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5호 : 독립 인문 잡지 한편 15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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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 경제적 정서적으로 홀로 서는 것만이 아닌 타인을 신경 쓰고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서로 의존하고 함께하는 것임을, 진정한 독립이란 함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임을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독립은 아직 진행 중이다. 황소희 쌤의 시민 수업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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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부모의 탄생>
마사 누스바움 <세계시민주의 전통>

지음_대화_독립은 함께 살기다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독립의 끝은 아니죠. 이후에는 그 공간을 편안하고 쾌적하게 유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 안 청소며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일, 집을 가꾸는 모든 일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독립 초기에 깨닫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이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필요한 가사 노동을 돈으로 해결하거나, 돈을 버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쉽지 않지요. 자신만의공간은 있으나 그 공간 밖에서든 안에서든 자유로운 삶은 없게 되는 역설입니다. - P114

가족으로 돌아가라거나 독립과 자유의 공간을 포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부모와 자식이든 교사와 학생이든 억압적인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고, 나를 침해하는 관계로부터는 가능한 한빨리 독립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방법을 고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 위해 경쟁에 몸을내맡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독립이라기보다는 고립이고,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철저히 경쟁과 자본에 종속된 삶의형태일 것입니다. - P117

서로 갖겠다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주겠다는 경쟁입니다. 누구도 이득을 보지 않지만 동시에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돈은 두 사람 사이에 공유되어있습니다. 이 돈은 모두의 필요를 위해 사용되거나 적절히 분배되거나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갈 수 있어요. 이것이 빈집이 유지되고 확장되고, 가난하지만 여유로울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빈고에서 일어난 교환은 자본의기초인 상품교환, 국가의 기초인 세금교환, 공동체의기초인 선물교환과 구분됩니다. 공유지를 만드는 이 독특한 교환을 사양교환이라고 정리하고 있어요. 빈고는사양교환을 확장해서 출자자와 이용자가 자본수익을서로 사양해 공유지가 만들어지고 잉여가 빈고 외부의 연대자에게 흘러가는 금융 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 - P124

만남을 피하고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는 것이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저 역시 함께 살기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만남을 회피할수록 점점 더 즐겁게 만나는 방법과 능력을 잃어버리게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돈을 매개로 한 관계만 남는다면, 여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가난하게 홀로 죽지 않고 부유하게 홀로 죽기 위해서 평생을 경쟁해야 할까요? 진정한독립이란 함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즐겁게 함께 사는 방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 P129

황소희_수업_한국인의 시민 수업

저는 우리나라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시달리고있는 불안이 계속해서 심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신뢰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 경험의 부재‘에서 찾고자합니다. 실패해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도 다른 이들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기에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늘고군분투해야만 합니다. 각자도생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타인을 신경 쓰고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것은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겠지만, 개인들이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고립될수록 어디에도 기댈 데 없는 개인들의 생존 불안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 P158

최근 서이초 사건 등으로 전 사회적 문제가 된, 언제나 내 아이를 앞세우는 ‘괴물 부모‘의 탄생 원인으로각자도생 사회를 든 『괴물 부모의 탄생』이라는 책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엄마 혼자 해결해야 했다는 사실을짚은 내용이었어요. - P159

그리고 구매자가 되면그저 돈을 가지고 뭐든 살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물건이 약속하는 아주 자극적이고 적극적인 환상이 펼쳐지는데 이것은 지젝이 잘 묘사하고 있죠. 소비는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물건을 찾는 지속적이고 늘 만족되지 않는 과정이고, 그 원동력은 그런 특별한 물건이 존재한다는 ‘약속‘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음주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일. 혼자 마시는 것도 좋지만 음주 공동체와 마시는 술을 너무 좋아합니다. - P167

그렇다면 특정한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사랑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세계시민주의자 마사 누스바움이 남긴 문장을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한때는 수많은 학자들에 대항해 국가보다는 세계에 초점을 둔 시민교육을 강력히 주 - P180

장했던 마사 누스바움이지만, 최근 출간된 『세계시민주의 전통』이라는 책에서는 전 인류와의 느슨한 연대를 말하는 세계시민주의가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임을 인정하며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대부분 가까운 것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전 세계적 목표에 도움이 된다. (중략)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은 정의에 헌신하는 성품에 깊이와 활력을, 마르쿠스의외로운 삶에는 없었던 바로 그 활력을 불어넣는다. 나아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모두 사랑하는 그런 삶은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인간적 헌신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보여준다. 물론, 그런 삶에는 많은 난관이 따른다." - P181

얼마 전에 화제가 된 오프라 윈프리의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을 보았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연설 중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학교를 다니지 못하던 시절, 연방보안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백인 학교에 등교했던 테시 프리보스트 윌리엄스(Tessie Prevost Williams)의 이야기를 꺼내더라구요. 저격수들이 흑인 어린아이들을 노리지 못하게 하려고 창문을 종이로 가려놓은 교실에 앉아공부했을 6살 어린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저린 한 편 경외감도 들었는데, 오프라 윈프리는 몇 주전 세상을 떠난 그녀를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 학교와 가정에서 누군가가 이 어린 소녀에게 아주 훌륭하게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윗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법과 아랫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법을요. 그들은 그녀에게 세상을 바라보며 단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정의와 자유에 대한 열정을 심었고, 그 열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영광스러운 투지까지 심어 주었습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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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
의존하는 독립

소유자 개인주의
스피노자 <에티카>

이양구_희곡_저마다의 먼 강으로

압록강 의사는 남한으로 이주해 ‘독립‘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북한에 두고 온 아버지가 죽어 간다는 얘길 듣고서야 깨달은 거예요. 독립해서 산다는 게 서로가 영원히 잊고,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걸 말이에요. 서로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하고 그 관계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는 걸 말이죠. - P28

고양이 맞아요. 최하영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민족의 죄인‘으로서 처단당할 날만을 기다리며 장인의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어느 날 임시정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요.
은행나무 장인 집이 저기 대학로 명륜동이잖아요. 왜정 때부터 지나다니는 걸 내가 많이 봤죠.
고양이 그렇군요. 1945년 12월 최하영은 처단당할줄 알고 나갔다가 만난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로부터 장차 수립될 대한민국의 헌법을비롯하여 입법, 사법, 행정 등 각 분야에서 수립 시행해 나갈 법 제도적 기초를 정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은행나무 친일파들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는 거네요?
고양이 지은 죄를 씻으라는 거였죠.
은행나무 …….
고양이 신익희 입장에서는 그렇게 전문적인 일을 그때 또 누구에게 맡길 수 있었겠어요?
은행나무 …… - P34

은행나무 내 그늘 밑에서 쉬다 간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네요. 분단된 뒤로는 정부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잡아가고 했으니 참 독재 정부가 오래도 갔지요. 민주니 평등이니 하는 당연한 요구도 억압하고 차별했어요.
고양이 수백 년을 사셨으니 그걸 다 지켜보셨겠군요.
은행나무 그랬죠. 분단이 또 다른 분단을 낳는달까요?
고양이 네. 그런데 정말 먼 옛날얘기 같네요.
은행나무 멀리 있다기보다는 날마다 발 디디고 있는 지반이라고 봐야죠.
고양이 지반이요?
은행나무 네. 지반은 흔들리거나 갈라지기 전에는 느껴지지 않지만 일단 균열이 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버리잖아요. 뿌리뽑히는거죠. - P36

송재홍_래퍼들의 갤럭시

그들 각자의 삶에 새겨진 힙합은 무슨 일을 하든 각자의 단독성을 이룰 지혜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역설적인 현상에 모순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 의존하는 독립. 힙합에서 래퍼들과 내가 함께 배운 지혜는 이렇듯 서로 의존하면서도독립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 P65

김강기명_독립 너머 연립

이러한 소유자 개인주의는 한편으로 중세의 신분적 질서 속에 권리와 권한이 묶여 있던 인간을 개인으로 풀어놓은 사유라 할 수 있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이개개인으로 풀려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는지를 설득력 있는 모델로 제시했다. 하지만 소유자 개인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경제적 관점은 동시에 인클로저(울타리 치기)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제 대륙의 식민화를 통한 자본의 시초 축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내재한 계급(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의 분할, 노동의 비참을 낳거나 정당화한사상의 근저에 놓이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전제이기도 하다. - P78

자연상태는 거대한 불평등의 상태, 갈등 혹은 폭정이 끊이지않는 상태가 된다. 바로 이 불평등과 갈등이 낳는 취약성 때문에 인간은 정치 공동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인민의 바깥에 혹은 위에 군주 혹은 의회라는 최고 권력을 두는 홉스와 로크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모두가 모두에게 권리를 양도하며, 개인을 다중(multitudo)으로구축하는 민주정이야말로 절대적 통치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재적 개체화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인간이 개인의 환상을 넘어합력을 통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개체화 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과 합력, 공존, 그리고 돌봄과 의존을 통해서만 우리는 개인 혹은 개체로서는 피할 수 없는 취약성을 벗어나 진정한자유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독립‘의 환상이 그보다 훨씬 더 큰 자연스러움인 ‘연립‘의 현실을 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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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4호 : 특별호 쉼 인문 잡지 한편 14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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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편집자들의 쉬어가기 위한 특별호(?) 그러나 쉴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기획이다. 나도 오랫동안 쉼이란 일을 잘 하기 위한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일을 위한 쉼이 아닌 쉼 자체를 위한 오롯한 쉼을 추구(하려고)한다. 나에게 맞는 쉼을 계속 고민하고 찾아본다. 물론 쉼을 위한 오랜 활동인 독서와 걷기는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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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너른 빈터_조지 오웰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박솔뫼 외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김진영_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번아웃의 시기에 나를 지배했던 질문은 오직 하나 ‘왜 계속 살아야 하지?‘였는데 생의 감각이 내게 가져오는 질문은 다양하고 넓었다. 어차피 계속 살아야한다면, 나를 계속 살게 하는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 서울에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이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맞나? 지금과 같은 가족의 형태가 가장 적합한가?"
여전히 뾰족한 답이 내려지지 않는 질문들이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번민과 스트레스로 다시 스스로를괴롭히고 있는 나 자신에 처음엔 좌절했다. 이제는 도망도 더 이상 소용이 없구나, 도망도 쉼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가만 살펴보니 질문의 초점이 모두 ‘나‘에게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분명 다른 유형의 스트레스였다. 삶의 상수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도망치다 보니, 정말로 상수인 것들과 변수인 것들이 구별되었다. - P85

소영광_무신론자에게 보내는 편지

이런 맥락에서 조지 오웰의 말을 음미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 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 저는 저 ‘단순함의 너른 빈터‘가 우리를 기존의 진지함으로부터 뺄셈하게 하는 안식일의 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P95

쉼 호를 만드는 편집자들은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느냐가어떻게 쉬느냐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저자들과 함께배워가고 있어요. 선생님의 신학적 논의는 제 머리에 쥐가 나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사유로부터 더 배울 게 있다는 예감도듭니다. - P101

편집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요약해서 소개한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도식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더엄밀한 논의 풍성한 전거들이 있지만 우리편지에서는 생략하기로 해요. 관건은 저 신적인 창조 이해가 과연 세계의 기원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함의를 제공하는가일 것입니다. - P104

하나님의 안식은 타자가 존립하기 위한 빈터를 마련하는 창조의 기쁨, 곧 자기를 비운다는 점에서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는 무아적인(ecstatic) 기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님이 신학자들의 감사의 말에서 주목하셨듯이 능동적인 자리에서 수동적인 자리로 물러나는 일, 자기를 이차적인 위치로 퇴각시키는 일은 내 욕망이나 실적, 삶의 영역에 이미 침투해 있는 타자의 기여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비춰 본 안식은 우리 안에 이질적인 타자가 존립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타자의 등장에서 촉발된 공존을 입체적으로 음미하고 향유하게 합니다. - P105

복음서에서 예수는 공적인 삶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서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저 40일간의 광야 생활을예수의 피정(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정은 문자 그대로 빈틈없는 일상에서 물러나서 정숙하게 자신을 살피는 일에 해당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피정 직후에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소명이란 다름 아닌 안식의 구현자로 사는 것입니다. - P107

연어*채효정_농사짓기에서는 뭐가 일이고 뭐가 쉼인가?

효정 1980년대까지 농촌은 서양식으로 농촌 근대화정책을 따라 소농들을 없애고 비료와 농약을 투입해서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변화해 왔어요. 그걸 비판하면서 유기농, 친환경, 생태농, 자연농 같은 대안적 담론과실천들이 생겨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농촌의 현실을보면 생태적인 방법으로 농사짓지 않는 분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 같은 시장과 소비자 중심의 농산물 인증 체제하에서 유기농업을 오롯이 개인이 떠맡게 되면, 농민들은 정말 뼈가 삭거든요.
그래서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농생태적 전환이 체제전환의 핵심이라고 했던 거고요. 저는 밭을 빌렸더니, 빌려주신 분이 제 밭까지 로타리 치고 비닐 멀칭까지싹 다 해 주셨더라고요. 선의로 해 주신 걸 화를 내겠어요, 싸우겠어요? 처음에는 주위에서 제초제 친 논두렁만 봐도 내가 말라 죽는 것 같고 가슴에 화가 가득 차고 - P133

그랬는데요. 물론 지금도 마음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왜 나는 그걸 안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하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오랜 관계 속에서 진득하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 P134

또 저는 텃밭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도 부여하는데요. 에코 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가능한가』를 보면 ‘타로 밭의 정치‘로 끝나거든요. 미 - P142

즈는 텃밭을 여성들의 정치 공간으로 적극 상상합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멀리 돈 벌러 가거나 민회에 가서 싸우는 동안 여자들이 들판에서 밭을 일구면서마을 일을 의논하고 같이 운영해 나가는 모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인도의 칩코 운동(벌목을 막기 위한 나무 껴안기 시위)은 대표적인 사례고요. 아까 구멍가게의 비공식 경제, 재생산영역이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여성들의 자급과 자치의역량도 비가시화되었어요. 저는 이런 ‘들판의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다른 정치를 상상할 때 반드시 참고하고 복원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텃밭을 생활 정치의 장으로도 적극 조직해 보면 좋겠습니다. - P143

저는 원래 삶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급자족이었는데, 농촌에 내려와 살면서 오히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어요. 그런데 자급자족(Self-sufficiency)을 넘어선 공급자족(Community-sufficiency)은 혼자 자급하는 게아니라 이웃들의 일을 돕고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며 필요를 충족하는 삶이에요. 저는 공급자족의 방식으로 풍요를 채워 가는 삶에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상상하기 어렵고 장벽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꿈꾸는 동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 P146

정기현*이정화_책 만드는 사람들이 도시 농부가 된 이유

박솔뫼 작가가 쓴 ‘붙이기‘라는 제목의 원고가 있거든. 검열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맥락 없이 갖다 붙인 내용에 대한 글이야. 그 무맥락의 붙임, 전혀 다른 두 개를붙이는 게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여기저기에서 느꼈어. - P156

내 경우는 좋아하는 것에 몰입할 때혹은 내 몸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움직일 때 가능한 것 같아. 예를 들어서 등산을 하면 너무 힘들잖아. 처음엔 힘들고 괜히 왔다 싶다가 어느 시점에 몰입이 되면서아 걷길 잘했구나, 하고 머리가 가벼워지는 거야. 그래서 완전 소화를 하려면 내 생각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몸을 움직여야 하는구나 생각했어.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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