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정원을 나가는 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 세기는 19세기였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 보금자리는 그래스미어라는 작은 호반 마을 끝자락의 한 오두막집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기운찬 남매는 윌리엄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도로시 워즈워스(Dorothy Wordsworth)였다. - P136

두 사람이 북부 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 그리고그 전에도, 그 후로도 또 다른 여러 곳을 걸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일이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은 전에도 있었다. 더 먼 길도 있었고 더 험한 길도있었다. 영국 시골 지역에서 가장 험한 풍경들(산맥, 벼랑, 황야, 폭풍, 바다, 그리고 폭포)이 경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 시인 남매가 태어나기 거의 30년전부터였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정인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른 것은 19세기가 시작되기 14년 전이었다. 많은 평자들은 워즈워스와 그의동행들이 보행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으로 만들었고, 이로써수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1세대 낭만주의자들이 보행 그 자체를 위한 보행, 즉 자연 속을 걷는 즐거움의 계보를 만들었다는것, 이로써 문화적 행위로서의 보행과 예술적 경험으로서의 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P137

19바뀌었다. 크리스토퍼 허시(Christopher Hussey)는 스토 저택(휘그당의 정치적 수도)이 정치를 정원 건축으로 옮겨놓았다고 말한다. "양식화된 설계가 느슨해지면서, 정원의 자연이 그 시대의 인본주의와 한편이 되었고,절도 있는 자유에 대한 신념과 한편이 되었고, 자연스러운 것들에 대한존중과 한편이 되었다. 또한 사람 한 명이든 나무 한 그루든 개체에 대한믿음과 한편이 되었으며, 정치가의 독재든 원예가의 독재든 독재에 대한혐오와 한편이 되었다." 그 시대의 훌륭한 조경 건축가 대부분이 이정원에서 일했고, 수많은 훌륭한 시인들과 작가들이 이 저택을 방문했다. 스토 정원은 한 번 고쳐질 때마다 수십 에이커씩 주변 토지를 합병하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어느 정원 역사가가 요약하듯 "30년 사이에 그의 취향은 계단식 잔디밭, 조각상, 직선로의 규칙적 배치를 선호하는 취향에서 […] 삼차원의 풍경화로, 이상적 자연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취향으로 바뀌었다." - P151

한때 견고한 요새의 일부로 설계되었던 귀족계급의 정원이 바깥세상과의 경계를 서서히 없애나갔다. 정원이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갔다는것에서 알 수 있듯, 그 무렵 잉글랜드는 과거에 비하면 많이 안전해진 곳 - P153

이었다.(서유럽의 여러 지역들도 잉글랜드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안전해졌고, 영국 정원의 유행도 곧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길이 좋아지고 노상 범죄가 줄어들고 여행 경비가 저렴해지는 ‘교통 혁명‘이 일어난 것은 대략1770년 이후였다. 여행의 성격 그 자체를 바꾸어놓은 변화였다. 18세기중엽 이전의 여행기들에는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랜드마크 사이의 길에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완전히 새로운방식의 여행이 생겨났다. 성지순례나 실용적 여정에서 가는 길은 고생스러움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감상의 대상이 되면서 여행 그 자체가모종의 목적이 되었다. 정원 산책의 연장이 되었다고 할까. 여행길의 경험 그 자체가 목적지로의 도착을 대신해서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연 전체가 목적지였으니, 이렇게 감상이 가능한 세상, 정원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세상에서는 출발이 곧 도착이었다. 보행이취미가 된 지는 오래였지만, 여행이 취미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걷는 여행 그 자체가 자연을 감상하는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확산되고 느린 여행 자체가 미덕으로 자리 잡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가난한 시인이 여동생과 함께 눈의 즐거움과 두 다리의 즐거움을위해 설원 크로스컨트리를 감행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P154

그림 같은 풍경의 강조나, 자연 관광의 등장은 자연 취향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 같지만, 이것들은 모두 18세기의 산물이다. 시인 토머스 그레이(Thomas Gray)는 1769년에 레이크 지방을 여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로부터 2년 전에 처음으로관광객이 이 지역의 자연을 감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레이 역시 이지역의 자연 감상 기록을 남겼다. 18세기 말에 관광지로 자리 잡은 레이크 지방이 여전히 관광지로 남아 있는 것은 실제로 길핀과 워즈워스와나폴레옹 덕분이다. 예전이었으면 해외로 나갔을 영국 여행자들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혼란 탓에 자국 관광을 시작한 것이다. 관광지까지의 이동 수단은 처음에는 마차였고 나중에는 기차였다.(더 나중에는자동차와 비행기였다.) 여행안내서를 읽고, 자연을 둘러보고, 기념품을 사는 패턴이었다. 관광지에서의 이동 수단은 보행이었다. 처음에 보행은 최고의 전망을 찾기 위한 부수적 이동 수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기가바뀔 무렵에는 보행 중심의 관광 상품이 생겨났고, 도보 여행이니 등산이니 하는 것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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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 미로, 기억 궁전, 신곡

5장 미로와 캐딜락: 상징으로 걸어 들어가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 P116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미로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모종의 여정을 상징한다. 통과의례의 여정 또는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고, 구원의 여정 또는 구혼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다. 그저 여정의 복잡함(길을 찾아가는 어려움, 길을 깨닫기까지의 어려움)을 상징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는 미로가 많이 등장한다. 크레타 섬에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전설의 미로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쓰는 동전에는 크레타 미로의 형상이 찍혀 있다. 실제로 발견 - P120

된 미로들도 있다. 사르데냐에는 바위 미로가 있고,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에는 돌사막 미로가 있다. 로마인들의 모자이크 미로도 발견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땅에 돌을 놓아 만든 유명한 미로가 500개가량 있다.(20세기까지 어부들이 출항하기 전에 미로를 걸으면 고기가 많이 잡히고 순풍이 분다는 믿음이 있었다.) 잉글랜드에는 잔디 미로가 있다. 미로는 젊은이들이 에로틱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예컨대 여자가 중앙에 가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달렸다. 미로의 굽이굽이 도는 길은 구애의 복잡함을 상징했다.) 잉글랜드에서 훨씬 더 유명한 미로로는 르네상스 정원의 미로를 후대에 귀족적 형태로 변형한 산울타리 미로가 있다. 미로에 대한 글을 쓴 많은 저자들은 미궁(maze)과 미로(labyrinth)를 구별하면서 대부분의 정원 미로를 미궁(maze)에 넣는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것이 미궁의 목적인 반면에, 미로(labyrinth)의 길은 하나뿐이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미궁이 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반면에 미로는 구원으로 가는 확고한 여정을 뜻한다는 것도 미로와 미궁의 차이다. - P121

이제는 책이 기억 궁전 대신 정보 저장소가 되었지만, 아직 책에는기억 궁전의 몇 가지 패턴이 간직돼 있다. 길이 책을 닮을 수 있듯, 책도 길을 닮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단테의 신곡은 그 최고의 예다. 영혼이 죽어서 가게 되 - P130

는 세 장소를 여행하면서 베르길리우스라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종의 저승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단테는 여행자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멋진 장면과 흥미로운 인물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 예이츠는이 걸작이 실은 기억 궁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실제로 이 책은 지형지물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곡의 여러 판본에 저승의 지도가 포함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곡을 여행기(『신곡보다 먼저 나오거나 늦게 나온 무수한글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장르)로 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이 걸어가는 길이 곧이야기의 길이 되는 것은 『신곡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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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요 성지순례

4장 은총을 찾아가는 오르막길: 성지순례

성지순례는 성스러운 것에도 물질적인 면이 있다는 생각, 땅에 영(靈)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이야기를 강조하면서 이야기의 배경 또한 강조함으로써 영과육 사이의 미묘한 길을 걷는다고 할까. 목적지는 영혼이지만, 목적지로 가는 길은 극히 물질적인 디테일(예컨대 부처가 태어난 곳, 예수가 죽은 곳, 성물이 보관돼 있는 곳, 성수가 흘러나오는 곳)로 이루어져 - P89

있다. 순례길에 오르는 것이 몸의 움직임을 통해 영혼의 믿음과 소망을표현하는 일이라면, 순례란 정신과 물질을 화해시키는 일이 아닐까. 순례가 믿음과 행동의 결합, 생각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생각은 성스러운 것이물질적 현존, 물질적 자리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모든 신교도와일부 불교도, 유대교도가 성지순례를 우상 숭배의 일종으로 보고 반대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영혼의 구원을 찾을 곳은 바깥세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내면세계라는 것이 그런 반대자들의 주장이었다. - P90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동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낸시 프레이(Nancy 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 P91

아직 길을 잃은 상태냐고 누가 물어올 때마다 그레그는 대답했다. "길을 가고 있으니까 길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Wherever you go, there youare.)" - P93

SCLC 창립 6년 후, 마틴 루서 킹은 비폭력 저항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남부의 인종분리주의자들이 흑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가능한 한 널리 공론화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킹은 압제 세력에게요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로 했다. 이것이 흑인 민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버밍햄 투쟁의 전략이었다. 최초의 행진은 1962년 성금요일에 시작되었고, 그 후로 무수한 행진이 이어졌다. 이 버밍햄 투쟁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진들이 쏟아졌다. 고압 소방호스로 물 폭탄을 맞는 사람들, 경찰견에게 공격당하는 사람들이 찍힌 사진이 전 세계의 분노를 자아냈다. 킹을 비롯한수백 명의 시위자들이 버밍햄을 걸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거리로 나오는 어른들이 없어지자 고등학생들이 가담했고, 어린 동생들까지 따라나서서 자유를 향해 행진하면서 개선가를 합창했다. 그해 5월 2일 900명의 아이들이 체포당했다. 공격당할 위험, 부상당할 위험, 체포당할 위험, - P103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가는 일은 특별한 결의를 요하는 일이었다. 기독교적 순교를 연상시키는 사진들 못지않게 남부 침례교도의 뜨거운 신심도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킹의 전기 작가 한 명에 따르면, 버밍햄 행진이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서 진행된 "한 기도 순례에서 찰스빌럽스 목사를 비롯한 버밍햄의 목사들은 3000명이 넘는 청년들을 이끌고 버밍햄 감옥을 향해 행진하며 「주가 나와 동행하기를 바라네(I WantJesus to Walk with Me)」를 불렀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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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인간이 이족보행을 왜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한 무수한 가설들이 있고 뚜렷한 증거를 가진 가설은 없지만 이족보행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명확하다.

3장 직립보행의 시작: 진화론의 요지경

걷는 일은 몸이 땅을 척도로 삼아 스스로를 가늠하는 방식이다. 그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예전에 다른 사막을 걸을 때였지만, 팻과 함께건호를 걸을 때도 그런 깨달음이 왔다. 산자락 하나가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서 푸른빛을 띠는 산맥이 마치 외야 관중석처럼 둥근 지평선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건호는 기하학적 평면이었고, 두 다리는 접혔다 펴졌다 하는 각도기였다. 측정의 결과는 땅은 크고 나는 작다는 것이었다. 사막을 걸을 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땅은 크고 나는작다는 그 반가우면서도 겁나는 소식이다. 흙바닥의 갈라진 선들까지 길고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오후였다. 팻의 트럭이 드리운 그림자는 고층건물의 그림자처럼 길었다. 팻과 나의 그림자는 오른쪽에서 우리를 따라오면서 점점 길어졌다. 내 그림자가 그렇게 길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림자 길이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는 내 질문에 그는 자기가 그림자끝까지 걸어갔다 와볼 테니 그 자리에 서 있어보라고 했다. 나는 그림자가 있는 동쪽으로 돌아섰다. 모든 그림자는 동쪽 산자락을 향해 있었고, 팻은 걷기 시작했다. - P59

인간의 보행에 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에덴동산에서의 추방(Fall)을 무수한 넘어짐, 떨어짐의 맥락에서 보게 된다. 네발로 기어 다니던 피조물이 갑자기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과제에 맞닥뜨렸다면, 무수히 넘어지지 않았겠는가. 존 네이피어(John Napier)는 보행의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보행이라는 독특한 행위 속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파국의 위기다. [......] 이렇듯 인간의 직립보행 속에 파국이 잠재해 있는 것은 뒤에있는 발을 앞으로 내딛고 이어서 뒤에 있는 발을 앞으로 내딛는 규칙적 - P62

인 움직임에 차질이 생기면 언제든 앞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아기들을 보면, 나중에 보행이라는 행위로 깔끔히 합쳐질 여러 동작들이 어색하게 따로 놀고 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는 넘어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몸통을 앞으로 내민 후 급하게 다리를 옮겨 몸통과 일자로 만든다. 채 펴지지 못한 통통한 다리로 그렇게 뒤처지기와 따라잡기를 반복하면서, 보행 기술을 완전히 익히기까지 계속 넘어진다. 남이 대신 채워줄 수 없는 욕망, 손에 닿지 않는 것을 향한 욕망, 자유롭고싶은 욕망, 에덴동산 같은 엄마의 안전한 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이렇듯 보행의 시작은 지연된 넘어짐이고, 넘어짐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만난다. - P63

고생물학은 자기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흔들어대면서 자기 가설에 어긋나는 증거는 못 본 척하는 변호사들이 우글거리는 법정 같기도 하다.(스턴과 서스먼에게서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증거에 전념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뼈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무수한 이야기 속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주장은 오직 하나인 것 같다. 매리 리키가 탐사팀과 함께 라에톨리 발자국을 찾았을 때처음 내놓았던 주장이다. "유인원의 발달 과정에서 직립보행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직립보행은 인간의 조상과 그 외 영장류 사이의 가장 큰 구별점인 듯하다. 이로써 손이 해방되면서 운반, 제작, 섬세한 조작을 비롯한 무수한 가능성이 펼쳐졌다. 사실 오늘날의 모든 기술력은 직립보행이라는 하나의 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 단순화하자면, 앞다리에 주어진 새로운 자유는 하나의 도전이었고, 두뇌의 확장은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것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 P75

다른 분야에서 보행을 사색의 주제로 삼는 사람들은 보행에 어떤의미들을 부여할지, 보행을 어떻게 명상의 도구로, 기도의 도구로, 경쟁의 도구로 만들지를 사색한다. 반면 보행과 진화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 주장이 아무리 시시껄렁하다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보행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시도한다는 점, 다시 말해 우리가 보행을 어떤 행위로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보행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이다. 보행은 인간 진화론에서 묘한 지렛목 역 - P79

할을 한다. 보행은 우리를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쏘아 올려 만유의 영장이라는 고독한 지위에 내려앉힌 해부학적 변신이었다. 한데 이제 보행은 우리를 환상적 미래로 날려 보내는 대신 까마득한 과거와 연결시키는 모종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10만 년, 100만 년(러브조이의 말대로 하면 300만년)을 이어온 똑같은 두 발의 움직임. 그렇게 두 발로 걸은 덕분에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정신이 확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두 발의 움직임 그 자체는 지금껏 그렇게 강해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다. 한때 보행이 우리를 다른 동물들로부터 떼어놓았다면, 이제 보행은 우리를 생물학적 한계들, 예를 들어 교미와 출산,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 일에 연결하고 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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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정신의 발걸음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고백록』에 나오는 말이다. - P33

장기 도보 여행의 초기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여행의 진지한동행 후보자를 루소는 결국 찾지 못했다. (동행에게 여비를 물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동행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루소가 걸을기회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준다. 그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루소가 그려 보이는 보행은 물론 이상적인 보행, 즉 건강한 사람이 쾌적하고 안전한 길에서 자발적으로선택한 보행이다. 나중에 루소의 무수한 상속자들이 행복, 자연과의 조화, 자유, 미덕의 표현이라고 여기게 되는 보행도 바로 이런 보행이다. - P41

홀로 걷는 사람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홀로 걷는 사람의 존재 방식은 노동자나 거주자나 한 집단 구성원의 유대 - P45

감보다는 여행자의 무심함에 가깝다. 걷는 동안 루소는 사유와 몽상 속에 살며 자족할 수 있었고, 자기를 배반한 것 같은 세상을 이길 수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걷는 것을 아예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선택했다. 루소는 걸음으로써 그야말로 발화의 형식을 얻었다. 논문 같은 엄격한 형식, 또는 전기문이나 역사서 같은 연대기적 형식과는 달리, 여행기는 탈선과 연상을 장려한다. 루소가 세상을 떠나고 거의 한 세기 반 후, 마음의작동 방식을 그려내고자 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체를 발전시킨다. 조이스의 소설『율리시스』와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뒤죽박죽 뭉쳐 있는 생각들, 기억들은 그들이 길을 걸을 때 가장 잘 풀려나온다. 바꾸어 말하면, 보행이라는 비분석적, 즉흥적 행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유는 이런 비체계적, 연상적 유형의 사유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바로 사유와 보행의 이러한 관계를 그려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 중 하나다. - P44

혼자 걷는 사람은 주변 세계와 함께 있으면서도 주변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다. 밖에서 구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에서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걷는 일 자체가 이 가벼운 소외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혼자 걷는 사람이 혼자인 것은 걷고 있기 때문이지 친구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 - P48

기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키르케고르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수시로 가벼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러면서 사유를 펼칠 수 있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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