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자기가 한밤중에 우리 침실로 숨어 들어와서 차례로강간하지는 않겠지?"
"물론 안 해요, 그런 짓."
"그렇다면 아무 문제 없어. 우리 방에 머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해. 그러는 편이 좋아. 그러면 서로의 기분도 잘알 수 있고, 내 기타 솜씨도 자랑할 수 있고, 나, 꽤 잘 치거든."
"정말로 귀찮지 않겠어요?" - P176

"나오코는 자주 저렇게 돼요?"
"응, 가끔." 레이코는 씨는 이번엔 왼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거. 그러면 큰일이야." " - P201

"알아요. 어쩐지 알 것 같아요."
"그 애가 악보를 가져오더니 한번 쳐 봐도 되겠느냐는 거야. 괜찮다고, 쳐 보라고 했지. 그러자 그 애는 바흐의 「인벤션(Inventionen)」을 쳤어. 그런데, 그게 꽤 재미있는 연주였어. 재미있다고 할까 참 이상하다고 할까, 분명히 평범하지는 않았어. 물론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 전문 학원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레슨도 받다가 안 받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자기 식대로 연주한 거니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음은 아니었어. 만일 음악 학교 입학 시험에서 그렇게 연주하면 그냥 떨어지고 말 거야. 그렇지만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어, 그게 다시 말해 전체의 90퍼센트는 말도 안 되지만, 나머지 10퍼센트의 중요한 포인트를나름대로 해석해서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그것도 바흐의 「인벤션」을! 난 그것 때문에 그 애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얘 도대체 뭐야, 하고. - P216

"그건 가 봐야 알 수 있어. 그나저나, 오늘 정말 짧은 스커트를 입었네."
"보기 좋죠?"인할
"계단 오를 땐 어떡해, 그거?" 의사가 물었다.
"그냥 올라가요. 시원하게 보여 주는 거죠." 미도리의 말에뒤에 선 간호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네도 곧 입원해서 머리를 열어 보는 게 좋을지 몰라." 의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는 가능한 한엘리베이터 타도록 해. 환자가 더 늘어나면 곤란하니까. 요즘그렇지 않아도 바빠." - P315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친척이 문병 와서 여기서 같이 밥을 먹잖아, 그러면 모두반은 남겨. 너처럼. 그래서 내가 덥썩 다 먹어 치우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 난 가슴이 먹먹해서 도저히 다 먹을 수가없어.‘라고 해. 그렇지만 간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농담이아니야. 남은 그냥 찾아와서 동정할 뿐이야. 화장실 수발도 들고 가래도 받고 몸을 닦아 주는 건 바로 나야. 동정만 해도 대소변이 처리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그런데도 내가 밥을 다 먹어 치우면 나를 비난 섞인 눈길로 바라보며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라고 해. 나를 무슨 짐수레나 끄는 당나귀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가지고서는 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까, 그 사람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중요한 건 대소변을치우느냐 치우지 않느냐 하는 거거든. 나도 상처받을 때가 있어. 나도 지쳐서 축 늘어질 때가 있어. 나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 나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의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머리를 열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는사이에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정신 상태도 이상해지고, 그런걸 두 눈으로 오래 지켜보고 있어 봐, 견딜 수 없다고. 게다가저축한 돈은 점점 줄어들고, 앞으로 삼 년 반 더 대학에 다닐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언니도 이런 상태로는 결혼식도 못할 거고." - P317

그 사람 연극의 특징은 이것저것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 하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는 상태에 빠져요. 그건 그럴 수밖에요. 모든 사람의 정의가 실현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 넌 저쪽으로, 넌 이쪽으로, 넌 저놈이랑 같이, 넌 거기서 잠깐 가만히 있어, 그런 식으로요. 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마키나‘라고 합니다. - P323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니 점점 애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 위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혼잡한 일요일 거리는 나를오히려 푸근하게 해 주었다. 나는 통근 열차처럼 붐비는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서 음악을 크게 틀어 줄 것 같은 재즈 카페에 들어가 오넷 콜먼이니 버드 파월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짙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방금산 책을 읽었다. 5시 반이 되어 나는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 P337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십이삼 년이 지난 뒤였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갔고 저녁에 근처 피자 하우스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내 손이며 접시며 테이블이며눈이 닿는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갰다. 그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비롯한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그것은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이미 오래전에 어딘가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쓰미 씨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았던 것이다. - P356

"더 멋진 말 해 봐."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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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는 참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적시고, 비옷을 입은 정비사들, 밋밋한 공항 건물 위에 걸린 깃발, BMW 광고판, 그 모든 것이 플랑드르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였다. 이런, 또 독일이군.
24665비행기가 멈춰 서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 스피커에서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 P9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더욱 선명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나오코에 대해 글을 쓰려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처음 한 줄이라도 나와만 준다면 그다음에는 물 흐르듯 쓰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한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해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자세한 지도가 자세함이 지나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때 - P21

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 마."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는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랬기에그녀는 나에게 호소해야만 했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 P22

"괜찮아." 나는 말했다. "어쩐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알 것 같아. 나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말을 잘 못 하겠어. 요즘 들어 계속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하면 이상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야. 맞지도 않는 말이거나 완전히 반대거나. 그걸 고쳐 말하려 하면 이번에는 혼란에빠져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모르게 돼. 마치몸이 둘로 갈라져서 서로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둘 사이에 커다란 기둥이 하나 있는데 그 주위를 빙글빙글돌면서 술래잡기를 해. 적절한 말은 다른 내가 아는데, 여기있는 나는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거야."
나오코는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마음, 알겠어?"
"많건 적건 누구에게나 그런 느낌이 있어. 다들 표현하고싶은 걸 정확하게 말 못 해서 안절부절못하고 그러잖아."
내 말에 나오코는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하고는 좀 달라." 나오코는 그 말만 하고 더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 P41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P48

나는 즐겨 책을 읽었지만 많이 읽는 타입은 아니고 마음에 드는 책을 잡으면 몇 번씩 반복해서 읽는 편이었다.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이었는데, 학교에서나 기숙사에서나 그런 종류 소설을 좋아해서 읽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주로 다카하시 가즈미, 오에 겐자부로,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당연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었다. 하나를 잡으면 몇 번이나 거듭 읽었고, 때로 눈을 감고 책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책향기를 맡고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열여덟 살 때 나에게 가장 다가온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지만 몇 번 거듭 읽는 사이에 조금씩 처음의 광채를 잃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최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계속 내 최고의 소설로남았다. 불현듯 생각나면 나는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 그 부분을 집중해서 읽곤 - P57

했는데,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페이지도 재미없는 페이지는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멋질 수가 있을까 감탄했다.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멋진 소설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 본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읽어 보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인간조차 없었다. 1968년에 스콧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것은 반동으로 지목될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장려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 P58

나가사와는 몇 가지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소유한 사내였다. 그는 때로 나조차 감동해 버릴 만큼상냥하게 굴다가도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음침한 저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과 구제할 길 없는 속물근성이 동시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거느리고 낙천적인 태도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그 마음은 음울한 늪의 바닥에서 외롭게 몸부림쳤다. 나는 그의 모순된 내면을 처음부터 선명하게 느꼈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왜 그런내면이 보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내도 나름의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다. - P61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아침까지 버티다 자기 혐오와 환멸에 사로잡힌 채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이다. 햇빛은 너무 눈부시고 입안은 까칠까칠하고 내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닌 듯했다. - P65

"매번 그렇게 혼자서 여행해?"
"그런 셈이지."
"고독한 게 좋아?" 그녀는 턱을 괸 채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 먹고 강의도 혼자서 뚝 떨어져 앉아 듣는 게 좋아?"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 P96

나는 거기에 대해 잠시생각해 보다가 귀찮아서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나가사와한테 빌린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짐』을 마저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책을 돌려주러 그의 방으로 갔다. - P99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격인 것 같네."
"그럴지도 몰라. 아마 그 탓에 사람들이 날 별로 좋아하지않는 것 같아. 옛날부터."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닐까." 그녀는 볼을 괴고서 우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난 너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 말투도 아주 특이하고 말이지. ‘어떤 것이든 그렇게 사로잡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 P127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요 몇 년 동안 도대체 내가 어떤 풍경에 익숙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내 기억 속에서 친밀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풍경은 기즈키와 둘이서 당구를 친 항구 가까운 당구장의 정경이었다. 그날 밤 기즈키는 죽어 버렸고, 그 이후로나와 세계 사이에는 뭔가 삐걱대고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고말았다. 나에게 기즈키라는 사내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거기에 앉아 캠퍼스의 풍경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혹시 미도리를 만날 수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날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P142

어느 날, 담당 의사한테 그런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했어.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뒤틀림을 교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뒤틀림에 익숙해지기 위한 거라고 했어.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물론이건 아주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건 우리가 품은 문제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난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알 것도 같았어.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 P155

나오코와 레이코 씨는 나란히 5시 반에 돌아왔다. 나와 나오코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오코는 정말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레이코 씨는 내가 읽는 책을 보더니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이런 데 오면서 일부러 그런 책을 가져와." 레이코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 P185

그다음 그녀는 「노웨어 맨 (Nowhere Man)」을 치고, 「줄리아(Julia)」를 쳤다. 때로 기타를 치면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와인 한 모금, 그리고 담배를 피웠다.
*「노르웨이의 숲』 부탁해."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씨가 부엌에서 고양이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00엔 동전을 꺼내 거기에 넣었다.
"뭔데요, 그거?"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때마다 여기에 100엔을 넣기로 되어 있어.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이렇게 해, 마음을 담아 신청하는 거지."
"그게 내 담뱃값이 되기도 하고."
레이코 씨는 손가락을 푼 다음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의 연주에는 마음이 담겼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않았다. 나도 호주머니에서 100엔을 꺼내 저금통에 넣었다.
"고마워." 레이코 씨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때로 나는 정말 슬퍼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깊은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춥고 외롭고, 그리고 캄캄한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으면 레이코 씨는 절대로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 나오코가 말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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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6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의 산‘ ㅎㅎㅎ [˝어떻게 이런 데 오면서 일부러 그런 책을 가져와.˝ 레이코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ㅋㅋㅋ 연말 즐독 응원합니다 ~~

햇살과함께 2023-12-26 18:10   좋아요 1 | URL
<마의 산>이 왜? 하면서 찾아보았는데, 어이 없을 만하네요.
하루키 너무 은유적이지 못한 것 아닌지? ㅎㅎ
서곡님도 남은 2023년 즐기는 독서되세요!
 

오랜만에 소설 읽기. 무슨 소설을 읽을까 읽지 않은 소설 책장을 살피다가 12월에 읽으려고 했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덕적 혼란>을 꺼내다가 하드커버라 지하철에서 읽기 불편하니 포기. 며칠 전 <김겨울의 라디오 북클럽> 팟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얘기를 들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으로 정했다. 하루키는 몇 년 전에 <기사단장 죽이기> 읽고 역시 나는 하루키와 안맞아 하고 생각. 20대에 읽은 <상실의 시대>는 나쁘지 않았던 기억(물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에 다시 읽어보려고 샀던 <노르웨이의 숲>. 첫 페이지 비행기 ‘금연 사인‘부터 충격. 그땐 그랬지. 아침에 30페이지 읽은 감상. 아 오글거려. 오글거린다. 참고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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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보 까보슈 - 3단계 문지아이들 3
다니엘 페나크 글, 마일스 하이먼 그림, 윤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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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개의 입장에서 인간과의 관계를, 다른 개나 고양이와의 관계를 말하는 책. ‘길들이지도 길들여지지도 말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평생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하는 책. 반려인이 되려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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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없으니 조심한들 소용이 없다. 누구든 불행을 피할 수 없으니 행복한들 소용이 없다. (이 얘기가 ‘거꾸로도‘ 적용되는 게 다행이긴 하다.) - P29

"일단 결정을 내렸으면 절대로 되돌아보지 마."
시컴댕이가 충고했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머뭇거리는 건 모든 개들한테 치명적인 적이거든." - P34

개는 그저 울기만 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울것만 같았다. 멈추지 않고. 하지만 슬픔이란 건 참 이상하다. 그토록 처참한 슬픔에 빠져 있는 중에도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을 주목하게 되니 말이다. 이제 털북숭이를 영원히잃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개는 그 소녀에게서 사과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더욱이 그 냄새가 이상하게 여겨진 건, 그 때가 전혀 사과의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개는 즉각 깨달았다. 새 여주인이 무얼 원하면 계절이나 시간은 아무 상관 없다는 걸. 그 애는 뭘 원하면 당장 가질 수있었다. 그 날 오후 그 애는 사과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그 날 저녁엔 개를 갖고 싶어했던 거다. - P81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앗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서글픈 생각 위로 그 동안 겪어 온 여러가지 슬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냉장고 문짝 옆에 있던 시컴댕이와 최후의 용기에 대해 말하던 털북숭이……
해가 졌다. 고속 도로 가장자리로 압사한 개들의 시체가 불쑥 지나쳐 갔다. ‘민첩함, 민첩함………’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올랐다. 참았던 슬픔이 이제 조용해진 차 안에서 방울방울 눈물로 터져 버렸다. - P99

결국 사과는 개를 저버린 거다. 털북숭이의 여주인처럼. 그런데도 개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기다리면서. 뭘 기다린단 말인가? 마술처럼 사과의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웃기는 소리다! 개를 여기 잡아 두고 있는 건 단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이 아닌가? 하! 자신의 자존심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그러고도 기자 앞에서 코맹맹이가 보였던 태도를 부끄럽게 여겼다니……… 사과는 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한다. 후추 여사는 아예 모르고 산다. 노루 씨는 자기를 개 줄에 묶어서는 마치 연이라도 날리듯 질질 끌고 다니며 산책이랍시고 시키고 있다. 이런 곳에 머물러 있는 자기가 코맹맹이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인가?
생각을 깊이 하면 뭔가 결론이 나오게 마련이다.
결론을 끌어 내다 보면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결정을 내리다 보면 행동에 옮기게 된다.
개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 P111

"시컴댕이와 털북숭이 덕분에 넌 벌써 많은 걸 알고 있는거야."
하이에누는 감탄하며 인정했다.
"시컴댕이 덕에 넌 누구보다도 냄새를 잘 분별할 줄 알고한눈에 제일 좋은 것들을 골라 내잖아. 게다가 넌 자동차밑으로 지나가는 위험한 일도 하지 않잖아! 그리고 네 친구털북숭이는 용기를 가르쳐 줬잖아? 우정은 또 어떻고? 그거야말로 다른 집단을 두렵게 하는 우리 개들의 두 가지 자질이잖아? 정말이지 넌 아주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던 거야! 그들을 만났던 게 너한테는 큰 행운이었다고."
그렇다. 그리고 이제는 하이에누가 그 나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하이에누는 개에게 사람들 얘기를 해 주었다. 사람들과 개들에 대해.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개들과사람들 각각에 대해서. - P134

개의 상처는 며칠 만에 아물었다. 희끄무레하게 부풀어오른 상처 자국에는 털이 자라지 않았다. 뺨 위의 흉터를볼 때마다 개는 지금의 행복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악몽도 꾸지 않고 하이에누와 멧돼지와 함께 다시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개는 두 친구를 떠났다. 왜냐고? - P163

그건 중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하이에누의 말처럼 ‘산다는 일은 아무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늘 변하는 게 문제‘ 이기때문일 것이다. - P164

쓰고 나서. 길들이지도 말고 길들여지지도 말자

게다가 내가 개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인간들에 대한 얘기다. 일테면 이런 거다. 여러분이 개를 갖고 있다면, 혹은 앞으로 개를가질 계획이 있다면, 제발 부탁하건대 개를 길들이려고 하지 말고 개에게 길들여지지도 말라는 거다. 말하자면, 자기 개를 비 - P235

굴한 아첨꾼이나 야수로, 혹은 자동 인형처럼 변화시켰다고 뽐내는 ‘주인들‘이 되지 말라는 거다. 그런 자들은 언제나 "내 개가 얼마나 똑똑한지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기 개의 영리함을 자랑하는 그 만족한 조련사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한없는 어리석음뿐이다. 하지만 개한테 길들여지는 사람이 되서도 안 된다. 개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하여 개 생각만 하는, 그리하여 개 얘기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의 삶은 이렇게요약된다. "난 개만 한 마리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이란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좋은 훈련이란 서로의 자존심을 존중할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면 "개의 자존심이란 뭔가?" 라고물을 것이다. 그건 개답게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훈련사는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행동하고자 한다면 자기 곁에 사는 개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정의 규칙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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