라고 여기고 있다. 하루는 예전 친구인 하리오카가 찾아온다. 그는 결혼과 함께 지방으로 떠났는데 뜻하지 않게 회사 비리에 연루되어 자기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사직을 하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도쿄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아주 친했던 사이라 다이스케는 반갑게 맞는다. 하리오카에겐 미치요라는 아내가 있다. 다이스케도 결혼 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 때는 미치요에게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어 하리오카와 미치요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미치요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뜻하지 않게 아버지로부터도 혼사가 들어온다. 자신이 사업상 도움을 받는 이의 딸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원래 다이스케는 요네자와 효노부가 쓴 '빙과'의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처럼 '에너지 절약주의자'로 구태여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하려고 애쓰는 따위의 성격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는데 그 사람과 결혼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치요가 눈에 밟힌다. 결국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선택한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연이 끊어진다. 아버지, 형, 형수 그리고 하리오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린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는 그녀가 결혼한 3년 동안 자신에게도 혼사가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고 내내 혼자 살았다고 하면서 그 시기가 다름 아닌 그녀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당신이 어디까지나 원 없이 복수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진정으로 바라는 일입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을 불러서 굳이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실은 당신에게 당하는 복수의 일부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이미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죄를 짓더라도 당신 앞에서 참회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p. 269)


 그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복수를 당한다. 아담이 야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는 오직 하와만 있을 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 고된 노동의 형벌을 받았듯이  다이스케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오로지 홀로 책임져야 한다. 소설은 일자리를 구하러 집을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으로 끝난다.


 표면 상으로 이 이야기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다. 다이스케가 주로 대립하는 것은 두 사람인데 하나는 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하리오카다.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백수로 지내는 다이스케를 영 못마땅해 한다. 본인은 성실성과 열정만으로 커다란 부를 얻은 사람으로 다이스케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다이스케에게 자신만 위해 살지 말고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그게 국민의 의무라는 말까지 한다. 하리오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내와 다이스케의 사이를 알기 때문에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리오카는 이런 말을 했다.


 "자넨 비웃고 있어. 그러는 자넨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자넨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이야. 달리 말하면 의지를 발전시킬 수 없는 인간이겠지. 의지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야. 인간이니까 말이네. 그 증거로 항상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난 내 의지를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려고 하고 내 의지 덕분에 이 현실 사회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네. 거기에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거야. 자네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지. 그러다 보니 관념 세계와 현실 세계를 따로따로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런 엄청난 부조화를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무형의 큰 실패가 아닐까?"(p. 102)


 여기에 다이스케는 잘 반박하지 못한다. '도련님'을 읽고 아버지와 하리오카의 대사를 읽으면 아버지와 하리오카가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실성과 열정. 시대의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 그것이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 특성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도련님'에서 주인공은 지인이 애인을 빼앗기자 그를 대신해서 복수까지 해주려 한다. 말하자면 그 주인공은 다이스케와 정반대의 인물인 것이다. 즉 여기서 다이스케를 가장 맹렬히 공격하는 대표적인 두 사람은 모두 '도련님' 주인공의 도플갱어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렇게 '그 후'를 '도련님'과 마주한다. 왜?


 '도련님'과 '그 후'를 나란히 놓고 보면 정말 커다란 변화가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도대체 그토록 적극적인 주인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렇게 수동적인 주인공을 전면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건 바로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 변화 때문이다. 러일전쟁 직후만 해도 일본은 부푼 희망 속에 있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강국이 되었다는 증거였고 이제 일본의 앞길에는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일본은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약속된 장밋빛 미래는 여지없이 시든 꽃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후'는 그런 일본의 현실적인 모습을 다이스케의 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이스케는 당시 전형적인 일본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상황도 경제 상황도 성에 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메이지 이념은 사라지고 모두가 오로지 현실적인 이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도덕도 없고 신념도 없고 꿈도 없었다. 오로지 재력과 권력만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날로 파시즘화 되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생각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거기에 물들거나 아니면 완전히 따로 존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모든 일본 지식인들에게 떨어진 선택의 기로. 여기서 다이스케는 전자를 선택한다.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았던 현실 일본 특성에 스스로 물드는 것이다. 하리오카가 노동의 의미가 먹고 사는 데 있다고 하자 다이스케는 그건 신성한 노동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자신은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다이스케가 그런 노동을 하려고 전차를 타는 것을 본다. 그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의미심장하다.


 담배 가게 입구의 노렌이 빨갰다. '대방출'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도 새빨갰다. 전신주도 빨갰다. 빨간 페인트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갰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 (p. 325)


 그는 물들고 빨간 한 가지 색깔이 된다. 물론 이 빨간 색은 욱일기가 그렇듯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기로 한다. 결국 고유한 자신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국주의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되었던가? 바로 미치요 때문이다. 그가 미치요를 원했고 하리오카로부터 빼앗아왔기 때문이다. 즉 다이스케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바로 미치요 때문이고 일본제국주의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 후'는 한 마디로 불길한 예언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 본질은 탐욕이고 그에 따라 조선의 강제 병합은 기필코 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예언의 소설인 것이다. 우리는 다이스케의 미래를 '문'에서 보게 될 것이다. '문'에 나오는 부부는 여러모로 다이스케와 미치요 커플의 판박이다. '문'의 주인공 역시 다른 남자의 여자를 빼앗았고 남자는 거기에 큰 상처를 입어 만주로 떠나 버린다. 주인공은 만주를 두려워하는데 그건 만주로 떠난 여자를 빼앗긴 남자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만주의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뒤로 더욱 만주와 그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분명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보면서 일본마저 패망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후반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불안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선생님도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며 아름다운 부인과 단둘이 은둔해 살아간다. 그가 스스로를 죄스럽다고 여기게 된 이유는 지금의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서 빼앗았고 그(이 남자는 오로지 이니셜로 표기되는데 공교롭게도 'K'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님은 메이지 천황이 죽은 날 할복한다. '마음'은 말하자면 '그 후'부터 시작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사유하는 나쓰메 소세키 경로의 최종판이다.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의 관계의 헤아림이 그만큼 깊고 거기에 대한 죄의식도 크다. 


  소세키는 메이지 정신에 입각한 일본만의 진정한 근대를 추구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의 일본은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거기엔 메이지의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공생은 없었고 오로지 지배와 착취 그리고 탄압만이 가득했다. 예민한 지성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다가올 비극을 내다봤다. 그는 그것을 '그 후'부터 일련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나 죄의식을 안고 사는 자로서 글로나마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그렇지만 '그 후'가 남기는 여운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시대의 폭압 아래서 홀로 분투하는 고독한 영혼의 그림자가 짙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적 상황과 아픔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다 그대로 집어넣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이후로 갈수록 더 깊어졌다. 감히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역사보다 더 섬세하고 사려 깊게 1910년대의 일본과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려준다고.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이어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역사적 차원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이것이 새로운 번역과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문'을 기다리는 커다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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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0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E-9 2014-12-18 01:56   좋아요 0 | URL
이 새벽에 아무개님 댓글을 발견하네요.
저야말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리뷰를 읽고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말만큼 절 기쁘게 하는 것도 없어서요.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아무개님의 마음에도 드는 작품이길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