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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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인들의 역사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때 마침 '오스만 제국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과 전쟁터를 누비는 예니체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문에서부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가났다. 저자의 의도는 오스만 제국 입문서로 이책을 저술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오스만 제국사를 알고 싶었던 나로서의 적잔히 실망했다. 그러나, 단행권으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서가 거의 유일하기에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오스만 제국 입문서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예니체리가 생각난다.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라고 불리는 어린이 공납제도에 의해서 충원되었다. 기독교 지역에서 어린이를 충당하여 교육시키고 관료와 예니체리로 선발하였다. 그런데,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만 본다면 데브시르메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잘 운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을 갖게한다. 그러나, 제국의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데브시르메 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세습의 방식으로 예니체리는 충원되었다.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으로 빚어진 오해를 이책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331 '터키행진곡'을 들으면서도 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이러한 음악이 작곡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에서 사용된 청동대포를 기억하는 나는 오스만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력으로만으로 유럽을 위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음악은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적대 여성 리더가 공중에 던지는 지휘봉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영국 합스브르크의 군악대도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아니라, 문화 대국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압제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널드 쿼터트는 이를 민족주의 논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민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규정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다. 그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은 국가 정체성 확보가 당면과제였다. 그들은 튀르크인의 악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조했다.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일어났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사'를 서술했다. 보통의 서양 학자들이 서구의 시작에서 제국주의적 편견에 휩싸여 제3세계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그러하지 않았다. 한예로 1915~19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을 서술하면서 그리스인이 저지른 1821년 오스만 무슬림 학살, 1876년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이 1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사례를 지적했다. 학살은 비인간적인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즉, 무슬림인 오스만은 악마, 기독교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서술이 돋보인다.

  6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고, 커피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럽에 전해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보다 많은 책이 번역되거나 쓰여진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을 그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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