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거대한 전쟁이 온다
존재 그 자체로 수수께끼였던 시인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엄청난 일이라고는 하나 전쟁, 아니 ‘특수군사작전‘이 한창인 가운데 과거의 문학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러시아군이 ‘작전‘을 개시한 뒤로 전쟁이라는 단어는 한동안 금지되었다. 사람들은 ‘전쟁 반대 (Her Bone,네트 바이네)‘ 대신 별표를 이용해 ‘HeT B****‘라고 낙서하고 다녔다. 경찰이 이 별표가 사실 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으면 철자의 개수가 같은 ‘잉어(Bo6a, 보블라)‘라고 받아치자는 밈이 유행했다. 한술더 떠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는 ‘잉어와 평화‘라고 부르자는 밈도 등장했는데, 이 책의 표지에는 인 - P123

물들 대신 잉어들이 무도회를 즐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대놓고 제목에 나오는 책은 많은 것을 함축했다. - P124

임가영

나는 증폭적 연결의 강박에서 한 걸음 거리를 둔참여를 원한다. 그래서 워크숍을 준비한다. 워크숍은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이후 각자가 흩어져 걸어갈 서로 다른 경로를 만들어 내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이 장치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연결의 에너지와 방식을 다른 형태로 재구성해 볼수 있을지 모른다. 장치의 작동을 확인하기 위해서는테스트가 필요하고, 이러한 테스트의 가장 좋은 방법은타인이 주관한 워크숍에 참여자로 함께하는 것이다. 나에게 워크숍은 즉흥과 우연의 요소를 품은 유동적 형식인 동시에 특정한 스코어로 읽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진행자의 노하우를 살펴보고 일부는 차용해 보기도 하고, 단지 거기서 벌어지는 일이 시간을 어떻게 차지하며 흘러가는지 느껴 보기도 한다.
워크숍에 참여하거나 만들 때, 혹은 만들기 위해참여할 때, 나의 몸은 특정한 장소와 상황 안에 배치된다. 차례차례 행위와 절차에 대한 요구가 생긴다. 나는내 생각을 말하게 되고, 동시에 타인의 생각을 듣게 된 - P172

다. 연결도 일어난다. 다만 그 연결은 내가 예상한 범위 안에서만 오지 않는다. 기대 밖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혹은 뒤늦게 도착하는 방식으로도 온다. 나는 혼자인 채로, 곰팡이처럼 축소되고픈 열망을 버리지 않은채로 워크숍이라는 장치가 자아내는 연결 안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빠져나온다. 그리고 자꾸만 반복해서 그렇게 한다. 대부분의 워크숍이 그러하듯 이 자리는 누구에게나, 특히 아직 불리울 이름이 없는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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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유난히 쓸쓸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매우 평온하다.
사랑도 미움도 없고
슬픔도 기쁨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없다."

루쉰, 희망 - P3

하은빈

우는 나와 쓰는 나는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후일담이나 실패담이 아닌방식으로, 완결성과 정합성을 갖춘 매끄러운 모양새로세상에 나오는 것을 좀처럼 상상하기가 어렵다. 누군가이런 이야기를 울지도 더듬거리지도 않으면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도, 정정도 번복도 하지 않으면서 정연하게 술술 해낸다면 나는 그 사람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울 것 같다. 나는 부딪치고 깨지고 조각난 이런 이야기들이 부서지고 깨지고 조각난 모양으로나마 세상에 나와 주고 또 남아 주기를 바란다. 그 이야기를 붙이고 기우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몫으로, 그 이야기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미루어 두고 그렇게 해 주기를바란다. - P30

박성우

어떤 사람은 이런 광경에 정리 좀 하고 살라고 핀잔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깔린 정리 취향을 믿지 않으며 방이 책으로 어지럽다는 것은 오히려이 시대에 드문 종류의 자기 보존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쌓여야 사유가 쌓이고 사유가 쌓여야 고독이 무너지지 않으며 고독이 무너지지 않아야 혼자 사는 삶이 한사람의 존엄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게 책더미는 읽고 난 뒤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물성 자체로 살아남기 위한 구조물이고 벽이며 때로는숨 막히는 세계 앞에서 잠시 몸을 기대는 지지대이자 ‘나는 아직 생각하는 사람이고 나는 아직 나 자신과 이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자위할 수 있는 안전한공간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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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호 : 축제 인문 잡지 한편 18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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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이든 이름만 다를 뿐 뻔하게 똑같은 요즘 축제 말고. 어릴 때 경험했던 외증조할머니의 장례가 생각난다. 집에서 치른, 축제 같은 장례 의식과 절차들. ‘축제 같은 집회’처럼. 즐거움만이 축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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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축제란 같은 날, 같은 곳에 모인 사람들이 우리가 동시에 같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인것 같아. 공간이 사람을 불러들여 축제를 만든다.
새벽 심오하다. 그치만 축제로 사회적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올린 뒤에 남는 허탈함과 외로움은 어쩌지? 나는 요즘후유증이 사흘은 가.
세영 군산북페어 전시에서 이런 질문을 봤어. ‘만약에 아트북 페어가 그저 공간이나 플랫폼에 그치지 않는다면?‘ 그런데 군산에서 동아시아의 사회참여예술을 다룬 책『점(占): 아시아, 참여, 예술』을 발견했거든. 도시를 점거한 홍콩의 우산혁명, 티베트 땅의 흙을 인도로 ‘이주‘시켜서 여러 티베트인들의 작은 화단을 만드는 참여예술 등을 다루고 있어. 축제가 그저 특정 공간이나 스쳐가는 플랫폼이 아니라면, 어느 시간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일, 거기서 뭔가를 키워 내는 일일 수 있겠다.
축제를 즐기고 집에 돌아가는 길 혼자가 되어서도 뭔가 충만한 느낌이 남아 있잖아. 그걸 붙잡고 다음에 다시모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축제가 시작된 바로 그곳을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새벽 잠시 차지한 땅에서 뭔가 키우기.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헛헛하지 않을 방법이구나. 다음 호 주제인 ‘혼자‘에서 나눌 이야기도 기다려져. - P16

이수유_죽음과 축제

내가 만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례의 축제적 외양은 집집마다 찾아오는 비극의 시기를 함께 다루면서 빚어진 무늬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축제란 각자가 지닌 색색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보다 - P33

는 홀로 맞서기 힘든 비극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것일 수 있다. 죽음은 하나의 공백을 만들어 내지만, 그 공백으로 수렴하는 힘들을 느끼게 하는 계기이기도하다. 웃음과 울음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독이나 침묵에 견주었을 때는 같은 편이다. 어쩌면 지금이 순간에도 축제적인 것은 크고 작은 비극으로 모여드는 이들, 비극 곁에 머무는 이들 가운데 잠재해 있는지모른다. - P34

정윤영

폭죽 터지는 소리 대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소리와 고래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축제. 폭탄이 터지듯굉음을 내며 번쩍이는 불꽃 대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초록 나무에 닿은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쓰레기가 없는 축제였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 축제였다.
동물의 삶을 상상하며 나의 1분과 말의 45분을 헤아릴 줄 아는 체험, 어린이가 어린이로 존중받고 말과고래가, 산천어와 나비가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경험, 그래서 인간도 동물도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슴 뻐근하게 느끼는 시간. 그게 놀이가 되고 서로의 기쁨이 되는 축제를 기다린다. - P84

김경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효석(1907~1942년)은 욕망, 노동, 월경(越境), 자연과 같은주제를 미시적으로 풀어낸 작가다.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효석은 흔히 토속적인 공간, 이국적인 정서 그리고 세련된 미감을 지닌 작가로 설명된다. 그런데 이효석은 인간의 현실을구성하는 복잡하고 첨예한 문제, 가령 계급, 인종, 폭력의 문제를 정밀하게 재현한 작가이기도 하다. 「깨트려지는 홍등」을 비롯해 기존의 소설 연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효석의 작품들은 일관된 하나의 경향을추구하지 않고 이분법적 구도를 지양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2025년인 지금 읽어도 현대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 P92

국명표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자, 나중에 ‘97년생촛불집회 사회자‘로 유명해진 보조요원이 사회자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에스파 「위플래시」로 시작해 로제「아파트」, 지드래곤 「삐딱하게」, 데이식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등 대중적인 아이돌 노래들을 연달아 틀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당시 「다시 만난 세계」가조성한 새로운 분위기를 보고 "지금 「위플래시」를 틀어야 해."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위플래시」 박자에 맞춰 외치는 구호는 참가자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냈고, 이것은 연이은 아이돌 그룹 노래의 활용으로, 즉 "탄핵송 플레이리스트"의 생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 P114

집회의 축제화로 이어졌다. [6]

유튜브 채널 씨리얼 - P115

결국 무언가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실현되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기를 바라는 동력과 정향이 12월 이후 집회 경험의 핵심이며 이후의 집회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벤야민이 남긴 말처럼 말이다. "인식은 오로지 번개의 섬광처럼 이루어진다. 텍스트는 그런 후에 길게 이어지는 천둥소리와 같다."[11] - P118

신동일

지난 여름의 경험으로 드러난 자신의 경직된 모습이 못마땅했거나 충동적 위반으로 오해와 갈등에 휩쓸리는 자신이 싫었다면, 오디세우스적 금욕과 오르페우스적 방종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단련된 자유를지향한 고대 그리스의 통찰을 빌려 자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창조해야 할 때다.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삶의 질서에 새롭고도 규칙적인 형식성을 부여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근력, 심력, 혹은 권력(덕)을 강화하는 건 수개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윤리의 어원인 에토스(ethos)가 ‘습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 각자의 정체성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재형성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품성의 힘을반복된 에토스에서 보았듯이, 작은 습관만이 큰 변화를만든다. 나는 언어 사용에도 에토스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학생들에게 애미 커디의 테드 강연 영상을 보여주곤 한다. 신체언어(body language)를 바꾸는 작은 습관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기회를 새롭게 연다는 메시지 "Fake it until - P150

you become it. Tiny tweaks become big change. (될 때까지 그런 척 하세요. 작은 변화가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듭니다.)"는 습관의 형식성이 결국 정체성마저 바꿀 수 있다는 논점을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 P151

예를 들면,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미학적 실천의 예시로 에크리튀르(e‘criture, 일상의 자기에 대해 쓰기)를 언급했다. 일기를 포함한 서사 형식을 가진글쓰기는 주체가 자신을 돌보고 변형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까지 반복될 때 글쓰기는 단편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새로운 에토스를 세울 수 있는 반복 가능한 실천이 된다. [5]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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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호 : 한국 인문 잡지 한편 17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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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 때 떠나고도 싶었지만, 한국인으로 한국에 산다는 기득권을 내가 영구히 포기할 수 있을까. K-민주주의부터 K-문학, K-푸드까지. 싫은 것과 부끄러운 것과 자부심인 것과 희망인 것의 뒤섞임.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야기가 가장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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