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이다보니 서사가 꽤나 길다. 대략적인 상황만 언급하자면 잡지 취재차 탄광이 있는 황곡시라는 곳을 방문한 인영과 명윤은 그곳에서 사진 찍는 일을 하는 장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는다. 그 와중에 광부로 일했던 임林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임林이라는 사람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황곡시로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던 임의선이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처음엔 이 임씨가 임의선인줄로 생각했는데, 뒤이어 계속 읽다보니 이 광부로 일했던 임林씨는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이라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명윤은 임의선을 찾기 위해 인영과 함께 황곡시 주변을 수소문해가며 샅샅이 뒤져보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인영이 방문했던 폐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신문기사 스크랩북에서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면서 의선을 찾는 일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거의 99% 포기상태였다가 1%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던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근거로 다시 의선을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세세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인영의 꼼꼼함과 명윤의 열정이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의선을 찾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고 월산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인영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인데, 불빛을 찾기 힘든 시골의 캄캄한 밤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비유적인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느껴졌기에 밑줄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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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가 의선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 의 영혜라는 인물과 거의 똑같은 것이었다. 단지 작품에 나온 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저자가 평소에 갖고 있는 신념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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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어서 쭉 읽어나가다가 보니 인영과 명윤은 더이상 의선을 찾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월산에서 황곡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왔는데, 그곳에서 어떤 아낙네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다. 처음에는 큰 의미없는 일상적인 대화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인영과 명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지명地名인 어둔리라는 단어가 나온다. 인영은 이 지명에 관해 아낙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동안 자신이 찾았었던 다른 지명들까지도 실재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영과 명윤은 자신들이 찾았던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낙심하고 있던 터라, 이 아낙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처럼 인영과 명윤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가로 아낙들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체가 아직 불명확한 어떤 젊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가 연골이라는 곳에 간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여기서 이 젊은 여자의 성이 김씨인 것으로 나오는데, 그동안 나왔던 소설 속의 인물들 중 김씨는 명윤과 함께 있는 인영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왠지 인영과 관련있는 사람인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소설의 앞부분에서 인영의 친언니인 민영이라는 사람이 잠깐 나왔었는데, 그녀는 인영이 11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을 독자인 내가 별도로 기록해 둔 것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 민영이라는 사람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그당시 행방불명되어 살아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나의 생각이 뒷부분을 통해 맞는 것으로 드러날지 아닐지는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던 퍼즐을 조금씩 맞춰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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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보니 김씨라는 사람은 그냥 마을에 사는 주민 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 김씨가 명윤에게 의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인 나로써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 P320

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은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 P320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눈빛의 변화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 P327

그냥......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 결국 그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건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짐승보다 낫다고 여겨지지 않아요. 소가 엄마한테서 떨어질 때 얼마나 슬프게 우는 줄알아요? 돼지가 죽기 전에 얼마나 불쌍하게 비명을 질러대는데요.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나는 회식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자꾸만 상상을 하게 돼요. 저것이 살았을 때는 어땠을까, 죽는 순간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 P328

내 방도 옥탑이라서 좋아했었어요. 가끔씩 와서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일광욕하는 사람처럼 옥상에만 앉아 있다가 가곤 했어요. 그애는 마치...
그는 미소를 거두었다.
・・・・・ 마치 식물 같았어요.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도 그애는 늘저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의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예요. - P342

재작년 겨울에 후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바닷가 모래밭에 갈매기떼들이 앉아 있는 걸 봤어요. 모두 일제히 한방향을 보면서 수십 마리의 새들이 꼼짝도 않고 있더라구요………… 그것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태양 쪽이었어요. - P342

다 햇빛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 P343

......너무 강한 햇빛은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요? - P343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은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P346

선배는 예전의 그애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애를 몰라요.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그때를 모르니까.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이 좋으니까. - P347

단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본능에 의지하여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건 어리석은 짓이건 내가 선택해서 나선 길이었다. 더구나 다음날까지는 어차피 작정하고 온 것 아닌가. - P349

자신도 모르게 명윤은 서인천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낮에도 창문을 꼭꼭 닫아 빛이 들지 않던 그 방의 오후를, 곰팡이가 흐드러지게 핀 장판과 벽지 썩어가는 냄새를 생각했다. 그의 삶은 그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다. 그의 몸뚱이에 들러붙은 그 눅눅한 어둠은 단 한 번도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종내에는 이 외딴 소읍까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온 것이다. - P357

황곡이 버림받은 거대한 짐승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 월산은 그보다 몸집이 작은 짐승 같았다. 오래전에 숨이 끊어져 이제 남은 뼈들마저 삭아가는 들짐승처럼, 이 소음은 높은 봉우리들의 가운데에 허술하게 엎드려 있었다. - P358

아버지는 땅속에서 살았었대, 라고 의선은 그에게 말했었다.
땅속이라니?
땅속, 아주 깊은 데에서 살았었대………… 거기서 돌을 캤대. 땅속에서 돌을 캔다는 건・・・・・・ 그 돌들하고 목숨을 조금씩 바꾸는 거라고 했어. - P362

명윤은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회의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의선이 말했던 것들은 어느 하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인영의 말대로, 그 말들에 의지하여 길을 나선 것부터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어쩌면 의선이라는 여자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명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고 겪었던 의선은 혼령이나 꿈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 P362

"그애가 아무 기록에도 없는 것이......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요." - P369

처음부터 의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었다. 줄곧 의선은 그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가냘픈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왔다. 그 힘이 우연히 명윤에게로 기울어 그와 함께 세 계절을 보낸 것뿐이다. 이제 그것이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울을 떠나면서 그가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찾아낸다 해도 그녀를 그 자신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끌어당길 수 없으리라는, 뿌리깊은 패배감이었다. - P370

마치 상처 입은 두 짐승들처럼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눈을, 서로의 등뒤로 검게 펼쳐진 폐광촌의 하늘을 쏘아보았다. 침묵이 후회와 외로움과 분노가 거칠게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 P372

"간 사람이사 무슨 걱정이 있겄누, 한겨울이라고 찬 구들장 걱정을 하나, 배 주릴 걱정을 하나. 손이 갈라지겄나, 발가락이 얼어터지겠나. 미어질 가슴도 없으니 얼마나 좋겄누." - P376

".....세월만한 약이 없다지?" - P378

"현리, 저기 칠판에 현리라고 적혔잖우? 우리는 그냥 어둔리라고 그래. 옛날부터."
목이 긴 여자는 배차시간표가 적힌 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뚫어져라 흑판을 쏘아보더니, 이번에는 긴 의자로 돌아가 자신의 배낭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냈다. 여자의 상체의 두 배는 될 대축척지도가 배낭 위로 펼쳐졌다. 여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월산을 짚었고, 이내 현리玄里를 찾아냈다. - P381

‘옛날에, 그애가 어둔리 이야기를 했었어. 난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 P382

"거 참 이상하네."
어둔리에 산다는 파마머리 아낙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젊은 여자애가 연골에 간다고 하는 걸 누가 봤다던데."
"연골엘가? 젊은 여자애가?"
매점 아낙이 되물었다.
"골말에 김씨 말이야. 왜 얼마 전에 타이탄 트럭 하나 샀잖어? 월산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인 줄 알고 태워주려구 했더니, 나가는게 아니라 연골로 들어간다고 하더래. 그래 참 별일도 다 있다고 했더니만." - P384

"더 빨리 걸어야 해. 시간을 끌수록 체온을 잃게 돼. 체온조절이 안 되면 죽는 거야. 알아?" - P389

전날 저녁 어둔리의 아랫마을인 골말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을 만나 의선의 사진을 보였을 때 그는 글쎄요, 라고 말끝을 흐렸었다.
비슷한 것도 같으네요. 하지만 얼굴을 하얀 목도리로 친친 싸매서 잘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는 세상에, 아무도 안 사는 연골로 간다니까 섬뜩했다니까요. 거긴 아무도 안 산다고 해도 들은 척 마는 척하고 허전허전 걸어가는 거예요. 한 손에는 기우뚱하니 큼지막한 가방까지 들고......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꼭 귀신에 띈 것 같더라구요.
그게 벌써 나흘 전의 얘기라는 것이었다. - P395

"그 조그만 마을에 주민이 몇이나 되겠어요? 모두 집안에 있었다면 못 봤을 수도 있는 거죠. 더구나 그애가 눈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얼어죽어 있든 어쨌든. 거기에 가야 해요. 그애를 찾지 못한다 해도…………"
명윤은 잔기침을 하며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다못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겨놨을 거예요." - P395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것일까. - P396

이것이 과연 맞는 길일까. - P397

의선이다. - P400

"......바로 찾아왔군요." - P401

"이제 어디로 가죠?" - P402

"여전히 그애에 대해서 알아낸 게 없군요. 난 이곳으로 오기만하면......
...(중략)...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팔차선 횡단보도에서 그애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런 말을 그애는 왜 그때 나에게 했었을까. 조용히 춤추는 것 같은 그애의 눈, 그 침묵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다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령 그애를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한다 해도." - P403

"......아무것도 없군요. 그런데." - P403

갑자기 긴장을 푸는 것은 좋지 않다. - P403

몇 분간 쉬었다 가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 P403

"봤죠? 하얗게 쓸어진 방바닥? 그애는 다시 와요. 반드시 온다구요. 서울서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한번 돌아왔는데 다시 못 오겠어요? 반드시 온다구요. 반드시 올 거예요." - P406

추위나 두껍게 쌓인 눈, 무거운 명윤의 몸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넋두리였다.
괜찮아요.
두고 가요.
제발 놔두고 가요.
반복되는 그의 속삭임이 머리끝까지 화를 치밀게 하였다. 제발 닥쳐줘, 라고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이를 물었다. - P408

이젠 다 틀린 거죠...... 이젠 다, 다 틀렸어요...... 이젠 더 가볼 곳도 없어요. - P408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사고 순간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은 저절로 삭제되는 것일까. - P418

세상 위로 올라오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나는 눈부시게 희고 뭉클뭉클한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구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구름 아래에 있을 때 구름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 P419

그 날아가는 비행기 아래에 내가 아는 세계가, 그 위로는 내가 가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 밑에도 다른 세상이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주알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P419

돌아올 때는 배를 탔다. 일곱 시간 동안 물살을 헤치며 육지를향해 나아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처음 타보는 배인데 멀미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바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겨울의 검퍼런 바다 밑이 따뜻한 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언니가 파도 속에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상처받기에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 P421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만나라도 봤으면...... 민영아. - P422

어쩌자고 그랬니..... 어쩌자고, 네가 어쩌자고...... - P422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이 무거워서 가라앉는 건데. - P423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 P423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 P424

그러나 그 상태로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로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해졌다. 생채기 위로 세월이 덧쌓였다. 묵었던 상처를 뚫고 새로운 상처가 파이고,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였다.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동안 나를 결박해온 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24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의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받아들였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한 번도 허락해보지 않은 애정을, 살을 부딪힐 만큼의 가까운 관계를 그녀에게 허락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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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권에서 강호인 상양고를 꺾고 결승리그에 올라온 북산은 8권에서 또다른 강호인 해남대 부속고를 상대하게 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해남대 부속고의 감독인 남진모가 자기 팀 주장인 이정환에게 건내는 말인데, 최고라고 평가받는 팀의 에이스 선수가 그 어떤 다른 선수들보다도 승부욕이 강한 것을 보면서 분야를 막론하고 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왜 탑일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태도가 탑이 될 수밖에 없게끔 그들 자신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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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해남대부속고의 한 선수가 독자인 나의 눈길을 끌었다. 훈련의 양과 질이 어마어마해서 중학교 때까지 날고 긴다던 선수들도 상당수가 그만둔다고 소문난 해남대부속고에서 3학년까지 살아남은 선수인데, 이름은 홍익현이고 체격조건이 왜소한 편이라 키가 큰 선수들이 주로 뛰는 시합엔 많이 나오진 못했던 선수였다. 근데, 북산고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해남대부속고와 대등한 시합을 하자 해남대부속고의 감독인 남진모는 이 선수를 출전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운동능력이 좋은 강백호를 마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얼핏보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데, 감독인 남진모는 어떤 점을 보고 이 선수를 출전시킨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좀 더 읽다보니 심리전의 목적으로 이 홍익현이라는 선수를 출전시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분을 잘하고 기본기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강백호에게 이 선수를 붙여서 강백호가 스스로 넘어지도록 유도하는 작전인 것이었다.

너의 장점은 엘리트 의식에 젖어있지 않고 언제나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정상에 있는 네가 가장 승리에 굶주려 있다니! - P19

반드시 이기자!! - P24

너는 말해줘도 몰라. - P49

그건 네 얘기겠지! - P107

재미있는데. - P116

계산 밖의 선수에게 휘둘려 상양은 자기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 P127

끈기가 있어요. 5명 모두... - P131

해남대부속고 농구부의 연습은 질과 양, 모두 격이 다를 정도로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매년 봄이 되면 각 중학교 에이스급으로 알려진 선수들이 이 명문 중의 명문을 동경해서 들어오지만, 반 이상은 일주일 만에 그만둔다. 한 달이 지나면 나머지의 반이 또 그만두고, 1년이 지날 무렵 남아있는 사람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 P133

너의 3년간의 노력을 터뜨려봐라!! - P134

해낼 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 P135

내... 내게서 점수를 따낼 수 있을 거 같으면, 얼마든지 따내봐! - P142

가능한 한 강백호를 도발해라. 하지만 수비는 전혀 안해도 돼. - P143

백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절대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강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대응해 왔어....성현준이나 두목원숭이 같은 녀석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와중에 운도 따르고 해서 그 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었던 거지.... - P146

상대가 강하지 않으면 실력 이상의 것은 발휘되지 않는 건가... - P146

엄청난 점프력과 리바운드에 현혹되어선 안돼. 운동능력은 있어도 그는 어디까지나 3개월 된 초보자. - P151

강백호의 실체를 완전히 파헤치다니... - P151

어차피 풋내기다. - P152

역시 해남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있는 남자다! - P159

꾸준히 노력해 온 걸요. 익현이 형.... - P159

골밑에서는 덩크만 노려라! - P161

아마도 그게 들어갈 확률이 가장 높을 거다...!! - P162

강백호, 어깨의 힘을 빼라. 손만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무릎도 쓰는 거다. - P170

두려워 할 것 없어!! 녀석은 프리스로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아!! - P171

약점은 아직도 많이 있을거다…. 모든 것을 파헤쳐주마, 강백호! - P173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멍청아. - P184

난 나간다. - P219

뼈가 부러져도 좋다.. 걸을 수 없게 되어도 좋다..!! 간신히 잡은 찬스다...!! - P222

그래... 왕자 해남은 항상 이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놓치지 않고 그곳을 찌르는 것이 해남의 바스켓이다!! - P228

고릴라는 반드시 돌아와. 고릴라가 빠진 구멍은 내가 메운다. - P237

너 혼자만으론 역부족이다. - P242

리바운드를 잡느냐 못 잡느냐는 골밑의 포지션 싸움에 달려있다. - P255

볼을 잡으면 겨드랑이 밑으로 잡아당겨,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투지를 상대에게 보여줘라. - P257

멍청하긴!! 너처럼 잡고 나서 방심하는 게 가장 위험해!! 착지와 동시에 밑에서 노리고 있는 녀석도 있다!! - P257

골밑은 전장이다!! 자신의 골밑은 어떡해서든 사수해야만 해!!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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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을 읽느라 하루이틀 계속 밀리다보니 이 책은 거의 1달만에 다시 읽는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화자인 김인영은 임의선이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를 이어나간다. 한 달 전 포스팅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었는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임의선이라는 인물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스테리한 캐릭터로 나온다. 한 번은 무단으로 가출을 해서 행방불명된 적도 있었고, 어느 날은 옷을 입지 않은 채 알몸으로 번화가를 질주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부분은 화자인 김인영이 임의선에 대해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인데, 아직 뒷 부분을 읽지 못했기에 앞으로 어떤 내용들이 나올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문장에 근거하여 독자인 내 나름대로 이후에 나올 내용을 예상해보자면 임의선이라는 인물이 지금은 좀 이상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향후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돌변해서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스토리 상에서 큰 영향력을 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나의 예상대로 이야기가 전개될지 아닐지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설령 내 예측이 틀릴지라도 이런 식으로 예측하면서 소설을 읽어나가는 게 몰입도를 높이는데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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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는 화자인 인영과 명윤 그리고 황곡시에 거주하는 장종욱 간의 대화가 나온다. 인영과 명윤은 잡지사에 소속된 자들로 취재차 황곡시를 찾았는데, 거기서 장종욱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여기서 이루 다 말하기 힘들정도로 장종욱은 기상천외하고도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취재하는 인영과 명윤의 입장에서는 일관성없는 장종욱의 모습을 속으론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취재를 해야하는 자신들의 업무 특성상 인내심을 가지고 장종욱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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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보니 장이 기억하는 광부 임林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문득 이 광부 임이라는 사람이 앞서 나왔었던 임의선일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이는 소설 앞부분에서 임의선이 강원도 탄광촌인 황곡시로 기차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나왔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근거와 내 느낌이 합쳐진다면 광부 임林은 임의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추가로 광부 임林의 특징적인 외형과 말이 지나칠 정도로 없다는 얘기를 보면서는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의 소설인 《희랍어 시간》에서 말이 없던 여자 주인공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둘 다 말이 지나치게 없다는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강 작가님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다보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속성도 대략적으로나마 비교해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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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얘기에서 장은 광부들의 사진을 찍고자 일단 그들과 먼저 친밀감을 쌓아나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술과 고기를 함께 나누며 그들과 조금씩 가까워진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장은 수십명의 광부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갱도에도 함께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된다.

그런데, 소설이 이 정도 선에서 멈춘다면 아무런 스토리 전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작가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갑작스레 갱도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사고가 나고 만다. 이 사고로 함께 있던 동료 4명이 목숨을 잃고 장과 임 단 둘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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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이 장편 소설의 제목인 검은 사슴과 관련된 얘기가 굉장히 상세하게 한두페이지에 걸쳐서 나온다. 검은 사슴과 관련된 설명이 주저리주저리 길기에 독자인 내가 이해한 바를 간략히 적어보자면 갱도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검은 사슴이다. 이것이 이후에 나올 내용들과 어떤 식으로 연계되어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기에 뭔진 정확히 몰라도 향후 이어질 이야기에서 무언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 P201

"지금 가자. 기다린 게 잘못이었어." - P205

하필 여기로 온 이유가 뭐요?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뭐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온 거요? 잡지라는 거, 그거 뭔가 읽는 놈들을 재미있게 해보겠다는 거 아니오? - P210

일요일은 광산도 휴무다. - P213

밝고 건강해야만 했다. 4월호니까. - P214

"궁금하면 들어가보시오." - P216

"그래가지고 남자라고나 할 수 있겠소?" - P216

"내가 그런 말에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라도 받은 듯이 울컥 뛰어들기를 바라고 말했겠지만, 나는 저런 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나한테는 자존심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 P217

"......원래 겁쟁이들은 이유들이 많은 법이지." - P217

"정확히 잘 보셨습니다. 나는 이유가 많은 비겁잡니다." - P217

세상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던지는 인사말이나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도 힘겨워 보이고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이들이 있다. - P229

"당신 같으면, 죽을 만큼 부려먹다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아무런 대책 없이 쫓아내버린다면 어떻겠소." - P231

이 도시는 어둡고 고요하고 검었으며, 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들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살았던 공간에서 버림받은 것들이 모두 모여 이루어진 다른 공간 같았다. 아니, 땅 위 세계의 반대편으로, 지구의 핵을 향해 컴컴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도시 같았다. - P232

날씨 탓이었겠지만, 마치 땅속에 걸린 인공의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듯이 이 도시의 공기는 어둑어둑하고 답답했다. 마치 두꺼운 땅을 비집고 어디론가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가고 나면 진짜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이곳은, 내가 자란 도시보다 오히려 하늘에 가까운 곳이었다. - P232

만일 명윤의 말대로 이곳이 의선의 고향이라면, 의선이 애써 어린 시절에 대한 화제를 피하곤 하였던 것은 이곳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 P233

그냥...... 잊고 지내요. 잘 생각하지 않아요. - P233

현실은 영화 따위와는 다르다. - P237

명윤의 말대로 나는 지독히 차가운 인간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 와서 찾아다녔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이제 괜찮다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 P237

"뭐, 실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싣지 마시오."
장은 숨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서 내가 읽은 것은 환멸이라기보다는 견고한 외로움이었다. - P239

어쨌든, 이리저리 변죽만 근사하게 울려대도 기사라는 것은 메꾸어질 수 있다. - P240

취재원과 헤어질 때마다 다시 만나자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241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 기어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헤아려보자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사방이 두꺼운 바위에 막혀 있는 탓에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돌토리로 여긴다지요. - P243

생김새나 몸집은 사슴 모양인데, 녹슨 바늘 뭉치 같은 검은 털들이 매끄러운 가죽을 뚫고 나와 정수리부터 네 발끝까지를 뒤덮고 있답니다. 두 눈은 굶주린 범처럼 형형하고, 바윗돌을 씹어먹는 것으로 허기를 이기느라 이빨은 늑대 송곳니처럼 예리하고 단단하답니다. - P243

이 짐승의 몸에서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번쩍이는 뿔입니다. 크기 때문에 얼핏 보아서는 무시무시하다는 인상부터 주는 그 뿔은, 그러나 꼬아놓은 머리채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이 짐승이 걸어가는 길 앞을 음음하게 밝혀준답니다. - P244

이 흉측한 짐승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광부들뿐입니다. 채굴 작업을 하는 광부들이 때로 이 짐승과 맞닥뜨리는데, 그때마다 이 짐승,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 소원인 이놈은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한다지요. 잡아먹히는 것이나 아닌가 떨고 있던 광부들은 조건을 내건답니다.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마. - P244

짐승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마를 앞으로 내밉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승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뿔을 잘라낸 광부들은 몇 발짝쯤 짐승을 데리고 가다가 다시 조건을 내겁니다.
네 날카로운 이빨을 자르게 해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마.
짐승은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버팁니다. 하지만 광부들은 여럿이고 짐승은 혼자 몸이니 배겨낼 수가 있나요. 한 사람은 뿔이 뭉툭하게 잘라진 짐승의 이마를 누르고, 다른 한 사람은 흑탄처럼 시커먼 짐승의 뒷다리를 붙잡고, 남은 사람들이 짐승의 뾰죽한 이빨을 뽑아냅니다. - P245

거무죽죽한 피가 짐승의 입이며 턱이며 이마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보면서, 광부들은 지상으로 통하는 넓은 갱도를 향해 필사적인 낮은 포복으로 달아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승의 뿔이며 이빨들은 달아나는 길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짐승이 따라나오지 못하도록 재빨리 나오는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 P245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 P245

광부 임林을 생각할 때마다 장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의 입이었다.
임의 윗입술은 예민한 붓으로 살짝 그어놓은 것처럼 얇았으며 아랫입술은 그보다 약간 부피가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입술이 얇다는 것뿐, 임의 입이 특별히 잘생겼거나 못났거나 이상한 모양을 한 것은 아니었다. - P245

장은 임만큼 말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어떤 말에도 ‘예‘나 ‘아니오‘ 또는 ‘글쎄‘ 정도로 대꾸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임의 과묵함은 단순히 말수가 적은 것과는 달랐다. - P246

그는 마치 세상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침묵의 장막을 쳐놓고 사는 사람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막장일을 할 때, 작업을 마치고 목욕을 할 때, 술을 마실 때, 심지어는 안전 구호를 짧게 외치며 임무 교대를 하는 순간까지도 임은 그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기묘한 침묵 가운데 있었다. - P246

그 침묵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지, 임과 헤어진 뒤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장은 마땅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진폐 병원 영안실에서 얇은 시트를 벗겨내고 아내의 아버지의 죽은 얼굴을 보았던 팔 년 전에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다. 임의 얄따란 입술에 언제나 긴장감 있게 맴돌고 있던 침묵은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었다. - P246

그런 임이 이따금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쓸 때가 있었다. 임은 단어들을 연결하는 데에 몹시 고심하면서, 듣는 사람의 분통이 터질 만큼 정성을 들여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은 대부분 별다를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 P246

장이 임을 알고 지냈던 기간은 고작 일 년여에 불과했다. 그뒤로 십 년 넘게 광부들과 함께 지내온 장에게 임이 유독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장과 처음 교분을 트고 지낸 광부가 바로 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P246

머리 위에서 몇 톤의 탄가루나 폐석이 떨어져 생기는 심심찮은 사망사고들에 대하여 장은 들은 적이 있었다. 젊은 그는 그때까지 죽음이 매우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이제 그것은 그의 두개골로부터 십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 P249

돼지고기와 막걸리는 목구멍의 분진을 씻어내준다는 것을 의사들도 인정했다 - P251

놓으면 죽는다. 죽고 만다. - P256

안전등을 끄시오. 빛을 아껴야 해. - P257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힘을 아껴야 해요. 그리고 체온을 잃지 않도록 서로 몸을 붙입시다. - P259

그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던 순간에 임은 장에게 그 사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 짐승을 본 사람이 있다오. - P259

저 짐승 눈. 저 눈! 저, 저 눈깔......! - P261

고놈들이 동발을 갉아먹을 테니까 사실은 다 잡아줘야 하는데, 다들 쥐를 예뻐해. 쥐는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거든. 동발이 무너지거나, 발파하는 위쪽 암반이 약하거나 해서 붕괴 위험이 있으면 쥐부터 싸그리 없어지는 거야. 광산사고는 순간이니까...... 고놈들 따라서 재빨리 피하면 살 수 있는 거라구. - P272

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자긍심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 작업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젊은 장으로 하여금 그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유혹이었는지 모른다. 하루하루가 거대한 판돈을 걸고 하는 노름의 연속이었다. 그의 판돈은 그의 목숨과 젊음, 하나뿐인 몸뚱이였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그는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대담해졌다. 밤새워 암실 작업을 마치고 마음에 드는 프린트를 얻고 나면 며칠을 더 밤새워도 거뜬할 만큼 원기가 충전되어오는 것을 느꼈다.
철들 무렵부터 그의 꿈은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발이 도저히 닿지 않을 만큼 사이가 벌어진 절벽과 절벽 사이를 뛰어서 건너고 싶었다. 그러다 살거나 그러다 죽고 싶었다. 바로 그 희망을 그는 황곡에서 실현하고 있었다. - P273

오래 뒤돌아보는 것은 좋지 않다. - P275

녀석들은 짖지 않았다. 그들도 인간처럼, 지나친 충격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 P281

......만일 그대가 밤의 어두움과 불빛의 따스함에 대해, 사람의 창의 애처로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원도 산간지방의 그믐밤 국도를 달려보라.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마치 끊길 듯한 기억처럼 하얗게 맺혀 있는 등불을 기억하라. 거기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부자리를 겨울산의 굽이굽이를 돌아 작은 읍내를 지나쳐갈 때면 잠시 그 창들의 수효가 많아지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빈들의 어둠 속으로 이내 삼켜지고 만다. - P282

그때 그는 젊었을까. 아직 그는 젊은 것일까. - P284

......대체 어디까지 네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 P292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 P310

결코 엄살을 할 줄 모르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대의 엄살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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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제인 오스틴 250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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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드립백 커피입니다. 맛과 향은 제품 설명란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탕수수 맛과 은은한 사과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맛과 향과는 별개로 포장 패키징에 제인 오스틴의 다양한 작품 제목들이 나와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상품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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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신장재편판 7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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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에서는 작년 대회에서 해남대부속고에 이어 2등을 했던 상양고와 북산고의 뜨거운 대결이 펼쳐진다. 6권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졌던 정대만의 활약이 돋보였고, 서태웅과 송태섭 그리고 채치수는 늘 한결같이 자기 몫을 해낸다. 마지막으로 강백호는 비록 득점은 많이 올리진 못했지만 특유의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리바운드를 10개나 잡아내며 팀에게 큰 도움을 준다. 7권 마지막 부분에 강백호가 상대팀 센터를 앞에 두고 슬램덩크를 내리꽂는 엄청난 장면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공격자 파울이 선언되어 득점이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낼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 장면은 그동안 강백호를 얕잡아봤던 다른 팀 선수들이 그를 다시 새롭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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