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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역사 2 ㅣ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16
조르주 루 지음, 김유기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평점 :
이슬람 출현 이후의 서아시아사(중동)에 관한 역사책들을 비교적 많이 출판되어 있는 반면에, 무지의 시기라 불리우는 이슬람 출현 이전의 역사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편적인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서아시아의 역사 전체를 알고 싶은 마음에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칭찬으로 인터넷이 도배되어 있지만, '무지의 시기'에 대해서 지식이 일천한 나에게는 칭찬할 수없는 책이다. 지도와 연표가 본문 서술과 분리되어 책의 맨뒷페이지에 제시된 점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는 출판사의 출판편의주의에 분노하게 만든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되어 독자의 이해를 유기적으로 돕는 편집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책들 중에서 무지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에 불편한 마음을 꾹참고 읽어 내려갔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부조작품에 대한 설명이었다.(168쪽) 조르주 루는 "군사들이 지여엥서 쉬면서 말을 돌보고 짐승을 도살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프와 탬버린에 맞춰춤을 춘다."라고 묘사하며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병사들의 고닮픔과 희노애락을 표현한 저부조작품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나온다. 잔혹한 아시리아 군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병사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살인마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저부조 작품을 바라보면 그들도 원치않는 전쟁에 끌려나온 우리의 이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왕과 귀족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이름없는 평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시리아의 영광도 있었다. 저자 조르주 루가 감탄했던, 그 저부조 작품을 사진으로 첨부해주었다면, 나도 조르주 루가 느꼈던 감동을 느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까마득하게 먼 오래전의 서아시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우리 역사도 아니고 멀고 먼 서아시아의 역사를,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 조르주 루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에 자신이 멀리 볼 수 있는 이유는 거인의 어깨위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거인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로마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 문명은 활짝 만개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서구세력이 주도한 근현대사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역사 앞에 겸손해진다. 오늘의 문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아시아의 역사를 들어다 본다.
오늘의 문명이 성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왜 단절되었을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는 격변하더라도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단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시기에 기록하기 쉽고 배우기 쉬운 아람어가 보급되었다. 이로인해서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언어를 잃은 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저자 조르주 루는 "자기 언어를 잊은 민족은 동시에 자기 과거를 잊고 머지 않아 자기정체성을 잃는다."(245쪽)고 말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철저한 파괴에 의해서 문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라진 것이다. 그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강줄기가 변경되면서, 강주변에 있었던 도시들은 쇠락해졌으며, 강주변의 수로 관리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번성했던 도시들은 하나, 둘 모래속에 파묻혀버렸다. 그러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역사속에 파묻혀 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다시 모래 속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조상들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 멀리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을 찾아가 입장료를 내고 유물을 보아야한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다. 저자 조르주 루는 "현대 무기가 이 위대하고 매력적인 문명의 마지막 증거를 없애지 못하도록 신께 기도하자."라고 책을 끝맺고 있다. 이슬람 사람들이 많이하는 말이 있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 뜻의 말이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이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더 이상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기를 신께 기도한다. 인샬라~~
ps.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참고로 기록해둔다.
<히타이트군대의 바빌론 공격>
삼수-디타나의 시대에 하티인들이 아카드 지방을 향해 진군해 왔다. 그러고 나서 그(무르실리스)는 바빌론으로 가서 바빌론을 파괴하고 후리인들을 무찌르고 사람과 물건을 바빌론에서 하투샤로 끌어갔다.(31쪽)-바빌로니아 연대기
<키루스의 움만-만다(메디아인) 정복>
네가 말하는 이 움만-만다와 그들의 나라, 그리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모든 왕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셋째 해에 마르두크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안샨의 왕이며 자신의 젊은 종인 키루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키루스)는 수많은 움만-만다 사람을 적은 수의 군대로 물리쳤다. 그리고 움만-만다의 왕 이슈투메구(아스티아게스)를 포로ㅗ 작아 끌어와 자기 나라에 가두었다.-211쪽
이슈투메구 왕은 군대를 동원해 안샨의 왕 키루스를 잡기 위해 진군했다. (중략) 이슈투메구의 군대가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군대는 왕을 사슬에 묶어 키루스에게 넘겨주엇다. -211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키루스의 바빌로 점령>
타슈리투 월(9~10월)에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우파(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자 아카드인들은 퇴각했다. 그는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제14일에 시파르는 전투 없이 점령 당했다. 나보니두스는 달아났다. (중략)
제16일에 구티움의 총독인 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다. 그 후 나보니두스가 돌아와서 사로잡혔다. 월말까지 구티인의 방패병들이 에사길의 문을 포위했지만 에사길이나 (다른) 신전에서 (의식)의 중단은 전혀 없었다.(중략)
아라흐삼누 월(10~11월)3일에 키루스가 바빌론에 들어갔다. (도로가?) 그의 앞에서 가득 채워졌다. 키루스는 바빌론 전체에 인사했고 바빌론에는 평화가 깃들었다.-214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비빌론의 모든 주민과 수메르와 아카드 모든 지방의 주민은 그 군주들과 총독들과 더불어 그(키루스)의 앞에 몸을 굽히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왕위를 얻은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얼굴에 기쁨으로 경의를 표했다.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고 손해와 재난을 피하게 해 준 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그렸다. -214쪽
<다리우스의 바빌론 점령>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가거라!' 나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이 바빌로니아의 군대와 싸워라!' 빈다파르나는 (페르시아) 군대를 거느리고 바빌론을 향해 진군했다. 아후라마즈다는 나를 위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빈다파르나는 아후라마즈다의 뜻에 따라 바빌로니아인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마가자나 달의 22일이 흐른 후 그는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바빌론에서 말뚝에 박아 처형할 것이다."-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