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으로 산에 갈 땐 시집을 가져간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이 필요하지만 등산 가방이 무거워지면 안되니깐. 오늘은 초록초록한 표지의 박연준 시인의 시집. 아직은 박연준 시인의 시가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시 ’시인하다‘는 좋았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이 시집에서 다시 만난 i(머리말이라는 시에서). 반가웠다. 김소연 시인의 시집 중 유일하게 읽은 ‘i에게’가 생각나서. 해설에서도 역시 언급되고. 시의 전체적인 의미나 제목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특정 단락들이 와닿는다. 이를 테면, 이런 시.2층 관객 라운지중략만약에……만약에 말이야……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내가 만약이 되어간다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중략
천사의 날개도 가까이에서 보면우악스러운 뼈가 강인하게 골격을 만들고아침엔 늦게까지 잠을 잔다. 어제가 충분하게 멀리 떠나갔다. 우선 보드라운 양말에 발을 넣을 것. 그리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다. 옥상에 올라간다. 머그잔을 들고서.다세대주택들이 반듯하게 도열한 것을 내려다본다. 호호 불며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사람들을 보고.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더멀어지는 걸 보고. 머그잔에서는 아직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우유 냄새가 올라오고.양말을 신길잘했다.잘하는 게 이렇게도 많다.영화라도 보러 가자고말하는 친구에게영화라도 보러 가자고응한다.-중략- - P77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그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야견디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는지를 더 이상모르므로되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는 것과되어본 적 없는 것상상조차 안 해본 것울타리를 뜯는 사람의 고독 옆에 서기전문가들의 거대하고 장엄한 편견 앞에 서서소진시키기믿고 싶은 것을 믿는 마음을 무효화시키기물 흐리기 어깃장 놓기이면의 이면의이면을계속해서 들쑤시기20년 전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중략- - P90
공연-중략-본 것들을이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정교하게 잔인해지던 사람이유를 만들어내며 잔인해지던이유조차 필요 없이 잔인해지던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말이 되는 것을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던 사람-중략- - P93
머리말-중략-i는 치아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나는 !에게 수반을 건네받았다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시를 쓰지 마i는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거렸다그럼 나는 무엇에 대해 시를 쓰지?옥상에 대해? 파피루스에 대해?생일에 대해?팔짱에 대해?네가 사라지고 나면커다란 건물이 한 채 생겨나고분양문의 플래카드가 창문마다 나부끼고 있어도아무도 입주하지 않고텅 빈 건물 복도에서텅빈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고시멘트 냄새가 나고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가 듣고-중략- - P99
저작무언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나하나하나죽어나가는이파리들엉망이 되고 있다는 당혹감보다는무언가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구나하는 불길함이 우선한다기쁜 일에 대해서도더러운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는걸하물며-중략- - P104
해설_김언i는 사회적인 자아(I)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그럴싸한사람 구실을 하는 자아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타인을기는 역할을 척척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일신조차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서의 자아다. 이런 자아가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역할이 될 수 없다. 그것의 역할은 자신을 지키거나 기껏해야 i를 품고 있는 ‘i+I‘ 혹은 ‘i+I+a’로서의 나를 (위의 시처럼 이상하게 생일을 챙기는 방식으로) 감당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런데 이런 못난 자아(i)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작고 보잘것없는자아에 기대어 시라는 것이 나오고 시인이라는 존재가탄생할 수 있다면, i가 찾아오는 날은 달리 말해 시적인자아가 탄생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자아가탄생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시인 혹은 화자의생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누구의 생일이든 그것을 정하 - P154
는 것은, 즉 i의 방문 날짜를 정하는 것은 시인도 아니고 화자도 아니고 I도 아니고 심지어 i도 아닐 것이다. i는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못 된다. 그럼에도 i의 방문으로 인해 시가 탄생하고 시적인 자아가 탄생하고 시인 역시 그로 인해 탄생이 가능한 존재라면, 위 시의 말미에 나오는 "나는 i 몰래 없는 시를 쓰러 갔다"라는 발언은 여러모로 재고를 요한다. 어찌 보면 i 자체가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갑자기 없는 시 쓰기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P155
김소연의 이번 시집에서는 핵심 이미지에 해당하는그것이 ‘밤‘이다. 단순히 시집 제목에 ‘밤‘이 들어가서도아니고, ‘밤‘이라는 단어가 시집 전반에 걸쳐 엄청난 빈도수를 보이며 등장해서도 아니다. 앞서 얘기해온 ‘끝‘에대한 사유도, 거기서 더 가지를 뻗어가는 얘깃거리도 모두 ‘밤‘이라는 이미지에 촘촘히 엮여 있기 때문이다. 촘촘히 엮여서 하나씩 끈을 풀듯이 풀어나가야 하는 밤을아래의 시에서 만나보자. - P163
며칠 후며칠 후에 나는 서울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서 자전거를 타고 갔던지난번을 기억하면서. 그때는흘러내리는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으며 찬바람을 맞았지.역 앞에서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었지.그때 누군가의 부음을 들었다.오래 서 있었다.추웠지만 잘 몰랐다.며칠 후부터 그 역은 운행이 중단되었다.가던 곳에 가려면 우선 서울을 경유해야 했다.며칠 후에 나는 읽던 책을 다 읽는다. 다음 챕터는 「비중에서 가장 이상한 비」이다. 한 페이지에 담긴 광활한시간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바라본다.그러다 참고 문헌에 적힌 또 다른 책을 읽겠지. 안경을 - P13
쓰고. 또 잠시 안경을 벗고,책을 읽는 동안에 우리 동네 재개발이 확정되고 애청하던 드라마는 끝나가고무언가를 챙겨 먹고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마지기다리던 며칠 후는감쪽같이 지나가버렸다.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 안 내린다면 눈이 내리는 나라로 가보고 싶겠지.지난번에 가보았던 그 숙소 앞 골목에서 눈사람을 만들겠지. 눈사람에게 - P14
목도리를 둘러줄지 말지 잠시 머뭇거리겠지.너무 추웠고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집에 돌아와유자차를 마셨다. 목도리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목도리가 없네 했다.*프랑시스 잠의 시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시선집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김진경 외 옮김, 잍다, 2018)에는 "레오폴드 보비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레오폴드 보비가 답시를 적는다는 마음으로 이 시를 적어보았다. - P15
2층 관객 라운지오늘은 화분의 귀퉁이가 깨진 걸 발견했는데깨진 조각은 찾지 못했다돌돌 말린 잎을 화들짝 펴고 있는 잎사귀들하얗게 하얗게 퍼져 나가는 입김들만약에.만약에 말이야.....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내가 만약이 되어간다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문을 열어먼지처럼 부유하는 생각들을 손바닥에 얹어벌레를 내보내듯 날려 보냈다 - P30
어둠 속에 손을 넣어악수를 청한다과학자의 ‘모릅니다‘는설명이 가능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식탁 옆 조제약 봉투들처럼 수북한 것기계의 뒷면으로 기어 들어가 헝클어진 선 정리를 시작하는 것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아도 돼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도 돼그럴듯함과그러지 못함과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 - P31
모두가 듣고 있다고 외치는 바람에외치던 사람도 계속 외치고 듣는 사람도 외치기 시작......듣기만 하는 사람 더 이상 없음 -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