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며칠 후에 나는 서울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서 자전거를 타고 갔던
지난번을 기억하면서. 그때는
흘러내리는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으며 찬바람을 맞았지.
역 앞에서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었지.
그때 누군가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서 있었다.
추웠지만 잘 몰랐다.

며칠 후부터 그 역은 운행이 중단되었다.
가던 곳에 가려면 우선 서울을 경유해야 했다.

며칠 후에 나는 읽던 책을 다 읽는다. 다음 챕터는 「비중에서 가장 이상한 비」이다. 한 페이지에 담긴 광활한시간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바라본다.
그러다 참고 문헌에 적힌 또 다른 책을 읽겠지. 안경을 - P13

쓰고. 또 잠시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 동안에 우리 동네 재개발이 확정되고 애청하던 드라마는 끝나가고
무언가를 챙겨 먹고

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
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
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마지기다리던 며칠 후는
감쪽같이 지나가버렸다.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 안 내린다면 눈이 내리는 나라로 가보고 싶겠지.
지난번에 가보았던 그 숙소 앞 골목에서 눈사람을 만들겠지. 눈사람에게 - P14

목도리를 둘러줄지 말지 잠시 머뭇거리겠지.

너무 추웠고
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유자차를 마셨다. 목도리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목도리가 없네 했다.

*프랑시스 잠의 시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시선집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김진경 외 옮김, 잍다, 2018)에는 "레오폴드 보비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레오폴드 보비가 답시를 적는다는 마음으로 이 시를 적어보았다. - P15

2층 관객 라운지


오늘은 화분의 귀퉁이가 깨진 걸 발견했는데
깨진 조각은 찾지 못했다

돌돌 말린 잎을 화들짝 펴고 있는 잎사귀들
하얗게 하얗게 퍼져 나가는 입김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문을 열어
먼지처럼 부유하는 생각들을 손바닥에 얹어
벌레를 내보내듯 날려 보냈다 - P30

어둠 속에 손을 넣어
악수를 청한다

과학자의 ‘모릅니다‘는
설명이 가능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식탁 옆 조제약 봉투들처럼 수북한 것
기계의 뒷면으로 기어 들어가 헝클어진 선 정리를 시작하는 것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아도 돼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도 돼

그럴듯함과
그러지 못함과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 - P31

모두가 듣고 있다고 외치는 바람에
외치던 사람도 계속 외치고 듣는 사람도 외치기 시작......
듣기만 하는 사람 더 이상 없음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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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과 남성 현대의 지성 39
조혜정 엮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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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쓴 이런 여성주의 책 너무 반갑다. 세대별 심층설문조사 - 비록 수적 한계는 있지만 - 와 제주 해녀의 삶에 대한 관찰과 추적조사도 흥미롭다. 80년대 나온 책이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다(촌스러움(?)은 오직 표지와 남한에서 태어났다는 작가 소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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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사실 에마 우드하우스는 작가의 다른 주인공들과 한 가지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설득』, 『노생거 사원』 등 여타 작품의 주인공들은 성격이나 처지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같이결혼 적령기 여성으로서 당시의 결혼 풍습에서 보자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의 출신은 젠트리 계급이기는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유산이 거의 없어서 독립적인 생활이어렵거나 결혼을 통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문제되는 절박한지경에 처해 있다. 이들에 비하면 에마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마을 대지주의 상속녀로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서결혼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오히려 어디에 구속될 수도 있는 결혼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작심까지 한 여성이다. 아무래도 중간계급 여성이 다수일 당대 독자들에게 에마가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을 법하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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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이 언감생심 나이틀리 씨를 넘보다니, 어떻게 그렇게 주제넘을 수가 있을까! 그런 남성에게서 확실한 언질도 없었는데 자기가 선택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가 있지! 그렇지만 해리엇은 전보다 겸손함도 조심성도 덜해졌다. 정신에서든 처지에서든 자신이 모자란다는 의식은 거의사라진 듯했다. 엘튼 씨 경우에는 자기와 결혼하면 격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지금 나이틀리 씨보다 한결 더 의식했던 듯했다. 아! 그 또한 자기 때문에 그리 된 것 아닌가! 해리엇에게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불어넣으려 애쓴 사람이 자기말고 누가 있나? 가능하다면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고, 높은 세속적 지위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가르친 사람이 자기 말고 누가 있는가? 겸손했던 해리엇이 허영심을 갖게되었다면, 그 또한 자신의 소행이었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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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가부장 체제를 넘어서: 생명 존중의 사회를 향한 여성 해방 운동

모성적 체험과 부모-자식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온 이러한 연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경험의 이분화가 사고 성향의 이분화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분화는 무의식적 사고 구조의 차이에서부터 구체적 관심의 차이에까지 걸쳐 나타나는데 우선 코넬, 터시웰Cornell and Thurschwell (1987)과 버틀러 Butler (1987) 등은 개체의 특.
성을 분리성과 차이성에서 찾는 이분법적 논리 구조가 남성 지배 체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에 주목해왔다. 그리고 이 이원론 - P390

적 사고 구조는 여성 억압뿐 아니라 자연 파괴적 세계관의 바탕이 되어왔다고 보고 궁극적으로 인간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간의관계를 규정해온 이원론의 극복 가능성은 우주 질서를 유기적으로파악하고 상호 의존성을 인식해온 여성들에게서 찾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슬리(B. Easlea, 1987) 역시 그의 논문, 「가부장제, 과학자와 핵전사들에서 현대 문명의 핵심으로 간주되어온·물리학과 그 산물인 핵무기를 가부장제와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다. - P391

이미 간략히 언급했듯이 여성 억압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상당히 구체적인 물적 토대를 다루는 노동력및 출산력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중심적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배제되는 문화적 차원이다. 이 글이 여성의 실천 의지에 관한것인만큼 문화적 차원에서의 배제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아드너 E. Ardener (1975: 21)는 억압 집단이 갖는 하나의 주요 특성을 그들이 지배 집단에 비해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구사력을 갖지 못한 점 inarticulateness, 즉 벙어리됨 mutedness에서찾고 있다. 그는 이것을 계급적 억압이든 인종적 억압이든 여성 억압이든 관계 없이 모든 불평등 관계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특성으로, 지배적 커뮤니케이션 체제에서 소외되어왔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보고있다. 억압적 상황에 놓인 집단은 한결같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지배 집단의 언어를 빌려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서 대부분의 여성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못하는데, 이는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어떤 - P394

언어와 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Firestone, 1972:149). 여성적 인성에 관해 30년간 연구를 해온 프로이트가 끝내 "도대체 여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그가 여성이 처해 있는 이러한 특수한 구조적 조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S. Ardener, 1975: 44).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지배‘란 곧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자체 실현 및 표현의 잠재력을 억제하여 그 집단의 경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P395

그러면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 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이를 단계적 작업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번째 과정은 의식화의 단계일 것이다. 두번째는 문제 의식을 심화하여 여성의 체험과 목소리를 더욱 확실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단계이며, 세번째는 이를 남녀 모두를 위한 새로운 사회의 원리로 통합, 재구성해나가는 단계이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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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7-2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앗 394페이지 인용문, 저도 밑줄 그었어요!!

햇살과함께 2024-07-25 23:37   좋아요 0 | URL
오드리 로드가 생각나는 부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