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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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나비, 흰 꽃에

  조그만 나비, 조그만 꽃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기나긴 근심은, 긴 머리카락에

 어두은 근심은, 검은 머리카락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부질없이, 부는 태풍

 부질없이, 사는가 속세에

  흰 나비도, 검은 나비도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나쓰메 소세키의 네번째 장편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바로 이 신체시에서 나온 것이다. 한 여인이 이 구절을 노래로 부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시처럼 태풍 속에 있지 않다. 그녀는 부르조아의 자녀로 태풍으로부터 안전하다. 막강한 재력과 권세가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르는 이 시는 그냥 시다. 현실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말들의 무더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들은 그녀와 비슷한 부르조아인 나카노는 시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않는다. 그가 말하는 건 그저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는 것 뿐이다. 삶의 태풍으로 부터 안전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볍다. 사진 한 장의 두께만큼 현실의 무게는 얄팍하다. 얄팍하기에 모든 것이 아름답다. 전쟁의 참화를 찍은 사진도 얇디 얇은 2차원의 평면이 되면 예술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들에게 닥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아름답다. 울타리 너머의 관찰자로서만 만날 수 있기에 어여쁘다. 하지만 지금 태풍 속에 휩싸여 있는 나비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삶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닐 것이다. 그건 오로지 길고도 어두운 근심일 것이다.

 태풍의 날카로운 손톱에 언제 어느때 날개가 짓이겨질지 모르는 그들은.

 

 그런 나비들이 소설에 있다. 이 소설은 주로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말한 나카노라는 남자다. 다른 둘은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라는 나카노의 친구인데, 바로 이들이 그런 나비들이다. 그렇게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등장인물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근심 나아가 절망이나, 누군가에게는 그저 진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하다는 감각에는 모르핀과 비슷한 것이 있다.

 갑각류와도 같이 피부에 살갑게 와닿는 감각이 없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살갗을 떨리게 하는 진짜 경험들이 그대로 휘발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도 전혀 뜨겁지 않은 브라운관의 화재 장면처럼. 아무런 진정성이 없다. 그러니 영화의 여주인공이 곧 화마에 휩싸일 위기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안심하고 여배우의 코가 성형인지 아닌지 신경쓸 수 있는 것이겠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나비들에겐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브라운관 속 태풍일 뿐이다. 조용한 재즈가 흐르고 있는 방에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기대어 와인을 마시며 보는 텔레비젼 속의 태풍은 리포터가 위기라 떠든다고 한들 그 무게감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어쩌면 한 순간의 흥미 이상도 되지 못할 존재감. 그저 잠깐 피어났다 내리는 비에 곧 떨어지고야 말 꽃잎과도 같이 쉬이 잊혀지게 될 것이니 무엇하려 마음에 담아두겠는가? 하니, 제아무리 나쓰메 소세키가 절박하며 썼다고 하더라도 심드렁해질 수밖에.


 그러니 이 소설의 주역은 울타리 바깥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나비들이다. 소세키는 그들을 위하여 '태풍'을 썼다. 그 역시도 도야 선생만큼이나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일본에 대해 절망했고 스스로를 태풍 속의 작은 나비일뿐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니 결국은 자신을 위로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나비들을 위한 소설이다.


 삶의 무거움에 짓눌리고, 삶의 비루함을 느끼며, 삶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을 위해. 그 때도, 오늘도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험난한 태풍 속에 내던저져 언제 뜯겨나갈지 모르는 작은 날개를 힘없이 끌어안고 버터야만 하는 나비들...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을...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중 가장 인기 없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참 보기 힘들었다. 지금 나온 현암사 판본이 국내 초역이니 말 다했다. 그래도 그 오랜 기다림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렇게 근사한 장정으로(실물은 사진보다 더 근사해 보인다. 더욱 좋은 것은 소세키와 태풍에 대한 관련 사진들이 앞부분에 도록처럼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책엔 흔히 나왔지만 지금은 사라진 편집 방식이라 아쉬워하던 것중 하나인데 이를 다시금 되살려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고(古)소설이라 할만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책이 더욱 옛스러운 맛을 간직하게 되었다.) 재회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은 내용이다.(하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내게 불만족을 주기란 갑자기 우주에 찻주전자 위성이 나타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읽는 내내 어째 꼭 지금의 나를 위해 나와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내게 세상은 까만 밤과도 같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었구나 느끼는 중이다. 칸트는 악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들에겐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예외가 되려는 족속들이 바로 악마라고. 바로 그런 악마들의 잇단 출현을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직과 상식 그리고 진실은 비웃음 거리나 되는 바보들의 미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아바가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고 노래를 불렀다지만 그 말 그대로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THE LOSER HAS TO FALL'이라는 가사 그대로 힘없는 약자는 쫓겨나고 그들의 호소는 자신의 이권이 없으면 도통 열릴 줄 모르는 편협한 귀에 가닿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고등학생 절반이 10억을 준다면 감옥을 가도 괜찮다고 대답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그런 세상이다. 바보들의 미덕을 자신의 신념으로 끌어안고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고 난감한 세상. 그런데 소설 속 도야 선생이 꼭 이와 같았던 것이다.

 

 도야 선생에겐 신념이 있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일본에서 가진 돈이 인격을 말해주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이 말은 곧 삶이 돈을 추구해서는 초라하다는 것이다. 삶은 보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도구이며 현재 일본에 만연되어 있는 황금만능사상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그는 갓 부임한 시골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연설한다. 그게 화를 부른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 모두가 애꾸인 세상에서 두 눈을 가지고 보려는 자는 질시와 증오를 받게 마련이다. 돈이 곧 인품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그 지방의 유지들, 비슷한 사고를 가진 교사들이 주동되어 학생들을 선동하고 결국 도야 선생을 학교에서 내쫓아 버린다. 직업을 잃어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졌으나 그는 그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이 그가 가진 신념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대할 수록 그는 오히려 내부의 신념을 더욱 벼린다. 갈고 갈고 또 간다. 노력으로 공부로 더 이상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신념만으로 꿋꿋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가혹한 태풍 속에서 이대로 부서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한 이상향에 도달할 때까지 날개짓을 그치지 않도록.

 

 그는 거울이 아니라 등불이 되려 한다. 누군가의 빛에 의해 비로소 반짝일 수 있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등불. 그래서 오히려 세상마저 그 빛으로 밝힐 수 있는 등불이.

 

 여름밤의 등불이 방황하는 곤충들을 부르듯이 그 빛 속으로 홀연히 같은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고 있던 나비 하나가 날아든다. 그가 바로 다카야나기다. 소설에서 그는 중간자적 존재다. 도야 선생처럼 문학자이며 그처럼 순수한 이상을 품고 있지만 반면 나카노가 가지고 있는 성공과 인정이라는 현실적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가난한 고학생으로 생활해온 다카야나기는 언제나 나카노가 보여주는 부의 달콤함 앞에서 주눅이 든다. 문학가로서 배우고 익힌 경험으로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만 집세를 벌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번역을 억지로 해야 하고 몇 푼의 돈이 없어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없게 될 때마다 그는 새삼 돈의 힘을 절감한다. 그러다 그는 한 잡지에서 우연히 도야 선생의 글을 읽고 광명을 찾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헤아려 대답을 내놓은 듯한 그 글에서 정말 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다카야나기는 도야 선생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이 내쫓겼던 중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뿐 아니라 선생에게 선동되어 같이 선생을 내쫓기까지 했으므로 언제고 꼭 사과해야지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을 찾아간다. 정확히는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의 지표로서 그를 가까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홀로 독야청청 하여도 얼마든지 태풍 속에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이 소설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방황하는 자,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나온다. 위에서 저런 식으로 줄거리를 말했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모든 작품들이 으례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어떤 확실한 결말을 주지는 않는다. 다카나야기가 도야 선생을 만난 게 고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고민으로의 열림이듯이.

 

 소세키, 그에겐 동화의 'EVER AFTER' 따위는 없다.

 

 그의 소설 '문'처럼 지금 겨우 겨울을 넘겨 여름이더라도 그 겨울은 또 다시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렇게 삶엔 삼한사온이 있고 사계절이 있다. 어느 땐 이게 진리야 확신하더라도 또 어느 땐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못미더워하는 법. 한 번의 깨달음으로, 한 번의 의지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다. 바람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어제의 해답이 오늘은 오답이 될 수도 있고 그 오답이 또 내일은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소세키는 그의 또 다른 소설, '한눈 팔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세상에 정리 가능한 일이란 거의 없다. 한번 일어난 일은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다만 여러 모양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라고.

 

 삶은 그 마음에 무엇을 품었든 늘 시험의 연속이다. 비는 언제 내릴지 알 수가 없고 우산이 꼭 준비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산이 없을 때에도 쏟아지는 폭우를 견딜 수 있도록 그 부단한 시험을 거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연단해 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아마도 도야 선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이상형인 듯 하다. 그렇다면 다카야나기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큰 포부를 안고 돌아왔지만 태풍과 같은 일본의 현실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다모클레스의 칼'인지도 모른다. 다카야나기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흔들릴 때마다 도야 선생을 찾았듯, 나쓰메 소세키 역시 그 품은 신념이 세파에 흔들릴 때마다 마음의 중심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왕좌에 앉을 때마다 자기 머리를 향하도록 위에 칼을 놓아둬 언제 이 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자각했던 다모클레스 왕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신념을 투영시키고 선택한 하나의 모델로서 가지게 되는 소설의 의미는 비단 나쓰메 소세키에게만 한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결이 없는 소설이 바로 우리네 삶의 현실적 모습그대로인 것을 감안한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어쩌면 바로 우리 모두의 모델로써 이 소설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도야 선생의 말들은 소설로 놓고 보자면 그리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한 에세이나 연설문에 보다 잘 어울린다. 더구나 다카야나기가 직접적으로 도야 선생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잡지의 글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이런 식의 문장과 인용이 분명 소설의 미학을 그르친다는 것을 소세키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분명 이토록 무리해서 넣은 것엔 이유가 있을 터. 그건 어쩌면 소설적 재미보다 다른 것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다카아냐기라 여기는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이나 격려 같은 것을. 진정 자유로워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이며, 그리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이다와 같은 격려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개짓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데 소세키가 다가와 아직은 이르다면서 내 등을 토닥이며 저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이 책이 나를 위해 꼭 나와준 것만 같았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는 나비떼를 본 적이 있다. 아주 작고 연약한 나비들이었다. 그 먼 거리를 횡단하면서 그들 역시 더러는 바람에 날개가 짓이겨지고 파도의 몸 전체가 휩쓸리기도 했을테지만 날개짓을 멈추거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그 작은 날개로 그들은 바라는 대로 대서양을 건넜다. 그래, 우리에게 태풍으로부터 지켜줄 울타리는 없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리고 이 작은 몸이 어디에 내동댕이 쳐질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게 울타리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오늘 이만큼 왔다고 하더라도 내일 또 어떤 바람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되는 날개짓에 보다 의미를 두며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영화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가 이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세상엔 발 없는 새가 있어.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다더군. 그 새는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 때는 그 새가 죽을 때야."

 

 이왕이면 나 역시 멈추는 순간이 그 때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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