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언덕을 넘길 때쯤, 가사가 예전 같은 속도로 나오지 않는 시기가 있었다. 이때 나는 오만하게도 ‘감이 떨어졌구나‘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은 겸허해짐과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것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예전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뇌‘라는 것은 결국 몸뚱이의 일부이니 피가 쌩쌩 돌고 산소가 공급되어야 원활히 돌아갈 터이고, 튼튼한 몸이 받쳐주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영감‘이라는 게 오더라도 잡을 기력이 있는 것이다. (건강이 자산이라는 말... ‘젊은이‘로 분류되는 나이에는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이던가!)
영감뿐이랴.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 의지, 힘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근성, 새로운 기회가 오기까지 잠복하고 버티는 힘.... 모두 결국 체력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게 많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이라는 말은 주로 비관적으로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패턴‘이 만들어지는 순간 설렘과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음악도 다음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지루해진다. 또한, 패턴이 남발되는,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는 사랑받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태도는 의외로 이런 관용구들이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쳇바퀴‘라는 표현이 인생을 비관하는 용도로 쓰이면서부터 ‘반복되는 일상‘이란 것은 멋도 맛도 없는 시간의 배열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쳇바퀴 같은 삶은 정말 불행한 걸까?
인간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동시에, 그 안정이 오면 회의감을 느낀다.
‘나는 이 쳇바퀴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다.‘
예측 불허의 내일들이 펼쳐져 있는 시간은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주로 암담하다. ...(중략)...불안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내일 때문 아니겠는가.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감은 섬광보다는 네잎클로버를 닮았다. 클로버 무더기가 있다면 그 안에 네잎클로버는 무조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일은 엄청난 행운같지만,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이 아프도록 찾아 헤맨 시간과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창작자들은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지만, 걷고 이야기 나누고 누워 있고 유튜브 따위를 보는 모든 순간, 머릿속 한편에 ‘해야 할 일‘의 회로가 쉼없이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느 요소가 이야깃거리의 단초가 되어 생각이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쉽게 좌절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설령 후질지언정, 기다리는 자에게 영감은 반드시 찾아온다.
"기특한 순간이 많아지면 그게 자존감이 되는 것 같아."
어렴풋이 품고 있는 생각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말해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몇 년을 주기로 단어는 유행을 탄다. 힐링, 웰빙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시대가 어렴풋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에 제목이 붙여지면, 그 단어는 한동안 수많은 문화를 지배한다. 요즘 그런 단어가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고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욕망이 부록처럼 딸려온다. 어릴 때 칭찬에 길들여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내성이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점이기도 하다. 허나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은 굉장히 작은 것들이다.
나의 존엄을 가꾸어 나가는 일은 결코 거창할 필요만은 없다. 존엄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창씨개명에 맞서고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존엄한 사람들은 일상 속 하찮은 순간들이 정갈한 이들이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생각해서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않았던 깨알같은 장면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요히 자신을 토닥여주는 습관을 가져보자.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건 달콤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내면을, 방치되어 있던 모습들을 다 끄집어낼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형태로의 사랑이든 마찬가지예요. 로맨스이든 아니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똑바로 마주볼 수 있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은 사실 대단치 않은 것들일 때가 많죠. 나만의 독특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무장해제되곤 하니까요.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하는 총체적인 그 연애의 모습이 저는 항상 탱고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패턴 속에 있지만 엇박이 있고, 굉장히 기쁜 멜로디 속에 흥이 차오르다가도 극단적으로 슬퍼지고...
"탱고는 실수가 나서 발이 엉키거나 스텝이 꼬이는 것, 그것조차도 탱고다."
연애에 실패하신 모든 분들, 그것조차 다음 사랑이 시작되는 하나의 조각이라고 생각을 하시면서 ‘그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이런 탱고 속에 살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양쪽이 불완전한 모양으로 퍼즐 조각처럼 딱 맞춰지는 것이 연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때로는 마법 같아요. 그냥 집 앞에 빵 사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중에 너무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면 제 앞의 장소가 뮤직비디오가 되어버리거든요. 별거 없는 내 하루가 그 한 곡으로 인해, 영화처럼 변하는 거예요.
향을 통해 내 안에 감정, 기억이 생생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대요. 향기가 기억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는 거죠.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더라고요.
‘내가 뭐든 될 것 같고, 만사가 뭐 이렇게하면 이렇게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치의 벽을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미래를 그릴 수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모양새이며 내가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기능이 작동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나서는 그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예쁘지 않은 풀을 잡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언어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대요. 그들은 모든 식물과 동물에는 각각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작물과 잡초를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살다 보면 유난히 ‘내가 잡초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럴 때 인디언들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세상에 존재 이유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까요.
꼭 아픔에 아픔을 더해야만 낫는 통증이 있죠. 바로 ‘근육통‘ 입니다. 통증이 아주 심한 부위를 만지면 너무 아프기도 하지만 묘한 시원함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게 실컷 주무르고 나면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도 근육이 있죠. 그렇다면 내 마음의 통증도 근육통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무조건 피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즐겨보는 겁니다. 실컷 앓고 나면 조금은 시원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가끔 마음이 복잡해질 때 호흡을 해보는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냥 내 호흡에만 집중해도 마음속에 좀 뿌연 것들이 가라앉으면서 ‘내가 지금 왜 복잡하고 왜 두근거리고 또는 왜 불안, 초조한 것인지‘ 딱 떠오르는 경험들을 몇 번 했어요.
너무 힘들 때는 가만히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요. 바닷속에 해조류 같은 게 뒤엉켰는데 내가 거기 얽매여 있다가 그걸 발로 탁 차면서 수영해나가는 이미지를 떠올리죠. 그러면 실제로 그 심상이 뭔가 내 온몸에 영향을 미치는 듯 그 고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는 기분을 맛볼 때가 있어요.
"어떤 작품이든 시작할 땐 다 형편없죠. 매일 하는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도 사실 대부분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수정하면서 더 분명한 형태로 진화하니까요."
결국,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하늘에서 떨어진 능력이 아닌 열정과 끈기라는걸요.
처음엔 위로를 준다고 함은 자고로 더 나은 것을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때로는 가사가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때, 그래서 힘들어하는 가사 속의 화자가 자신들과 다름없음을 이야기할 때, 거기서 더 위로를 느끼더라고요.
상대방을 간파하는 거 같은 제일 쉬운 말이 뭐냐면 "사실 마음 많이 약하지?"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대개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곤 하죠. 이처럼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약한 모습을 한 부분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약한지 모르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가끔 잊어버리는 거 같아요.
설렘은 결국 긴장감에서 오는 거고, 긴장감이라는 건 서로 모르는 데에서 서로를 예측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에 기인하는 거니까요.
설렘은 뒤돌아봤을 때 너무 아름답고 순수하고 촉촉한 거 같은데, 막상 진행 중일 때는 좋은 날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날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모든 게 불확실하고, 저 사람 마음을 모르겠고, 오늘 마음 내일 마음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어요.
사랑은 계속 변해가면서 다양한 단계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 같더라고요.
설렘이라는 것은 지나고 보면 앞면만 생각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 같지만, 그 뒷면은 수없이 불안한 밤들, 입맛이 떨어졌던 저녁 식사들, 이런 게 분명히 있을거예요.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거 같아요."
걱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우리가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들은 대부분 걱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대단히 명확한 문제의 경우에는 그걸 우리가 몸으로 해결하고 다니느라 가만히 멍하게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겨를도 없습니다. 사실 사서 하는 걱정들이 대부분이죠.
알면서도 가끔 멍하니 있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거든요. 중력이 있는 거 같아요. 걱정에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100퍼센트 점점 침전할 수밖에 없는데 ‘아, 이거 아니지. 이거 내 생각이지‘ 이렇게 헤엄쳐서 나오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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