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 P201
"지금 가자. 기다린 게 잘못이었어." - P205
하필 여기로 온 이유가 뭐요?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뭐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온 거요? 잡지라는 거, 그거 뭔가 읽는 놈들을 재미있게 해보겠다는 거 아니오? - P210
밝고 건강해야만 했다. 4월호니까. - P214
"그래가지고 남자라고나 할 수 있겠소?" - P216
"내가 그런 말에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라도 받은 듯이 울컥 뛰어들기를 바라고 말했겠지만, 나는 저런 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나한테는 자존심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 P217
"......원래 겁쟁이들은 이유들이 많은 법이지." - P217
"정확히 잘 보셨습니다. 나는 이유가 많은 비겁잡니다." - P217
세상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던지는 인사말이나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도 힘겨워 보이고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이들이 있다. - P229
"당신 같으면, 죽을 만큼 부려먹다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아무런 대책 없이 쫓아내버린다면 어떻겠소." - P231
이 도시는 어둡고 고요하고 검었으며, 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들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살았던 공간에서 버림받은 것들이 모두 모여 이루어진 다른 공간 같았다. 아니, 땅 위 세계의 반대편으로, 지구의 핵을 향해 컴컴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도시 같았다. - P232
날씨 탓이었겠지만, 마치 땅속에 걸린 인공의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듯이 이 도시의 공기는 어둑어둑하고 답답했다. 마치 두꺼운 땅을 비집고 어디론가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가고 나면 진짜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이곳은, 내가 자란 도시보다 오히려 하늘에 가까운 곳이었다. - P232
만일 명윤의 말대로 이곳이 의선의 고향이라면, 의선이 애써 어린 시절에 대한 화제를 피하곤 하였던 것은 이곳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 P233
그냥...... 잊고 지내요. 잘 생각하지 않아요. - P233
명윤의 말대로 나는 지독히 차가운 인간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 와서 찾아다녔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이제 괜찮다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 P237
"뭐, 실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싣지 마시오." 장은 숨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서 내가 읽은 것은 환멸이라기보다는 견고한 외로움이었다. - P239
어쨌든, 이리저리 변죽만 근사하게 울려대도 기사라는 것은 메꾸어질 수 있다. - P240
취재원과 헤어질 때마다 다시 만나자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241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 기어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헤아려보자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사방이 두꺼운 바위에 막혀 있는 탓에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돌토리로 여긴다지요. - P243
생김새나 몸집은 사슴 모양인데, 녹슨 바늘 뭉치 같은 검은 털들이 매끄러운 가죽을 뚫고 나와 정수리부터 네 발끝까지를 뒤덮고 있답니다. 두 눈은 굶주린 범처럼 형형하고, 바윗돌을 씹어먹는 것으로 허기를 이기느라 이빨은 늑대 송곳니처럼 예리하고 단단하답니다. - P243
이 짐승의 몸에서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번쩍이는 뿔입니다. 크기 때문에 얼핏 보아서는 무시무시하다는 인상부터 주는 그 뿔은, 그러나 꼬아놓은 머리채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이 짐승이 걸어가는 길 앞을 음음하게 밝혀준답니다. - P244
이 흉측한 짐승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광부들뿐입니다. 채굴 작업을 하는 광부들이 때로 이 짐승과 맞닥뜨리는데, 그때마다 이 짐승,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 소원인 이놈은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한다지요. 잡아먹히는 것이나 아닌가 떨고 있던 광부들은 조건을 내건답니다.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마. - P244
짐승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마를 앞으로 내밉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승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뿔을 잘라낸 광부들은 몇 발짝쯤 짐승을 데리고 가다가 다시 조건을 내겁니다. 네 날카로운 이빨을 자르게 해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마. 짐승은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버팁니다. 하지만 광부들은 여럿이고 짐승은 혼자 몸이니 배겨낼 수가 있나요. 한 사람은 뿔이 뭉툭하게 잘라진 짐승의 이마를 누르고, 다른 한 사람은 흑탄처럼 시커먼 짐승의 뒷다리를 붙잡고, 남은 사람들이 짐승의 뾰죽한 이빨을 뽑아냅니다. - P245
거무죽죽한 피가 짐승의 입이며 턱이며 이마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보면서, 광부들은 지상으로 통하는 넓은 갱도를 향해 필사적인 낮은 포복으로 달아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승의 뿔이며 이빨들은 달아나는 길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짐승이 따라나오지 못하도록 재빨리 나오는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 P245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 P245
광부 임林을 생각할 때마다 장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의 입이었다. 임의 윗입술은 예민한 붓으로 살짝 그어놓은 것처럼 얇았으며 아랫입술은 그보다 약간 부피가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입술이 얇다는 것뿐, 임의 입이 특별히 잘생겼거나 못났거나 이상한 모양을 한 것은 아니었다. - P245
장은 임만큼 말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어떤 말에도 ‘예‘나 ‘아니오‘ 또는 ‘글쎄‘ 정도로 대꾸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임의 과묵함은 단순히 말수가 적은 것과는 달랐다. - P246
그는 마치 세상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침묵의 장막을 쳐놓고 사는 사람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막장일을 할 때, 작업을 마치고 목욕을 할 때, 술을 마실 때, 심지어는 안전 구호를 짧게 외치며 임무 교대를 하는 순간까지도 임은 그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기묘한 침묵 가운데 있었다. - P246
그 침묵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지, 임과 헤어진 뒤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장은 마땅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진폐 병원 영안실에서 얇은 시트를 벗겨내고 아내의 아버지의 죽은 얼굴을 보았던 팔 년 전에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다. 임의 얄따란 입술에 언제나 긴장감 있게 맴돌고 있던 침묵은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었다. - P246
그런 임이 이따금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쓸 때가 있었다. 임은 단어들을 연결하는 데에 몹시 고심하면서, 듣는 사람의 분통이 터질 만큼 정성을 들여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은 대부분 별다를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 P246
장이 임을 알고 지냈던 기간은 고작 일 년여에 불과했다. 그뒤로 십 년 넘게 광부들과 함께 지내온 장에게 임이 유독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장과 처음 교분을 트고 지낸 광부가 바로 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P246
머리 위에서 몇 톤의 탄가루나 폐석이 떨어져 생기는 심심찮은 사망사고들에 대하여 장은 들은 적이 있었다. 젊은 그는 그때까지 죽음이 매우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이제 그것은 그의 두개골로부터 십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 P249
돼지고기와 막걸리는 목구멍의 분진을 씻어내준다는 것을 의사들도 인정했다 - P251
안전등을 끄시오. 빛을 아껴야 해. - P257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힘을 아껴야 해요. 그리고 체온을 잃지 않도록 서로 몸을 붙입시다. - P259
그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던 순간에 임은 장에게 그 사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 짐승을 본 사람이 있다오. - P259
저 짐승 눈. 저 눈! 저, 저 눈깔......! - P261
고놈들이 동발을 갉아먹을 테니까 사실은 다 잡아줘야 하는데, 다들 쥐를 예뻐해. 쥐는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거든. 동발이 무너지거나, 발파하는 위쪽 암반이 약하거나 해서 붕괴 위험이 있으면 쥐부터 싸그리 없어지는 거야. 광산사고는 순간이니까...... 고놈들 따라서 재빨리 피하면 살 수 있는 거라구. - P272
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자긍심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 작업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젊은 장으로 하여금 그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유혹이었는지 모른다. 하루하루가 거대한 판돈을 걸고 하는 노름의 연속이었다. 그의 판돈은 그의 목숨과 젊음, 하나뿐인 몸뚱이였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그는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대담해졌다. 밤새워 암실 작업을 마치고 마음에 드는 프린트를 얻고 나면 며칠을 더 밤새워도 거뜬할 만큼 원기가 충전되어오는 것을 느꼈다. 철들 무렵부터 그의 꿈은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발이 도저히 닿지 않을 만큼 사이가 벌어진 절벽과 절벽 사이를 뛰어서 건너고 싶었다. 그러다 살거나 그러다 죽고 싶었다. 바로 그 희망을 그는 황곡에서 실현하고 있었다. - P273
오래 뒤돌아보는 것은 좋지 않다. - P275
녀석들은 짖지 않았다. 그들도 인간처럼, 지나친 충격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 P281
......만일 그대가 밤의 어두움과 불빛의 따스함에 대해, 사람의 창의 애처로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원도 산간지방의 그믐밤 국도를 달려보라.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마치 끊길 듯한 기억처럼 하얗게 맺혀 있는 등불을 기억하라. 거기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부자리를 겨울산의 굽이굽이를 돌아 작은 읍내를 지나쳐갈 때면 잠시 그 창들의 수효가 많아지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빈들의 어둠 속으로 이내 삼켜지고 만다. - P282
그때 그는 젊었을까. 아직 그는 젊은 것일까. - P284
......대체 어디까지 네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 P292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 P310
결코 엄살을 할 줄 모르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대의 엄살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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