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4호 : 특별호 쉼 인문 잡지 한편 14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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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편집자들의 쉬어가기 위한 특별호(?) 그러나 쉴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기획이다. 나도 오랫동안 쉼이란 일을 잘 하기 위한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일을 위한 쉼이 아닌 쉼 자체를 위한 오롯한 쉼을 추구(하려고)한다. 나에게 맞는 쉼을 계속 고민하고 찾아본다. 물론 쉼을 위한 오랜 활동인 독서와 걷기는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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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너른 빈터_조지 오웰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박솔뫼 외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김진영_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번아웃의 시기에 나를 지배했던 질문은 오직 하나 ‘왜 계속 살아야 하지?‘였는데 생의 감각이 내게 가져오는 질문은 다양하고 넓었다. 어차피 계속 살아야한다면, 나를 계속 살게 하는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 서울에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이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맞나? 지금과 같은 가족의 형태가 가장 적합한가?"
여전히 뾰족한 답이 내려지지 않는 질문들이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번민과 스트레스로 다시 스스로를괴롭히고 있는 나 자신에 처음엔 좌절했다. 이제는 도망도 더 이상 소용이 없구나, 도망도 쉼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가만 살펴보니 질문의 초점이 모두 ‘나‘에게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분명 다른 유형의 스트레스였다. 삶의 상수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도망치다 보니, 정말로 상수인 것들과 변수인 것들이 구별되었다. - P85

소영광_무신론자에게 보내는 편지

이런 맥락에서 조지 오웰의 말을 음미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 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 저는 저 ‘단순함의 너른 빈터‘가 우리를 기존의 진지함으로부터 뺄셈하게 하는 안식일의 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P95

쉼 호를 만드는 편집자들은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느냐가어떻게 쉬느냐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저자들과 함께배워가고 있어요. 선생님의 신학적 논의는 제 머리에 쥐가 나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사유로부터 더 배울 게 있다는 예감도듭니다. - P101

편집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요약해서 소개한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도식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더엄밀한 논의 풍성한 전거들이 있지만 우리편지에서는 생략하기로 해요. 관건은 저 신적인 창조 이해가 과연 세계의 기원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함의를 제공하는가일 것입니다. - P104

하나님의 안식은 타자가 존립하기 위한 빈터를 마련하는 창조의 기쁨, 곧 자기를 비운다는 점에서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는 무아적인(ecstatic) 기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님이 신학자들의 감사의 말에서 주목하셨듯이 능동적인 자리에서 수동적인 자리로 물러나는 일, 자기를 이차적인 위치로 퇴각시키는 일은 내 욕망이나 실적, 삶의 영역에 이미 침투해 있는 타자의 기여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비춰 본 안식은 우리 안에 이질적인 타자가 존립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타자의 등장에서 촉발된 공존을 입체적으로 음미하고 향유하게 합니다. - P105

복음서에서 예수는 공적인 삶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서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저 40일간의 광야 생활을예수의 피정(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정은 문자 그대로 빈틈없는 일상에서 물러나서 정숙하게 자신을 살피는 일에 해당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피정 직후에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소명이란 다름 아닌 안식의 구현자로 사는 것입니다. - P107

연어*채효정_농사짓기에서는 뭐가 일이고 뭐가 쉼인가?

효정 1980년대까지 농촌은 서양식으로 농촌 근대화정책을 따라 소농들을 없애고 비료와 농약을 투입해서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변화해 왔어요. 그걸 비판하면서 유기농, 친환경, 생태농, 자연농 같은 대안적 담론과실천들이 생겨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농촌의 현실을보면 생태적인 방법으로 농사짓지 않는 분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 같은 시장과 소비자 중심의 농산물 인증 체제하에서 유기농업을 오롯이 개인이 떠맡게 되면, 농민들은 정말 뼈가 삭거든요.
그래서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농생태적 전환이 체제전환의 핵심이라고 했던 거고요. 저는 밭을 빌렸더니, 빌려주신 분이 제 밭까지 로타리 치고 비닐 멀칭까지싹 다 해 주셨더라고요. 선의로 해 주신 걸 화를 내겠어요, 싸우겠어요? 처음에는 주위에서 제초제 친 논두렁만 봐도 내가 말라 죽는 것 같고 가슴에 화가 가득 차고 - P133

그랬는데요. 물론 지금도 마음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왜 나는 그걸 안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하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오랜 관계 속에서 진득하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 P134

또 저는 텃밭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도 부여하는데요. 에코 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가능한가』를 보면 ‘타로 밭의 정치‘로 끝나거든요. 미 - P142

즈는 텃밭을 여성들의 정치 공간으로 적극 상상합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멀리 돈 벌러 가거나 민회에 가서 싸우는 동안 여자들이 들판에서 밭을 일구면서마을 일을 의논하고 같이 운영해 나가는 모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인도의 칩코 운동(벌목을 막기 위한 나무 껴안기 시위)은 대표적인 사례고요. 아까 구멍가게의 비공식 경제, 재생산영역이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여성들의 자급과 자치의역량도 비가시화되었어요. 저는 이런 ‘들판의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다른 정치를 상상할 때 반드시 참고하고 복원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텃밭을 생활 정치의 장으로도 적극 조직해 보면 좋겠습니다. - P143

저는 원래 삶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급자족이었는데, 농촌에 내려와 살면서 오히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어요. 그런데 자급자족(Self-sufficiency)을 넘어선 공급자족(Community-sufficiency)은 혼자 자급하는 게아니라 이웃들의 일을 돕고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며 필요를 충족하는 삶이에요. 저는 공급자족의 방식으로 풍요를 채워 가는 삶에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상상하기 어렵고 장벽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꿈꾸는 동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 P146

정기현*이정화_책 만드는 사람들이 도시 농부가 된 이유

박솔뫼 작가가 쓴 ‘붙이기‘라는 제목의 원고가 있거든. 검열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맥락 없이 갖다 붙인 내용에 대한 글이야. 그 무맥락의 붙임, 전혀 다른 두 개를붙이는 게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여기저기에서 느꼈어. - P156

내 경우는 좋아하는 것에 몰입할 때혹은 내 몸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움직일 때 가능한 것 같아. 예를 들어서 등산을 하면 너무 힘들잖아. 처음엔 힘들고 괜히 왔다 싶다가 어느 시점에 몰입이 되면서아 걷길 잘했구나, 하고 머리가 가벼워지는 거야. 그래서 완전 소화를 하려면 내 생각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몸을 움직여야 하는구나 생각했어.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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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니아 쉬블리 소설 <사소한 일>

하미나_곧바로 응답하지 않기

언젠가 권여선 작가의 인터뷰에서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읽은 적이 있다. 동의한다. 텅 빈 시간, 텅 빈 일정, 텅 빈 머리, 텅 빈 대화.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주쳐야하는데 그렇게 마주친 자신의 존재를 감당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나머지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만들고, 쓸데없는 말로 침묵을채우고, 사람과 사건에 대한 이론을 계속해서 생성해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충분히 버티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 P21

프리다이빙은 그간 내가 얼마나 경직된 채 무리하며 일해왔는지 돌아보게 해 주었고, 힘을 주기보다 이완하는 쪽이 훨씬 배우기 어렵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이전의 방식, 힘을 줘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고 동시에 힘을 주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프리다이빙이 아니라 바다가 가르쳐 준것이라고 말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후로는 무얼 하든 조급함이 많이 줄었다. - P24

- 요가를 한다. 너무 열심히는 하지 않는다. 다음날 또 가고 싶을 정도로만 한다. - P27

하미나와 독자들_당신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하미나 이 문장도 좋았어요. "쉬는 것이 생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기쁘기 위함이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기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데 무척인색하다고 느끼거든요. 오로지 기쁨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선택하는 것, 기쁨을 누리는 걸 꺼려 한다고 생각해서, 진짜 쉼에 이 또한 중요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P47

신기한 경험이었다. 걷다 보니 자연스레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졌다.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으니, 자연과 사람을 천천히 관찰할 기회도 생겼다. 자연스레잡생각이 사라졌고 어지러웠던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아, 나한테 맞는 쉼은 걷기였구나." - P49

이 부분도 밑줄 그었는데요. "쉬지 않는 시간도 결국 쉬는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저는 이번에 글 쓰면서 느꼈는데 제가 자꾸 쉬는 시간도 사실은 일하기 위한 시간으로 생각해 버리는 버릇이 있는 거예요. 내가 몸을 가볍게 해서 다음번 펀치를 잘 날리기 위해서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연 님은 반대로 쉬는 시간을 위해 쉬지 않는 시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인간은 이 세상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삶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취하며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이 부분도 좋았습니다. 세상에 대해 그렇게까지 우리가 적극적인 뭔가를 할 수는 없지만 태도나 표정 정도는 바꿀 수 있다는 그 정도의 행위성을 짚은 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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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주제 아닐까? 영끌.

누구나 집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아파트에 20년째 살고 있다. 결혼하면서부터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으니.

편리하지만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내 집 같지 않다.

가족이 함께 살고 있지만, 그냥 숙소 같다. 집에 있으면 자꾸 집을 나가고 싶다(그래서 주말마다 탈주 중).


집 하면 어릴 때 살던 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탈출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립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옥상이 제일 그립다.

방 두 칸, 손바닥 만한 중간방(거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좁은 집에 많은 식구. 나만의 공간은 그저 내 책상 뿐이던 곳. 그곳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옥상이었다.

엄마에게 혼나거나 형제들과 싸우거나 울적하거나 빈정 상하는 일이 있으며 옥상에 올라가서 구석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울거나 원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다시 내려온다.

그곳이 없었다면 가출했을지도. 아니, 더 삐뚤어졌을지도.



"우리가 집안의 구석에

몸을 피하고 있을 때,
스스로 잘 숨겨져 있다고 믿는
우리의 몸 주위에 하나의
상상적인 방이 건조된다.
이 부동성의 공간은
존재의 공간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 P3

 
















이한솔 편집자의 ‘13호를 펴내며편집자의 말. 엄마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혼란과 어수선함과 정리되지 않음과 걱정과 우울과 짜증과 미안함과 가끔의행복 속에서 느끼는 양가감정.


엄마가 되고 나서는 혼란이 내 기본 상태다. (짧은 순간 벅차게 느끼는 엄청난 고양감과 행복 (하루의 대다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기 부정과 죄책감 사이에서 몸도 정신도 쪼개진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네가 아이 봐주는 날이잖아. 하지만 아침에 애들을 두고 나가는 게 힘들어.‘ 우리는 언제나 말이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배웠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제인 라자르, 『분노와 애정』)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일찍 아이 옆에서 잠들어야 하는 중력과 새벽 알람에 총 맞은 것처럼 집을 나서기. 나도 아는 것을 찾으려 자꾸 문장을 뒤진다. "저처럼 우울한 엄마들이 진짜 있나 궁금해서 왔어요."(수미,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 하지만 읽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다른 엄마들과는 진짜 통하는지? 비혼인 친구, 아이가 없는 동료들, 그리고 아이가 있는 남자들에게 말하는 게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주 사적인, 집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일들을 못 참고 터뜨리듯 말한다. 난 친구와 동료들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걸까? 그런데 이런 얘기를 집 밖에 해도 될까? 모든 걸 엎지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홀로 난망함과 수치심에 빠진다. – P6~7

  















 

김영욱의 글 장자크 루소집 없는 아이’ 루소가 자식들을 다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만 알았는데루소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짝 알게 되었다.


루소는 18세기식 부랑아다. 우선 그는 계몽주의의 철학자로서 여러 측면에서 집과 가족을 고찰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인류학, 『사회계약론』의 정치학, 『에밀』의 교육학, 그리고 곧 다시 말할 『신 엘로이즈』의 정념론을 보라. 그는 집 혹은 가족이라는 소우주의 발생, 기능, 한계,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따진다. 그러고서 『고백』에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까지 자전적 문학을 통해 자신이 평생 편력한 집들을 문학사의주제로 제안할 것이다. 그에게는 집이 없었다. 다시 말해 집이 많았다. 제네바에서 보낸 유년기의 집들, 보호자이자 애인이었던 바랑 부인과 누린 짧은 행복의 거처 샤르메트, 세상의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그를 잠시 보호해 주었던 생피에르 섬의 외딴집, 그가 마지막 몽상의 나날을 보낸 영국식 정원의 은신처 등에는 지금도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P41

  














 


박진영의 글 나의 깨끗한 집 만들기’. 목요일에 한편 줌 강의에서 맹미선 편집자와 함께한 박진영의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가습기살균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국에서 화학제품의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깨끗함, 편리함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란 말인가. 박진영의 탐구 시리즈 책도 읽어봐야겠다.


과학기술과 그로 인한 사회문제와 갈등피해를 연구하는 나는 DDT, 글리포세이트, PHMGCMIT/MIT와 같은 화학물질이 공장과 집 안팎에서 일으킨 피해를 수없이 보고 듣고 읽어왔다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일들은 다 모르겠고 다만 집의 더러움을 간편하고 빠르게 없애고 싶었다편의점에서마트에서인터넷 장보기에서 익히 들어온 상표의 제품은 과연 편리하고 효과가 좋았다생활화학제품이눈앞의 더러움을 없애는 동안 내가 할 일은 마스크를 끼고 환기를 잘 시키는 것 정도였다. - P78

















 

육주원의 글 이슬람 사원 짓기’. 백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한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대구에서 벌어진 이슬람 사원 건립 관련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멸하는 지방대를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면서 외국인 학생이 자신들의 문화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하지 못하고 방해하고 혐오하는 학교, 주민, 행정기관, 국가.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에서 눈여겨봐야하는 것은 단지 반대 주민들의 엽기적인 혐오만이 아니다글로벌 경쟁력 제고라는 목표하에 학생들을 유치한 후 방치하는 국립대일부 주민들의 탄원서 한 장으로 무기한 공사를 중지시켜 갈등을 키운 북구청행정 소관의 문제를 운운하며 수수방관하는 대구시 등총체적인 국가의 ‘부작위가 배제적인 혐오의 집 만들기를 용인하고 있다그간 북구청경찰 등은 반대 주민들의 인종주의적 텃세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 왔다국가 기관이 극단적인 혐오에 눈 감고 그것을 혐오가아니라 국민들이 당하는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순간 반대 주민들의 인종화된 소속감의 정치가 힘을 얻었다. - P105


이슬람 사원 갈등을 취재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던 경북대 학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사원에 대해듣고 싶어 왔다는 그에게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냐고묻자 해 준 이야기다경북대 편입생인 그는 어느 날 자취하는 골목에 걸린 혐오표현 현수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게 버젓이 걸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하루이틀며칠이 지나자 그 현수막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혐오가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문제는 익숙해진다는 것이다내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참아 넘길 수있다는 것이다그러는 동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집만들기텃세 부리기도 어느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혐오가 집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상호 공존과이해의 집을 만들어 가는우리 안 국경을 허무는 실천이 절실하다. – P108~109


 

오은정의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글 후쿠시마의 주민들’, 이재임의 동자동 쪽방촌에 대한 글 쪽방의 장례식’, 김호성의 생애 마지막 돌봄과 장소에 대한 글 마지막 둥지를 찾아서등등.


이번 편은 편집자의 말부터 한편 한편이 다 흥미있는 주제여서,, 그만 줄여야겠다(??).

읽고 싶은 책들은… 역시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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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임 <힐튼 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
김호성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이슬람 사원 짓기_육주원

짐을 버스에 실은 뒤 꼭 안아 주고 돌아가려는데, 버스 기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넌 집에 안가니?" 물었다. 거구의 백인 남성의 한쪽 팔에 "영국인이 먼저다(British First)"라는 문신이 보였다. 차별이주는 모멸감, 폭력적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공포는 아무리 여러 번 반복되어도 편안해지지 않는다. 간신히 "내 집 캔리(Canley)인데? 지금 갈 거야."라고 말했다. 그간 비슷한 인종차별적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이불킥을 하던 밤들의 분노를담아 쥐어 짜낸 용기였다. 그러자 징그러울 정도로 빙글거리는 웃음과 다시 돌아온 "아니, 네 진짜 집."이라는 말. "떼끼, 이놈. 내가 너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산 영국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니!"라고 호통을 치진 못했다. 떨리는 몸으로 ‘진짜 집이 아닌 내 집‘에 돌아와 맥주 캔을 따며 폴란드 하우스메이트에게 이제 정말 이나라를 뜰 땐가 싶다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 P98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에서 눈여겨봐야하는 것은 단지 반대 주민들의 엽기적인 혐오만이 아니다. 글로벌 경쟁력 제고라는 목표하에 학생들을 유치한 후 방치하는 국립대, 일부 주민들의 탄원서 한 장으로 무기한 공사를 중지시켜 갈등을 키운 북구청, 행정 소관의 문제를 운운하며 수수방관하는 대구시 등총체적인 국가의 ‘부작위‘가 배제적인 혐오의 집 만들기를 용인하고 있다. 그간 북구청, 경찰 등은 반대 주민들의 인종주의적 텃세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 왔다. 국가 기관이 극단적인 혐오에 눈 감고 그것을 혐오가아니라 국민들이 당하는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순간 반대 주민들의 인종화된 소속감의 정치가 힘을 얻었다. - P105

이슬람 사원 갈등을 취재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던 경북대 학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원에 대해듣고 싶어 왔다는 그에게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냐고묻자 해 준 이야기다. 경북대 편입생인 그는 어느 날 자취하는 골목에 걸린 혐오표현 현수막을 보고 큰 충격 - P108

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게 버젓이 걸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자 그 현수막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 혐오가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참아 넘길 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집만들기, 텃세 부리기도 어느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혐오가 집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상호 공존과이해의 집을 만들어 가는, 우리 안 국경을 허무는 실천이 절실하다. - P109

후쿠시마의 주민들_오은정

타라치네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피폭된 벨라루스 사람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당하지 않으면 그 심정을 잘 모르잖아요. 방사선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않고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몰라요. 마음을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벨라루스 사람들이 왔을 때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나누면서 입장이 비슷하다는 것이 얼마나 서로 간의공통감각을 만들어 내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주는 것,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지요. - P126

집이 없어, 하지만!_지수

제너레이션 렌트(generation rent)[2]라는 말이 있다. 평생 세입자로 살아가게 되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땅에 머무는 이들 10명 중 4명은 세입자다. 이들은 소유하지 않았으나 점유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밥을 먹고 쉰다. 다양한 공간에서 서로의 노동과 돌봄을 주고받으며 관계 맺는다. 곳곳을 공유하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입자들의 머무름이 도시를 구성한다. 세입자의 머무름 없이는 현재를 말할 수 없고, 이 사회E SUAS PR의 존속을 말할 수 없다. - P161

쪽방의 장례식_이재임

이런 현실에서 이웃의 안녕을 함께 고민해 온 사람들이 있다는 건 큰 위안이 된다. 소유주의 재산권이주민의 주거권에 우선한다는 이 사회의 공식을 뒤엎고자 하는 사람들, ‘내 집‘ 말고 ‘우리 집‘을 그리는 사람들, 소수의 일확천금이 아니라 나와 이웃들의 공동의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 동자동에 있다.
김정호의 장례식은 동자동의 한 교회에서 치러졌다. 동료들과 쪽방 주민들, 사회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장례식에서 나는 임대주택이 지어져 쪽방을 모두 떠나는 날 쪽방의 장례식을 치르는 상상을 했다. 이웃의 부고가 아니라 낡고 열악한 집의 부고를 알리는 모습을, 더 이상 방에서 죽어 간 이웃의 부고를 듣지 않아도 될 미래를 그렸다. 쪽방 모양 상여를 함께 들고, 우리는 이 도시에서 말끔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말하고 싶었다. - P182

마지막 둥지를 찾아서_김호성

인간의 생애주기에서 말기란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 없이 증상이 악화되어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가능성이 큰 시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말기에 대다수의 사람은 돌봄을 받고,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평소 ‘편안하다고 생각한장소‘를 꼽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약60퍼센트는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40퍼센트나 된다. [6]집은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한 장소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의 장소다. 말기 돌봄을 받는 사람의 질병의종류, 돌봄의 사정, 경제적 상태, 주거의 형태에 따라각기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 P199

예를 들어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혼자 작성한 것으로 말기 돌봄 계획은 끝나지 않는다. 그 계획은 단순한 문서 작성이 아니라, 말기 돌봄 주체를 정하고 소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생의 끝에 자율적이고 존엄한 삶을영위하기를 바란다. 이는 바람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말기 이전까지는 환자 스스로가 삶의 주도권을 갖지만 그 후로는 다른 이와의 관계성 속에서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환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 속도와 방향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어야환자의 마지막 이야기가 올곧게 쓰일 수 있다. 마지막둥지는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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