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 - 통권 1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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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증원에 함몰된 공공의료의 문제에서 공공은행 공공에너지 공공교통 등 다양한 ‘공공성’으로 논의를 확대한다. 매번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좋은 것’에 대한 감각은 ‘가치’에 대한 감각과 전혀 다르다는 일리치 선생의 말처럼 ‘가치’만을 따지며 살고 있지 않은지 반성한다. 나에겐 녹색평론이라는 좋은 선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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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노자 이야기> <나락 한 알 속의 유주>
<짐을 끄는 짐승들>
리베카 솔닛《이 폐허를 응시하라》
애나 칭 <세계 끝의 버섯>
김현아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
김지승 작가 <짐승 일기》

길을 가는 사람: 무위당_이현주

그나저나 너의 삿된 견해만 치우면 홀연 불보살의 극락정토가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승찬 대사의 깊은 뜻이 이 몸에 들어와서 웬만큼 소화되기 시작한 게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근자의 일이니 그동안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던 셈이다. - P166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던 무렵 빈민운동 활동가였던 젊은이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되었다. 그가, 아마도 황금배지를 가슴에 달고(?),
운동권 대부로 알려진 선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가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청하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이 말 그대로 한 말씀 툭 던지셨다. "까불지 마시게."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다. - P167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과연 지당한 말씀이셨다. 다만,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 그 결과를 두고 판단하는 못되고 터무니없는 인습(因)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만 그것이 지당한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 부끄럽고 민망스러운 일에 성공하는, 이를테면 나라와 민족을 동강 내는 한이 있더라도 본인이 집권해야겠다는 무슨 그런 일에 성공하는 것보다() 참으로 위대한 일에 실패하는, 이를테면 지상에 하느님나라를 세우겠다는(예수) 또는 이 한 몸 바쳐서라도 민족의 분열은막아야겠다는(白凡) 그런 일에 당당하게 실패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람다운 사람, 철학자 니체의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어떤 사람‘ 아니겠는가? - P171

나의 눈에서 전체의 눈으로_유소림

장 선생님이 이념을 중심으로 한 투쟁과 대립의 사회운동사에서 일찍부터 협동과 공생에 관심을 두신 것은 세상을 갈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보고 계시는 그분의 관점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일이었다.
이 존재계의 이치 자체가,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저 벌레부터 사람에이르기까지 협동과 공생이 아니면 도무지 생존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러하니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작동하고 계심은 참으로자연스러운 일이다. 수행자 싯다르타가 보리수하에서 발견해낸 연기(起)라는 존재이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싯다르타 수행자는 그 이치를발견하고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 각자(覺者)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존재근거가 되는 것이 존재의 이치라면 이런 존재계에서 어떻게 다른존재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존재를 해치는 것은, 너를 해치고, 벌레를해치고, 땅을 해치고, 물을 해치는 것은 곧바로 자해행위다. 벌레 한 마리도 온 우주가 동원되어 생겨나고 이 나도 온 우주가 동원되어 비로소생겨난다면 벌레와 이 존재 중에서 누가 더 귀하고 잘난 존재인가. 인간 어머니도 그러하듯 우주 어머니에게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법이다. 이 간단 명료한 이치를 우리 인류는 석가모니의 연기 발견 이래 2,500년 동안,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 이래 2,000년이 지나도록 모르쇠하고 있다. - P179

풀 한포기에 대한 존경심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개정증보판 (2016) 맨 끝에 김종철 선생님께서 한살림 활동가들을 위한 ‘무위당 학교‘에서 하신 강의 녹취록이 실려있다. 김종철 선생님이 전해주는 몇몇 일화를 보면 장 선생님은 종교사상가 혹은 사회운동가이기 전에 누구에게나 깊고 따스한 만남이 되어눈물겹게 하는 감동적인 한 인격이었음이 깊이 전해온다. 김종철 선생님은 장선생님을 생각하면 공자가 떠오른다고 하신다. 노자가 아니라공자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논어>의 첫 문장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說乎)"가 바로 장 선생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란다. 學而時之,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힌다. 바로 그것이었다. 장 선생님은존재계의 상호관계망을 잘 이해하시고 그것을 반복 학습하면서 그 이치를 당신 삶의 기준으로 내면화시키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오늘 여러분들은 중요한 성경말씀을 들으셨으니 그것을 항상 되뇌고 반복해보시라 이 말입니다"(130쪽). "성경에 좋은 얘기가 있어요. 일흔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 내가 매일 넘어져요. 그동안 사회에서 배운 게 있어서 안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저질러요.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는 벌써 넘어진 거지. 그럴 때는 내가 잘못했구나 하면서 털고 일어나야지. 그러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요"(207쪽)! "속담에 연자방아 돌리던 망아지는 밭에 가도 돌기만 한다는 말이있어요. 여태까지의 습관, 관행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지. 결국은 자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결단을 통해서 자애와 절약, 겸손을 바탕으로 전체를 보고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77쪽). - P181

자급을 생각한다_최문철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늘어려웠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쌍한 장애인 조직으로 대상화되지 않게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도움을 받는 일은 일방적이고 시혜적인모습으로 흐르기 쉬웠다. 도움을 구하기 전에 동등한 관계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 배웠다. 꿈뜰에서만큼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장애인을 위해 비장애인을 희생시키거나, 후원을 늘리기 위해 장애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섬세한 이해와상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서로의 자기다움을 지켜줄 수 있다. 선의를 가진 도움이라 할지라도 이용을 당하거나 자기다움이 위태로워질 상황이라면 일단 멈추는 게 맞다. - P189

-2년 전에 시작한 책 모임에서, 발달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옹호인들・특수교사, 부모와 가족, 관련 종사자, 마을주민들을 꾸준히 만나고있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서 매번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65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아이를 위한 정신의학》을 천천히 소리 내서 다 읽었고, 혼자 읽을 땐 이해하기 어려웠던 책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이어서 함께 읽고 있다. 책 모임을 통해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옹호인들도외롭다는 것을, 환기와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과 필요를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 P191

‘좋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자급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자기다운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늙고, 병들고, 장애가 있어도, 전형적이지 않아도, 소수자여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돈과 능력과 정상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스스로를 살피는 기술을 익히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은 삶이 가능하다고말하고 싶다.
장애를 안고 농사를 지으며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작은 마을 안에서 건강한 의식주, 돌봄과 협동의 기술, 좋은 추억, 믿을 수 있는 친구, 자기답게 지낼 수 있는일터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떻게든 계속 해보려고 한다.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모쪼록 좋은 삶을 자급해낼 수 있기를!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창간사(1991) - P192

자본주의 다시 보기_강수돌

이것이 (물리적 폭력과 구별되는) 제도적 폭력이다. 물리적 폭력은 가시적이어서 저항을 곧잘 부르나, 제도적 폭력은 비가시적, 구조적이라잘 정당화된다. 이렇게 자본의 가치지향은 무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배타성과 폭력성을 띠는 구조(위계)를 통해 관철된다. 이는 비단 정치경제만이 아니라 교육, 언론, 의료, 문화, 예술, 종교 등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일리치 선생이 ‘우정‘에 대해 말한 것처럼 "좋은 것(the good)에 대한 감각은 가치(value)에 대한 감각과 전혀 다르다." 교육이나 의료 등 ‘가치의 제도화‘가 결국 인간적 무력감을 초래하는 것도 이 제도적 폭력때문! - P198

수직에서 수평으로, 폐쇄에서 개방으로, 소유에서 관계로의 ‘혁명‘이다! 이것이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말한 ‘재난 공동체‘다. 이는 또한, 애나 칭이 <세계 끝의 버섯>에서 말한 송이버섯 같은 존재다. 이는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파괴 뒤, 그 폐허를 뚫고 처음 솟아난 생명체다. 앞의 ‘자경단‘은 겉으로는 강력한 재난공동체로 보이나, 실은 그 자체가 재난의 일부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갖고 사느냐(상품 물신)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삶의 방식)다. - P199

사람보다 로봇을 믿는 당신에게_장일호
김현아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의 부제는 ‘정보 과잉과 불신의 시대, 병원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환자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의료산업의 공모자가 된다. 의료산업이 숙주삼는 것은 두려움이며 ‘감정‘은 꽤 자주 ‘팩트‘를 이긴다. 질병 자체보다질병을 문제시하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이야말로 의료산업을 든든히 조력한다. 2020년 국립암센터가 암과 무관한 30세 이상 1,23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설문 대상자 중 27.1%는 "암 생존자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31.5%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고, 45.7%는 "암 환자 집안 자녀와 결혼을 피하고 싶다" 라고 응답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처럼 사람이 운집한 장소에 갈 때면 나는 사람들 머리 위로 그 숫자들을 떠올리다 움츠러들곤 했다. - P206

치료과정이 곧 완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타인에게 이해시키는것은 여전히 숙제처럼 남아 있다. 그것은 의료진들이 환자와 만나는 매일의 시간에서 느끼는 답답함이기도 할 것이다. 김현아는 "많은 환자가완치와 치료의 개념을 혼동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에 대한 과장된 통념이 확산되었기 때문"(133쪽)이라고 본다. "병원에서 일을 하 - P209

다 보면 너무 많은 사람이 ‘완벽한 건강‘, ‘완벽한 정상 상태‘가 있다고 믿고 이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이 유난히 정상성에 집착하는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인데, 그러다 보면 삶의 한모습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하는 많은 문제를 마땅히 치유해야 하는비정상성으로 낙인찍게 된다"(255쪽). 자본이 약속하는 것은 ‘완치‘지만그것은 의학보다는 기적 혹은 신앙의 영역에 가깝다. 손상된 몸은 아프기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고, 치료는 질병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는조치다. ‘완치가 없다‘라는 진실은 의료진과 환자가 나누는 비밀에 가깝다. 환자는 ‘살아남는 것‘과 ‘회복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반복한다.
김지승 작가의 <짐승 일기》(난다, 2022)에서 ‘관병‘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나는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병과 싸우기 싫고(‘투병) 병을 다스리고 싶지도 않으며(‘치병‘) ‘반려 병‘은 내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가볍다고 느끼던 차였다. 김 작가 역시 그런 소외감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러던 어느날 과거 머물렀던 절의 주지 스님이 쓴 편지를 발견한다. 스님은 이렇게 적는다. "불교에서 ‘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 본다는 의미이다. 관심은 마음을 그리 보며 바르게 살핀다는 의미가 되겠지. 앞으로세상을 잘 관하여 길 잃지 말고 인연이 닿거든 또 보자." 김 작가는 그편지에서 ‘관병‘이라는 단어를 발굴해 병을 헤아리고, 살피며, 관계하는대상이라고 정의한다. 관병이야말로 병원과 환자 사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의료 비즈니스 시대‘를 만든 공모자들을 ‘모두까기‘ 한 김현아가 고민하는 지점도 그와 아주 멀지 않다. - P210

기후위기 시대의 ‘좌파적’ 사유_한승동
박노자 <전쟁 이후의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서방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것도 잉여 수탈과 본원적 축적을 위한 전쟁과 군사력 추구의 부산물과도 같은 것이다. 1780년 영국이 인도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식민화했을 때 영국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상위 3%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이 모든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전시 징병을 해야 했던 1차 세계대전 때였다. 19세기 말에 프랑스나 독일 등이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도 징병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징병 대상에서 제외된여성들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1946년이 돼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비스마르크가 ‘복지‘제도를 마련한 것도 전시 총동원체제를 위한 상이병연금, 전몰 군인 유족연금, 부상병 무상치료 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복지도 전쟁의 산물인 셈이다. 한국의 군인연금이나 공무원 연금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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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치 도약을 위해서_이헌석

혹자들은 기후정치가 이미 ‘오염된 표현‘이며,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중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가 진보진영만의 표현이 아닌 것처럼, 기후정치도 기후정의 진영만의 ‘신줏단지‘가 아니다. 기후정치는 혹여 잡티가 튈까 애지중지 모시는귀중품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 양당 기후정치의 한계를 비판하며 싸워야 하는 마당이다. 이번 총선은 국회의원 선거 사상 처음으로 기후위기를 중심으로 작은 마당이 벌어졌으나,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기후정의 진영과 진보정당이 철저히 패배한 선거였다. 기후정치 마당을만든 것은 기후정의운동 진영이었으나, 정작 마당을 만든 이들이 그 공간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정치적 중립에서 정치참여 운동으로
여기서 하나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최근 급격히 변화된 정치지형이다.
시민단체 등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대변형 운동이 최근 급격히 직접적인 정치참여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표가 정당가입률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정당가입률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 P121

홍세화 선생이 지은 삶_오창익

홍세화 선생이 돌아가셨다. 2024년 4월 18일. 봄꽃 좋은 날이 그의기일이 되었다. 이름은 세계(世界) 평화(平和)에서 한 자씩 따서 세화(世和)라 지었지만, 참혹한 전쟁은 어머니와 동생을 앗아갔다. 가난했던성장과정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20년 넘게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았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다. - P125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비참한 감옥행을 막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레미제라블>의장발장이 과잉 형벌의 대명사가 되었듯,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사람들도 과잉 형벌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범죄자여서 또는죄질이 나쁜 범죄자여서 감옥에 보내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징역형을 선고할 만큼 나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그저 기초질서 위반행위쯤 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선고받은 벌금형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감옥에 가면 생계 박탈, 가정 파괴 등 후유증도심각하지만,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감옥에 끌려왔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매년 감옥에 가는 사람이 4~5만 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 P127

선생의 일관된 태도는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회의(懷疑)하자, 항상의문을 품자"는 다짐과 짝하는 태도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어떻게 하는 게 나 자신과 이웃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일인지 돌이켜보자는 거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해줬던 좋은 말씀을삶의 원동력을 삼았던 거다. 외할아버지는 늘 "착한 사람은 항상 손해본다. 그렇지만 너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제삼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라"는 등의 깨우침을 주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의 지혜로운 말씀을 늘 기억하며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떤지 등을 계속 살폈던 것이다. 물론 끊임없는 긴장이 필요한 일이다.
홍세화 선생은 ‘짓다‘는 동사를 곱씹곤 했다. 의식주, 곧 입고 먹고자는 일을 목적어로 하는 ‘짓다‘는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거다. 그렇다. 우리는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도 짓는다. 선생은 의식주처럼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것도 잘 지어야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어떤 사람으로 지을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나 자신을 짓는 과정에서 환경이나 조건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자신을 좀더 아름다운 존재로, 더 바람직한 인간이 되게 만드는 과정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거다. 나를 짓는 과정은 전적으로 내 몫이기에 선생은 부단히 자신을 제대로 짓기 위해 노력했다. - P230

지역의 자치, 왜 중요한가_로라 로스

낸시 프레이저가지적했듯이, 정치적 행위는 단지 ‘사회적 보호‘(좌파)나 ‘자유‘(우)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즉 보통사람들이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가되는 것을 뜻한다(여기서 ‘정치‘는 공동체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 P135

따라서 다음 세 가지를 사회운동의 중심적 요소로 두는 일은 반드시필요하다. 첫째, 약자들을 돌보는 일은 사회화돼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성들도 그들의 삶 속에 보살피는 활동을 포함시킴으로써 남성화된 방식의 삶과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일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행복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들이있어야 한다. 셋째로, 변화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도 그 프로젝트 내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고, 일이 수행되고, 해야 할 일들이 분배되고 있는지, 그리고 활동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고 있는지 모두 중요하다.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긴급성이나 효율성 때문에 이 원칙이 뒷전으로 밀려선 안된다. 물론 지역 단위라고해서 이런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실현될 가능성은 훨씬 크다. (김정현 옮김) - P141

정의로운 산림보호지역 확대를 논의할 때_오충현

금년 봄, 사과값이 상승하면서 드디어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 문제가 기후변화라기보다는단순한 농산물 유통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은 대구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주변에 사과나무를 심고 주민들에게 보급한 것이 대구 사과가유명해지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변화로 인해대구지역 사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사과 산지가 북상하여충주나 포천 지역이 주요 사과 산지가 되었다. - P143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이와 같은 인간활동의 결론은 인간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멸종되지 않고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와 생물종, 서식처를 다양하게 유지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그는 권하였다. 이런 권유를 기반으로 1992년 생물다양성 조약이 체결되었다.
생물다양성 조약 체결 이후 전지구적으로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다양한 활동을 진행했지만 WWF 보고와 같이 아직도 생물종 감소는 지속되고 있다. 2020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와 ‘생물다양성 과학기구(IPBES)‘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이라고 하는 공동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보전이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생물다양성 손실과 기후변화를 동시에 해결하고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해법으로 ‘자연기반해법‘을 제시하였다. - P146

자연기반해법이란 현존하는 자연자산을 최대한 잘 관리하고, 부족한부분은 더욱 확충해서 관리하는 방법을 통해 기후변화 문제와 같은 환경문제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 P147

자연과 노동에서 배운다_천종현 최하정 한종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가 유대인 강제수용소 입구에내걸었던 표어는 원래 실현될 수 없는 거였는데 우리 또한 그랬다. 비닐하우스 안이라 춥지는 않았지만 노동은 힘겨웠고 한미리스쿨로 돌아와 야간 수업을 할 때는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대학이나 MBC저널리즘스쿨에서 몇 시간 강연을 듣고 귀가하던 때와는 비교가 안되는 강행군이었다. - P152

장 대표는 몇 번이고 중간 크기의 ‘중과‘가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들 선물용으로 ‘대과‘를 선호한다. 그래서 겨우내 잘라둔 가지가 봄에 다시 나도 잘라버린다. 굵은 가지는 계속 큰 열매를 맺고, 작은 가지는잘려 나가는 모습에서 괜스레 취업을 준비하는 처지가 떠올라 위축된다. 작고 못난 열매도 음료가 되고 잼이 되는데…. 육지로 가는 제주 월동무는 규격을 벗어나면 크건 작건 밭에 버려진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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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정보 산업_최원형

이런 보건의료정보의 상업적 거래가 얼마나 은밀하게 만연해 있는지, 또 업자들의 주장과 달리 익명화된 데이터가 얼마나 재식별화하기 쉬운지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에서 발생했다. 2015년, 한국의 의약품 관련 단체들이 설립한 ‘한국약학정보원‘과 요양급여 청구 프로그램 개발사 ‘지누스가 2011~2014년 사이 약국에서 쓰는 프로그램 등을 통해 수집한 보건의료정보들을 당사자 동의 없이 ‘한국아이엠에스‘에 22억 원을 받고 팔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넘겨진 정보는 환자 주민등록번호와 병명, 조제 내역 등이 포함된 47억 건으로, 피해 규모는 자그마치 4,399만 명에 달했다. ‘한국아이엠에스‘에서 정보를 얻은 미국의 본사는 이를 재가공해 100억 원에 국내 제약회사에 되팔았다. 지은이는 책에서 이 사건을 중요하게 언급하며, "세계에서 기술이 가장 발달한 국가 중 하나인 한국이 환자 의료정보의 상업적인 이용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의 한복판에 놓이게 됐다"고 평가한다.
그 ‘싸움‘의 전선은 ‘비식별화한 것은 활용에 대한 개인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빅데이터산업의 논리와 ‘비식별화한 것이라도 보호받아야 할 개인정보‘라는 개인정보 보호의 논리 사이에 형성됐다.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었지만, ‘한국아이엠에스‘ 등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들은 2020년 1심에 이어 2021년 2심과 3심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피고들이 줄곧 주장한, ‘식별 - P87

정보를 암호화했기 때문에 개인정보에 해당하지 않고, 재식별화할 의도가 없었다‘는 논리를 재판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앞서 언급한 데이터과학자 라타냐 스위니의 연구팀이 ‘아이엠에스‘가 한국에서 받은 익명화된 데이터를 연구해, 그 익명화 방법이란 게 주민등록번호 일부를 정해진 특정 알파벳으로 바꾸는 정도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한 것도 재판부의 판단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 P88

핵심 문제는, ‘아이엠에스‘ 같은 기업이 수십 년 동안 보건의료정보를 수집하고 거래해왔던 것을 은폐해온 역사가 보여주듯 ‘상업적 목적‘
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다. 지은이는 "건강 관련 기업들이 의료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숨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환자를 고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오랫동안 ‘아이엠에스‘
의 배를 불려온 것은 환자들이 아니라 제약회사나 보험회사, 정부 등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빅데이터를 다루는 기업의 고객 역시 개별 데이터의 주인인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를 자원으로 삼는 다른 기업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약 시장이 주도권을 쥔다면 기업들이 우리에 대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파악할 테고, 그 정보를 이용해 우리의 미래를 빚어내려 할 것이다." 지은이는 특히 의학의 경우 "특유의 방식과특수성을 지닌 산업 분야지만, 다른 경제 분야에 비하면 진짜 고객(환자)을 만족시키는 정도가 훨씬 부족하다"고 꼬집는다.
산업의 효용을 앞세우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개인정보 보호는 빅데 - P90

이터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 따위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말은 우리에게 아주 간명한 핵심이 무엇인지짚어준다. "큰 그림에서 보면, 건강 빅데이터 시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더 높은 투명성과 더 많은 동의 절차, 그리고 더 많은 통제다." - P91

살아있는 의료_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대의학은 크게 틀렸습니다. 연구자들은 박테리아(세균)가 자연돌연변이를 통해서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광범위하게 갖게 되기까지는 대략 100만 년은 걸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박테리아가 바보인 줄 알았던 거죠. 그러나 박테리아는 고도로 지각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균은 인간 언어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언어수단을 통해서 소통하고, 자신의 친족을 알아보고 자손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화학물질들을 만들어냅니다. 박테리아는단세포생물이지만 많은 수의 박테리아가 모였을 때에는 집단적 지능을나타냅니다. 동식물, 곤충 같은 복잡한 생물들도 본질적으로 ‘박테리아공동체‘라고 봐야 하는 거예요. - P93

약초의술은 대부분의 증상을 치료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건강관리 모델이 ‘질병과의 전쟁‘이 아니라 ‘고통을 완화하는 것으 - P105

로 전환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프게 될 겁니다. 그건 막을 수없는 일이고, 또 막아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약초의학에 의존하게 되면단기간에는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약초는 조제약과 같은 저항성 문제를 일으키기 않기 때문이죠. 부작용도 훨씬 적고, 비용도 싸고, 그리고 재생 가능합니다. 자연분해됩니다. 지구의 생태적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약초의학은 지속가능한 의술입니다.
식물의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이 세계에 죽음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한계를 지운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그런 한계를 억울해하거나 누군가를 탓하거나 분개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태도야말로 성숙함의 하나의 징표가 아닐까요. - P106

뇌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하잖아요. 어째서 우리 문화는 식물을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지능이 없는 존재라고 보는걸까요?
식물은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의 틀 속에서 반응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지만 전통문화들은 식물을 지능이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떤장소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 봐도 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못 보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식물 신경생리학자들이 식물이 지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가설은 틀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훨씬 많은 신경세포로 된 뇌를 보유한 식물들도 다수 있다고 합니다. 식물의 신경망은 뇌라는 장기가 아니라 뿌리시스템 속에 내재돼 있다고 해요. 이 네트워크는 인간의 뇌처럼 두개골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흙이 허용해줄 수만 있다면 무한히 자랄 수있습니다. 사시나무의 경우에는 뿌리가 10만 년 이상 동안 자라 수십만평에 이르게 뻗어 나가기도 합니다. - P112

나 자신의 한계, 놓쳐버린 기회, 미처 마치지 못한 일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오를 어느 정도 바로잡을 수 있어요. 회피해온 일들을 처리할 기회인 거예요. 무엇보다 우리는 젊은 자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생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온전히 진실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회한에 찬 임종을 맞이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건 자기자신을 깊이 배신하는 일입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일은 피하려고 합니다.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남겨둔 일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김정현 옮김)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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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모, 강원도 왕진의사 <아픔이 마주하는 세계에서>
마을진료소, 이웃복지사
선례 없음이란 결국 의지 없음을 뜻했다.

의대 정원 확대에 가려진 이야기_김연희

한국의 의사 직군은 ‘이중의 격차‘ 속에 놓여 있다. 첫 번째는 의사 직군과 사회의 다른 직군 사이의 소득 격차이다. 30년 가까이 의사 공급은 고정돼 있지만 의료시장에 돈이 몰리며 의사 직군의 임금은 독보적으로 높아졌다. 이렇게 의료시장으로 몰려간 돈은 의사 직군 내에 또다시 격차를 만들어냈다. 건강보험공단이 공급자단체와 수가(의료 가격)를 계약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격통제를 받는 급여 영역은 수익 상승이 비교적 완만하다. 국민 생명에 꼭 필요한 필수의료 과목이 대부분여기에 속한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와 흉부외과, 신경외과 같은 곳들이다. 반면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건강과 미용시술을 향한 욕구가 커지면서 의료시장으로 몰린 돈은 병의원이 임의로가격을 정할 수 있는 비급여 영역으로 흘러갔다.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같은 전통적인 비급여 시장에 더해, 손실보험의 활성화로 통증의학과처럼 새로운 비급여 시장 역시 빠르게 확장되었다. - P59

의대 증원을 둘러싼 논쟁은 ‘총량‘과 ‘배치‘의 문제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총량은 절대적 의사 수 부족, 배치는 의료계 내 잘못된 자원배분을 의미한다. "의사 수는 부족하지 않은데 배치가 잘못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오래된 주장이다. 그 원인으로 늘 저수가를 꼽는다. 건강보험이 소아청소년과나 흉부외과 같은필수의료에 쳐주는 수가가 낮아서 전공의들이 선택하지 않는 기피과가된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시절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되며 진료비나수술비의 수가가 낮게 책정됐고 의사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일종의 박리다매인 ‘3분 진료‘ 관행이 굳어졌다는 것은 한국 의료계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건보 수가에서 진료비와 수술비는 낮지만 검사비는 원가보다높게 책정돼 있다는 점," 이런 수가 구조를 이용해 의료계에서 검사를남발해왔다는 점, 또 잘못된 자원 배분을 바로잡으려면 비급여로 큰 소득을 올리는 분야의 수익 역시 재조정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의사들은언급하지 않는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내놓은 필수의료 개혁패키지에서 손실보험제도를 손보겠다는 방안을 두고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의대 증원 못지않게 극렬한 반대의견이 형성되었다. - P61

이 분야를 취재하며 ‘보건의료제도의 세 주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국민건강보험으로 대변되는 ‘정부‘, 의료기관·의료인 등 ‘공급자‘ 그리고 ‘이용자‘, 즉 일반시민, 이렇게 세 주체가 보건의료제도를 지탱하는 기반이라는 의미이다. 보건의료는 복잡하고 전문성이 높아 의료인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왔는데 이 개념을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치료는 인체와 의료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의 - P63

역할이지만, 보건의료제도는 한국사회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사회보장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 구성원이 동참하고 공동체가 함께 가꾸어야 할 공적 시스템인 것이다.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큰 신뢰를 받으며 시민의 건강 수준을 높여왔던 성공적인 제도가 일대도전을 맞고 있다. 의대 정원으로 촉발된 의료 개혁은 의사집단이 아니라우리 모두의 일이다. - P64

바깥 없는 몸, 관계 없는 의료_김태우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 이후의 시대가 규정하는 분리의 체계에 주목하였다." 과학과 정치, 자연과 인간의 영역을 나누는 것은 근대라는 시대에 헌법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후의 시대를 규정하는 분리의 헌법은 몸에도 가해진다. 몸과 몸 밖을 분리하는방식으로 드러난다. 근대라는 시대는 ‘순수하게 하기‘를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그것은 경계를 나누는 대상들의 순수성을 만드는 담론과 실천 - P70

을 통해 근대 헌법에 종사하는 작업이다. 생의학은 몸에 대한 ‘순수하게 하기‘를 담당하는 대표적 지식과 실천의 체계다. 생의학은 몸의 내부에시선을 돌리면서 몸의 수준에서 ‘순수하게 하기‘를 완수한다. 몸의 내부의 부분과 그 부분의 더 내밀한 부분에 시선을 던지면서 ‘순수하게 하기‘를 실천한다.
이러한 ‘순수하게 하기‘의 내부 보기가 추동하는 시선의 방향성에 의해 몸 외부와의 관계는 차단된다. 수많은 발암물질이 도처에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몸 내부로 집착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미세먼지들이 자욱한 공기를 마시고, 미세플라스틱이 부유하는 물을 마시고,
항생제 투여된 고기를 먹고, 농약 묻은 야채를 먹고, 화학약품으로 숙성시킨 과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내부로 집착된 시선을 지속한다. 살벌한 경쟁의 기업문화 속 스트레스가 만연한 직장을 다니고, 휴식하고 운동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365일 자영업장을 운영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몸 내부로 향하는 강력한 시선의 방향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다시 나누어진 부분의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의 관성을 멈추지 못한다. 발암물질, 미세플라스틱이 이미 하이브리드된 몸인데, 의료는 자꾸 이 몸의 순수성을 말한다. 지금의 의료에서 몸과 몸 밖의 관계성은 무시된다. ‘관계‘ 없는 의료가 지금의 의료를 특징짓는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질책의 말을 듣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 - P71

기록 갱신이 일상이 된 최고기온의 여름에서 "열기는 새로운 코비4)드"로 작동한다. 강력한 열기 속에 실내에 머물라는 재난문자가 수시로 터진다. 이것은 열기에 의한 격리(lockdown)이다. 에어컨이라는 취약한 보호막으로 지키고 있는 실내도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에어컨이가동되지 않을 때를 상정한 재난 예측 연구들은, 격리도 유효하지 않 - P72

은 새로운 코비드의 강력함을 말하고 있다. 만연하는 기록 갱신의 열기를 걸어 잠근 문이 막아주지는 못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내부로 향한 시선을 돌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료 개혁이다. 기후재난의 시대가 경각으로 임박한 상황에서 의대증원의 문제보다 시급한 것은, ‘순수하게 하기‘의 몸과 그 내부 보기를통해서만은 건강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의료인의 적정 숫자보다 그 의료인이 다루는 몸이 어떤 몸인가에 대한 논의가더 시급하다. 의대 증원 논쟁이 역사적인 이유는 국가와 의료의 연결로결성된 권위적인 체계에서 수동적 몸으로 남은 근현대 몸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과 기후의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하는 역사의 문턱에 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 P73

농촌 돌봄의 기발한 대안 두 가지_양창모

"이분들이 왜 병원을 찾아가야 하지? 의료진이 찾아오면 안되나?" 노인들에게 써준 수많은 진료의뢰서가 결국 의사에게 가 닿지 않은 채 버려졌다는 걸 알았을 때 든 생각이다. 시골 동네마다 있는 마을회관에서한두 달에 한 번이라도 의사가 찾아오는 마을진료소를 개설한다면 어떨까 싶었다. 인구 30만의 도농복합 도시라면 대략 서너 팀의 의료진만있어도 웬만한 시골 마을은 빠지지 않고 방문할 수 있다.
좋은 기획이라 생각해서 추진했지만 결국 행정의 벽에 부딪혔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의료법이다. 의료법 제33조 1항에는 의료기관으로 허가되지 않은 공간, 예를 들면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는 진료행위를 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관계 공무원은 이 1항을 인용하며 마을진료소 설치가 어렵다고 했다. 난감했다. 관련 법을 찾아봤다. 1항이 명시되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동시에 예외 규정도 있다. 예를 들면 예외규정 3호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요청하는 경우"에는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않고도 진료행위를 할 수있게 되어 있다. 시장이 공익상 마을진료소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설치가 가능한 것이다.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관계 기관에 항의도했으나 이제까지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어처 - P76

구니가 없었다. 선례가 없지만 정부가 앞장서서 선례를 만든 사례, 즉원격의료를 허용한 디지털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의료법은 원격의료를 금지한다. 하지만 정부는 규제특구라는구실로 이를 허용했다. 수백억의 지원금도 풀었다. 강원도에서만 적어도 100개의 방문진료팀을 만들 수 있는 돈이다. 선례 없음이란 결국 의지 없음을 뜻했다.
만들어내는 주어가 정당이든 시장이든 도의회든 상관없이 이 모든시행착오에도 마을진료소는 결국 만들어질 것이다. 주어가 누가 됐든시골의 노인들은,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매일 옆에서 함께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 문장을 완성해낼 것이다. 드러난 사회적 고통은 수없이 고쳐쓰더라도 결국 주어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노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 주어를 찾고 싶을 뿐이다. - P77

돌봄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 아니라 관계이다. 어떤 역할도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멀리 시내에서 온 요양보호사보다 마을에 함께 살고있는 이웃복지사가 훨씬 중요한 이유이다. 요양보호사에게 대상자는자신의 서비스가 필요한 익명의 개인이지만 이웃복지사에게 대상자는 - P78

마을사람이다. 요양보호사에게는 자신의 대상자가 누구를 만나고 이웃들과 어떤 도움을 주고받는지, 건강을 위협하는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때 누구에게 연락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웃복지사에게는 중요하고 이미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요양보호사는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는 돌봄의 구성원이 아니지만 이웃복지사는 서비스 시작 전부터 이미 이웃 돌봄의 구성원이다. 의사인 나는 황 할머니무릎에 관절주사를 놓고 돌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 이웃복지사는요가를 통해 할머니 무릎 관절의 힘을 근본적으로 길러주면서도 함께운동할 친구를 불러온다. 함께 있는 사람이고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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