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진정한 전환은 행정구역을 합병하는 외형적인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원을 둘러싼 소모적 경쟁을 협력적 배분의 구조로 전환하려는 중앙-지방 간의 문화적 성찰과 제도적 처방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욱이 통합은 되돌릴 수 없는 위험한 선택인 데 반해, 설계된 협력 - P14
은 환경변화에 맞추어 다시 고쳐나갈 수 있는 유연함과 회복탄력성을지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가 되려는 용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상태로 함께 작동할 수 있는 정교한 거버넌스의 지혜다. - P1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가 되는 용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채로 함께 가는 지혜다. 더 큰 정부를 만드는 결단보다 더 정교한 거버넌스를 설계하는 인내가 절실하다. 우리가 꿈꾸는 지속가능한 지역의 미래는 하나의 단일한 위계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자율성이 살아 숨 쉬는성숙한 네트워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속도정치를 멈추고, 되돌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정교한 설계를 시작해야 할 때다. - P17
종묘 주변 개발 이슈는 한 번에 끝날 문제가 아니다. 자연과 문화재보존은 발전지상주의 사회, 정확히 말하면 문화(K-콘텐츠)도 돈이 되는발전사회가 마주하는 일상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이를 개발이익과 환경가치의 충돌로 바라보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제국주의와 한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피식민 국가에서도 자본주의는언제나 제국주의로 전환된다. 일제하 조선의 남태평양 개발 열풍을 생각해보라. - P36
1977년 8월 20일과 9월 5일, 미국 플로리다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보이저 2호와 1호가 차례로 발사됐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오늘, 두 대의 탐사선은 태양계 밖 성간 공간 어딘가에서 끝나지 않을직진운동을 지속하며 공허한 시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탐사선에는 55개 언어의 인사말과 27곡의 음악, 지구의 소리가 담긴 황금 레코드판이실렸다. 이와 더불어 지구와 인류의 모습을 담은 115장의 이미지도 수록됐다. 칼 세이건을 필두로 한 다학제적 전문가 팀은 수록 자료를 선정하며 부정적이거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오염된 도시나 대규모 벌목 현장처럼 지구를 훼손하는 인간의 활동은 실리지 않았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를 폭로하기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에 무게를 둔 탓이다. 그 결과 레코드에는 웅장하고 정결하며 조화로운 하늘과 구름, 산맥과 계곡, 바다와 - P74
해안의 풍경이 담겼다. 하지만 이렇게 고른 사진들은 사실 우리가 이미상실했거나 파괴하고 있는 모든 것의 영정사진과 다름없으므로 기실보이저호는 지금의 지구가 얼마나 달라졌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겠다. 인류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고있으면서도 매 순간 지금의 지구는 안녕하냐는 인사를 송신하고 있는셈이다. 과거의 우리가 미래를 향해 던진 안부를 현재의 우리가 수신하고 있는 모양새다. - P75
보통 네메시스를 ‘복수의 신‘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의 원래의미는 ‘분배하다‘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네메시스란 과한 것을 덜어내어 다시 균형을 회복하려는 원리로, 각자에게 마땅한 자기 몫을 재분배하는 우주적 작용을 말한다. 무엇이든 과잉은 항상 네메시스의 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응징을 통해 지켜야 할 선이 사라져 무질서해진 시공간에 다시 질서와 균형이 회복된다. 고대 그리스는 이것을 정의라고 보았다. 정의가 살아있는 한, 과도한 행위는 응징되고, 정당한 자기 몫은다시 올바르게 분배되어 질서와 균형이 맞춰진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비극의 효과인 ‘카타르시스‘도 주인공이 고통을 겪거나 죽을 때가 아니라 선을 넘는 행위가 마침내 처벌받고, 과잉 몫의 재분배가 이루어져균형이 회복될 때 일어난다.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 속에서 과잉이 초래한 무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감정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 P87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마음속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그것을 이루는 것이다." 첫 번째 비극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보다 더 큰 비극은 바로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찾아온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겪은 비극이다. 그는 세속의 모든 것을 얻었다. 사랑도 권력도 명예도 모두 그의 손안에 있었고, 그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네메시스가 응징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다 얻는 것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이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라는 바를 모두 차지하는 것은 과잉이고 우주의 균형을 깨는 욕심이기에, 네메시스가 정의의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하는 것이다. 휴브리스 관점에서 보자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저마다의 몫의 균형이 깨질 때 바로 비극이 시작되고, 삶은 고통스럽게된다. - P89
성장의 사회적·생태적 한계를 직시하면, 지속적인 성장과 기술의 관계 연구보다 절박한 물음이 있다. "유한한 세계에서 언제까지 성장을지속할 수 있을까?" "성장 자체는 좋은 것이어서 한계를 무릅쓰고라도성장해야 하나?" 성장의 한계는 아니라고 답하지만, 성장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성장에 목을 맨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많을수록 좋은가?" 자본주의는 이런 물음을 외면한다. 필요 충족이 아닌욕망 충족에 ‘충분함‘이란 없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자본주의는성장의 이름으로 우리 욕망을 제어하던 사회규범이나 관습을 해체했다. 우리 욕망은 기술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확장일로에 있다. - P97
2025년 상반기, 재생에너지가 세계 전력생산의 34.3%를 차지하며 처음으로 석탄(33.1%)을제치고 세계 최대 전력원이 됐다. 하지만 석탄 사용량 자체도 늘어나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재생에너지 확대보다 전력 수요가 더 빠르게증가한 탓이다. 늘어난 재생에너지는 기존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늘어난 에너지 수요를 보충하는 데 그쳤다.지금 기술의 대세는 인공지능(AI)이다. 우리 정부도 ‘AI 강국‘에 매진한다. 그런데 AI 구현에 필요한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전력이 들어간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요는최대 16GW에 달한다. 전력 수요가 폭증한다며 지금 정부는 윤석열 정부의 핵 폭주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급조한 두 번의 정책토론회와한 번의 여론조사를 형식적으로 해치우더니 기존 계획대로 핵발전소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 건설을 발표했다. 가히 ‘에너지 쿠데타‘라고 할 만한 폭거다. 신규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로 지정된 지역은 극심한 갈등에 휩싸일 것이다. 새로운 송전선로는 지역의 산천과 마을을딴낼 것이다. 모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는 정녕 과거에서 배우지 못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가. - P99
이번 호도 늦지 않게 읽어내었다. 꼭꼭 씹어먹진 못했지만. 지방과 농어촌 문제, 선거와 민주주의, 기후위기 등, 매번 같은 주제이지만 조금씩 다른 관점과 문제와 기대를 말한다. 다음 호에는 다가올 지방선거와 관련된 주제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언급된 기후시집 <여름, 연루>를 찜해둔다.
걷기주의자권대웅걷다 보면 답이 온다생각이 오고 파동이 온다하늘과 구름과 땅속에서문장이 온다발걸음이 땅에 닿을 때마다몸의 기억과잠들었던 꿈공중의 신호등이 켜진다걷기란 그것들을 끌어당기며 - P136
마음이 바라고상상하는 곳으로 가는 일나무는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가며하늘로 향해 가는 길을 읽는다그것은 나무가 걸어가는 방식사람은 앞으로 걸어가면서내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운다몸 어딘가에 살고 있는 상처낙엽 같은 미움들한 걸음 한 걸음씩 어루만져 주는 일걸을 때 나는 창조자자유로운 영혼심장과 두 발은 나의 육필몸으로 관통하는 바람과 구름과길의 문장을 쓴다 - P137
갈등, 반대, 제약 같은 것들을 모조리 제거해야 할 것,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틀렸습니다.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 장애물이 없으면 성취감도 맛볼 수 없어요. 난관은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그래서 고통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사람, 의지가 꺾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좋은친구가 되지 못해요.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로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우리 삶에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잖아요. 첫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이것이 인간의 행복과 건강에 중요하다는 증거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프랭클 - P162
은 인간이 자연과 어울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 이것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중요한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고, 셋째는 고통입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참된인간이 된다는 거예요. 물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 없겠죠. 또 너무나 부도덕하고 비참해서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고통도있습니다만... - P163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 주류 문화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누구든,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 생각의 자유와 상상의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 대단히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나 자신의 내면의 변화밖에 없어요.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의 정신, 마음, 영혼을 아름답고 창조적이고 신성한 우주를 향해서 활짝 열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어요.내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그분들이 내 책에서 뭐, 매일 아침 20분간 명상하기 같은 어떤 규칙 - P168
을 배웠기 때문은 아닐 거예요. 명상도 좋겠죠. 하지만 변해야 하는 일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일은 세계를 다르게 보는것입니다. 내가 책을 써서 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물론 처음부터 어떤 비전을 제시하지는 않아요. 논리적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차근차근 독자들을 어떤 장소로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해서, 정말 기초적이면서도 극히 중요한 측면을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장소로 말입니다. (김정현 녹취, 옮김) - P169
세상은 ‘관계‘에서 시작한다. 물리학에서도 물질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실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서로 간의 힘의 관계만이 남는다. 생명의 보고인 숲을 연구한 생태학자들도 말한다. "숲은 상보적 관계에서출발한다." 몇년 전 ‘좋은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라는 제목의 TED강연에서 700여 명을 70년 동안 추적한 하버드대학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결론은 단 하나, ‘좋은 관계‘로 요약된다. 좋은 관계가 행복의 전 - P175
부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세상을 지배할수록 외로움은 깊어지고, 그 외로움은 분노와 혐오로 증폭된다. 결국 관계가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 P176
기후 시집 <여름, 연루>
기후외교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기후변화는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초래될 9가지 경계선을 밝혀냈는데, 이미 그중에서 6개가 한계치를 넘어섰다. 기후 이외 - P58
에, 토양 및 담수의 변화, 생물다양성 붕괴, 영양소 순환 사이클의 교란, 과불화화합물(PFAS) · 유전자조작생물(GMO) · 미세플라스틱 등 지구환경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질의 확산 등이 그것이다. 해양 산성화도 결정적 변화를 가져올 한계점에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된 분명한 위협이지만 국제적으로 적절히 대응이 이뤄지고있는 사안은 단 하나도 없다. - P59
북(北)이 패권을 잃고, 남(南)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다자주의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체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것을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적 목표를 세워야할 것으로 보인다. 이 여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되돌아가야할 때도, 길을 잃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낡은세계는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현재는 괴물들의 시대이다."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안전한 항구에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김정현 옮김) - P101
불안과 슬픔의 연대, 연루감여름이 남긴 것을 돌아본다. 지난여름 평균기온은 25.7℃로 1973년기상관측 이후 역대 1위였던 지난해 여름 기록(25.6℃)을 경신했다. 폭염 일수는 28.1일, 열대야 일수는 15.5일이었다. 온열질환자 숫자는 작년보다 20.4% 증가한 4,460명으로, 2018년 이후 가장 많았다고 한다. 폭염 속에서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봤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쓰러진 것들이 비단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폭염과 폭우 그리고 가뭄 속에서 풀, 벌레, 물고기, 동물들 역시 터전을잃고 멀리 떠내려가거나 말라 죽었다.여름이 남긴 것들과 지금 살아서 겨울을 맞는 우리는 어떤 관련이 있나. 환경운동연합이 기획하고 권누리, 마윤지, 박은지, 윤은성, 윤지양, 정재율, 한연희, 희음 여덟 명의 시인이 참여해 엮은 시집 《여름, 연루> - P115
는 그 관계에 대해 묻는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의 현장을 찾아 고통을 함께한다. 화성습지, 월성원자력발전소, 가덕도 등이다. 인간에 의해 땅이 파헤쳐지고 물이 오염되는 상황에서도 그곳에 여전히존재하는 생명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자연이라는 거대한 연결고리 안에서 연루돼 있음을 확인한다. - P116
소설가 황정은은 올해 문학주간 개막 행사에서 자신의 소설을 낭독한 뒤, ‘연루감‘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내가 가해자가 아닌데도 죄책감이생기고 괴로운 느낌. 그는 세계의 폭력과 위기상황에서 연루감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지구,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가동하는 에어컨, 에어컨을 돌리기 위해 쉬지 않고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 원전 주위의 사람들 혹은 동식물, 그리고 바다. 모두가 연결돼 있다. 우리는 착취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삶, 다른 생명을 착취한다. 황정은의 말대로 연루감으로부터 안전한곳은 없다. -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