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통권 1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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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식민지화하는 도시민의 삶을 살고 있음을.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농촌에는 머리 위 고압선과 송전탑을 건설하고 도시의 산업폐기물 등을 처리하기 위해 농촌에는 소각장과 매입장을 짓고. 이게 식민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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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석_ 타르콥스기 <희생>

알렉산더와 도메니코 같은 인물의 원형은 러시아 정교의 고행자를일컫는 ‘유로지비‘, 즉 ‘바보 성자‘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바보 성자 - P474

는 남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타르콥스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던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대문호들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민중의가장 뜨겁고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수난,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느끼는끊임없는 수난의 욕구"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런 수난을 겪음으로써, 즉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문화에서 이런 수난은 고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P175

손제민_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

로르바케르가 어느 인터뷰에서 인공지능(AI)이 영화에 활용되는에 대해 얘기한 것을 보면 그가 간단치 않은 감독임을 알 수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헐리우드리포터> 인터뷰).

저는 ‘인공적으로 똑똑한(artificially intelligent)‘ 사람이기보다는 ‘유기적인 멍청이(organic dumb)‘입니다.... 과학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고생각해요. 예를 들면, 미리 가공되지 않은 음식을 소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날것 그대로의 재료를 마주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려스러운 - P186

건, 우리가 극도로 정제된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점이에요.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에서 살아갈 영양분을 얻는 것인데, 그런데 이 극도로 정제된 이미지들은 실제로는 죽은 물질들 (데이터)로 만든 것입니다. 살아있는 물질들로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인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진짜 음식은 맛으로 느낄 수 있어요. 살아있는 이야기 속에서는 차이를 느낄 수 있어요. 죽은 물질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먹었을 때 저는 알수 있습니다. 실수가 있더라도 살아있는 물질로 만들어진 이미지인우에는 그걸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완벽하진 않아도, 완벽히 세련되지 못해도 살아있는, 그리고 오점을 갖고 있는 것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계는 실수를 할 수없으니까요. - P187

박혜영_마리아 미즈 <마을과 세계>

그것은 에코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일생이 무엇보다 "마을이 세계고, 세계가 곧 마을"이라는 둘 간의 연결성을 말하고 지키는 데 헌신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 P218

미즈가 경험한 ‘오래된 미래‘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훗날즈는 여성의 삶과 자연생태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여성을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자연을 약탈하는 식민주의는 모두 자본주의의 이윤추구와 동일한 착취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에코페미니즘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런 정치경제적 통찰을 어머니를 통해 깨닫게 된다. - P220

우리는 흔히 자급이라고 하면 빈곤이나 저개발 아니면 혼자서 구차스럽게 사는것을 떠올리지만, 미즈에게 자급이란 모든 사회 · 경제 활동의 초점을 상품생산과 이윤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재생산에 두는 것을 말한다. 자급은 좋은 삶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물적, 문화적 필요를 여성, 자연, 제3세계를 착취하지 않고 생산해내는 삶의 방식이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속에 과잉풍요를 누리며 자연과 미래세대에게 쓰레기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 생활방식 속에서 필요를절제하는 삶을 말한다. 미즈에게는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좋은 삶을 누리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자연의 충만함과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자급의 모습이다. - P222

오은영_도갈드 하인 <우리에게 내일이 없더라도>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것을 깨닫게 된 그는 이 상황이 기후변화에도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저기서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파국적인 미래를 그려 보인다. 그러나 하인이 보기에 더 심각하고 자명한 사실은기후변화가 해결 가능한 문제이기보다 함께 감수해야 할 곤경이라는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원제 ‘폐허 가운데서 일하기(At Work in theRuins)‘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라면 해결책이있다. 문제를 해결하면 상황은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곤경에는해결책이 없다. 곤경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를고민할 필요가 있다. - P235

그런데 평화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넓고 곧게 뻗은 큰길과 같은 답을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의 사고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향 아래에서발생하고 정립된 평화학은 하나의 획일화된 답을 거부한다. 그래서 볼 - P236

프강 디트리히는 그의 책에서 추상명사인 평화를 굳이 복수형(peaces)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주제들을 24개의 장에서 다루면서도굳이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지 않는 도갈드 하인의 작업도 하나의 확고한 답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책에 하나의 결론, 정답이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야말로 근대성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세계는 안정적이고 질서 정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고의 배후와 우리 사회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에 존재하지 않는가?" 이 세계의 종말을 인정하면서 다음의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절벽에서 손을 놓을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생각하게 된다. - P237

이문재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성숙 단계입니다. 대의제와 양당제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해하는 한 주권자 시민의 존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선거와 다수결, 주권 위임으로 대표되는 민주정은 사실 과두정과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 소수 엘리트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권모술수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10년, 20년 뒤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은 "지금 우리 인류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환경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라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자본과 권력의 강고한 장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시민의 각성과 - P252

연대 말고는 없어 보입니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열어나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러기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공감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보일배와 오체투지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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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

뭐, 쌀 수입이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수입쌀 운용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수입된 쌀을국내에서 사람이 소비하는 용도로 유통해왔다. 반면, 우리와 비슷한 시 - P140

기에 역시 쌀을 전면 개방한 일본은 자국의 쌀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않도록 수입쌀 유통을 관리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입쌀의 96%가밥쌀용 또는 가공용으로 쓰인다. 사람이 먹는 용도인 것이다. 반면 일본은 26% 정도만 가공용으로 쓰일 뿐 나머지는 해외 원조 또는 사료용으로 사용한다. 두 정책의 차이는 명백하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수입쌀은 가공식품 등에서 우리 쌀을 밀어내며 결국 우리 쌀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국 내의 소비를 자국 내의 생산으로 충족할 수 있다.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가공식품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정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최근의 ‘햇반‘ 사태는 결국 수입쌀 운용 정책이 대기업의 배를 불리는 데 이용되었다는 걸 보여줬다. 실제 2022년 CJ제일제당은 국내산 쌀을 사용하는 대신 수입쌀로 ‘햇반‘을 출시한다. 원재료의 가격은 3분의 1로 낮아졌지만 소비자 가격은 그대로였다. 2022년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이다. 만약 우리도 일본처럼 수입된 40만t의쌀이 사료용으로 사용되었다면 지금의 논란은 있을 수 없다. 기후위기시대에 ‘남는 쌀‘ 운운하며 이런 시간 낭비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세계평균 곡물자급률은 102%를 훨씬 상회하고, 선진국인 호주 270%, 캐나다 195%, 미국은 130%이며,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일본도 30%가 넘어갈 정도로 국제적으로 식량주권을 위해 힘을 쏟는 시대에, 정작 우리 정부는 주식인 쌀의 감축을 농민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 P141

하승수

전기는 보내주고, 폐기물은 받아들여라?
수도권 도시지역과 농촌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산업·의료 폐기물이다. 서울에는 폐기물 처리시설이라고 해야 생활폐기물 처리시설정도가 있다. 재건축·재개발을 그렇게 많이 해도 건설폐기물 처리시설이 서울에는 없다. 대신 농촌과 산촌에 산업폐기물들이 밀려든다. 건설폐기물 정도가 아니라 하수·폐수에서 나오는 오니, 소각장에서 나온재, 폐플라스틱, 폐합성수지, 폐석면, 폐산, 폐알칼리, 폐유, 광재, 분진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산업폐기물이 농촌에 밀려들고 있다.
산업폐기물이 대량 발생하는 건 물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시스템이 갈수록 확대돼왔기 때문이다. 온갖 물건이 더 많이 생산되고, 여러 생산공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최종 소비재의 편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은 도시이지만 그들의 쓰레기는 농촌, 산촌에 떠넘겨지고 있는 것이다. - P151

돈이 되는 폐기물 처리사업
이제 농촌은 지대를 추구하는 자본이 침범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인구가 빠져나가고 고령화되면서 반대할 힘이 없는 농촌에 각종 오염시설이 밀려들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때맞춰 농지와 농촌을 파괴할여러 입법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산업단지 인허가 절차 간소화에 관한 특례법‘인데, 이명박 정부의 규제개혁 1호 법안으로 2008년에 추진된 이 법은 우리 농촌에 산업단지가 무분별하게 들어서게 된 결정적 요인이다. 산업단지는 원래 주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하는 것이고, 농촌이라면 농공단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법에 따라서, 일반산업단지가 민간 영리기업들에 의해 추진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심지어 강제로 토지수용도 할 수 있다. 업체가 산업단지 부지를결정하고, 특례법에 의해 간소화된 인허가 절차를 밟으면, 주민들의 반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산업단지는 많은 경우 산업폐기물 매립장까지 포함한다. 처음에는산업단지가 들어와서 일자리와 인구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민들이 나중에야 폐기물 처리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반대에 나선 경 - P153

우도 있었다.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수백, 수천억 원대 이권사업이 되면서 산업단지가 아닌 곳에서도 폐기물사업을 추진하려는 업체들이 생겼다. 업체들의 몸집도 커졌다. 인허가만 받으면 이윤은 보장되다시피 하니 최근에는 사모펀드나 대기업들이 산업폐기물, 의료폐기물 사업을장악해가고 있다. 문제는 산업단지, 산업폐기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토건사업,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필요한 골재는 늘어났지만 바다와 강에서 골재를 채취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영리업체들은곳곳에서 석산 난개발을 하고 있다. 발파로 인한 소음과 진동, 돌가루에 시달리는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농촌마을의 고통은 심해져간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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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기후재정은 이처럼 기업과 시장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정부와 기업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투자를 하고 있다 말하지만 그 사업이 실제 어느 정도나 기후위기 대응혹은 남반구 지원에 사용되는지는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얼마 전 옥스팜은 지난 7년간 세계은행의 기후재정 중 40%에 달하는 410억불(약 57조 원)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많은 부분 기후와 무관한 개발사업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높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이나 현재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기후대응댐‘이 기후위기 대응이나 기후정의와는 무관함에도 ‘기후위기 대응사업‘으로 포장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반구에 대한 지원도 다르지 않다. 남반구에서 큰 기후재앙이 일어나면 북반구의 금융기관들은 얼마를 지원했다며 홍보를 하곤 한다. 하지만 ‘지원‘은 대부분 무상지원이 아니라 대출을 통해 이뤄진다. 당장필요하기 때문에 가난한 남반구 국가들은 대출을 받지만, 재난이 반복되면서 빚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반면 남반구에서 재난이 많아질수록 금융기관들은 돈을 더 번다.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식민주의적 수탈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신자유주의 녹색성장 패러다임에서 기후재정이 민간투자와 등치되는 시대에 기후 불평등은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 P87

진은영

낭만적인, 너무나 낭만적인 유튜브

빨간 스툴에 올려놓을 흰 가습기를 살래 - 점점 더 건조해지고 있어요-구호 물품의 잿더미-곧 크리스마스, 칠면조에 꽂힌 은 나이프와 포크-냄새가 좋은 것처럼 보여요- 기쁨은 그 새의 잘린 목에 달린 커다란 리본 같고요-아-칠면조가 새구나-날 수 있나?-당신과 있을 때면 언제나-꿈의 작살들이 일제히 날아가 영혼에서 나온 난폭한 것이 영혼을 향해 - 투명한 고래가 유영하고-멋져요 사랑할 때 사용하는 동사들을 가르쳐 주세요 예전에는 기다립니다-나는 조금씩 늘어났습니다-세간 살림이 늘어나듯 너와의 추억이 늘어났고-그러나 이제는 소유한다-이 X아 죽여버린다 너는 내 거니까-오, 여자를 사랑하듯 땅과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우리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원전은 필수-엄마! 그거 자꾸 보시면 나는 또-블랙리스트 작가가 됩니다-흐른다-죽음(조회수 없어도 최다 업데이트 영상) - 죽음아 너는 무엇을 베고 싶으냐-흔들리는 모든 초록을-나는 갓 베어낸 풀 냄새를 좋아하거든-오라! 연금 강자 미래에 셋 증권- 하나 둘 셋 증식하는 미래-돈 안되는 모든 날에 죽음을-국경없는의사회의 호소-세상에서 가장 긴 것은 슬픔이 아니라 숏폼이지-선악을 넘어서 뱀처럼 날쌔게 미끄러지는-데메테르의 벨벳 허리띠 같은-광고 사이에서 뻣뻣해진 고개를 들면- - P124

가을날 무더운 아침,
창밖으로

아름다움의 구속복 같이 피어오르는 미친 살구꽃의 흰 가지들은
하늘의 침대에 묶여서

빨갛게 꿈틀거리는 뱀장어 같은 뿌리들은
땅의 흑해에 묶여서

물을 찾아
말라가고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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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클라인 <‘아니요’로는 충분하지 않다>

WTO, FTA, 트럼프주의

원래 "농업은 자유무역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나라는미국이다. 1951년에 미국은 농업조정법을 발동하여 네덜란드 유제품수입을 금지했는데, 가트로부터 위법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내국법에 따라 외국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가트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결국 면제 인정을 받아냈다. 그런데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의 농업규모가 커졌던 것이다. 농산물 수출을 늘려서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줄이는 일이 급선무가 됐다(우루과이 협상이 시작된 1986년 미국의 농업지원 예산은 250억 달러로, 1982년보다 6배 증가해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농산물 자유무역‘이라는 통상원칙을 새로 정립했다. 1988년 처음으로 유전자조작식품(GMO) 판매를 승인한 미국으로서는 이를 자유롭게 팔 수있는 세계 농산물 시장도 절실했다. - P54

‘경쟁적 자유화‘ 독트린이 출현한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이었다. 즉 중국이 세계경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인 2002년에 미국은 WTO와는 별도로 통상원칙을 마련했다는 말이다.
한편 트럼프는 2017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마치 WTO를 끝장낼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세계의 나라들이미국 앞에서 경쟁하게 만드는 원리는 트럼프 정권에서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 배후에 거대한 미국 시장이 있다는 점에서도 변한 것이없다. 경쟁시키는 수단이 달라졌을 뿐이다. 트럼프는 감당하기 힘든 관세로 위협을 한다. 그래서 세계의 제조업 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공장을 짓게 만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FTA에서는 상대국에 작게라도 떼어주었던 미국 시장의 추가 개방이라는 요소마저 사라졌을 뿐이다. 나는 트럼프가 WTO와 FTA를 종식시켰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 - P62

다. 그것들은 엄연히 우리 눈앞에, 이 땅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년 40만t이 넘는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것도 WTO규범이다. 미국산 쇠고기에 애초 40% 부과하던 관세가 내년이면 0%가되는 것도 한미FTA의 효력이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통상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라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수용해야 한다. 반면 미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미국 자신만이 결정한다. 게다가 미국은 그저 더 많은 제품을외국에 팔기 위해 통상규범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미국 기업이 외국에서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은 법 제도 환경에서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미국 통상의 목표이다. 그것을 위한 수단이 1995년의 WTO였고, 2002년의 FTA이며, 그리고 협정문조차 없는일방적 조치인 트럼프주의이다. 이 모두가 살아 있다(바이든의 인도태평양경제협력틀(IPEF)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 P63

‘탈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서 ‘세계화‘는 세계의여러 나라들이 서로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이 힘은 특정국가들에 ‘제재‘를 부과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행사되지만, ‘세계화‘의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도 행사된다. 이러한 권력 행사야말로 제국주의의 특징이다. 세계화된 자본의 패권을만들어내는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제재‘ 역시 가차 없는 제국주의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인 것이다. 즉 이른바 ‘탈세계화‘는 ‘세계화‘를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P69

신자유주의에서 공유지경제로

나오미 클라인은 ‘아니요‘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7)에서, 미국사회는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싸우면서 보수적 우파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녀는 또한, 만약 이 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애초에 트럼프주의가 발생하게 된 조건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상기시킨다. 즉 ‘트럼프에 저항하는 것‘ 이상을 우리는 달성해야 한다는말이다. 그녀는 지난 40년 동안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수많은 곳에서공적, 사적 영역을 이끌어온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이끌어온) 신자유주의의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는 한 우리 삶은 갈수록 더 살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 P71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경제학자들이 ‘호모에코노미쿠스‘라고 부르는것으로 이해한다. ‘경제적 인간‘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개인으로서, 시장에서 자신이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일체의도덕적 속박에서 자유롭고,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동체 및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반도덕적, 반사회적 원자(原)이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보통 추상적 개념으로 여겨진다. 현실 속에서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체 속에서 타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또 도덕적 감정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오미 클라인도지적했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인간형, 즉 호모에코노미쿠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트럼프는 거의 순수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는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이다. 그의 전 존재가 사리사욕 추구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트럼프에게서 신자유주의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놓있는지 직접 볼 수 있고, 바로 그래서 그를 보며 기겁하고 움츠러드는 것이다.
오래전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에서의 이런 경향에 주목했다. 부르주아 시스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기심, 냉담한 ‘현금 지급‘ - P77

이외에는 어떤 관계도 남겨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다음과 같은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원해버렸고, 그리고 파기될 수 없는 공인되어 있는 여러 다양한 자유를 모두 몰아내고 단 하나의 부도덕한 자유, 즉 ‘자유무역‘만 성립시켜 놓았다. 한마디로 착취를 위해서, 종교적·정치적 명분들로 감춰져 있지만실상은 노골적인, 파렴치한, 직접적인, 잔혹한 착취만 남아 있다." 바로이것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자유롭게 풀어놓은 신자유주의 윤리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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