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없으니 조심한들 소용이 없다. 누구든 불행을 피할 수 없으니 행복한들 소용이 없다. (이 얘기가 ‘거꾸로도‘ 적용되는 게 다행이긴 하다.) - P29

"일단 결정을 내렸으면 절대로 되돌아보지 마."
시컴댕이가 충고했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머뭇거리는 건 모든 개들한테 치명적인 적이거든." - P34

개는 그저 울기만 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울것만 같았다. 멈추지 않고. 하지만 슬픔이란 건 참 이상하다. 그토록 처참한 슬픔에 빠져 있는 중에도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을 주목하게 되니 말이다. 이제 털북숭이를 영원히잃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개는 그 소녀에게서 사과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더욱이 그 냄새가 이상하게 여겨진 건, 그 때가 전혀 사과의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개는 즉각 깨달았다. 새 여주인이 무얼 원하면 계절이나 시간은 아무 상관 없다는 걸. 그 애는 뭘 원하면 당장 가질 수있었다. 그 날 오후 그 애는 사과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그 날 저녁엔 개를 갖고 싶어했던 거다. - P81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앗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서글픈 생각 위로 그 동안 겪어 온 여러가지 슬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냉장고 문짝 옆에 있던 시컴댕이와 최후의 용기에 대해 말하던 털북숭이……
해가 졌다. 고속 도로 가장자리로 압사한 개들의 시체가 불쑥 지나쳐 갔다. ‘민첩함, 민첩함………’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올랐다. 참았던 슬픔이 이제 조용해진 차 안에서 방울방울 눈물로 터져 버렸다. - P99

결국 사과는 개를 저버린 거다. 털북숭이의 여주인처럼. 그런데도 개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기다리면서. 뭘 기다린단 말인가? 마술처럼 사과의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웃기는 소리다! 개를 여기 잡아 두고 있는 건 단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이 아닌가? 하! 자신의 자존심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그러고도 기자 앞에서 코맹맹이가 보였던 태도를 부끄럽게 여겼다니……… 사과는 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한다. 후추 여사는 아예 모르고 산다. 노루 씨는 자기를 개 줄에 묶어서는 마치 연이라도 날리듯 질질 끌고 다니며 산책이랍시고 시키고 있다. 이런 곳에 머물러 있는 자기가 코맹맹이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인가?
생각을 깊이 하면 뭔가 결론이 나오게 마련이다.
결론을 끌어 내다 보면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결정을 내리다 보면 행동에 옮기게 된다.
개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 P111

"시컴댕이와 털북숭이 덕분에 넌 벌써 많은 걸 알고 있는거야."
하이에누는 감탄하며 인정했다.
"시컴댕이 덕에 넌 누구보다도 냄새를 잘 분별할 줄 알고한눈에 제일 좋은 것들을 골라 내잖아. 게다가 넌 자동차밑으로 지나가는 위험한 일도 하지 않잖아! 그리고 네 친구털북숭이는 용기를 가르쳐 줬잖아? 우정은 또 어떻고? 그거야말로 다른 집단을 두렵게 하는 우리 개들의 두 가지 자질이잖아? 정말이지 넌 아주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던 거야! 그들을 만났던 게 너한테는 큰 행운이었다고."
그렇다. 그리고 이제는 하이에누가 그 나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하이에누는 개에게 사람들 얘기를 해 주었다. 사람들과 개들에 대해.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개들과사람들 각각에 대해서. - P134

개의 상처는 며칠 만에 아물었다. 희끄무레하게 부풀어오른 상처 자국에는 털이 자라지 않았다. 뺨 위의 흉터를볼 때마다 개는 지금의 행복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악몽도 꾸지 않고 하이에누와 멧돼지와 함께 다시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개는 두 친구를 떠났다. 왜냐고? - P163

그건 중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하이에누의 말처럼 ‘산다는 일은 아무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늘 변하는 게 문제‘ 이기때문일 것이다. - P164

쓰고 나서. 길들이지도 말고 길들여지지도 말자

게다가 내가 개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인간들에 대한 얘기다. 일테면 이런 거다. 여러분이 개를 갖고 있다면, 혹은 앞으로 개를가질 계획이 있다면, 제발 부탁하건대 개를 길들이려고 하지 말고 개에게 길들여지지도 말라는 거다. 말하자면, 자기 개를 비 - P235

굴한 아첨꾼이나 야수로, 혹은 자동 인형처럼 변화시켰다고 뽐내는 ‘주인들‘이 되지 말라는 거다. 그런 자들은 언제나 "내 개가 얼마나 똑똑한지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기 개의 영리함을 자랑하는 그 만족한 조련사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한없는 어리석음뿐이다. 하지만 개한테 길들여지는 사람이 되서도 안 된다. 개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하여 개 생각만 하는, 그리하여 개 얘기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의 삶은 이렇게요약된다. "난 개만 한 마리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이란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좋은 훈련이란 서로의 자존심을 존중할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면 "개의 자존심이란 뭔가?" 라고물을 것이다. 그건 개답게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훈련사는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행동하고자 한다면 자기 곁에 사는 개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정의 규칙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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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문지 스펙트럼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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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북클럽 에디션으로 읽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 [독신남의 죽음]과 중편 [꿈의 노벨레]. 22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강렬한 반전의 [독신남의 죽음]. 그의 편지는 독신으로 죽는 사람의 소심한 복수인가 알량한 복수인가 끔찍한 복수인가.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 [꿈의 노벨레]. 부부란 무엇인가. 성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긴장과 질투와 사랑과 미움을 유발하는 관계를 평생 유지할 수 있을까. 꿈과 현실의 몽환적이고 모호한 경계를 흩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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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4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책이 나왔나, 관심있게 지켜보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햇살과함께 2023-12-04 13:07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읽었는데, 더 읽어보고 싶네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작가로, 병과 죽음, 인간의 심리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에서 안톤 체호프와 비슷한 느낌이 있네요. 찾아보니 출생연도도 비슷하네요!

서곡 2023-12-04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본 후 원작을 찾아 읽을까 생각(만) 했었던...오늘 월요일이네요 한 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햇살과함께 2023-12-04 13:10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보니 영화를 다시 보고 싶네요.
제 머리 속엔 탐 크루즈의 이 영화와 바닐라 스카이가 짬뽕되어 있어요 ㅎㅎ
서곡님도 한 주 잘 보내세요!

yamoo 2023-12-04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독신남의 죽음...이 나왔나보네요..
슈니츨러 번역본은 모두 모은 줄 알았는데...
참가로 슈니츨러 저작들은 엔날에 출판된 책들이 워낙 중복출판된 것이 많아 목차를 봐야 같은 책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ㅎㅎ

얼른 구입해야 겠으요~~~

햇살과함께 2023-12-04 13:13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건 민음사 북클럽 특별판이라 서점에서 구매가 안되는,,,
아직 민음사에서는 일반 책이 안 나온 것 같아요.
작가와비평이라는 출판사의 <어떤 이별>이라는 슈니츨러 명작 단편집에 있는 [총각의 죽음]이 이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새파랑 2023-12-04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책은 민음사 북클럽인가보네요? ㅋ 독신남의 죽음 왠지 재미있어 보입니다~!!

햇살과함께 2023-12-04 13:15   좋아요 1 | URL
네 북클럽 특별판이에요~ 독신남의 죽음 뜨악합니다~ ㅎㅎ
 

Novelle.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

독신남의 죽음
의사는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가급적 소리를 내지않고 서둘러 옷을 입는 동안 마음속에서 무언가 씁쓸한것이 일었다. 그것은 오래된 좋은 친구를 곧 잃을지모른다는 아픔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젊었던 그들 모두가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곤혹스러운 감정이었다. - P11

꿈의 노벨레
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녀의 뜻에 따라 옆자리에몸을 쭉 펴고 누웠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으려조심했다. 우리 사이에 칼 한 자루가 있어. 그는 비슷한상황에서 자신이 반쯤 우스갯소리로 꺼낸 적 있는 말을 - P109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뜬눈으로 누워있으면서 서로의 가까움과 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팔로머리를 받치고 오래도록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치 그녀의얼굴 윤곽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 P110

그런데 이제 어쩌지? 집에 갈까? 아니면 어디로가겠어!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내일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미숙하고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고, 모든 게 비현실적이 되었다. 심지어 집도, 아내도, 아이도, 직업도, 그렇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서 저녁 거리를기계적으로 계속 걸어가는 자기 자신조차도.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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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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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1권 로재나를 읽고 연달아 읽었고, 첫 살해 장면에서 혹시, 설마,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놈이 나온다. 선입견이 작용하게 할 것인가, 선입견을 무시할 것인가. 대놓고 하는 경찰, 정치, 국가 비판 비중이 커 소설적 재미는 다소 반감된다. 콜베리는 과연 경찰을 그만두었나.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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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몬손이 자신에게 선입견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아무래도 선입견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사건이 될것 같았다.
선입견은 좋지 않다. 하지만 선입견이 판단에 개입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못지않게 선입견을 무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선입견으로 세워진 가정이 때때로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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