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엔 내가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 P79
오랫동안 혼자서 생활하다 보면, 별의별 것을 다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때때로 혼잣말을 하게 되기도 한다. 북적거리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기도 한다. 중고 스바루 차에 친밀한 애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시대에 뒤떨어져 간다. - P79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엉터리 같은 방송밖엔 하고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저작물著作物의 구토물을 보여 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작물이라서 별로 더럽지는 않지만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진짜 구토물처럼 보인다. - P80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나는 돌고래 호텔에 숙박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 그 근본 명제인 돌고래 호텔이 없어져 버린 셈이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 P87
시간을 하릴없이 허비하기도 어지간히 힘든 일인 것이다. - P90
우선 뭘 해야 할지 결정된 셈이다. 기어를 낮게 놓아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상황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다. - P93
"그 호텔엔, 즉 말이죠, 뭔가 좀 이상한 데가 있어요. 좀 비정상이라고나 할까..... 일그러진 데가 있어요." - P98
"있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선 여태껏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느낀 건 굉장히 구체적인데도, 막상 그것을 말로 하려면 그런 구체성 같은 것이 자꾸자꾸 엷어져 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요." - P98
"꿈과는 또 달라요. 꿈이라는 건, 저도 자주 꾸지만 시간이 지나면 물러가잖아요, 그 사실성이.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언제까지고 똑같아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사실적이에요. 언제까지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요. 눈앞에 쏙 떠올라요." - P99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품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그것이 자꾸자꾸 부풀어 오르지." - P109
"무엇과 무엇이 문득 연결되는 거야. 무엇인가를 계기로." - P110
"여러 가지 연결 방식이 있는 거야." - P110
"눈 치우기 같은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하고 있는 거야.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 P114
"그런 건 만성이 돼. 일상생활에 파묻혀서 어느 것이 상처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지. 상처라는 건 그런 거야. 이거다 하고 끄집어내어 보여 줄 수도 없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대수로운 상처가 아냐." - P115
"이야기할 것이 많을 때엔 조금씩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 P120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대부분 육감은 틀리지 않더라고요." "오랫동안 하다 보면 틀리는 수도 있죠. 확률적으로." "그야 그렇지만" - P121
호텔의 아침 식사란 하루만 지나도 질린다. - P122
섹스의 영역에서 공정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고 나는 자문해 봤다. 섹스에서 공정성을 찾는다면 차라리 이끼가 되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러는 편이 간단하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P118
모든 것은 면밀한 계획 아래 진행됐다. 그것이 고도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가장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가 가장 유효한 정보를 입수하며, 가장 유효한 이익을 얻게 된다. 누가 나쁜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본투자란 그런 것을 내포한 행위인 것이다. 자본투자를 하는 자는 그 투자액에 상응한 유효성을 요구한다. 중고차를 사는 사람이 타이어를 발로 걷어차고 엔진을 살펴보듯이, 천억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는 그 투자의 유효성을 세세히 검토하며, 때로는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 세계에선 공정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투자 자본의 액수가 너무 크다. - P124
거대 기업이라는 건 그런 루트 같은 것도 꽤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회사는 정치가에서 소설가, 록 싱어, 폭력배에 이르기까지, 입김이 작용할 만한 자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있다. 일본도를 든 해결사 패거리가 들이닥친다. 경찰도 그런 사건에는 그렇게 열심히 손을 쓰려 하지 않는다. 경찰의 제일 위에까지 이야기는 이미 통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패랄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다. 그것이 자본투자다. 물론 예전부터 많건 적건 그런 일은 있었다. 예전과 다른 점은, 그 자본의 그물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치밀해지고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거대 컴퓨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현상이 그 그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P125
집약과 세분화에 의해 자본이라는 것은 일종의 개념으로까지 승화됐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행위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본이 갖는 역동성을 숭배한다. 그 신화성을 숭배한다. 도쿄의 땅값을 숭배하며, 번쩍거리는 포르쉐가 상징하는 것을 숭배한다. 그것 이외에는 이 세계에는 이미 신화 따위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도자본주의 사회다. 마음에 들건 안 들건 간에,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 P125
선악이라는 기준도 세분화됐다. 세속화된 것이다. 선 가운데에도 유행을 좇는 선과 유행을 좇지 않는 선이 있다. 악 가운데에도 유행을 좇는 악과 유행을 좇지 않는 악이 있다. 유행을 좇는 선 가운데에도 포멀한 것과 캐주얼한 것이 있고, VIP 같은 것이 있고, 쿨한 것이 있고, 첨단 유행을 걷는 것과 속물스러운 것이 있다. 짝짓기도 즐길 수 있다. 미쏘니Missoni의 스웨터에 트루사르디Trussardi의 바지를 입고, 폴리니Pollini 구두를 신듯이 복잡한 스타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런 세계에서 철학은 자꾸자꾸 경영 이론을 닮아 간다. 철학은 시대의 역동성에 근접하는 것이다. - P126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구석구석에 그물이 쳐져 있다. 그물 바깥에는 또 다른 그물이 있다.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돌을 던지면 그것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온다. 정말 그런 것이다. - P126
아무도 그런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대 자본이 부정하게 정보를 입수해서 토지를 매점하고, 또는 정치적 결정을 강요하고, 그 말단에서 폭력배가 작은 신발가게 주인을 협박하거나, 인기 없는 작은 호텔의 경영자를 구타했다 해서, 누가 그런 일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런 것이다. 시대는 흐르는 모래처럼 계속 흘러간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우리가 서 있던 장소가 아니다. - P127
나는 돌고래 호텔의 지배인을 생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패의 그림자에 뒤덮인 그 불행한 남자를. 그에게는 이 시대를 타고 넘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 P127
그는 나에게 있어 (그리고 나는 그에게) ‘이미 통과해 버린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내가 그를 거기에 밀어 넣은 건 아니다. 그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고, 그 두 갈래 길은 여간해선 교차하지 않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 P128
가끔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용기를 북돋워 줄 필요가 있었다. - P131
세계에는 두 가지 색깔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색과 검정. 그것이 일정 시간을 두고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 P131
할 일이 없으면 여러 가지 일을 시간을 들여 정성껏 하게 된다. - P131
"경향이라는 건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 P139
스페인 전쟁이라는 건 정말 여러 가지 시사점을 담고 있는 전쟁이다. 옛날엔 제법 그런 전쟁이 있었다. - P145
피로라는 것은 미추美醜나 연령과는 관계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비나 지진이나 벼락이나 홍수처럼. - P146
그녀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고마워"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쓱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이날의 유일한 쓸 만한 일이었다. 하찮은 일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나날의 하찮은 사건에서 기쁨을 찾아내며 하찮은 인생을 보내고, 그러곤 죽어 갔을 것이다. 수영을 배우기도 하고, 미라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의 집적을 사람들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P148
제트족jet set, 여행을 많이 다니는 부자들 - P149
그것은 두려울 정도의 완벽한 어둠이었다. 어느 하나도 형태 있는 것을 식별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기척마저 느낄 수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검은색의 허무뿐이다. 그런 완벽한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순전히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육체가 어둠 속으로 용해되고, 실체를 갖지 않는 ‘나‘라는 관념이 마치 엑토플라즘ectoplasm처럼 공중에 떠오른다. 나는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나, 새롭게 가야 할 장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허무의 우주를 방황하고 있다. 악몽과 현실의 기묘한 경계선을. - P156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는 거야. - P157
이제 그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머릿속의 공백을 무언가로 채워 버리고 싶다. 공포탓이다. 공백 속으로 공포가 스며들어 오는 것이다. - P159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에서 무의미한 이미지를 몰아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계속 있을 수만도 없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는가? - P159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공포에 점점 몸이 지배당할 것이다. - P160
나는 침묵의 어둠 속을 벽을 따라 나아갔다. 나는 그 이상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봤자 별수 없다. 다만 시간을 연장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발을 앞으로 내미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주의 깊게, 확실하게. - P163
흔들리고, 끝어당겨지고, 응축한다. 시간의 왜곡에 맞추어서 나 자신도 왜곡되는 것이다. 유령의 집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 P165
아무것도 두려워할 건 없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 - P165
그저 연결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 P165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그것은 말했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안으로 들어와."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양 사나이였다. - P166
"조심해야지. 죽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전쟁이라는 건 반드시 있는 거야. 언제든 반드시 있어. 없을 리가 없다고.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있어. 인간이란 건 말이야, 내심 서로 죽이는 걸 좋아하거든. 그리고 다들 지쳐 떨어질 때까지 서로 죽이는 거야. 지쳐 떨어지면 얼마 동안 쉬지. 그러곤 다시 죽이고 죽기를 시작해. 뻔한 일이야.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어쩔 수도 없는 거야. 그런 것이 싫다면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 P169
"이 장소를 잊어버릴 순 없었어. 잊어버리려고 하면, 무엇인가가 반드시 나로 하여금 여기 생각을 하게 했지. 필시 여기는 나에게 특별한 장소인 거겠지. 좋든 싫든 상관없이, 나는 나 자신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느껴. 꿈속에서 그렇게 느낀거지. 여기서 누군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나를 찾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여기에 올 결심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 P171
"어쨌든, 당신이 여기에 온 건 당신이 여기로 와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 당신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어. 필시 누군가가 이 장소를 통해서 당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테지. 아마 누군가가 당신을 찾고 있을 테지.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아마 그게 맞을 거야. 하지만 그건 그렇고 지금 당신이 여기로 되돌아온 건 참으로 당연한 일이야. 새가 둥지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 반대로 말한다면, 당신이 돌아오려고 생각지 않는다면, 여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 P172
나는 나 자신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 왔다.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라고.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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