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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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명강의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때가 있다. 대학에서 젊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참! 열정도 많고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느낌은 들지만, 깊이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해 아쉬울 때가 있다. 반면, 노련한 노교수님의 강의는 많은 내용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기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교수님의 강의를 '명강의'라고 말하며 후배들에게 추천했다. 사회에 나와서 배움의 열의가 시들지 않았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연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다양한 강의를 찾아 듣는다. 그렇게 알게된 교수님과 저자들 중에서 고 신영복 선생은 단연 많은 것을 깨우치게한 명강의를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너무도 강렬했던 '강의'에 이어서,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가 되어버린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펼쳐들었다. 신영복이라는 문을 통해서 진리의 화원에 들어가 보자.

 

1. 신영복을 읽는 키워드 '관계'

  '나의 고전 독법 강의'를 읽으면 신영복 선생 고전독법의 키워드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계'를 중시여기는 그의 인생철학은 '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출소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야!'라고 신영복에 예측하면 번번이 그 예측이 빗나갔다. 반면 노인들은 그 사람이 다시 들어올지, 사회에 나가서 잘 살게 될지를 잘 맞추었단다. 신영복은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신영복이 그 사람됨만을 보았던 반면, 노인들은 사람과 처지를 함께 보았다. 나무는 홀로 설수 없다. 흑과 물과 돌과 나무와 어우러져야 하나의 나무가 우뚝 설 수 있다. 신영복이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다. 아무리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마음먹어도, 보통 사람들은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관계'를 우리는 잊고 산다. 신영복이 재소자에게 이응노 화백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응노 화백은 감옥에서 사람을 부를 때, 수인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다한다. 한 젊은 재소자에게 이름을 묻고는 "뉘집 큰아들이 감옥와 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재소자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홀로 서있는줄 알았으나, 자신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 누이가 보고 싶어졌고 그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세웠다한다. '관계'를 깨닫자 젊은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자신의 존재를 '관계'를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치유가 시작된다.

  '관계'가 치유의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슬퍼하기도한다. 그러나 외딴 섬에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문에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는 말이 있다. ''관계'에 상처받은자, '관계'를 딛고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2. 세상을 살아가는 키워드 '사랑'

  셍떽쥐베리는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강신주는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부처'란,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뜻한다. 사랑은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은 사랑은 '삼께 맞는 비'라고 표현한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어설푼 위로보다는 같이 눈물흘려주는 것이 그들의 치유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고통도 슬픔도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함께할 때만이 서로의 눈부처를 보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한다. 신영복은 '사랑'을 이용한 고문방법을 경험한다. 전기고문을 받다가 신영복은 탈진을한다. 그러자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어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영복은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무자비한 취조관이 사실은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리만치 크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없는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영복은 얼마나 환멸을 느꼈을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고문의 일환으로 연출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고문방법이었다.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주기도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랑의 모습은 무엇일까?

  신영복 선생이 '강의'와 '담론'이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씨과일로 큰 열매를 먹지않고 남겨 놓는 모습! 까치밥이라면서 가장 큰 감을 남겨 놓는 시골 농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까치밥으로 가장 큰 과일을 남겨 놓으면 새가 날아들어 그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는 어느 곳에 그 과일 씨앗을 배설물과 함께 떨어 뜨린다. 그래서 새로운 과일나무가 어느 곳에선가 자라기 시작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우리 모두를 사랑할 때만이 참다운 사랑은 이뤄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무엇일까? 신영복은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한다.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이를 발로 실천할 수 있다면 최고의 공부가 아닐까? 이것이 가장 진실된 배움이지만 이것이 가장 힘든 배움이기도 하다. 좁은 가족의 사랑을 인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길! 가장 힘들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3. 오늘을 생각하고 깨우친다.

   신병교육대에서 훌련을 받다가, 한 훈련병이 제대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교는 그 훈련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야, 너 서울대 나왔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는 훈련병의 답변이 나왔다. 순간, 주변에서는 "야~~ 제가 서울대 나왔어?"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교관은 주변을 의식했는지, "놀랄것 없어, 예는 공부 못해서 서울대 간거야! 안그래?"라고 말했다. 훈련병은 "네, 그렇습니다."라며 군기든 대답을 했다.

  서울대 나왔다는 말에 '내가 서울대 다니는 사람을 보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감탄을 하는 주변의 수많은 훈련병이나, 서울대 다니는 훈련병을 공부못해서 서울대 갔다고 말하는 조교 모두가 서울대에 대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영복 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적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서울대 컴플랙스' 집단 감염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서울대 애들이 나보다 똑똑하니까, 내가 굳이 그들을 이기려 노력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패배주의자들도 여러명 보았다. '서울대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서울대'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변방의 창조성'을 가지려면 그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담론' 곳곳에서 외치고 있다. 그럼, 나는 또다른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려 노력해보았다.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며 그 컴플랙스가 사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변방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을 돌려 놓고 장작을 옮겨 놓아 불이 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묵자'에 나와 있듯이, 불을 끄려 동분서주한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곡돌 사신을 해서 불을 사전에 예방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병을 고친 사람은 명의라 칭송받지만, 병을 미연예 예방한 사람은 칭송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소 도둑을 잡은 사람에게는 칭송하지만, 소도둑이 들지 않도록 외양간을 튼튼히 지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뫼한 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지 않는지 반문해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3차 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한 많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두고서 비판하는 일부 수구 정당과 그를 추종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연에 전쟁을 예방하여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곡돌사신'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지금 이순간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너무도 소중한 기회이다.

 

4. 배움에 더해서...

  좋은 책은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하는 책이다. '담론'에는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그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살아나는 말들이 많다. '객관'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관객'이 된다는 신영복선생의 말은 '객관적이어라.'라고 말하는 언론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계적 중립에 치우쳐서 박근혜 정권에서 행해지던, '한국사 국정화'도 관객의 시선에서 구경하듯 보도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관객'이 되지 말아야한다. 그들과 '관계' 맺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러한 단어가 '자살'이다. 자살을 거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부단히 외치고 있다. '살고 싶다.'고 ....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케시마'라는 말도 거꾸로 읽으면, '마시케다'가 된다. 일본은 침략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마시케다'며 넘보고 있다. 벼가 있는 언어 유희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톨레랑스'를 아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말이며, 우리사회에 '톨레랑스'가 필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톨레랑스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라는 뜻으로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갈 것을 당부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시작이어야합니다.' 단순한 공존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나가자! 새로운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발자국 더 나가자! 신영복은 외치고 있다. 목수는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주춧돌부터 그린다. 톨레랑스라면 서로 인정하면서 공존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신영복은 자신의 부족한점을 깨닫고 목수의 그림을 배우려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 톨레랑스를 뛰어 넘으려한다. '톨레랑스'를 말할때, '톨레랑스'그 너머를 보자! 신영복은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신영복은 공자와 귀곡자의 말을 대비해서 설명한다. 두가지를 대비해서 설명하는 신영복 특유의 설명법은 우리에게 탁월한 이해와 영감을 준다. 공자는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했으니, 말잘하는 공자가 얼마나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있다. 반면 귀곡자는 '언어는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갑자기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라는 '논어'구절이 생각났다. 겉모습과 속이 빛나야 군자라는 공자의 말을 말에 적용시켜보자. 말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말의 포장도 잘되어야 참다운 말이 아닐까? 말의 내용과 수사가 잘 갖추어져있다면 그 사람을 어진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대화할 때,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화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그사람의 입장에서 대화해주는 방법을 강조한다. 수많은 논리적 근거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문질빈빈'이라는 말은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은 사실을 뛰어넘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신영복 선생은 '사실이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말한다. 단편적인 레고조각 한두개를 가지고 전체의 진실을 알기는 매우 힘들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레고조각을 모으는 수고로움을 회피하며 한두개의 레고 조각으로 진실을 본듯이 말한다. 많은 레고 조각을 모았다고 하여 모두가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룡뼈 화석을 발굴한 고고학자가 몇십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공룡뼈를 잘못 맞추어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발굴을 통해서 알았다는 일화는 질실을 알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자!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시는 언어를 뛰어 넘고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의 창조'활동이라 신영복은 말한다.  우리 사실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자! 그리고 그 길을 모색해보자!!

 

5. 신영복 선생님 이의 있습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신영복 선생님이지만, 그의 견해 모두를 동의할 수는 없다. 신영복 선생님 질문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대학생을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이라 말한다. '대학 4년은 계급을 고민하는 시기'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대학생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극히 일부 명문대, 몇몇 학과에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자본의 냉혹함 속에 내몰려 혹독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고민을 하는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계급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는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박탈당하고 취업준비에 내몰린 대학생들에게 '계급 선택'의 자유는 없다.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신영복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체주의 사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많다. 다수의 횡포! 중우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다수가 힘', '다수 그 자체가 정의'라는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과거 상당수의 국민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았다. 그렇다면 이에 당신은 박정희와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가? 참다운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할 때만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제도이다. 신영복이 '모두가 위반할 수 밖에 없는 규칙은 고쳐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주장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는 개방화되고 속국화됩니다.'라는 표현도 동의할 수 없다. 신영복 선생이 통일 신라 시기를 주권이 침해된 시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이 침해된 속국은 아니었다. 한예로 김춘추의 묘호를 '태종'이라고 짓자 중국이 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겹친다하여 고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신라는 당당히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초석을 닦은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고 주장하며 당나라의 요구를 물리쳤다. 신영복은 '자주'와 '개방'이라는 2분법을 축으로 해서 우리역사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는 역사 이해를 쉽게할 수는 있으나, 역사 인식의 외곡을 가져올 수 있다.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언제 밝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담론'에는 신영복 선생이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적혀있다.

  신영복은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구회 추억'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추억을 머릿속에 담으려했다. 그리고 감옥에 비치는 한줄기 햇볕을 보았다. 신영복은 햇볕을 보면서 죽지 않는 이유를 찾았고, 깨달음과 공부를 통해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했다. 자신의 추억뿐 아니라, 타인의 추억 속에서 깨달음과 공부를 했다.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의미치료'라는 치료방법이 있다. 그에게서 '추억'은 '깨달음과 공부'를 가능하게하는 힘을 주었고, '깨달음과 공부'는 신영복에게 살아야하는 '의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깨달은 그의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라고 신영복은 말한다. 추사는 71세를 살았으며, 이광사는 73세를 살았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서체는 완숙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살아서도 안된다. 부단히 인생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아는 노력을 해야한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우리에게 '강의'와 '담론'을 들러주었기에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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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06 2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님.~
편안한 주말밤 되세요^^

강나루 2018-10-06 20:26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6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꼬나면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완독부터 해야할텐데요 ㅎㅎ

강나루 2018-10-06 20:3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시면 되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며 느끼며 읽어야하기에 천천히 꾸준히 읽으세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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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은 다양한 각도로 재해석되어 왔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는 관점과 제왕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으로 보는 시점에서 소개된 서적을 보아왔던 나에게 최진석 교수의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다.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틀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 공본<도덕경>을 읽고 있는 나는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을 이해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최진석 교수의 책은 내가 <도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새로운 <도덕경>의 세상은 무엇일까?


 

1. 최진석만의 탁월한 해석

 

 논어 자로 편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통은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나 소인과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최진석은 해석이 달랐다. 당시의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유념해서, 군자는 지배계급으로서, 군자와 소인 계급이 다르며,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여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구분을 부정하고 군자와 차이 없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존의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보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혁명적으로 해석한 최진석의 해석은 나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듯했다. 공자는 기존 질서 유지를 두둔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볼 수도 있는 해석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논어>와 대비시키며 최진석은 자신만의 <도덕경> 읽기를 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를 최진석은 어떻게 해석할까?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보통의 해석을 최진석은 자신만의 '무'와 '유'의 개념정의로 혁신적 해석을 해낸다. '무'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어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정의한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비어있음'으로 '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곳이 우리가 기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도시의 비어있는 공원이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주듯이……. '있음'과 '없음'의 극단적인 개념으로 도덕경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도덕경이, 최진석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니,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2. <도덕경>의 핵심 '유무상생'

 <도덕경>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핵심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은 <도덕경>의 핵심은 대립 면의 공존이라 말한다. 이를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할 수 있다. 유와 무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새끼줄이 서로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이 되듯이, 유는 무와 관계를 맺고 무는 유와 관계를 맺는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 차에서 공존한다.'는 최진석의 해석은 그가 바라보는 <도덕경>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운 관점이 눈에 들어온다. '밝을 명(明 )'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해를 해로만 또는 달을 달로만 아는 것은 '지(智 )'이며, '해와 달을 한 세트로 아는 것'은 '명(明)'이라 말한다. 노자 철학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최진석의 해석을 확장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동양철학의 의문들이 풀린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 말은 삶과 죽음을 같이 바라보아야, 둘 사이를 관계론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삶과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과 이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사랑과 이별'이 하나라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싹튼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해서 싸우는 것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무관 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대립하는 세차원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3.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이라는 말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노자는 사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을까? 사냥은 고대의 군사훈련 성격도 갖고 있기에 군주는 사냥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최진석은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애고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라고 해석한다. 사냥감을 쫓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맹목적으로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쳐 나갔는가? 충남의 00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1% 안에 드는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가 근접한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같은 목표,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많은 학생이 미쳐나가고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놓은 목표의 위험성을 일찍이 노자는 지적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노자의 구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라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진석은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국가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최진석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광풍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본제국'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바치라고 강요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가치 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다. 그 죽음의 행렬에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노자는 이미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맡기고 있는가? 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러할까?

 

 최진석을 통한 <도덕경> 읽기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서, 하상공주에 근거한 노자 이해를 주로 해왔다면, 최진석을 통해서 대립 면의 관계성을 강조한 '(有無相生)'이라는 문구를 통한 노자 이해는 <도덕경> 이해를 한 차원 높여주었다. 그리고 '보통명사'로 살기보다는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을 되뇌며, 학생들에게 남이 정해 놓은 목표를 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교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자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나의 삶을 살자! 오늘도 나는 <도덕경> 읽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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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강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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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니체! 내가 니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서점에서 였다. 그때 돈으로 천원이면 작은 책한권을 살 수 있었다. 시중의 책을 글자 폰트를 작게하고 얇게 만들어 돈이 부족한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책이었다. 그 책들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책을 샀다. 그러나, 5장을 읽고는 다시 책장을 덮었다. 너무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서 팟캐스트를 통해서 니체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니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책을 꺼내 들었다.

 

1. 불친절한 니체씨!!

  니체는 불친절하다. 자신의 사상을 독자가 알기 쉽게 풀어써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책의 출판사는 니체 만큼이나 불친절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마틴 하이데거가 왜?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성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말해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출판사는 이러한 설명도 없이 독자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 1,2,3부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번씩 읽으며, 4부의 마틴 하이데거의 '신은 죽었다. '라는 논문을 읽으면 니체에게 성큼 다가서리라 믿었다. 그런데, 아뿔싸!! 니체의 사상을 잘 이해하라고 구성한 4부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책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4부였다. 불친절한 니체씨 만큼이나, 하이데거도 불친절했고, 이들을 뛰어넘는 출판사의 불친절함은 나를 감탄하게 했다.

 

2. 여혐 니체!!

  니체라는 이름은 강한 느낌을 준다. 중세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을 억압해왔던 종교에 맞서서, 당당히 신은 죽었다. 라고 외쳤던 니체!! 당당한 이미지의 니체가 여성 혐오자였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니체를 연구하는 여자 학자도 있는데, 그 여성학자는 니체의 이러한 여혐론에 대해서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까?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저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복수와 사랑에서 여성은 보다 야만적이다."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번째 실수였다."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

 

  왜? 이리도 니체는 여성 혐오자가 되었을까? 니체가 강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수록, 니체가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정답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니체는 아버지가 5살에 돌아가셨기에, 어머니를 비롯한 3명의 고모와 엘리자베트라는 여동생에 둘러싸여 살아야했다. 그는 여성의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삶이 내면에 침잠하여 여성 혐오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니체가 '힘의 의지'를 추구 한 것도, 강한자가 되어 여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의 '힘의 의지'는 단순히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 불굴의 신념'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성성을 강요받던 니체는 이 강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적 불굴의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적인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처음부터 여자를 보는 눈을 망쳐 놓는다."

"늘 깜짝할 사이의 많은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그대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결혼생활은 긴 대화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니체가 결혼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학자 황상민이 한말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혼에 대한 많은 심오한 격언들은 그만큼 니체가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루 살로메와 연애하고 싶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루 살로메는 니체를 거부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와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싶었지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는 싫었다. 여성으로부터 버림받고, 좌절받은 남자의 상처는 깊다.  2011년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우퇴위아 섬)에서 극우 청년에 의해서 테러가 일어났다. 그 청년의 말중에서 '나도 여자를 사귈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또한 극우 청년으로, 여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 단일민족 국가로 한국을 뽑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사랑은 분노로 폭발한다. 니체와 노르웨이의 극우청년의 경우, 여성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력적 말이나 행동으로 이것이 표출된 것은 아닐까?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단지 소크라테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결혼하지 못한 니체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들린다. '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다!! 천재인 내가 무엇인 못나서 여성이 없겠는가?'라는 니체의 절규가 나의 귓가에 들린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의 단계를 초월해 있다." 진정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며, 상대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 악마가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도 결국 동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니체는 여성에게 동정의 대상이고 싶지 않았다. 한남자로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 쌀로메에게 니체는 동정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나 보다. 니체를 알면 알수록 그가 더욱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3.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란 니체!!

 니체를 공부하면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떠오른다.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현실 교회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와 도올은 예수를 성인으로 인정한다. 가장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기에 예수의 말과 달리살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쓴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다 동등하다. 그런데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놓다니!'라고 소리친다. 이 말은 '도마복음'에서 예수를 인간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예수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니체의 주장은 크리스찬들에게는 엄청난 발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니체의 말을 가히 충격적이다. 더 큰 폭탄발언을 소개할까?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작품에 불과하며 망상에 불과하다.' 니체의 이 말은 자신을 전투적 무신론자로 규정한 니챠드 도킨슨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 가정의 엄격함이 니체를 이렇게 급진적인 철학자로 키웠던 것일까?

  "저 도덕이야 말로 위협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이라 주장하며 '도덕'에 대한 의심을 한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의심은 보통 용기있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니체의 말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한사회에서의 도덕이 다른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된다.(공간의 차이) 또한 한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부도덕일 수도 있다.(시간의 차이)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따라죽는 사티라는 인도의 풍습 과거에는 도덕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인도를 벗어나면 사티는 부도덕한 일이 된다. 그리고 오늘날 사티는 법으로 해서는 안되는 악습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실의 그 어떤 철창도 부수려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억압을 부수려했다.

  니체를 대표하는 사상중에 하나가 '니힐리즘'이다. 허무주의!! 니체의 니힐리즘은 '최고 가치들이 가치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종래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은 새로운 가치 선정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했다. 서구 기독교 도덕에 대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시대의 도덕을 세우기 위한 창조적 파괴일지도 모른다.

 

4. 고통속에 철학을 꽃피운 니체!!

  이책 곳곳에 '병자', '고통',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들이 자주 그의 글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질병',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니체가 매독을 앓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이 매독균이 뇌에 침투하여 그를 미치게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팟캐스트에서는 뇌종양이 그를 괴롭혔고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주장을 했다. 매독과 뇌종양 중에서 한가지만이 니체를 괴롭혔다기 보다는 이 모두가 니체를 괴롭혔을 것이다.  

 

"괴로움이 철학을 낳는다면 만약에 생각 자체가 병으로 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우리 철학가들 역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혼은 병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눈을 감아버린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전혀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무거운 일이다."

 

니체는 괴로웠을 것이다. 매독은 잠시 발생했다가 치료를 중단하면 잠복기에 들어가고 이 매독이 재발할 경우 척수에도 침투할 수도 있고, 뇌에 침투할 수 있다. 뇌에 침투할 경우, 매독성 치매로 진행된다.그 고통 속에서 니체는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이 고통에 무릎꿇지 않았다. 니체는 '그들에게 있어 삶에 대한 생각이 몇백배나 더 생각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하겠다며 당당히 고통과 죽음에 맞선다.

  혹시 니체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회복된다."는 그의 좌우명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모든 경우가 하나의 행운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그렇다.'며 고통의 극단인 전쟁을 찬미하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보인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고통에 무릎꿇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희망을 노래했다. '철학은 고작 신체의 해설과 신체에 대한 오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것 '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이라고 말한다. 신체! 아니 건강한 신체를 그는 희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을 승화했다.

 

"내가 심하게 아팠던 시절에 얻은 이득을 난 아직도 다 소모하지 못했다."

"삶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니체는 고통속에서도 철학을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낸다. "가장 강한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파멸을 보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라는 그의 말은 병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자신은 그 질병을 통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고통과는 상관 없이 행복하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떠오른다. 힘든 감옥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불굴의 신념이 떠오른다.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인생과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은 신영복이 생각난다. 니체에게 고통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라는 감옥에 굴하지 않고, 신영복이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았듯이, 니체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Amorfati(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서서히 죽어가는 니체는 절규한다. "적어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하나의 긍정자가 되고 싶다."이 말은 지금은 긍정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병마와 싸우며 긍정자가 되기 위해서 니체는 노력한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웃는다면, 그는 죽을 때도 웃을 것이다. '영원회귀'라는 말을 이때 사용해야되지 않을까? '고통'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 니체!! 그는 초인을 찾는다.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고통을 사랑하려하는 니체의 모습이 느껴진다. 세상에 고통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 나아가 상대방의 아픔까지 사랑하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사랑할때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며 상대방의 고통까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할때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그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니체는 자랑스럽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체의 이 소망을 이뤄지지 않는다. 1889년 투린에서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감싸 앉으며 그는 쓰러진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했던 초인은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10여년을 병실에서 살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한다. 그때가 8월 25일이었다.

 

5. 니체가 들려주는 아포리즘!!

  니체의 글은 문학적이며 많은 명언들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명언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그 명언중에 일부를 소개해본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그 법칙을 획득해 낸 윤리 이외의 어떤 윤리도 알지 못한다."

  '그 법칙을 획득해낸 윤리'란 무엇일까?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구체적 '삶의 문답'으로 해부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노예의 윤리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윤리로 살면서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

  동물중에서 '우울증'을 알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혹은 과로사를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니체의 탁월한 지적은 한국의 현실에서 너무도 유효하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은 댓가를 필요로한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한다. 희생없이 댓가만을 바란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여성을 원한다면 시간과 돈과 사랑을 한여성에게 쏟아야하듯이....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황금만능의 시대! 감질! 금수저가 활개치는 시대! 우리사회에 적절한 니체의 명언이다. 회사원들을 자신의 기쁨조로 여기며 갑질을 해대는 재벌 2세와 3세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로 인해서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진리는 힘이 필요로 한다."

  '정의는 힘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치환가능하다. 정의도 진리도, 진실도 힘이 있어야 정의일 수 있고 진리일 수 있다. 세월호의 진실은 촛불혁명이라는 힘을 필요로했고, 그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니체는  "그 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고 있지도, 전에 존재해 본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자유정신에 대한 부정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지독한 고통속에서 살아야했던 니체에게 '자유정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 건강한 육체에 대한 희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강한 니체의 모습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프고 고뇌하는 인간 니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고통속에서 완성된 철학을 나의 지식으로 단시일내에 정복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산맥 중에서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까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의 명언을 읽기 위해서는 긴다리가 필요했다. 나에게 긴다리가 없다면 긴 장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린시절 기다란 장대를 개울에다 짚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던 일이 생각난다.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만약 니체를 이해할 수 있는 장대를 이책의 곳곳에 배치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기에 좀더 수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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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벽암록
윤용진 지음 / 애니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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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을 강신주 방식으로 풀어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선문답에 대한 책들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사실 강신주가 '벽암록'을 비롯한 선문답 관련 서적들에 관한 책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문답책들이 쉽게 풀어 놓았다고 말들하지만,  강신주 처럼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깊으면서도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대려도 강신주는 새로운 선문답 관련 책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그를 기다리느니, 다른 책들을 읽으며 갈증을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른 바위위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책제목이 '벽암록'이다. 5권으로 풀어 놓은 벽암록이 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쉽게 풀이한 '세상 벽암록'을 선택해다. 과연 이책은 선문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


1.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조린다.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몇개의 화두는 풀 수가 있었고, 몇개는 저자 윤용진의 풀이를 읽고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나의 풀이와 저자 윤용진의 풀이가 다른 부분이 있다. 
  제2칙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 대한 풀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만을 꺼리면 된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그러니 도는 명백함도 없다. 라는 조주화상의 말에 수행승이, '명백함이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나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윤용진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크다고 할 수 있는가?', '도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윤용진의 풀이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지 않을까?

  도는 간택을 꺼린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간택하지 않으니 도는 명백함도 있을 수 없다. 노자가 말했지 않은가? 도를 도라하면 도라할 수 없다고.... 인간의 개념으로 도를 명백히 규정한다면 도는 하나의 도그마로 떨어진다. 인간의 도그마에 의해서 규정된 도를 과연 도라할 수 있겠는가? 한예를 들어보자.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절대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한 조선의 성리학을 유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자와 송시열의 사상만을 정통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지 않는가? 그들을 학자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칼을 들이 대는 행동은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절대화된 도는 도가 아닌 것이다.

  제3칙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에 대한 풀이도 동의할 수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스님이 '법체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화상이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 이네.'라고 답한다. 일면불의 수명은 단 하루요. 월면불의 수명은 8천 1백세이다. 윤용진은 이를 '수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풀이한다. 그럴까? 마조화상의 말씀을 너무 낮은 수준에서 풀이한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삶은 하루 같이 짧지만(일면불(日面佛)), 저승에서의 삶 혹은 윤회의 삶은 억겁의 시간이다.(월면 (月面佛))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조화상은 지금 이순간의 삶보다는 우주적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원주스님의 말에 답하고 있다. 불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제20칙 거기엔 뜻이 없다.의 풀이는 너무 의아스럽다. 용아납자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취미화상이 선판을 가져오라 한다. 용아납자에게 선판을 받아 들고는 즉시 내려쳤다. 이를 윤용진은 "분명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풀이한다. 선판과 포단을 내리친 것이 어찌,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되는가? 선판과 포단은 참선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네 스스로 좌선하여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용아납자'를 깨우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29칙 온 세상이 파멸할 때라는 주제는 불교를 순응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행자가 '온 세앙이 파멸할 때'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대수화상이 '따라가라!'라고 말한다. 이를 윤용진은 '그날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풀이했다. 얼마나 순응적인 풀이인가! 나는 풀이를 달리한다. 불교의 생각의 넓이와 폭은 헤아릴 수가 없다. 미륵보살도 56억 8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신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파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우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새로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대우주적 순환 속에서 온 세상의 파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대수화상은 '따라가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63칙 남전의 일도양단에 대한 풀이도 저자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서로 다투자.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절단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선승들이 말이 없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버렸다. 이를 윤용진은 '한번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한번 죽은 고양이도 다시 살아올 수 없다.'라고 풀이한다. 남전화상이 분열된 선승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양이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풀이로는 남전화상의 의도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선승들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서 선승들의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 집착을 없애려 고양이를 죽였다고 풀이해야 보다 근본적인 풀이가 되지 않을까?

 

2. 불친절한 용진씨

  이 책은 대중을 위해서 씌여졌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제43칙 산놀이를 설명하면서 '오노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한 제69칙 남전의 일원상 또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전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그렇다면, 남전화상이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저자 윤용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62칙 우주 가운데 보물은 원문과 저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책에는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혜초"라는 인물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해 놓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화두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초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문익화상이 '네가 혜초니라.'라고 말했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문익화상이 일깨우고자 했던 참된 의미는 '네가 부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한 것이 아닐까?

  저자 윤용진이 스스로 밝혔듯이, 불교 철학자도 아니요, 스님도 아니기에 깊이 있는 설명을 바랬던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다음에 '벽암록'의 본칙과 송, 수시, 착어, 평창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읽을 때, 이 책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벽암록의 끝이아니라, 시작점이 셈이다.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윤용진이 심혈을 기울여 풀이를 달아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나의 화두를 읽고 그 뜻풀이를 하고, 이를 윤용진의 풀이와 비교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선문답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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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 - 한대 지식의 집대성 오늘 고전을 읽는다 4
이석명 지음 / 사계절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회남자'! 그 이름도 낯선 책이다. 팟캐스트 '전영관의 30분 책읽기'에서 이윤호선생이 '회남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어서 처음 알게된 책이다. 한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았기에 결국 무제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두께도 상당히 얇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책장을 넘겨보자.

 

1.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

  '회남자'라는 책이 얇은 책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였다. 장사 마왕퇴의 발견에서 부터 시작하여 회남왕 유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며 '회남자' 탄생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는 '기론'과 '무위'등의 개념을 통해서 '회남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상서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회남자에 대한 안내서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으나, 상당히 가벼운 책이라는 한계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음식맛은 보지 못하고, 열심히 레시피만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2. 회남자는 무제에 대항한 책이었을까?

  이윤호선생은 '회남자'를 팟캐스트에서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책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회남자는 무제에 반기를 든 책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결합된 황로학의 대표적 이론서이다.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최고의 통치술을 이루기 위해서, 인재등용, 법치, 시스템마련, 세의 확보 등의 다양한 통치술을 소개하고 있다.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지가 아니라, 순리에 따라서 시스템적으로 통치가 이뤄지도록 하여, 통치자가 바삐 움직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무위'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중앙집권화를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지 그 방도를 알려준 책이라할 수 있다. 황실의 피가 흐르는 유안이, '회남자'가 완성되자 한질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이책을 소중히 보관하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회남자'는 무제의 통치술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통치술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다.

 

3. 성인과 미친자를 구별하라!

  아인슈타인의 비서가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아인슈타인을 대신해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이 질문을 했다. 비서는 "이질문은 너무도 쉬운 질문입니다. 제 비서도 이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라며 비서에게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막힌 무위(색이무위)와 열린무위(통이무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진정으로 과학에 대해서 깨달은 자이고, 아인슈타인의 비서는 깨닫지는 못했으나,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을 흉내낼 수 있는 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사람에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막힌 무위와 열린 무위의 차이일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하면, 자신은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아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보이기에 집착할 수 없는 자일 경우가 많다. '회남자'에서는 성인과 미친자의 차이와 공통점을 소개하고 있다. 둘다 근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인은 덕으로 내면의 조화를 유지하는 반면에, 미친자는 화복을 분간 못하여 근심이 없는 자이다. 겉모습만을 보고, 겉모습만을 따라하면서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자! 그를 경계해야한다. 진정으로 통달하려한다면, 내면에서 부터 깨달음이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4. 즐거움도 경계해야할까?

  회남자에서는 ,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이라고 단정한다. 귀와눈이 소리와 색깔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면 오장이 요동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고요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즐거움 또한 경계하라는 이 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즐거움'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들을 통털어 '즐거움'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표현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줄 수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 즉 sex와 같은 쾌락일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탐닉하면 정신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지적즐거움이나 이타적 즐거움(봉사활동)과 같은 즐거움은 많이 할 수록 행복하게 우리를 이끌지 않는가! 이들을 구별해서 논지를 전개했다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회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전이 있다. 그 많은 고전들 중에서 새로운 고전 하나를 만났다. 한대의 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작품에 대한 작은 입문서를 읽고, 회남자라는 책이 어떠한 책인지 어렴풋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회남자라는 책의 입문서로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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