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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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공부하다보면 수많은 도시의 이름을 접하게된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기에는 도시에 담긴 역사와 문화가 너무도 깊다. 각 도시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 싶었던 차에 조 지무쇼의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30개 씩이나 되는 도시를 한권에 담는것 자체가 무리일 텐데..... 과연 조 지무쇼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수 있을까?


1. 일본중심의 세계사

  역사서는 저자의 역사관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이책 또한 일본인 저자의 일본중심의 세계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첫째, 30개 도시의 선정기준에 의문을 품고 싶다. 세계 도시 30개 중에서 한국의 도시는 단 하나도 없다. 그에 반해서 일본의 도시는 '천년의 수도'라는 수식어를 붙여 교토를 장황하게 서술했다. 그밖의 많은 도시들을 30개 도시에 선정하면서도 선정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극히 주관적인 선정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둘째, 일본중심의 서술이 보인다. 상하이의 조계시대를 끝낸 것이 일본이라는 서술부터 시작해서, 오스트레일리아가 완전한 독립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일본과의 싸움 때문이라는 서술은 떨떠름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조 지무쇼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의 글을 한줄이라도 남겨 놓았다면 떨떠름함은 적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썼기에 일본중심의 서술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떨떠름함이 한국인이기에 갖을 수 있는 기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에서 개운치 못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2. 두껍지만 얇은 책

  이책은 두껍지만 얇은 책이다. 왜? 두껍지만 얇은 책일까?

  첫째, 책은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그러나 300페이지 넘는 책에 30개의 도시를 담다보니, 한 주제에 10페이지 안밖의 서술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과 지도를 포함한다면 각도시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너무도 적다. 깊이 있는 정보를 얻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둘째, 쉽게 읽을 수 있다.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과 지도를 빼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책의 깊이도 깊지 않기에 마음잡고 읽으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무거운 책을 읽고 머리식히기를 위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두껍지만 얇은 책이기에 책의 두께에 겁먹지 말고 가볍게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묵직한 깨달음을 주는 책을 얻기는 힘들다. 가볍게 세계여행하듯이 즐기길 워한다면 이책을 선택해도 괜찬을듯 싶다. 깨달음의 무개를 느끼고 싶다면 다른 책을 선택하길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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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2020-12-0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 또한 일본 작가들의 세계사 작품에 실망을 하고 있던 터라
구매를 망서리던 참이였지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얻은 실망감이 무척 오래가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0-12-07 18:5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
간호윤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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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을 선택할때는 수많은 비법을 기대하며 책을 고른다. 글을 잘쓰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 책으로 나를 인도한다. 다산과 연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들이 쓴 책과 그들이 읽은 책들은 우리에게 큰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의 글솜씨의 일부나마 배우고 싶어 책을 펼쳤다.


1. 책읽기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라는 '맹자'의 글이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는 '맹자'의 말이다. 책속의 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 없음만 못하다라는 이글귀는 나의 뇌리에 꽃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판적 글읽기를 할 수 없다면,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볼 수 없다면, 나는 책의 노예가 될뿐이다. '창조적 오독'을 하며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미 2천년 전에 맹자가 비판적 글읽기의 중요성을 말했다. 책에 지배당하지 말고, 책을 부릴 수 있는 지혜를 갖자!


2. 글쓰기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을 쓴 간호윤은 글을 잘썼는가? 간호윤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글을 평할 수 없다. 그러나, 이책만을 놓고 평하자면, 좋은 평을 할 수없다.

첫째,  책을 '논'과  '해'로 나눠서 집필했다. 이로인해서 책읽기가 힘들었다. '논'은 어려운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고, '해'는 평이한 내용으로 꾸며져있다. '논'과 '해'를 하나로 녹여 서술했다면, 독자들이 책을 읽기 쉬웠을 것이다. '논'과 '해'가 분리되어 있기에 '논'과 '해'가 따로 논다. 논문을 읽듯이 본문과 주석을 읽어야하는 번거로움은 책의 이해를 어럽게했다.

둘째, 간호윤의 글은 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잘쓰지 않는 글들을 가져다 표현한 점은 우리글을 살리고, 간호윤의 어휘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특히 '논'을 읽고 이해하는데 힘이들었다. 

간호윤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잘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글쓰기 책들을 읽기 전에는 책속에 엄청난 글쓰기 비법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갖는다. 책을 다읽고 나서는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는 내용이 없음을 깨닫고 실망한다. 부지런히 책읽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반드시 퇴고해라! 당연한 글쓰기 비법을 알기 위해서 수많은 글쓰기 책을 읽은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 글쓰기에 어찌 특별한 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책일고, 부지런히 글쓰고, 부지런히 퇴고하자! 이것이 글쓰기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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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표정있는 역사 7
호사카 유지 지음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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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너무도 먼 이웃 일본! 조선을 움직인 선비와 막부를 움직인 사무라이! 그들이 만든 선비문화와 사무라이 문화는 너무도 다른 한국과 일본을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참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사 잘 아는 저자가 집필한 책이 필요했다. 일본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호사카 유지의 책이 제격이었다. 호사카 휴지의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칼의 문화와 붓의 문화
선비가 만들어낸 붓의 문화와 사무라이가 만든 칼의 문화는 너무도 다른다. 한국에서 여성은 어머니로 기억 되지만 일본에서는 부인으로 기억 된다. 한국에서 무식하다는 말은 엄청난 모욕감을 주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욕이 없다.
한일간에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붓으로 싸우는 조선의 선비와 칼로 싸우는 일본의 사무라이는 너무도 다른 문화를 만들었다. 이것이 순종적이면서도 잔인한 일본을 만들었고, 깨어 있는 시민들이 움직이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본의 거친 사무라이를 길들인 것은 조선의 선비문화였다.

2. 조선 선비, 일본을 가르치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책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읽었을 정도로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소개한 대표적인 책이다. 호사카 유지교수는 무사도를 분석하면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무사도에 소개된 사무라이의 규범 대부분이 조선 선비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사무라이와 선비는 너무도 다른데, 그 규범은 왜이리도 비슷할까?
임진왜란을 우리는 일본에 철저히 유린당한 사건이라 기억한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유린했지만 조선 선비의 문화는 일본 사무라이의 정신을 장악한다. 일본군에게 잡혀 아들과 딸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간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 성리학을 가르처 준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제자를 길러 일본에 성리학이 뿌리 내리게한다. 호사카 유지교수는 조선 성리학이 에도막부가 200여년 동안 평화를 누린 비결 중에 하나라고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다르면서도 비슷한점이 있는 이유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전해진 조선 성리학이 사무라이의 야생의 기질을 길들였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조선 성리학이 대한해협을 건너니 사사도가 되었다. 사무라이를 길들였으나 그 야만적인 본성을 없애지는 못했다. 사무라이의 침략 본성이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게 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이 조선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선 성리학의 중심이 된 심성론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사무라이가 조성 성리학의 심성론의 중요성을 깨달아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일본 정치인과 순종적인 일본시민을 보면 깊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일본 시민이 깨어 있는, 옳은 일을 행동하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p.s. 재미있는 사료가 있어 적어둔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에 무릎을 꿇고 신이라 칭했다. 외부에도 신을 칭함은 인신의 도리가 아니다. (중략) 몸은 천하의 실권을 쥐면서 신임을 이방에 칭하여, 이방으로 하여급 천조를 번신처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쿠다이(국처) 를 손상시켰다. -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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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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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았는가? 피터 자이한은 미국이 세계 패권을 포기하고 고립주의로 돌아간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미국없는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미국과 친해지라 말한다. 미국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오만한 주장이라 생각되지만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이라면 브레튼우즈체제 성립 이전의 고립주의로 회귀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는듯하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오만한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하며 피터 자이한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을 펼쳤다. 내 생에는 일어나리라 상상하지 않았던 코로나19 펜데믹이 발생하고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나라들의 민낯을 보며 그 어떤 가능성도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1. 지금의 세계질서는 기이한 현상인가?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결국 그 탐욕의 끝은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초강대국 미국을 탄생 시켰다. 미국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할 수있었겠지만 미국은 다른길을 선택한다.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항해의 안전을 제공한다. 기존 패권국이 해오던 수탈 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방식이었다.
세계는 미국이 만든 브레튼우즈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과 같은 나라는 번창하였다. 미국이 깡패국가로 지목한 나라는 경제적 파국으로 내몰렸다.
그런데 미국이 변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은 미국이 당연히 해오던 일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이 타국에서 피를 흘리며 돈을 쓸 필요가 있가? 한국과 같은 부자나라에 미국이 군사력을 제공할 필요가 있는가? 피터 자이한은 트럼프가 당선되기 이전에 이책을 통해서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기할 미래를 제시했다. 미국이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미국없는 세계는 무질서한 아비규환 지옥이다. 유일한 초강대국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 경찰로 남아있지 않는다. 이때 미국의 무력으로 보호받으며 발전했던 한국은 이제 일장춘몽에서 깨어나야만할까?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 받는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미국이 셰일혁명으로 날개를 달았다. 더이상 석유를 구하기 위해서 중동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자원과 인구학을 이용해서 미국의 미래를 살펴봐도 세계에서 미국의 미래는 밝다. 반면 러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저출산과 고령화의 덧에 빠져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 불안하며 자원도 안전적으로 조달하기 힘들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그 피해를 톡톡히 보는 나라도 많다.
피터 자이한은 미국없는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미국과 친해지라 말한다.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미국없는 미래를 예측한 피터 자이한의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

2. 피터 자이한의 주장이 가진 함정
세계적 석학들은 미래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모두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피터 자이한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피터 자이한은 2040년 구미당기는 술 한 병을 사들고 찾아오라는 여유를 부린다.
피터 자이한의 예측이 들어 맞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 되어야한다.
첫째, 트럼프세력이 군산세력을 이겨야한다.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트럼프와 분쟁을 유발해서라도 세계 각지에 미군을 보내려는 군산세력의 대결에서 트럼프를 중심으로한 세력이 승리해야한다. 트럼프가 노련하게 군산세력과 맞서고 있지만 군산세력의 반격도 만만치않다.
둘째, 탁월한 리더쉽이 필요하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에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타국에 반감을 얻어서는 안된다. 왕은 여우의 머리와 사자의 심장을 가져야한다. 트럼프식 일방주의는 수많은 적을 만들어 미국을 고립시킨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도 지키는자가 어리석다면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셋째, 미국의 지정적 잇점을 위협하는 요인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ICBM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있다. 발전은 미국의 지정학적 잇점을 무력화 시킬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 펜데믹을 보듯이 예측할수 없는 신종전염병은 미국을 위기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기후변화도 미국을 위협할 수있다. 피터 자이한은 미국은 해수면 상승의 영향을 미미하게 받을 것이라 예측했으나 기후변화의 피해는 지정학자인 피터 자이한의 예측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밖에도 내가 예측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들이 미래에 펼쳐질 수있다. 우리는 오만해지기 보다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피터 자이한은 ˝간단히 말해서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을 향해가는데 미국은 여기서 쏙 빠지게 된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지옥에서 벗어 나고 싶다면 미국의 친구가 되라! 그의 확신에찬 몇몇 주장은 빗나가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에 위협이되지 않기에 미국은 중국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예측은 미중무역전쟁을 보면 빗나간예측이었다. 또한 미국은 베네수엘라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통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역시 빗나간예측이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패권을 포기한다는 예측도 빗나갈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쥔자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 놓지는 않는다. 하물며 세계 패권인들 말해서 무엇하랴!
미국 우월주의에 빠진 피터 자이한의 예측이 빗나가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지정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정학을 이용하는 인간의 리더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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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 근대 150년 체제의 파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서의동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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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기획살인˝이라는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었다. 월성 원전 1호기 폐쇄를 문재인 정권이 기획했다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원자력 전공학생들이 대학가에 붙인것이다. 이들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교훈은 찾아 보기 힘들다. 과학기술 만능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일본이 치유할 수없는 상처를 지구에 남겼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물론이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태평양을 방사능 오염수로 채우려하고있다. 일본의 과학만능의 사고관을 들여다본다면 탈핵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 치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을 펼쳤다.

1. 사무라이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다.
밈(Meme)이라는 말이있다. 문화적 유전자라 번역하는 밈은 한 사회에서 유전자 처럼 문화정보가 유전된다는 개념이다. 일본인의 밈에는 사무라이의 칼이 담겨져 있다. 같은 과학기술도 일본인들은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받아들였다.
의사의 난학이 사무라이의 양학이되면서 일본인들은 서양의 모든것을 배우고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서양으로 유학가는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을 개량하기 위해서 백인여성을 아내로 맞이해 오라고 훈시하기까지했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이라 할 지라도 일본이 군사강국이 되기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사무라이의 칼이라는 밈이 작동한 결과이다. 망치를 손에 쥔 목수에게 모든 것은 못으로 보이듯이, 칼을든 사무라이에게 모든것은 베어버릴 적이거나 적을 쓰러뜨릴 도구로 보였다. 서구의 과학기술은 적을 쓰러뜨릴 너무도 강력한 칼이었다. 일본은 과학기술이라는 보검을 얻기위해서 그 어떠한 댓가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43년 다네가시마의 도주가 조총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포르투갈 남자에게 바쳤듯이 말이다.

2. 사무라이, 과학기술이라는 보검을 얻기위해 영혼을 팔다.
일본의 근대는 천운이 함께한 시기였다. 19세기 후반 서구 각국에서 과학연구가 사회적으로 제도화 되었고 직업과학자가 생겨났다. 서구 과학기술을 습득하기에 장벽이 너무 늦았다. 에너지혁명이 일어난지 반세기밖에 안되었으며 선진국은 기계기술을 일본에 팔기에 바빴다. 선진국이 실패를 쌓으며 발전시킨 과학기술을 일본은 실패없이 배워갔다.
아무리 천운을 타고 있는 일본이라도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일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이를위해서 여공들은 주야 2교대라는 살인적인 노동에 혹사 당했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지는 이러한 여공의 모습을 보며 국제적 경쟁의 이점이라 평가했다. 비인도적인 살인적인 노동을 근대화를 통한 군사강국 일본을 만들기 위한 잇점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노동자와 농민만이 일본 근대화의 희생양인것은 아니다. 일본의 자연도 고통을 받았다.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 사건이 대표적 사건이다. 1885~1895년 일본 국내 구리의 4할 이상을 생산한 아시오광산은 어민과 농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다. 채광과 정련과정에서 나온 오염수가 와타라세강을 오염 시켰다. 오염수는 농지를 오염시켰다. 물고기는 떼죽음 당하고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했으며 가축과 사람은 병들어갔다.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일본정부는 국익을 내세워 기업의 손을 들어 주었다.
국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 시킬 수있다는 논리는 패전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은 일본의 기업과 정부 학계가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괴물이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서, 정부는 성장을 위해서, 학계는 기업이 제공하는 이익을 얻기위해서 환경 오염을 묵인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돈과 권력 권위를 이용해서 기업의 범죄행위를 용인했다. 그러나 가장큰 문제는 생명의 어머니, 자연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자연을 괴롭혀 경제 발전을 통한 군사 강국이 되려했다. 결국 그 속에서 자연이 죽어갔다.

3. 과학자가된 사무라이의 폭주
메이지유신 시기, 사무라이들은 천대 받았던 과학기술자가된다. 사무라이들은 군사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과학을 연구했다. 최신 무전기술을 전쟁에 도입해서 화약제국 러시아를 제압했다. 1차 세계대전은 과학이 전쟁승리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정부는 전쟁 승리를 위해서 과학기술에 투자했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서 군수 무기를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얻기위해서 마음껏 연구하기 위해서 국가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했다. 이 시기, 아니 일본의 과학자는 ˝전문적 연구자가 수행해야할 사회적 역할은 의식하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 만큼 권력자가 다루기 쉬운 것은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아이히만 처럼 자신이하는 연구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올지 생각하지않았다.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의 총력전에 충실히 봉사한 과학기술자들은 반성했을까? 천만의 말씀,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지 못한 핵을 미국이 만든 것에 경의를 표하고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것을 송구스러워했다. 일본인들은 패전의 원인을 과학기술에서 찾았다.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에 매진한다. 특히 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핵기술을 얻기위해 부단히 노력한 일본은 핵발전소를 가동하며 핵무장의 기회를 엿본다.
2011년 3월 11일 지옥의 문이 열렸다. 기술강국 일본, 안전한 일본이라는 신화는 허상이었다. 통제불능의 핵발전소 사고로 일본국토의 70%가 방사성 세슘에 오염 되었다. 자연을 고문한 댓가를 일본을 포함한 지구인들이 나눠 부담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정치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있다. 더 이상 자연은 고통을 참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기계장치가 발명되자,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힘쎈 남자가 하던 일을 여성과 아이들이 할 수있게 되었기에 노동은 더욱 가혹해졌다. 전등이 발명되자, 야간노동이 가능해졌다. 주야간 2교대라는 고강도 노동에 인간은 내몰렸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기계 그자체 만으로는 결코 인간 노동이 경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도 과학기술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행복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과학기술을 부릴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숙할 때만이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미소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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