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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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가 또 나를 울리네. [일 년], [답신]이 특히 좋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나 또한 그랬던 것처럼. 살면 살아진다는 걸 이젠 안다. 세월을 겪으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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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수업은 매시간 그녀가 선정한 영문 에세이를 읽고, A4 용지 한장 분량의 에세이를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읽어야 할책의 양이 많은 탓에 수강신청 정정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갔고, 결국 수강생은 열댓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첫번째 수업시간에 우리는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에세이를 한 줄 한 줄 따라읽어내려가며 강독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자를 쓸때의 느낌,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 - P10

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9년 2학기, 구년 전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대학교 3학년 학사편입생이었다. - P11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 - P31

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응주의, 능동적인 순종. 그런 말들에서 나의 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말은 나를 모욕하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뿐, 그녀가 속으로는 분명 다른 판단을 내렸으리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때 강의실을 둘러싼 이상한 열기를 기억한다. 그녀의발언에 대한 지지와, 한편으로는 분명한 반감이 뒤섞인 공기를. 그 학기 내내, 그녀의 수업시간에는 그런 긴장감이 돌곤 했다. - P32

그녀는 무릎 위에 크로스백과 책을 올려놓았다. 그 책은가즈오 이시구로의 Never Let Me Go였다. 은행을 다니던 시절에 영인문고에서 사서 읽은 책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나도 그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 P33

일 년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 - P108

을 하고는 환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 P109

답신

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니도 내가 걱정할까봐 자기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게 그때 우리가 솔직하지 않았던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아.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 P150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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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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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구에서 9지구까지 계급화된 지구, 1지구 중에서도 최고 학교인 프라임스쿨에 다니는 잡안 좋고 순수하고 착실하고 예의바르고 명철한 다윈 영. 루미 헌터에 의해 그의 알이 깨지며 그의 세계가 폭발한다. 설국열차 같기도 데미안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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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는 단호함을 넘어서 냉정함이 느껴지는 다윈의 말에 내심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할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것으로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곧 다윈은 느끼지 못하는 은밀한 시선으로 찬찬히 다윈을 살폈다. 머리칼에 그늘진 이마, 야윈 뺨, 이곳에 있으면서도 다른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 버즈는 오늘에야 비로소 다큐멘터리 해설자에 맞는 다윈의 특성을 알아본 것이 어쩌면 이런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까지만 해도마냥 빛이 난 길로만 걷는 소년인줄 알았던 다윈이 겨울을 눈앞에 둔 지금은 그늘에 잠겨 잘 보이지 않게 된 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기가 있는 세계를 둘러보는 관찰자가 돼 있었다. 몸은 여위고 눈빛은 아직 흔들렸지만 단호한 목소리에서만큼은기필코 아버지의 성안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버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다윈은 지금 애써 어른이 되려 하는 것이다. 아무 씨앗도 날아들지 않는 정체된 하늘과 아직 충분히 영양이 차오르지 않은 마른 토질에서 어떻게 갑자기 그런 변화의 욕구를 싹 틔웠는지는 모르지만, 버즈는 다시 한 번 다윈이 프라임스쿨을 대변할 목소리의 적임자임을 확신했다. 홀로서기 위해 내면에서 조용히 분투를 치르는 소년은 자신이 구현해 내고자 하는 프라임스쿨의 이상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 P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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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대회 개회식에서 니스는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능은 갑자기 품속으로 날아온 한 마리의 새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빛깔로 기쁨을 주지만 언제 또 홀연히 품에서 날아가버릴지 모릅니다. 그 새를 진정한 자기 것으로 길들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훈련하고 반복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새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높은 이상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길들인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승패를 떠나두기숙사는 모두 승리할 것입니다." - P279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버즈 아저씨나 너에게서 할아버지의 흠결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게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어?"
"하지만 흔히들 그러잖아. 우리들이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것들은 아버지 세대가 이뤄 낸 영광 덕분이니까, 영광과 함께 흠결도 이어받아야하는게 정당한거라고."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영광과 흠결을 같은 방향에 두는 건 인간의 발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퇴보적인 관점이야.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전 세대의 영광은 이어지고 흠결은 사라진다고 하는 게 문명의 발달에도 부합되는 것 아니겠어?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유래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새로운 존재잖아."
이야기를 끝내는 순간 레오가 과장되게 박수를 쳤다.
"내가 프라임스쿨에서 들은 모든 얘기들 중에 제일 감탄이나오는 이야기야. 학생회 애들도 여기서 네 강의를 들었어야 하는건데."
"너무 그러니까 꼭 놀리는 것 같은데?"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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