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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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는 나쓰메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관두고 아사히 신문의 전업작가가 되어 '우미인초'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한 작품이다. 1907년, 6월에서 10월까지 '우미인초'를 연재하고 2개월을 쉰 다음, 1908년 1월부터 4월까지 연재했다. '우미인초'는 꽤나 인기를 얻어 백화점에선 '우미인초'란 이름을 붙여 목욕가운을 팔았고 귀금속점에선 '우미인초 반지'를 팔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춘원 이광수가 '우미인초'에 영감을 받아 근대 최초의 장편 소설이기도 한 '무정'을 썼다. 다소 불안한 가운데 시작했던 첫 연재 작품이 성공을 거둔 탓인지 소세키는 두 번째 연재물에선 더욱 과감하게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문학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렇게 해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세계에서 가장 이채로운 빛을 발하는, 때문에 가장 소세키답지 않은 소설로 늘 손꼽히는 '갱부'가 태어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열 아홉의 청년이 죽을 결심을 하고 가출한다. 게곤 폭포나 아사마 분화와 같은 유명한 자살 명소를 찾아 가려고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갱부가 되지 않겠느냐며 접근해 온다. 호기롭게 가출은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더없이 막막하고 외로웠던 그는 별 생각도 않고 그만 승낙하고는 사내를 따라 광산으로 간다. 평생 서생으로만 살아온 탓에 정식 광부는 되지 못하고 조수가 된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정반대인 거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갱부가 되어 남으리라 생각하고 버티지만 결국 폐가 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게 끝이다. 소설은 전혀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점에서 문득 끝난다. 더구나 그 때까지 끌어온 이야기도 이거다 싶은 줄거리가 없을 정도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에 이 갑작스런 종결은 더욱 황망하다. '기승전'만 있고 '결'은 없었던 '풀베개'와 똑같다. 소설은 딱 절반을 잘라 전반은 사내에게 이끌려 광산까지 오게되는 과정을, 후반부는 광산에서 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게 전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완결이 아닌 과정의 소설이다. 결말의 지점에서 마치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오로지 그 하나의 끝을 위해 존재해 온 것인 양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결말을 없애버려 소설의 모든 부분이 저마다 존재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소설인 것이다. 즉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죽음과도 같은 결말 위에서 독자 자신이 거쳐왔던 소설의 시간을 과거로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시간을 지금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재로 만들어 참여하게끔 만든다. '갱부'는 소세키의 그런 의도로 쓰인 소설이다.


 이것은 소세키의 문학관과 연결된다. 앞서 '갱부'는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으로 더욱 밀고나간 작품이라 했다. 그렇다면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건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다. '하이카이적인 것'이란 쉽게 말해 하이쿠를 탄생시킨 원천 같은 것을 말한다. 하이쿠는 바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봉건 체제가 몰락하면서 발전한 '하이카이렌가'가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더불어 점점 형식화되자 바쇼는 그에 반발하여 그것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쿠'가 되었다. 즉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란 형식 자체가 전무했던 본래의 하이쿠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소세키는 평생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서양의 근대에 맞서 일본적인 것을 수호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의 인물이다. 이는 곧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보다 거대한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예로 '도련님'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계 보다는 국수주의에 물들어 점점 제국화 되어가는 일본에 반발해 나온 작품이었다. 그가 하이쿠를 문학의 이정표로 가져온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서양 문학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선망을 가졌던 서양 문학이 곧 종말하리라 예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바쇼를 절망하게 했던 도쿠가와 체제의 '렌가'와 같았다. 그것은 너무 형식적으로 굳었고 그 규격화되다시피한 획일적인 형식 탓에 스스로 아무리 리얼리즘이라 표방하고 있었어도 존재하는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쇼가 그 '렌가'는 렌가가 아니라고 보았듯이 소세키도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의 강의에서 소설가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자신의 심리적, 감각적 체계를 통해서 '비아(非我)'인 세계의 객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서양 문학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지 못했다.


 일단 '나'가 사라져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이룩된 3인칭 관찰자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품이 특정한 상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어디나 널리 통용되는 보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협소한 한 개인이 보고 느낀 것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칭의 이동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시켰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문학은 쉽게 진리를 말하고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로까지 자처하면서 스스로 권위를 쌓아나갔다. 그러자 작가는 독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진실로 작가와 독자는 화자와 청자라는 차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대등한 개인들의 관계일 뿐이었으나 작가와 문학이 진리의 대변자로 자임하면서 독자는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버렸다. 그 수도사처럼 독자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신과도 같은 작가가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해석하는 게 전부였다. 문학이 진정 근대를 이룩한 계몽의 산물이라면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대화와 토론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독자가 할 수 있는 건, 누가누가 작가의 뜻을 제대로 찾아내나와 같은 정답 맞추기 밖에는 없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서 문학 수업에서 자주 들었던 '밑줄 좍'이야 말로 실은 문학이 죽었다는 선포에 다름아니었다. 문학은 그 형식이 권위가 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했을 때 이미 수명이 다했던 것이다.


 서양 문학은 개인을 '개인'이 아니라 '대중'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이 아닌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내 식대로 사는 게 아닌 '보편'적인 방식으로 살게 만들었다. 서양 문학은 개인의 자유와 거기에 뒷받침된 가능성을 보편의 굴레로 구속했다. 그렇게 '국민'을 만들고 개인을 '국가'아래 종속시켰다. 문학이 국민국가의 도래를 가져왔다고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했던 건 이런 이유였다. 당연히 문학의 진정한 사명인 세계의 객관적인 진실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문학이 독자에게 주입한 것은 기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쉽게 보편의 탈을 썼고 '누군가'의 눈과 판단은 '우리'의 눈과 판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눈과 내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이식되어버린 남의 눈과 머리로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소설과 동시에 탄생했다. 사실은 문학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소세키는 그것을 보았다. 문학이 결국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세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의 산물임을 밝히는 것. 그 개인조차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실수도 하며 인간적으로도 좀 모자란 한계 많은 존재로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대변자이니까. 둘은 서양 문학의 규격화되다시피한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그러한 형식으로부터의 이탈이야말로 문학의 진정한 모습이다. 셋은 결코 보편이나 진리를 자처하지 않는 것. 섣불리 다 안다고 주제넘게 나대지 않는 것. 어디까지나 이건 불완전한 한 인간의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래야 독자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카이적인 것'의 실체다.(물론 소세키의 제안에 따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바로 이 '하이카이적인 것'이 '갱부'에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갱부'를 읽다보면 참 많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바로 홍상수의 영화 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그 영화에서 고현정이 분했던 인물은 자꾸 자신을 나무라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이 대사에서 '나'를 '세상'으로 바꾸면 그대로 '갱부'에서 소세키가 독자에게 정말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될 것 같다. 즉 '삶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불확실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섣불리 다 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마라.는 것.



 사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내내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의 진심은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가 분한 인물인 '문호'의 입을 벌려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폭발했던 적이 있다.


 니가 어디서 줏어들은 게 널 고질(홍상수식 조어로 극중에서 문호에게 '교수님 저질 같아요.'라고 말하자 문호는 그럼, 너는 고질이냐? 고질이 뭐냐? 라고 대꾸한다.)로 만드는 게 아냐. 너 책 많이 읽었어? 니가 읽은 그 책들이란 거 있지. 그게 다 죽은 새끼들 찌꺼기야. 니가 믿는 것들이란 다 그런 새끼들의 자기 정당화야. 아전인수야. 알아? 딱 니가 아는만큼만 갖고 애기하는 거야. 마. 우리가 뭘 아니? 뭘 확실히 아니? 왜 꼴값을 해. 씨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통렬하다. 바로 이 말을 나쓰메 소세키는 '갱부'를 통하여 할 수만 있다면 독자나 당대 일본 사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해주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세키는 진심으로 문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갱부'를 과정의 소설(소세키 스스로는 반복적으로 '갱부'는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소설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쓴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때?'하는 식으로.


 '갱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하이카이적인 것'은 바흐친이 소박한 농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밝혀냈던 것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다름아닌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라 정의한다. 쉽게 말해 옛날 조선 시대의 한 장터에서 양반을 조롱하는 마당극을 보고 있는 민중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기존 권위를 풍자하고 해학하여 실추시키고 자신 역시 그 세계에 대등한 참여자임을 각인시킨다. 풍자와 웃음은 그들의 무기이며 연대를 위한 끈이 된다. 마당극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곳곳에서 구경꾼들의 이런 저런 말들도 오고간다. 마당극은 한껏 열려있다. 그런 화자와 청자 사이의 넘나듦이 무한히 가능한 공간이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세계가 있으며 그 모든 세계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마다 존중받아야 하 개체로서.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란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갱부'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작품이다.


 '갱부'는 1907년에 쓰여졌다. 시점을 생각하면 소세키가 '갱부'에 투영한 태도가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바야흐로 일본은 파시즘적인 제국의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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