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신주라는 철학자는 다양한 방면에 자신의 철학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영화와 문학을 자유자재로 분석했다. 그리고 시도 해체한다. 보통의 철학자들이 한명의 철학자의 사상에 빠져서 자신의 온 역량을 소비하는데 비해서, 강신주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철학적 사유를 한다. 그리고 그 철학적 사유는 시와 영화, 소설 작품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의 철학적 놀이에 독자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 꾀 오래된 책이지만, 읽고 싶었으나 서가에 꼽아 놓고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들었다.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이라는 책이다. 


  사실 현대의 많은 시들이 읽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렵다. 시를 읽으면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강신주가 소개하는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고 시를 읽으면 시가 이해된다. 놀라운 경험이다. 시인은 이러한 철학을 몸으로 채득하고 본능적으로 시를 쓰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적 사유 없이 글을 썼는데, 강신주가 적당한 철학을 가져다 붙여준 것일까? 강신주가 소개한 어느 독자의 글 을 읽으며 무릎을 탁! 쳤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씨인지도 모른 채 씨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씨앗들이 다양한 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철학자가 뒤따라가면서 시인이 뿌린 씨가 어떤 꽃의 씨인지를 하나하나 알려줍니다."(22쪽)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난 이상,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그 시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우리는 강신주의 도움을 받아서 시인의 손에서 시를 뺏앗아 올 수 있었다. 

  많은 시를 강신주의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만해 한용운 시인이 그토록 불렀던 '님'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색다른 결론이 무척 흥미로웠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님'은 조국일 수도있으며, 부처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님일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한용운을 강렬하게 기억했기에 그의 '님'은 조국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강신주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이라고 단정한다. 어려서 결혼하고 55ㅔ에 유씨 또다시 결혼한 만해 한용운이 서여연화라는 여인을 또 사랑했다니... 정말 충격적이다. 쉽게 그의 님이 '조국'일 것이라 단정한 것은 역사를 사랑하는 나의 바램이었던 것일까? 인간 한용운에 대한 고민 없이 너무도 쉽게 내가 믿고 싶은 한용운을 상상하며 '님'은 조국이어야 한다고 단정한 것이다. 

  강신주의 철학 강의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는 '사랑'이다. 대중 강연에서 강신주는 사랑을 강조했다. 이 책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한마디를 던졌다. 


  "사랑은 히드테리와 강박증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을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41쪽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의 균형을 추구해야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의 경지와 비슷한 것이 건전한 사랑의 경지가 아닐까? 나의 욕망만을 추구하면 이는 스토킹 범죄가 되고,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데만 골몰한다면 이는 가스라이팅이 될 것이다. 참된 사랑은 이렇게 힘들다. 결혼을 한 부부 사이라할지라도 때로는 나만의 욕망을 추구하며 상대방에게 불만을 품을 때가 있다. 지나고보면 나의 옹졸한 생각임을 깨닫지만, 그때는 그 욕망에 매몰되어 진정한 사랑을 보지 못한다.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89쪽


고정희 시인의 시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라는 시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낙제점이다. 진정한 사랑은 강신주가 말했듯이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보듬어야한다. 그런데, 고정희 시인의 시에는 여성적인 것은 우월하고 남성적인 것은 열등하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녹아있다. 여성이 남성의 이데올로기를 극복 못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있다. 남성의 것은 폭력적이기에 열등하고 여성은 사랑을 낳기에 우월하다는 생각도 또다른 폭력적 모습이다. 서로의 다름을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치환해버린다면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조화시켜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남성의 욕망과 여성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첩경이 아닐까?


  시가 어려워 평론가나 철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시적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나의 게으름도 시를 어렵게 느끼는데 한몫했다.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은 난해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체력이 많이 약해진 강신주가 체력을 회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겨주길 기대해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2-15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2022년 알라딘 서재의 달인 추카합니다
여기로 가셔서
https://blog.aladin.co.kr/zigi/14178206
주소 입력하시고
알라딘이 보내주는 선물 꼬옥 받으세요

강나루 2022-12-19 01:50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님, 연말 행복하게 보내시고, 새해에 복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12-15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2-19 01:50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새해에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