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첫째가 학교 국어 수업 관련 난쏘공을 읽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며 엄마가 한번 읽어보라고 하길래 뭐가 이해가 안간다는 거지 하고 궁금해서 - 그러나 반년간 책상 책탑에 쌓여있다가 - 16년 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표제작을 먼저 읽어보았다. 아 이해가 안간다는 의미를 알겠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난장이라는 것도 소설의 기법도 우화같기도 동화같기도 하다. 화자가 계속 바뀌고 공간도 갑자기 바뀌고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시점이 갑자기 바뀐다. 단락이 구분되지 않은 채 마치 연결되는 대화처럼 묘사처럼 설명처럼.

또한 이 소설은 연작소설이기에 첫편부터 읽는 것이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데, 아마 소설 전체가 아닌 표제작만 읽었겠지. 물론 개별 단편들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이다.

70년대말 엄혹한 분위기에서도 이 소설을 살아남게 한 힘, 출간된지 45년이 넘은 이 시대까지 300쇄를 넘어 살아있게 한 힘. 그것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난장이가,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겠지.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는 조세희 작가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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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3-18 0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 시절에 처음 <난쏘공>을 읽었을 때 동화를 보는 듯한 표현이 낯설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끝까지 읽게 만드는 <난쏘공>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독자마다 느낌이 다를 거예요. 의미가 숨어버린 상징적인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

햇살과함께 2024-03-18 12:25   좋아요 0 | URL
저도 다시 읽었는데도 처음에 이게 뭐지 했네요 ㅎㅎ 현실을 너무 뾰족하게 사실적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동화같이 표현하여 더 널리 오래 읽히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노동자 교회에 갔다.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들을 목사가 찾아주었다. 공포심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목사는 강조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일반 교회의 목사들이 그공포심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노동자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회조사연구회‘라는 모임에 끌어들였다. 지부장은 공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표 복사본만 게시판에 나붙었다. 은강방직 노조는 조용히 침몰해가고 있었다. - P221

노인은 간단히 말했다.
"아주 좋아질 거야. 거기다 동그라미를 쳐줘."
학생들은 나무껍질 문 앞에 서 있었다. 뜻밖의 대답이라는 표정을 그 아이들이 지었다.
"나는 곧 죽을 거야."
애꾸눈 노인이 말했다. 어머니는 그 노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죽은다음에야 평온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찾아온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생활은 아주 나빠질 것이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불안해했다. 어머니는 내가 질 싸움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나는 어머니가 저목장에 나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 P237

클라인씨의 병

"죽기가 살기보다 쉽지."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얘들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우."
"그러시겠죠." - P247

"아버지는 꼽추가 아녜요. 앉은뱅이도 아니구요. 아세요?"
"안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나는 벌레야." - P252

"그래서, 뭘 얻었니?"
"눈을 떴어요."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어!"
지섭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장 안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깥에 나가서 뭘 배워? 네가 오히려 이야기해줘야 알 사람들 앞에 가서 눈을 떴다구? 장님이 돼버린 거지, 장님이, 그리고, 행동을 못 하게 스스로를 묶어버렸어. 너의 무지가 너를 묶어버린 거야. 너를 신뢰하는 아이들을 팽개쳐버리구."
"그렇진 않아요."
내가 말했다. - P256

추위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과학자를 찾아갔다. ‘클라인씨의 병‘은 그의 방 창가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알았어요."
빠른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
과학자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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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남편은 신문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직장에서, 지하도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숱한 배기 가스 속에서 쫓기며 몸둘 바를몰라하는 자신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출퇴근길의 만원 버스 속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몇 대씩 줄을 지어 달려나가는 시청 쓰레기차를 본다고도 말했었다. 신애는 남편의 말을 알아듣는다. 얼마나 많은 정신이 날마다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나가 버려지는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 P35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돌아갈 것 같았다. 형도 아버지가 든 술병을 빼앗아버리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 눈을 감는 날의 일을 생각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언덕 위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숭고함. 고통. 구원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생을 시작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수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숭고함도 없었고, 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 나는 형이 조판한 노비 매매 문서를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첫번째 싸움에서 져버렸다. - P115

궤도 회전

윤호는 말했다.
"여러분은 십대 노동자 문제를 놓고 삼십 분 동안이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십대 노동자에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행복동에 살 때 어느 분의 소개로 난장이 아저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아들과 딸이 공장 지대에 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잡하고 힘든 일을 합니다. 그들의 어린 동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인간적인 대우를 어떻게 해야 받는지도 모릅니다. 현장 일이 그들의 성장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위에서는 날마다 무지한 생산 계획을 세웁니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돌려 일합니다. 어린 노동자들은 생활의 리듬을 기계에 맞춥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기계에 빼앗깁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생각나죠? 그들은 낙하하는 물체가 갖는 힘, 감겨진 태엽 따위가 갖는 힘과 같은 기계적에너지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처럼 십대 노동자 이야기를 하며 노동이라는 말, 의무라는 말, 자연적인 권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처럼 그들을 돕자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갖는 감상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못 줍니다.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이 겪는 일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197×년,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 P166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어머니의 가계부는 이런 내역들로 꽉 찼다. 나는 은강에서의 생존비를생각했다. 생활비가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한 생존비였다. 우리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팔만삼천사백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이백삼십일원이었다. 그러나 보험료 · 국민저축 · 상조회비 · 노동조합비 · 후생비 · 식비 등을 제하고 어머니 손에 들어온 돈은 육만이천삼백오십일 원밖에 안되었다. 이 돈을 벌어오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일했고 어머니는 늘 불안해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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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관내분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로그 + 라디오 장례식 + 독립의 오단계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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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초엽!!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로봇이 대세인 속에서 김초엽 만의 소재와 주제로 풀어낸 애잔하고 다정한 이야기. 김혜진의 돌봄 노동의 딜레마와 간병로봇의 고뇌, 오정연의 안락사 호텔에서의 마지막 일주일도 머지않아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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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1-29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여기 김초엽의 “관내분실” 수록되어 있나요? 전 단행본에 실린 걸로 읽었는데, 좋았어요!

햇살과함께 2024-01-29 22:37   좋아요 1 | URL
관내분실 대상 우빛속 가작 동시 수상한 작품집입니다! 저도 김초엽 작가 2편은 우빛속 단행본으로 이미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관내분실_김초엽

한 명의 여성 MC를 둘러싼 네 명의 남성 패널들이 마인드와 영혼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패널 중 누군가가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신호의 연속으로 해석할 수 있고, 마인드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것은 뇌 속의 다양한 화학적 신호들, 펩타이드와 신경전달물질의 영향을 전기적 신호로 데이터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그렇게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로부터 나왔죠. 한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 P44

수상 소감_김초엽

그래도 최악인 건 아니다. 과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실패가 완전한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틀리지 않는다면 새로운무언가를 찾아내는 일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도 끝에, 나는 글을 쓰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패는 그리 나쁘지 않다. 그게 과학소설이라면 더더욱. - P62

마지막 로그_오정영

D2-62는 슬퍼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한구석이 고장 난 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나면 결핍도 원동력이 되는 걸까. 저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요, 묻고 싶었다.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요."
내 마음을 읽은 듯 그가 말했다.
"죽고 싶은 마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근거가 갑자기사라지는 거죠. 안락사 담당 안드로이드들은 그런 감정 변화 인지에 특화된 앱을 장착하고 있어요. 담당 안드로이드가 좀 더 살아보라며 손을 내민다면 굳이 마음을 다잡지 말아요."
D2-62가 내 어깨 너머로 눈짓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저 영감도 그렇게 마음을 바꿨죠. 당시 담당 안드로이드를 계속 담당자로 배당해달라 요청했다더군요. 살아야겠다는 욕구라는 게, 죽겠다는 결심보다 쉽고 당연해야 하잖아요. 노을이, 하늘이예쁘네요, 함께 볼까요, 누군가 매일 같은 시간에 권해주기만 해도살아지는 게 하루하루니까."
그가 가리키는 곳에 겨우 혼자 거동할 수 있는 수준의 노인과 그에게 찻잔을 건네는 안드로이드가 있었다. 조이였다. 조이의 미소가 멀리서도 보였다. 어제 내가 보았던 미소와 다르지 않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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