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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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작품들을 거듭 읽어가다보면 작가도 세월따라 변해간다는 걸 알게됩니다.


삶의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말이죠. 나쓰메 소세키도 그러합니다. 분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같은 초기의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은 '문'이나 '한눈팔기'와 같은 후기의 나쓰메 소세키와는 많이 다릅니다. 초기의 소세키는 '도련님'의 주인공과도 같이 세계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와 당당하게 대결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임에 반해 후기의 소세키는 '문'의 주인공에서 보듯 세상 앞에서 한없이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죠. 아마도 '도련님'을 읽고 바로 '문'을 읽게되면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련님'이 1906년에 나왔고 '문'은 1910년에 쓰여졌는데 불과 4년만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마도 그렇게 된 것은 그의 네번째 소설'태풍'에 나왔던 '도야 선생'과 같은 경험을 그 역시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도야 선생처럼 자신이 옳은 신념을 가지고 올곧게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 역시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러다 점점 변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만을 절감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절감을 가져온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태풍' 이후로 내어놓은 소설들이 계속 실패한 것에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세키는 1907년, 당시 재직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합니다. 1년에 1번 100회 정도의 연재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매달 200엔을 받는 아사히 신문의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는데 당시 연봉 800엔으로써 많은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생활해야했던 소세키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죠. 또 그가 아사히 신문 입사에 대한 일종의 소감으로써 쓴 글을 보면 당시 소세키는 대학 강의라는 것에 상당히 지쳐있었던 듯 합니다. 그 글에서 그는 자신이 대학 강의를 그만둔 것을 '개'의 탓으로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꽤나 집중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바로 뒤이은 대학을 떠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 든 도서관에서의 일화를 보면 '함부로 큰 소리로 말하거나,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곤 해서 (책 읽는) 고상한 취미를 방해하는 정도가 막대했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어쩐지 소설 '도련님'에서 수학 선생이 되어 시골중학교로 부임한 주인공이 자신이 성심껏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놀려먹기까지 해서 잔뜩 반감을 갖게 되는 부분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도련님'은 흔히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인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건 이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나쓰메 소세키는 정신병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신경쇠약이었습니다. 굉장이 예민한 성격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죠. '도련님'의 주인공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물론 '도련님'의 주인공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동경제국대학 영문학 강사 시절엔 제자 한 명이 폭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그 충격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소세키의 아내도 신혼 때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집 부근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젊은 날의 소세키는 참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정이었으니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강의 환경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 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대학 강사 생활에 많이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소세키를 보다 못한 친구가 그렇게 정 괴로우면 글이라도 써봐라고 해서 썼던 게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소세키는 100% 재택근무를 보장받아 일상의 번거로운 잡사는 잊고 마음껏 자신이 꿈꾸던 문학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카프카가 가장 바랐던 생활을 그는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된 연재 소설 '우미인초'는 그러나 너무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통속적이라 소세키 특유의 매력을 다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미인초'는 우리나라의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무정'이라는 소설도 쓰게할만큼 당대에 영향력이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뒤의 '갱부'는 그만한 반응조차 받지 못했죠.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이후 내내 성공의 가도를 걸어온 그에게는 꽤 통증이 심한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존심마저 강했던 그였으니 그 아픔은 더욱 깊었겠죠. 아마도 그래서일까요? 이후 '산시로'는 변모된 모습을 보기에 됩니다. '갱부'는 언뜻 보면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슷합니다. 그 소설에서 인간 사회의 관찰자 역할을 했던 고양이를 19살의 소년으로 바꾸어 놓으면 '갱부'가 되지요. 그렇게 '갱부' 역시고 관찰자의 소설입니다. 자기가 속한 세계가 싫어서 가출한 소년이 우연히 한 갱부를 만나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긴 탄광촌으로 따라가지만 건강 문제로 정작 갱부는 되지 못하고 사무원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한 편으로 거기엔 소년이 본 탄광촌의 실상이 잔뜩 그려져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갱부'는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작품입니다. 자연주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주력합니다. '갱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산시로'는 다릅니다. 세계 보다는 '나'에 더욱 주안점을 둡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내가 어떻게 그 세계를 해석하는가, 세계가 내 마음에 드리운 잔영을 독해하는데 더욱 주안점을 두는 것이죠. '산시로' 이후로 내면의 심리묘사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반영하죠. '도련님'과 '문'이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세계에 대한 태도의 극심한 차이는 아마도 이것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은 세계를 앞에 두고도 전혀 해석을 하려하지 않는 반면 '문'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세계가 자신에게 남겨놓는 것에 대해 해석하려하니까요. 즉 후기의 소극성이란 정말 사람이 소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 특유의 성향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산시로'는 다시금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소세키의 전성기를 되찾게 해 줍니다. 그 뒤로는 '한눈팔기'도 성공하여 주욱 안정적인 문학 세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죠.





 재밌는 것은 '도련님'과 '산시로'가 좀 비슷한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원래 있던 곳에서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죠. 물론 '도련님'에게는 '산시로'와 같은 가슴 아리는 짝사랑은 없습니다만. 정말 주목할만한 이 두 작품의 차이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틀리다는 것이죠. 당대에 '모던 걸'이라 불렀던 신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산시로'에는 주인공이 동경했던 '미네코'라는 아주 매력적인 신여성이 등장합니다. 소설이 연재될 당시 그 성공이 바로 미네코 덕분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꽤나 소세키가 긍정적으로 묘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에선 전혀 그렇지 않죠. 여기서 신여성이란 존재는 세속적인 계산으로 신의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속물일 뿐입니다. 원래 고가 선생이랑 혼인을 약속했다가 그의 집안이 기울자 이내 교감 '빨간셔츠'로 갈아타는 '마돈나'라는 신여성에게 도련님의 주인공은 속물인 '빨간셔츠', '알랑쇠'에게 하듯이 경멸을 보냅니다. 이렇게나 여성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소세키 개인의 경험이 반영된 탓입니다. 소세키는 '삼각관계'를 많이 쓰기로도 유명하죠. 그랬던 것은 그 역시 '삼각관계'를 아주 뼈져리게 겪었기 때문입니다. 1895년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그야말로 '어두운 시절'이었죠. 요코야마 영자 신문에 기자로 응시했으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낙방했고 거기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을 거절하고 친한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네, 소세키는 그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삼각관계를 이루었고 결국은 패했습니다. '산시로' 이후로 '상실감'이 그토록 빼어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경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소세키는 꽤나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거든요. 그러다 돌연 미쓰야마라는 시골 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바로 그 곳이 소설 '도련님'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그 학교에서 느꼈던 것을 '도련님'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인데 그렇다면 당시 소세키가 여성, 그것도 신여성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지는 능히 짐작이 되시죠? 바로 그 경험의 반영으로 '도련님'에서 신여성은 그렇게 묘사된 것입니다.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 역시 고가 선생처럼 자신의 무능으로 여성을 빼앗겼을 지도 모르겠어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원래 의도였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세키의 실제 삶과 관련하여 조금은 중구난방으로 '도련님'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그만 이렇게 이야기 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앞서 작가의 변화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건 바로 첫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 사이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태도라는 견지에서 볼 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적인 위치를 고수하지만 '도련님'은 관찰을 떠나 세계와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Watch It'에서 'Do It'으로 변화한 것이죠. 이 관점의 변화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이건 단순히 '도련님'이 두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라거나 자전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여기엔 분명 당시 일본 사회가 처한 상황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그건 바로 1904년 일어난 러일전쟁입니다.



물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과는 그것을 쓸 때의 임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렇게 꽤나 개인적인 이유로 쓰였습니다. 애초에 작품으로 발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소설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우선 1장 정도만 쓴 것을 한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그것도 좋아서 쓴 작품이기에 '러일전쟁'이 일본 사회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는 못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도련님'은 본격적인 문학에 대한 열의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소세키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웅지'였습니다. 원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세키는 문학론을 먼저 쓰려고 했다죠. 영국에서 실제 서양 문학을 사사받았지만 그걸 일본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저 답습이 아닌 일본에게 알맞은 문학론을 정립하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좌절한 문학론이 '도련님'의 모습으로 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불화'는 사실 '빨간 셔츠'나 '알랑쇠' 그리고 '신여성'이 뜻하는 바로 '모던'이라는 근대와의 불화이기 때문이죠. '빨간 셔츠'와 대립각을 이루는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의협심이 강하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분노하면 행동부터 앞서는 데다 옳은 것은 어떤 상황이든 관철되어야 하는, 융통성마저 없는 마치 사무라이와도 같은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근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인지 바로 그 신념의 고수가 비슷하게 근대적인 가치관을 부정했던 허먼 멜빌의 '바틀비'를 많이 연상시킵니다. 근대화된 조직 내에서 그 어떤 명령에든 '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바틀비는 그 자체로 우리가 근대라는 것을 너무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를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었죠. 그렇게 무조건적인 추종만은 아닌 스스로 돌이켜보고 헤아리는 것. 소세키도 '도련님'을 통하여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소세키가 '도련님'의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많이 듣게끔 연출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이런 저런 것을 끊임없이 듣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신념이 강해서 자기에게 말하는 타자의 입장에서 헤아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과 맞춰보는 게 고작이죠. 성숙의 정도를 타자의 입장에 얼마나 잘 서 있을 수 있느냐로 가늠한다면 도련님의 주인공은 확실히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소세키도 그것을 잘 알았던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제목을 일부러 '도련님'이라고 지었겠죠. 소설에서 '도련님'은 어릴 때부터 주인공을 보살펴왔던 유모 기요가 주인공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기요는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가족도 포기한 주인공을 유일하게 따스하게 품어주는 주인공에게는 그야말로 어미새가 있는 둥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주인공은 그런 기요와 헤어져 멀리 시골까지 내려와 교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기요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애틋한 사랑 한 번 느끼지 않은 채 오직 다시 기요와 같이 살 날만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인공은 독립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영원히 보호 받기를 꿈꾸는 미성숙한 존재. 당연히 소세키는 '도련님'을 붙여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대로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소설에서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빗대어 고양이로 여겼었죠. 그래도 이제는 뭔가 할 수라도 있는 사람이라는 '도련님'이 되었으니 조금이나마 발전했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스스로를 고양이나 도련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 지금의 일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변해버렸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서양 열강이었던 러시아. 일본은 막상 전쟁을 벌이게는 되었지만 설마 자신들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그랬는데 이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건 일본에게 그들 역시도 이제 서양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한 마디로 '러일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단절이었습니다. 바로 '메이지 유신'와의 단절이었죠.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이란 본디 서양의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반 서양적이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최고지휘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알려진 대로 '정한론'을 주장했는데 그건 서양 열강에의해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조선을 먼저 개국시키고 근대화하도록 강하게 압학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100% 신뢰할 수 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라는 한 나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범 아시아주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을 오로지 아시아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그 아시아를 침략해오는 서양 열강과 싸우려 한 것이죠. 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는 이러한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깡그리 기화시켜 버렸습니다. 강자가 되었던 그들은 이전까지의 아시아 연대는 부숴버리고 오로지 일본 한 나라만의 이익 극대화에 나선 것이죠. 사이고는 실각되어 메이지 10년에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가 죽고 사이고의 정한론을 배척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만의 국력 강화를 주장하며 실권을 장악해버렸습니다. '도련님'이 쓰여진 건 그런 시기였습니다. 주인공과 산미치광이가 보여주는 모습이 '메이지'스럽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반감은 당시 일본에 대한 소세키의 반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아예 소설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하지요.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 자리에서 학생들끼리의 난투극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학생들과 미친듯이 싸웁니다. 어쩌면 그 정도로 소세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당대 사회에 대한 거부가 있었기에 '도련님'이 이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후기의 헤아림이 부족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로 점점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나라가 되어갑니다. 아무리 돌팔매질을 해도 변하는 것 하나 없는 일본. 점점 거대해져만 가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돌팔매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일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자신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후기의 작품들은 그런 이유로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분노하는 것만큼이나 그 분노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소세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문학을 통해 삭여왔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련님'은 정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글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러일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도련님'이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글이 참 길어졌습니다. 당신도 지치셨겠죠? 어리석게도 이제와서야 왜 이렇게 썼나 자문하게 되네요. 아마도 오늘날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제 마음의 뭔가를 건드린 탓이겠죠. 나쓰메 소세키로 하여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을 쓰게 한 것처럼 말이죠. 결국 책을 읽는 것이나 글을 쓴다는 것도 나름대로 견뎌가기 위한 자기 치유의 일환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지식을 얻는다거나 남에게 읽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도련님'을 읽고 글로 우려내면서 이렇게 오늘을 견딥니다. 당신도 오늘 이 까만 밤 아래 어디에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겨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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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해져가는 세상 앞에서 나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저는 나스메 소세키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읽어야지 하고 책만 사놓고...
실은 아무 지식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헤르메스님의 글이 참으로 반가왔습니다.

그렇군여, 오늘을 견디기 위해서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마침 새로 시작한 일이 다소 심심한 곳이 있어서 여유가 있을것 같기도 하네요.
저랑 같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쓰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무게. ㅠ

아래 페이퍼의 천사학을 제가 요즘 읽는데, 저는 천사학이라는 제목만으로 홀랑 구입해서 소설인줄 몰랐답니다... 그런데, 트와일라잇 종류의 판타지더라구요... 평이요, 음....... 음....... 음......

ICE-9 2013-12-19 00:3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글을 반가이 맞아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요즘 이사 준비도 있고 해서 정말 정신이 없네요. 그래서 알라딘 서재에 이렇게 마녀고양이님의 좋은 댓글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ㅠ ㅠ
요즘은 정말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날 치유하기 위해서 글을 읽고 쓰고 있는 듯 합니다. 도련님 리뷰도 너무 그 마음에 의탁해서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냥 그러고 싶네요. 어떻게든 견뎌가려는 몸부림으로... 천사학 찜해놨는데 마녀고양이님 말씀을 들으니 걱정되네요. 나중에 돌덩이같은 충격도 부드러움으로 감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읽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