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인간이 이족보행을 왜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한 무수한 가설들이 있고 뚜렷한 증거를 가진 가설은 없지만 이족보행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명확하다.
3장 직립보행의 시작: 진화론의 요지경
걷는 일은 몸이 땅을 척도로 삼아 스스로를 가늠하는 방식이다. 그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예전에 다른 사막을 걸을 때였지만, 팻과 함께건호를 걸을 때도 그런 깨달음이 왔다. 산자락 하나가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서 푸른빛을 띠는 산맥이 마치 외야 관중석처럼 둥근 지평선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건호는 기하학적 평면이었고, 두 다리는 접혔다 펴졌다 하는 각도기였다. 측정의 결과는 땅은 크고 나는 작다는 것이었다. 사막을 걸을 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땅은 크고 나는작다는 그 반가우면서도 겁나는 소식이다. 흙바닥의 갈라진 선들까지 길고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오후였다. 팻의 트럭이 드리운 그림자는 고층건물의 그림자처럼 길었다. 팻과 나의 그림자는 오른쪽에서 우리를 따라오면서 점점 길어졌다. 내 그림자가 그렇게 길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림자 길이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는 내 질문에 그는 자기가 그림자끝까지 걸어갔다 와볼 테니 그 자리에 서 있어보라고 했다. 나는 그림자가 있는 동쪽으로 돌아섰다. 모든 그림자는 동쪽 산자락을 향해 있었고, 팻은 걷기 시작했다. - P59
인간의 보행에 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에덴동산에서의 추방(Fall)을 무수한 넘어짐, 떨어짐의 맥락에서 보게 된다. 네발로 기어 다니던 피조물이 갑자기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과제에 맞닥뜨렸다면, 무수히 넘어지지 않았겠는가. 존 네이피어(John Napier)는 보행의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보행이라는 독특한 행위 속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파국의 위기다. [......] 이렇듯 인간의 직립보행 속에 파국이 잠재해 있는 것은 뒤에있는 발을 앞으로 내딛고 이어서 뒤에 있는 발을 앞으로 내딛는 규칙적 - P62
인 움직임에 차질이 생기면 언제든 앞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아기들을 보면, 나중에 보행이라는 행위로 깔끔히 합쳐질 여러 동작들이 어색하게 따로 놀고 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는 넘어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몸통을 앞으로 내민 후 급하게 다리를 옮겨 몸통과 일자로 만든다. 채 펴지지 못한 통통한 다리로 그렇게 뒤처지기와 따라잡기를 반복하면서, 보행 기술을 완전히 익히기까지 계속 넘어진다. 남이 대신 채워줄 수 없는 욕망, 손에 닿지 않는 것을 향한 욕망, 자유롭고싶은 욕망, 에덴동산 같은 엄마의 안전한 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이렇듯 보행의 시작은 지연된 넘어짐이고, 넘어짐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만난다. - P63
고생물학은 자기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흔들어대면서 자기 가설에 어긋나는 증거는 못 본 척하는 변호사들이 우글거리는 법정 같기도 하다.(스턴과 서스먼에게서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증거에 전념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뼈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무수한 이야기 속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주장은 오직 하나인 것 같다. 매리 리키가 탐사팀과 함께 라에톨리 발자국을 찾았을 때처음 내놓았던 주장이다. "유인원의 발달 과정에서 직립보행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직립보행은 인간의 조상과 그 외 영장류 사이의 가장 큰 구별점인 듯하다. 이로써 손이 해방되면서 운반, 제작, 섬세한 조작을 비롯한 무수한 가능성이 펼쳐졌다. 사실 오늘날의 모든 기술력은 직립보행이라는 하나의 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 단순화하자면, 앞다리에 주어진 새로운 자유는 하나의 도전이었고, 두뇌의 확장은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것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 P75
다른 분야에서 보행을 사색의 주제로 삼는 사람들은 보행에 어떤의미들을 부여할지, 보행을 어떻게 명상의 도구로, 기도의 도구로, 경쟁의 도구로 만들지를 사색한다. 반면 보행과 진화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 주장이 아무리 시시껄렁하다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보행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시도한다는 점, 다시 말해 우리가 보행을 어떤 행위로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보행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이다. 보행은 인간 진화론에서 묘한 지렛목 역 - P79
할을 한다. 보행은 우리를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쏘아 올려 만유의 영장이라는 고독한 지위에 내려앉힌 해부학적 변신이었다. 한데 이제 보행은 우리를 환상적 미래로 날려 보내는 대신 까마득한 과거와 연결시키는 모종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10만 년, 100만 년(러브조이의 말대로 하면 300만년)을 이어온 똑같은 두 발의 움직임. 그렇게 두 발로 걸은 덕분에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정신이 확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두 발의 움직임 그 자체는 지금껏 그렇게 강해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다. 한때 보행이 우리를 다른 동물들로부터 떼어놓았다면, 이제 보행은 우리를 생물학적 한계들, 예를 들어 교미와 출산,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 일에 연결하고 있다. - P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