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철학, 영화를 캐스팅...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게다가 내가 탄 전철은 사람이 더더욱 없는 6호선, 난 편한 마음으로 앉아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내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손에 든 책이 낯이 익다.
“어? 저 책은...<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잖아?”
내가 읽었던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 걸 봤을 때의 즐거움, 게다가 그 책은 내가 올해 읽은 책 중 세손가락 안에 꼽을만큼 훌륭한 책이 아닌가? 이따금씩 온화한 시선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면서, 난 그에게 말을 걸고픈 충동을 느낀다. 승객들이 죄다 휴대폰을 걸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는 전철 안에서 그토록 좋은 책을 읽고 있는 그 남자가 멋져 보였다.
2. 노숙자
보름쯤 전, 난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녁 시간대라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맞은편 자리는 빈 좌석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노숙자임을 알만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그 양쪽으로 각각 두 자리씩이 비어 있었던 것. 몇정거를 지나자 무던한, 아니면 용기있는 남자가 그 중 한 자리에 앉았지만, 바로 옆 두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내가 이해가 안간 게 바로 그 점이었다. 내 오른쪽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던 것. 그 기현상은 내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술자리에 가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이런다.
“너 임마, 거울을 좀 봐봐. 너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게 노숙자 같잖아.”
저, 정말 그래서 사람들이 안앉은 걸까?
3. 편함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어쩌다 빈자리가 나도 앉는 일이 없었다. 튼튼한 나 대신 그 자리를 좀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앉기를 바랐기에. “진정한 노약자에게 양보해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빈자리에 앉기 시작한 건 서른이 되고 나서다. 그때의 난, 전철이 역에 서고 문이 열릴 때마다 양보해줄 사람이 있는지 문가를 유심히 봤었다.
지금은 아니다. 경쟁까지 해가며 앉는 건 아니지만, 일단 앉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책에 눈을 가져간다. 나이드신 분과 눈이라도 마주칠까봐서. 의자에 중독이 되었는지 앉아 있는 게 너무도 편하다. 엊그제는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며 앉아 있는데, 내 앞에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의 다리통이 자리를 잡는다. 왜 하필 나야,란 생각을 하며 계속 버텼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한눈에 보기에도 고령인 듯하다. 책을 보는 척했던 날 사람들이 어떻게 봤을까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앉고 싶어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내 앞에 선 그 할머니가 몸이 힘들었을까봐,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까봐 걱정이 됐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그분들만큼 피곤할까. 난 아직 젊다.
* 2007년이 밝았습니다. 첫 방문자는 누구신가요? 하여간 캡쳐는 제가 했답니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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