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 P320
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은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 P320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눈빛의 변화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 P327
그냥......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 결국 그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건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짐승보다 낫다고 여겨지지 않아요. 소가 엄마한테서 떨어질 때 얼마나 슬프게 우는 줄알아요? 돼지가 죽기 전에 얼마나 불쌍하게 비명을 질러대는데요.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나는 회식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자꾸만 상상을 하게 돼요. 저것이 살았을 때는 어땠을까, 죽는 순간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 P328
내 방도 옥탑이라서 좋아했었어요. 가끔씩 와서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일광욕하는 사람처럼 옥상에만 앉아 있다가 가곤 했어요. 그애는 마치... 그는 미소를 거두었다. ・・・・・ 마치 식물 같았어요.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도 그애는 늘저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의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예요. - P342
재작년 겨울에 후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바닷가 모래밭에 갈매기떼들이 앉아 있는 걸 봤어요. 모두 일제히 한방향을 보면서 수십 마리의 새들이 꼼짝도 않고 있더라구요………… 그것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태양 쪽이었어요. - P342
다 햇빛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 P343
......너무 강한 햇빛은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요? - P343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은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P346
선배는 예전의 그애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애를 몰라요.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그때를 모르니까.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이 좋으니까. - P347
단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본능에 의지하여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건 어리석은 짓이건 내가 선택해서 나선 길이었다. 더구나 다음날까지는 어차피 작정하고 온 것 아닌가. - P349
자신도 모르게 명윤은 서인천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낮에도 창문을 꼭꼭 닫아 빛이 들지 않던 그 방의 오후를, 곰팡이가 흐드러지게 핀 장판과 벽지 썩어가는 냄새를 생각했다. 그의 삶은 그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다. 그의 몸뚱이에 들러붙은 그 눅눅한 어둠은 단 한 번도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종내에는 이 외딴 소읍까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온 것이다. - P357
황곡이 버림받은 거대한 짐승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 월산은 그보다 몸집이 작은 짐승 같았다. 오래전에 숨이 끊어져 이제 남은 뼈들마저 삭아가는 들짐승처럼, 이 소음은 높은 봉우리들의 가운데에 허술하게 엎드려 있었다. - P358
아버지는 땅속에서 살았었대, 라고 의선은 그에게 말했었다. 땅속이라니? 땅속, 아주 깊은 데에서 살았었대………… 거기서 돌을 캤대. 땅속에서 돌을 캔다는 건・・・・・・ 그 돌들하고 목숨을 조금씩 바꾸는 거라고 했어. - P362
명윤은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회의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의선이 말했던 것들은 어느 하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인영의 말대로, 그 말들에 의지하여 길을 나선 것부터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어쩌면 의선이라는 여자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명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고 겪었던 의선은 혼령이나 꿈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 P362
"그애가 아무 기록에도 없는 것이......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요." - P369
처음부터 의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었다. 줄곧 의선은 그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가냘픈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왔다. 그 힘이 우연히 명윤에게로 기울어 그와 함께 세 계절을 보낸 것뿐이다. 이제 그것이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울을 떠나면서 그가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찾아낸다 해도 그녀를 그 자신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끌어당길 수 없으리라는, 뿌리깊은 패배감이었다. - P370
마치 상처 입은 두 짐승들처럼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눈을, 서로의 등뒤로 검게 펼쳐진 폐광촌의 하늘을 쏘아보았다. 침묵이 후회와 외로움과 분노가 거칠게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 P372
"간 사람이사 무슨 걱정이 있겄누, 한겨울이라고 찬 구들장 걱정을 하나, 배 주릴 걱정을 하나. 손이 갈라지겄나, 발가락이 얼어터지겠나. 미어질 가슴도 없으니 얼마나 좋겄누." - P376
".....세월만한 약이 없다지?" - P378
"현리, 저기 칠판에 현리라고 적혔잖우? 우리는 그냥 어둔리라고 그래. 옛날부터." 목이 긴 여자는 배차시간표가 적힌 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뚫어져라 흑판을 쏘아보더니, 이번에는 긴 의자로 돌아가 자신의 배낭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냈다. 여자의 상체의 두 배는 될 대축척지도가 배낭 위로 펼쳐졌다. 여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월산을 짚었고, 이내 현리玄里를 찾아냈다. - P381
‘옛날에, 그애가 어둔리 이야기를 했었어. 난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 P382
"거 참 이상하네." 어둔리에 산다는 파마머리 아낙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젊은 여자애가 연골에 간다고 하는 걸 누가 봤다던데." "연골엘가? 젊은 여자애가?" 매점 아낙이 되물었다. "골말에 김씨 말이야. 왜 얼마 전에 타이탄 트럭 하나 샀잖어? 월산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인 줄 알고 태워주려구 했더니, 나가는게 아니라 연골로 들어간다고 하더래. 그래 참 별일도 다 있다고 했더니만." - P384
"더 빨리 걸어야 해. 시간을 끌수록 체온을 잃게 돼. 체온조절이 안 되면 죽는 거야. 알아?" - P389
전날 저녁 어둔리의 아랫마을인 골말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을 만나 의선의 사진을 보였을 때 그는 글쎄요, 라고 말끝을 흐렸었다. 비슷한 것도 같으네요. 하지만 얼굴을 하얀 목도리로 친친 싸매서 잘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는 세상에, 아무도 안 사는 연골로 간다니까 섬뜩했다니까요. 거긴 아무도 안 산다고 해도 들은 척 마는 척하고 허전허전 걸어가는 거예요. 한 손에는 기우뚱하니 큼지막한 가방까지 들고......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꼭 귀신에 띈 것 같더라구요. 그게 벌써 나흘 전의 얘기라는 것이었다. - P395
"그 조그만 마을에 주민이 몇이나 되겠어요? 모두 집안에 있었다면 못 봤을 수도 있는 거죠. 더구나 그애가 눈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얼어죽어 있든 어쨌든. 거기에 가야 해요. 그애를 찾지 못한다 해도…………" 명윤은 잔기침을 하며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다못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겨놨을 거예요." - P395
"여전히 그애에 대해서 알아낸 게 없군요. 난 이곳으로 오기만하면...... ...(중략)...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팔차선 횡단보도에서 그애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런 말을 그애는 왜 그때 나에게 했었을까. 조용히 춤추는 것 같은 그애의 눈, 그 침묵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다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령 그애를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한다 해도." - P403
"......아무것도 없군요. 그런데." - P403
갑자기 긴장을 푸는 것은 좋지 않다. - P403
몇 분간 쉬었다 가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 P403
"봤죠? 하얗게 쓸어진 방바닥? 그애는 다시 와요. 반드시 온다구요. 서울서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한번 돌아왔는데 다시 못 오겠어요? 반드시 온다구요. 반드시 올 거예요." - P406
추위나 두껍게 쌓인 눈, 무거운 명윤의 몸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넋두리였다. 괜찮아요. 두고 가요. 제발 놔두고 가요. 반복되는 그의 속삭임이 머리끝까지 화를 치밀게 하였다. 제발 닥쳐줘, 라고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이를 물었다. - P408
이젠 다 틀린 거죠...... 이젠 다, 다 틀렸어요...... 이젠 더 가볼 곳도 없어요. - P408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사고 순간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은 저절로 삭제되는 것일까. - P418
세상 위로 올라오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나는 눈부시게 희고 뭉클뭉클한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구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구름 아래에 있을 때 구름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 P419
그 날아가는 비행기 아래에 내가 아는 세계가, 그 위로는 내가 가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 밑에도 다른 세상이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주알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P419
돌아올 때는 배를 탔다. 일곱 시간 동안 물살을 헤치며 육지를향해 나아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처음 타보는 배인데 멀미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바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겨울의 검퍼런 바다 밑이 따뜻한 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언니가 파도 속에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상처받기에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 P421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만나라도 봤으면...... 민영아. - P422
어쩌자고 그랬니..... 어쩌자고, 네가 어쩌자고...... - P422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이 무거워서 가라앉는 건데. - P423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 P424
그러나 그 상태로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로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해졌다. 생채기 위로 세월이 덧쌓였다. 묵었던 상처를 뚫고 새로운 상처가 파이고,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였다.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동안 나를 결박해온 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24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의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받아들였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한 번도 허락해보지 않은 애정을, 살을 부딪힐 만큼의 가까운 관계를 그녀에게 허락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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