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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눈잡이 아침달 시집 25
이훤 지음 / 아침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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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자 시인의 ‘양눈’으로 바라본 세상. 고국과 이국의 시선이 담긴 ‘양눈’으로 바라본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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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네가 지나치게 슬픈 사람이었던것도
내가 기분을 잘 알아차리는 편인 것도

앞서 가도 느긋하게 걸어도
이름 부를 때
자주 다른 곳에 있었다

쉽게 짧아지는 사람과 긴 마음을 염원하는 사람이 번갈아가며 실망한다

누구도 수건을 몰래 두고 가지 않았는데

술래가 되어 술래를 만들고

눈빛이 눈빛을 살리고 눈빛이 눈빛을 놓치고
고요가 침묵을 시작하고
침묵이 고여
곰팡이 - P44

문에서 새로 태어나는 수건이 문만큼 쌓이면
집이 떠난다

타인이 타인을 지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끝나고

또 타인을 초대하고

지어지고

이름 부르고

확인하고

지워지고

헐거워져

바람 빠진 공과
흐르지 않는 눈을 얻게 된 사람이 어느 날 스스로에게 묻는다 - P45

헤이, 아직 거기 있어?


술래가 그곳을
빠져나간다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는다

아무도 퇴장하지 않는다 - P46

증언 9


덜 마른 바지를 입고 볕에 누워

바삭해질 때까지 그리움을 말리는 사내를 보았다 - P69

증언 11


어제는
울고 싶을 때마다 물을 한 잔씩 마셨다

다 마신 컵들을 창 쪽으로 뒤집어두고 잤는데

여름 내내 비가 왔다 - P88

피에르


피에르는 주로 혼자 있거나
무언가를 읽는다

읽기 때문에 이곳으로부터 유보될 수 있다 책은 가장 현재형으로 달아나는 방식
월말에 잡아둔 약속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다

어디 가?

효용을 멀리하고 싶은 인간들이 연구자를 옹호했지

피에르는

혼자 있다 비생산적인 자세로 누워 책을 읽고

다크 초콜릿을 부러뜨려 반 개씩 입에 넣고 최대한

지연되기 위해 공들이고 있다 - P95

읽다 말고 방금 지은 얼굴이 저가 만든 것인지
어제 읽은 문장이 만든 것인지

더는 알지 못할 때

책은 피에르를 어떤 모양으로든 굴릴 수 있다

굴러가다 말고
저를 주워
피에르는
집으로 돌아간다 - P96

옥사나

아직 살아있는 엄마 무덤에 왔다

미리 써둔 시와
잘 기억나지 않는 당신 표정과
기록된 적 없는
이 대화가

전부 미리 자라고 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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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어딘(김현아)의 <활활발발>을 읽다가 알게 된 고정희 시인.

여성해방을 노래한 페미니스트로 <여성신문> 주간 등 여성문제를 최초로 폭넓게 탐구한 여성주의 시인이자 민중시인이며 서정시인이라고 한다.


구매를 벼르다 드디어 위트앤시니컬에서 구매했다.


시집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아벨'로 표상되는 떠나간 자들(민중, 동지, 아우 등)에 대한 속죄의 마음, 부끄러움, 그리움, 슬픔의 시들이다.


첫 마주침이 중요한 건가.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건가. 시집을 구매하기 전에 블로그 등에서 본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닿던 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나서도 가장 좋았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서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판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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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585
오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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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달에서 나온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오은 시인의 시집. ‘주황에서 주황으로. ‘있었다에 이어 없음에 대해. ‘이름에 이어 이름 없는 대명사에 대해.


이 시집에는 총 58편의 시가 실려 있고, 제목은 다음과 같다.


그곳 3

그것들 6

그것 16

이것 1

그들 9

9

우리 9

4

1

시집 제목처럼 대명사로만 작성된 시 제목.



첫 번째 시와 마지막 시가 가장 좋았다. 특히, 마지막 시. 그런 날이 있다. 혼자 있고 싶어 화장실에 가서 나오고 싶지 않은 날. 내 앞에서도 웃을 수 없는 날.



그곳


"
아빠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그날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오늘은 아빠가 왔다." 최대한이 터질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 P9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 갔다

혼자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었다가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부끄러운 것이었다가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마침내
혼자여서 편한 것이 되었다

화장실 거울은  닦여 있었다
손때가 묻는 것도 아닌데
쳐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것을  것처럼
볼꼴이 사나운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웃지 못할 이야기처럼
웃다가 그만 우스꽝스러워지는 표정처럼
웃기는 세상의
제일가는 코미디언처럼

혼자인데
화장실인데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없었다 - P135




솔직히아직오은 시인의 시보다 인간 오은이 더 좋은 상태다(물론 이 정도 거리에서).

언젠간 오은 시인의 언어 유희를 맘껏 즐기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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