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작년에 몇 번 마셨어요?”

내게 지난 한해 동안 술을 마신 횟수를 묻는 분이 몇 있었다. 예년과 달리 내가 술일기를 제때제때 챙겨쓰지 못한 탓인데, 컴퓨터 앞에 앉은 김에 작년 통계를 뽑아 봤더니 131번이다. 매우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소주 한병을 마셨던 술자리와 소주 한병을 넘게 마신 낮술을 제외한 거니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된다. 사실 사흘에 한번을 마셔도 120번이니 더 줄여야지 않을까?


새해라고 뭐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2007년을 맞는 내 각오는 제법 단단했다. 첫 출근을 한 어제 아침만 해도 비어 있는 스케쥴란을 보면서 뿌듯해하기도 했으니까. 지인에게 말했다.

“나 오늘부터 학교에서 합숙하며 일할 거야!”

그럼으로써 돼지해에 돼지에서 벗어나자는 음험한 욕망도 있었는데, 운동을 제법 하는 내가 살이 계속 찌는 이유가 남들이 지적한대로 술 때문이니, 학교에서 살면서 영양이 부실하기로 유명한 학교식당 밥을 먹고 산다면 다이어트도 저절로 되지 않겠느냐는 것.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일이 엮여서 점심부터 삼겹살을 구웠으며-근데 거기 가보니 새해 둘째날 고기를 먹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모교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이번주 금요일 지도교수댁에서 신년회 있으니 오시랍니다”란 연락을 받았고, 금요일은 원래 술약속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학장님이 “오늘 보직 맡은 사람들끼리 저녁이나 먹지”라고 말한 것. 십년 이상 되는 선배들이 소싯적에 나이트에 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조용히 술잔을 비웠고, 술자리가 파했을 무렵엔 제법 술이 취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에 갔고, 열심히 소주를 비웠고, 도대체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우리집이다. 귀소본능을 발휘해 준 내게 고마워하는 찰나, 둥그렇게 뭉쳐진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M 자가 선명하게 그려진....


 

저, 저것은.....! 갑자기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려진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사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리고 집에서 그걸 우걱우걱 먹고 있는 모습이. 전에 냄비를 태워먹은 이래 라면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보호본능이 나로 하여금 햄버거를 사게 만든 것. 자, 이제 따져보자. 삼겹살에다가 복 지리를 먹고, 안주를 먹고, 정종에다 소주를 잔뜩, 거기에 햄버거까지-이게 다이어트 원년을 선포한 첫 출근날 내가 먹은 것들이다. 술을 먹던 이가 갑자기 술을 끊는다는 건, 그럼으로써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사람이 보직을 맡고 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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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적오리 2007-01-0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저랑 다이어트 내기 하실래요?

Mephistopheles 2007-01-0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이라는 글자에 화들짝 놀란 메피스토...
(학생들은 방학인데 교수님은 바쁘신가 봐요..^^)

H 2007-01-0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자 봉투의 정체가 맥도널드였다니..ㅋㅋ
저희 동네 맥도날드는 24시간 운영하더라구요.
저도 새벽 3시에 후렌치 후라이 사 먹으로 간 적이 있는데..-_-


하이드 2007-01-0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황금돼지해~

짱꿀라 2007-01-0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시님은 꼭 올해에는 성공하시리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근데 술 끊으시면 술 이야기가 혹시 중단되는 것 아닌지요.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인에요. 그러면 마태우스님을 사랑하는 독자들(저를 포함해서)이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킬 염려가 있사와요.^^

해리포터7 2007-01-0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보호본능이 제대로 작용했군요.

moonnight 2007-01-0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이번주엔 어쩐 일인지 계속 골골하고 있어요. 저도 술을 좀 줄여야지. 하고 목표를 세웠답니다. 함께 노력해요! ^^

무스탕 2007-01-0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하나도 다이어트 맘 먹고 젤로 먼저 한게 술 끊은거에요.
(문제는... 여자 후배라는거... -_-)
그랬더니 정말 날씬해 졌어요! 물론 하루아침에 이룬 업적은 아니지만 정말 이뻐졌어요.
마태님도 분명 크게 영향을 미칠거에요.
옷 얇게 입는 여름을 기대할테야요~ ^^

춤추는인생. 2007-01-0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요즘 매일같이 체중을 제는대요. 그전날 라면먹는것보다도
술먹는게 훨씬 타격이 크다는걸 알았어요... ;; 술은 정말 무서운애예요.

클리오 200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끊기 전에는 다이어트가 힘드리라고 봅니다. 보직을 맡고 있다면 더욱... ㅋㅋ

미래소년 200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M자에 저도 깜딱! 놀랐습니다 ^^
그나저나 돼지해에 님은 "식복" 하나는 보장받으신 듯~
(약간 늦은 듯 하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07-01-0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소년님/전 돼지되기 싫어요...흑. 님도 새해복많이...
클리오님/일단 보직을 그만두고...그 후 술을 끊는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춤추는인생님/전 그 무서운 애랑 너무 친하다는 게 문제..... 저도 체중을 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떳떳하게
무스탕님/저도 그 후배님을 따라서 뭔가 해보고 싶은데...관성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한번 가던 길로 계속 가려는 경향...주위에서도 안도와주고... 속세를 아예 떠날까 싶어요
달밤님/너무 알찬 연말을 보낸 탓이라고 생각해요. 저랑도 놀아주시면 다 나을 거예요
해리포터님/라면을 햄버거로 대신한 보호본능이 과연 바람직할까요...ㅠㅠ
산타님/저기요...술 줄이겠다는 소리는 연초면 늘 하는 얘깁니다. 너무 괘념치 마소서.
하이드님/그러니까, 저의 해군요...ㅠㅠ
에고이스트님/후렌치 후라이의 칼로리가 더 높다는 설이 있던데....으음...24시간 하다니..
메피님/마음은 좀 여유롭지만 일은 여전히 많다는.........ㅠㅠ
해적님/전 식탐을 버리지 못할 거예요 엉엉. 내기하면 무조건 님이 이기삼.
속삭이신 ㅂ님/말씀 감사합니다. 님 말씀 잘 들으면 훌륭한 사람 될텐데... 흑...
 

 

 

 

 

전여옥.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정치인이다(그런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는 책을 쓰더니만

자신이 직접 테러리스트가 되어 맹렬한 테러를 자행하는 일관성을 보이기도 했다.

찌라시에다 노무현을 열심히 욕하는 글을 쓰다가

그 인기를 발판으로 직접 정치권에 뛰어든 이래

돌발영상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끊임없이 이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정치권은 시끌벅적해졌고

그가 나오는 토론은 언제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괄괄하기 짝이 없는 성질을 보면

군사독재 시절엔 어떻게 참고 기자생활을 했을까 의아했지만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그리워하는 건 바로 그 시절인 것 같다.


정치인으로 워낙 맹활약을 해서 사람들이 까먹었을지 모르지만

정치를 하기 전 그는 대단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일본 특파원 시절에 썼던 <일본은 없다>는

드넓은 시야와 명석한 판단력을 한껏 드러내줬다는 평을 들으며 백만부가 넘게 팔렸고

일본에서도 ‘일본을 가장 왜곡한 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혹자는 남이 쓴 원고를 통째로 베꼈다고 주장하지만

단순명쾌하기 짝이 없는 그 책을 그 아니면 또 누가 쓰겠는가?


정치권에 감으로써 더 이상 그의 글을 못보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인지

그가 이번에 두권으로 된 <폭풍전야>란 책을 냈다.

1권은 정치권에 입문한 뒤 “안에서 바라본 정치인들의 실체를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데

소개된 구절을 보면 구미가 당긴다.

[내가 정치판에 들어와서 놀란 것은 기존의 이미지를 배신하는 정치인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언론에 '젊은 피'로 알려진 A의원, 참신한 이미지와는 달리 거의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할 뿐만 아니라 상임위에는 눈도장만 찍는 등 매우 불성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본은 없다>의 정치인 판이 될 텐데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알라딘 측은

이 책을 주문하는 독자들에게 무료배송을 결정했다.


하지만 알라딘 서재지기들은 이 책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출간한 지 벌써 12일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페이퍼나 리뷰에서 이 책을 언급한 사람이 없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작년 한햇동안 나한테 소홀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나 바람맞힌 거 다 용서해 줄테니 전여옥 책을 읽고 리뷰를 써라.”

그는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용서해 주지 마라.”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이고

사회과학 주간베스트 18위에 오를 정도로 절찬리 판매되고 있는 이 책에

알라딘 분들이 무관심한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을 구입한 독자들이 많이 구입한 책 중

<당신들의 대한민국2>가 있다 이유 역시 미스테리하다.

누구, 가르쳐 주실 분?

참, 땡스 투는 절대 사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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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떤 책이길래 신년 벽두부터 마태우스 님이 이렇게 리뷰를 쓰실까, 혹시 심윤경 작가가 새로운 글 집필에 들어간건가, 생각했는데 이러한 책도 나오는군요! 아마 이 글로 마태우스 님께 땡스 투 할 일은 제 인생에 없을 듯 합니다. 하긴, 얼마 전엔 누군가의 부탁으로 제 멤버쉽 포인트 늘릴 겸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주문하긴 했지만 이 책은 부탁받아도 안살겁니다.

아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07-01-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호호 카테고리도 3류소설입니다^^ 님도 올 한해 의미있는한해가 되길 빕니다. 님의 인생에서 2007년은 끊임없이 언급될 해잖습니까^^

이매지 2007-01-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태님이 새로 책 내시는 줄 알았어요^^;;

클리오 2007-01-0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쪽 의원님 보좌관이 전화하면 어쩌실려고 그러세요... ^^;

모1 2007-01-02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쪽에는 관심이 없어서가..아닐까요? 주로 소설이나 아동용도서를 서재인들은 많이 보는 느낌이던데요. 저도 관심이 없어서...

Mephistopheles 2007-01-0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얼짱각도로 찍었네요...나원참...

가을산 2007-01-0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A가 누군지는 궁금하네요.

oldhand 2007-01-0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1권에 붙은 부제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비상식이 통용되는 이상한 나라"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왜 실소를 금치 못했는지는 굳이 이유를 첨언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은 실소에 그친것이 아니라 혈압도 상승하더군요)

moonnight 2007-01-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도 카테고리 먼저 확인했답니다. 역시. ^^

stella.K 2007-01-0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옥 비판하는 사람들 많던데요. 저도 <일본은 없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는데 뭐 여옥씨 스럽더군요.^^

픽팍 2007-01-02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은 없다를 읽으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그 편협한 사고관과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가 작다고 하는 이상한 논리에 납득이 안되어서 그만두었답니다. 또 책을 내다니 팔리긴 하는가 보군요. 말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말속에 씨가 전혀 없다는 면에서는 씨없는 수박과 막상막하가 아닌가 감히 아니 쉽게 생각해 봅니다. 절대 안 사볼 책..돈 주고 이 책 사라고 하면 다른 책 사야지

마노아 2007-01-0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쵝오! 카테고리 분류 너무 잘되어 있어요^^ㅎㅎㅎ

마태우스 2007-01-0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부끄럽습니다. 3류소설처럼 쓰려고 했는데 머리가 잘 안돌아가더이다..
픽팍님/그사람, 일관성 하나는 알아줄 만 합니다. 일본은 없다 식으로 세상을 살더라구요^^
스텔라님/문제는 거기서 더 발전을 못했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가 본 정치인을 비판한다니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아요. 코 후비는 걸 보면 "깨끗한 이미지의 이면엔 코딱지가 있다"고 할 사람이죠
달밤님/전 무조건 달밤님 편이어요 히히
올드핸드님/부제 보니 무슨 전쟁터 나가는 십자군으로 착각한 건 아닌가 싶어요. 노무현이 독재라나 뭐라나.... 하여간 비상식적인 짓은 혼자 다하면서...
가을산님/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호호 내기해서 진사람이 그 책 읽고 알려주기 할까요?^^
메피님/그러게 말입니다.......
모1님/그게 아니구요 전여옥이 그간 해온 짓들이 워낙 '어의상실'이라서...^^
클리오님/그럴까봐 전화 안받고 있다는...^^
이매지님/안그래도 올해는 책을 한권 내는 게 목표랍니다^^


sayonara 2007-01-0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상식인들의 지탄을 한 몸에 받는 전여사의 책이군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전여사의 책을 무척 즐겨 읽습니다. 그녀의 현란한 글빨과 맛깔스런 문장들 때문에요. 차라리 소설을 쓰면 좋겠구만.(100% 진심.. -_-+ )

토탈리콜 2007-01-0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테우스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처음인사드립니다
지금예스24에서는 전여옥 인터뷰기사를 새해첫 인터뷰로 올렸다가 많은 분들이 회원탈퇴를 하는등 정말로 폭풍전야가 된모습ㅂ입니다. 물론 저도 회원 탈퇴하고 알라딘으로 바로 옮겼구요. 한번 구경가보세요 예스인터뷰란 코너입니다^^
 

 

 

 

 

 

 

 

1. 철학, 영화를 캐스팅...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게다가 내가 탄 전철은 사람이 더더욱 없는 6호선, 난 편한 마음으로 앉아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내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손에 든 책이 낯이 익다.

“어? 저 책은...<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잖아?”

내가 읽었던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 걸 봤을 때의 즐거움, 게다가 그 책은 내가 올해 읽은 책 중 세손가락 안에 꼽을만큼 훌륭한 책이 아닌가? 이따금씩 온화한 시선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면서, 난 그에게 말을 걸고픈 충동을 느낀다. 승객들이 죄다 휴대폰을 걸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는 전철 안에서 그토록 좋은 책을 읽고 있는 그 남자가 멋져 보였다.


2. 노숙자

보름쯤 전, 난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녁 시간대라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맞은편 자리는 빈 좌석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노숙자임을 알만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그 양쪽으로 각각 두 자리씩이 비어 있었던 것. 몇정거를 지나자 무던한, 아니면 용기있는 남자가 그 중 한 자리에 앉았지만, 바로 옆 두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내가 이해가 안간 게 바로 그 점이었다. 내 오른쪽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던 것. 그 기현상은 내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술자리에 가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이런다.

“너 임마, 거울을 좀 봐봐. 너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게 노숙자 같잖아.”

저, 정말 그래서 사람들이 안앉은 걸까?


3. 편함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어쩌다 빈자리가 나도 앉는 일이 없었다. 튼튼한 나 대신 그 자리를 좀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앉기를 바랐기에. “진정한 노약자에게 양보해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빈자리에 앉기 시작한 건 서른이 되고 나서다. 그때의 난, 전철이 역에 서고 문이 열릴 때마다 양보해줄 사람이 있는지 문가를 유심히 봤었다.


지금은 아니다. 경쟁까지 해가며 앉는 건 아니지만, 일단 앉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책에 눈을 가져간다. 나이드신 분과 눈이라도 마주칠까봐서. 의자에 중독이 되었는지 앉아 있는 게 너무도 편하다. 엊그제는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며 앉아 있는데, 내 앞에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의 다리통이 자리를 잡는다. 왜 하필 나야,란 생각을 하며 계속 버텼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한눈에 보기에도 고령인 듯하다. 책을 보는 척했던 날 사람들이 어떻게 봤을까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앉고 싶어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내 앞에 선 그 할머니가 몸이 힘들었을까봐,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까봐 걱정이 됐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그분들만큼 피곤할까. 난 아직 젊다.

 

* 2007년이 밝았습니다. 첫 방문자는 누구신가요? 하여간 캡쳐는 제가 했답니다. 호호.

118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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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7-01-0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2185030

전 22번째 방문자군요! ㅋㅋ
마태우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실 2007-01-0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4185042

아니 언제 이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을꼬???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빕니다~~~~


水巖 2007-01-0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6185044
그 앞에 서 있던 짖궂은 영감태기 혹 수암은 아니였을까요? ㅎㅎㅎ

이매지 2007-01-01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7185055

전 47번째입니다^^
마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erpoll 2007-01-0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3185081

저는 73번째. 마태우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무스탕 2007-01-0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5185093

와~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네요.

마태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 늦게 만난 덕분에 함께 즐거울수 있었던 시간이 조금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올해엔 작년의 몇 따블 되게 즐거운 시간들 같이 보내자구요 ^__^


비로그인 2007-01-01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95....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조선인 2007-01-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185106

마태님 인기는 놀라워라. 늦었지만, 그래도 100순위 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노아 2007-01-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5185143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마태우스님도 20만 달성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이벤트 벌써 기획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다락방 2007-01-0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53 (캡쳐 하다 계속 실패. 전 왜 이런걸까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짱꿀라 2007-01-0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새해 복 많으받으셔요.

실비 2007-01-0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63185171

제가 읽은책을 보고 있는사람을 보면 어찌나 반갑고 이야기 하고 싶은지 몰라요^^


마태우스 2007-0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그렇지요? 제가 원하는 건...저랑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는 거... 호홋.
산타님/감사합니다. 님 덕분에제가 작년에 조금 더 행복했다는... 올해는 제가 님에게 뭔가를 베풀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락방님/에디터로 쓰기에 쓰셔야 하는데...작년에 님과 많이 친해져서 좋았습니다. 올해도 활발한 끝말잇기를...호홋.
마노아님/아이 부끄러워요. 제 20만은 벌써 다른 분이 지나간 길이구, 해서 조촐하게 이벤트 하고 끝낼 생각이어요^^
조선인님/노숙자 얘기로 동정표에 호소한 게 주효한 듯....^^ 조선인님, 작년엔 식구가 하나 더 느셨지요? 올해는 그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사실 수 있음 좋겠어요
무스탕님/작년에 늦게 만난 아쉬움을 올해 함 풀어봅시다!!! 여러가지로 감사드리구, 님에게도 올 한해가 좋은 해로 기억되길 빌께요
토탐정님/아앗 오랜만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님도 복 많이 받으시길!!
이매지님/올해는 제가 님에게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는 해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꾸벅. 여러가지로 감사드려요
수암님/설마요 전 수암님 딱 한번 뵜지만... 평생 기억할 것 같은데요^^ 복 많이 받으세요
세실님/님 덕분에 여러가지로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술일기 카운트 중 님이 몇번은 책임져 주셔야죠?^^ 좋은 한해 보내시길
비연님/올해가 님에게 멋진 한해가 되길 빌겠습니다 꾸벅. 올핸 더 친해봐요!
속삭이신 분/잊지 않고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님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해 보내시길!!

전호인 2007-01-0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에도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모1 2007-01-02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모습이 노숙자잖아...라는 글을 보면서 그동안에 올라온 사진들은 컨셉이셨나...하는 생각도....저도 자리에 경로석에는 잘 안 앉는데...요즘에는 유혹에...

해적오리 2007-01-02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4185500

저도 가끔가다 제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지하철에서 보게되면 유심히 쳐다보게 된답니다. ^^ 그 사람이 누구건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더라구요. ^^


마태우스 2007-01-03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그렇죠?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비슷하군요^^
모1님/평소 모습이 저번의 그모습인데도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이다...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가...
전호인님/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님도 올한해 의미있는 한해가 되길 빌께요
 

 

 

 

 

졸고 있다가 갑자기 울린 전화벨에 잠을 깼다. 나와 정치 얘기를 하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지금 여성부 폐지운동이 벌어지고 있잖아. 이번에 여성부가 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신문과 뉴스를 안본지 오래라, 뭐가 뭔지 몰랐다. 얘길 들어보니 성매매를 안한다는 각서를 가장 많이 받은 회사에게 회식비를 지급한단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물었다.

“뭐가 문젠데?”


그는 말했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는 게 말이 되냐고. 하지만 성매매 금지법이 발효될 때, 그는 내게 실토했었다. 이 땅의 남자 중 그런 곳에 한번도 안가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냐고. 90% 이상이 경험이 있지 않느냐고. 그 정도 수치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도 되는 거 아닐까?


“각서 쓸 때 얼마나 수치감을 느끼겠어?”
그는 내게 따졌지만, 난 그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수치심을 느끼면 각서를 안쓰면 되는 거 아닐까? 그의 말은 시종일관 길을 잃고 있었다. 성매매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매매는 성행하고 있으며, 연말일수록 더 심하다는 건 그 역시 인정하지 않는가. 이번 행사가 연말 성매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걸로 족한 거 아닌가. 모 언론에서는 이 일로 인해 여성부가 해외토픽감이 되어 망신을 당했다지만, 해외 원정을 다니면서 자행되는 우리나라의 성매매가-정력제를 포함해서-국제적 망신을 당한 게 어디 한두번인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여성부 폐지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벌써 5만명이 넘게 서명을 했단다. 참 할 일 더럽게 없다 싶다. 비정규직이 절반에 육박하는 이 나라에서, 곧 자신의 문제가 될지도 모를 KTX 여승무원의 투쟁에는 냉담하면서, 여성부를 없애는 일에 그렇게 많이들 서명을 하다니 말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부처들 중 여성부만큼 일을 잘한 곳이 어디 있는가? 경제를 말아먹은 재경부나 문화를 말살한 문화부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아랍과 비슷한,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인 우리나라의 여성권한척도에는 눈을 감은 채, 티끌만큼이라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마초들의 숫자는 너무나도 많다.


극악한 마초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남녀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대세에 밀려서, 인기 하락이 두려워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진심은 아니다. 여성부 폐지에 서명한 이 5만여명은 사실 남녀평등의 시대가 도래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며, 여성부의 활동으로 인해 초래된 불편함들을 참을 수가 없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시대의 물줄기를 뒤로 돌릴 수는 없는 일, 성매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마음 단단히 먹으시라. 시대는 점점 변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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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부 폐지의 목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답니다. 이번에 보다 가시적으로 행해지고 있을 뿐이지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여성부가 있으며 공직에 여성을 할당하는 것도 대한민국만의 유일한 제도라고 그들은 말하지요. 여성을 잠정적으로 우대하는 조치가 남성에게는 역차별로서 작용할 수 있음을 잘 알지만, 여성에게 불리한 현실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답니다. 심지어 10만원권을 만들면 여성 인물이 그 화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집단 이기주의라고 말을 하고,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확대되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육아 지원과 관련된 예산이 여성부에 귀속되기에 여성부 예산이 증가하자 그것 가지고도 예산 낭비라며 말이 많은 걸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제 선택이 아니고, 제 지난 경험 역시 제가 원한 것이 아니지만... 성폭력의 '성'을 제외하면 '폭력'인데 그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성폭력을 많이 당해봤나보네. 그러니까 괜히 피해의식 있어서 여성부를 지지하는거지."라는 식의 가벼운 댓글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게도 저는, 시대가 변하고 있긴 할까 되묻게 되네요.

바람돌이 2007-01-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성폭력이나 성추행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잖아요. (뭐 물론 처벌은 너무 약한 것이 맘에 안들지만...) 근데 이걸 갖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놀림감으로 삼는답니다. 회식자리에서 뭐 자연스럽게 서로 술 따르면서 잘 먹다가 갑자기 어 이러면 성희롱이야 아니야라면서 그걸 웃음거리로 삼아버리는 그 남자들 머리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늘 궁금하답니다.

마태우스 2007-01-0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런 거 많이 봐요.... 성희롱법을 실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니가 설마 날 고발하겠냐는 턱없는 자신감...
콸츠님/맞습니다 여성부의 모든 일에 딴지를 걸고픈 애들이 있지요 남성부를 만들라고 하질 않나...사회의 모든 권력을 다 가졌으면서 역차별 어쩌고 하면서 난리 부르스를 치지요. 시대의 변화는 워낙 더디게 오잖습니까? 저 20대 때와 비교하면 변했다는 거지만, 아직 멀었죠 울나라.
속삭이신 분/저 역시 님을 알게되어 서재생활이 즐거웠답니다. 제가 미모에 약한 거 잘 아시면서...호홋. 좋은 말 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내년엔 아니 올핸 친하게 지내요.

LAYLA 2007-01-01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은 쉽게 알아듣기 쉽게 글을 써주셔서 넘 좋아요 ^^짝짝짝~

비로그인 2007-01-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가끔씩 핀트가 나간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아윽! 어려워요! 이런 문제를 해설해주시는 책, 한권 어떠세요???

stella.K 2007-01-0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해가 안가요. 여성부가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하는데...

짱꿀라 2007-01-0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글을 읽고 가네요.

마태우스 2007-01-0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부끄럽습니다. 글 쓰는 내내 문장이 잘 안되서 버벅거렸는데... 아무튼 뜻은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어요
스텔라님/제말이 그말입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정군님/어맛 전 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옵니다 열심히는 해보겠지만....
라일라님/그게요 제가아는 게 매우 피상적이라서 그래요 호홋.

도도 2007-01-1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렇게 멋진 글을 이제 발견하다니. 마태우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07-01-1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드플루토님/아니 이렇게 멋진 댓글을 이제야 발견하다니....매드님두요!
 

 

 

 

 

할머니와 같이 밥을 먹다보면 피곤한 일이 한두개가 아니다. 당신 밥을 팽개치고 내게만 관심을 보이는 게 할머니의 컨셉인데, 내가 젓가락을 대는 반찬마다 내 쪽으로 밀어주시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국 좀 더 먹어라.”란 말을 평균 다섯 번쯤 하고, 그 중 두 번은 밥을 드시다 말고 내 국을 뜨러 가신다. 밥을 더 먹어라는 말도 그와 비슷한 횟수이니 도합 열번이다. 밥을 먹다말고 내게 오시더니 내가 아무렇게나 입는 잠옷의 깃을 세워준다든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가 먹지도 않는 반찬을 접시에 담아와 내게 내미신다. 생선을 안먹는다고 누차 말해도 할머니는 정성스럽게 생선의 살을 발라서 내 앞에 놓아주신다. 할머니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솔직히 피곤하다.


내가 기거하는 방을 정리해주신다며 내 물건을 없애 놓는 것도 할머니의 특기다. 한번은 내가 방바닥에 놔둔 열쇠가 없어져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찾은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까 할머니가 내 가방에 넣어 두신 거였다. 입으려고 꺼내둔 내 옷을 엄마 장롱에 넣어 두기도 하고, 구겨서 버린 찌라시와 광고성 편지들을 정성스럽게 펴서 내 머리맡에 놓아두시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엄마와 난 할머니가 일을 그만하고 당신 삶을 사시길 바라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뭔가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신다. 그게 바로 당신이 살아오셨던 삶이니까.


내가 아는 아주머니 한분은 내년에 100살이 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신다.

“밥상 거두고 나면 앉은 채로 금방 졸다가, 저녁상 차려서 갖고 가면 두리번거리다가 이러셔. 날 샜냐?”

우리 할머니가 TV를 안보는 것처럼, 그 시아버지도 TV를 안본 채 심심하게 하루를 보낸단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그분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어서, 그 시아버지는 손 하나 까닥 안한 채 하루를 보내신다. 오죽하면 점심을 차려놓고 가도 밥솥에서 밥을 푸는 게 싫어서 점심을 굶으실까.

“시아버지, 제가 시아버지 점심 때문에 아무 데도 못가야 해요?”라고 논리적인 설명을 해봤자 삐진 시아버지 마음을 풀 수가 없다.


난 할머니가 아무 일도 안하시길 바라지만, 막상 아무 일도 안하는 시아버지를 모시는 아주머니의 마음도 편하진 않다.

“젊어서부터 일은 안하고 몸관리만 해서 아주 건강하셔. 그 덕분에 시어머니랑 가족들은 아주 골병이 들었지.”

예천 양반 출신인 그분은 젊어서부터 아무 일도 안한 채 큰소리만 쳤단다. 시어머니가 죽어라 농사일을 하다가 돌아오면 “자네 이리 좀 와보게. 어서 내 다리 좀 주물러.”라고 하셨다니 할 말을 잃는다. 여름에 더울 때 더위에 지친 시어머니가 집에 와보면 모시옷을 입고 방안에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나. 그래서 시어머니는 “저 영감이 어서 죽어야 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데,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시어머니는 8년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그래도 88세까지 사셨으니 장수하신 거지만). 자신의 친구분이 목욕탕에서 죽고 난 뒤부터 공중 목욕탕을 안간다는데, 그 아주머니는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

“안씻어서 그렇지 아주 건강하다니까.”

아주머니의 말이다.

“내가 시아버지 모시는 걸 짐스럽게 생각하면 아마 하루도 못살 거야. 그냥 집에 가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사니까 속이 편해.”


아무것도 안하시고 지금도 안하시는 시아버지, 아주머니는 그분이 시어머니를 고생시키는 걸 보면서 미워하기 시작했다는데, 지금 내 곁에 있는 할머니는 어릴 적 날 위해 헌신하셨고, 좋은 것도 많이 사주셨고, 지금도 나를 위해서 피곤할 정도로 배려를 하시는 분. 내가 할머니를 피곤해해서야 되겠는가. 할머니가 반찬그릇을 내게 밀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다시 할머니에게 밀곤 했던 오늘 아침이 부끄러워진다. 할머니, 말로만 이래서 죄송하지만....앞으로 잘할께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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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레이드 멘트 나왔네요, 앞으로 잘할께요....
지금처럼 하시면 될거에요.

레와 2006-12-3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은 일을 하시는게 아니라,
단지 당신 삶을 살고 계신거 뿐인데..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오셨던 그분 삶을 받아 드리기가 싶지만은 않겠지요.

어떻게 보면 '포기'와 '수긍'이란 말이 같은 의미일지도 몰라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요.

지금도 충분히 효로 충만하세요. 지금처럼만 하세요!

아흥.. 힘들때마다 안길 수 있는 할머니 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프레이야 2006-12-3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한 마태우스님/ 할머님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님, 새해엔 더욱 신명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모1 2006-12-3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 건강하시길 빌면서..승연님의 트레이드 멘트 나왔네요..란 말에 묘한 웃음(?)을 지으면 글남깁니다.

짱꿀라 2006-12-31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건강도 하시구요. 마태우스님의 착한 마음씨가 저에게까지 전달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시구요.

마노아 2006-12-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만큼 하시는 분도 별로 없을 거예요. 님 멋쟁이!

moonnight 2006-12-31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만 해도 일등 효손이십니다. ^^ 저도 새해엔 부모님께 더 잘 해 드려야 할 텐데.. 마태님 글에 부끄러워지네요.

무스탕 2006-12-3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께 엄마랑 다른 투정을 부리는건 누구나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저도 할머니 살아계실때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불만도 있고 했었죠.
그렇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참 보고싶더라구요.
그냥 맘에서 우러나는대로 할머니를 대하시면 할머니도 아실거에요.
손주분의 귀한 마음을요...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손주분 달달 볶으세요~ ^^*

2006-12-31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1-0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님 서재에 답글 달았어요...
무스탕님/잘 못하고 후회하고...또 잘 못하고 후회하고.. 이런 삶의 반복인 것 같아요... 지금도 후회가 가끔씩 되는데 돌아가심 더하겠지요... 그러지 말아야 할텐데..
달밤님/새해 목표는 달밤님께 더 잘하는 거라는...^^
마노아님/아니어요...흑. 님이 아시는 것만큼 잘해야 할텐데...
산타님/부끄럽습니다. 착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1님/동생이 아프셨을 때 님이 하시는 거 보구 가족이란 저런 거구나 부끄러웠어요...
배혜경님/전 아직 멀었습니다....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꾸벅
레와님/막상 그 할머니 품이 있는데 전 잘 안기지 못하네요....지금 한번...
승연님/지금처럼 하면 넘 부족하죠...올핸 좀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글구... 그게 제 트레이드멘트란 걸 눈치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