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읽고 알게 된 닉 혼비의 <피버 피치>. 그렇다. 축구 좋아하는 김혼비 작가는 닉 혼비의 책을 읽고 반하여 작가명을 혼비라 지은 것이다.

몇 년 전 김혼비 작가의 책을 너무 유쾌하게 읽어서 닉 혼비의 <피버 피치>도 궁금해져 도서관에서 빌려왔으나 축알못, 특히 과거 영국 축구라고는 박지성의 맨유, 그의 동료였던 웨인 루니, 호날두, 라이언 긱스 등 몇몇 이름 밖에 모르는 나는 읽다 반납기한에 닥쳐 중도 반납하였고, 몇 년 동안 ‘읽고 있어요’에 있던 이 책을 다시 빌려와 읽었다. 최근 아시안컵 이슈 때문인가 이 책이 다시 생각난 것은. ‘읽고 있어요’ 책 털기.

11살 부모의 이혼 이후 처음 찾게 된 아스널 경기, 이후 아스널의 충성 팬이 된 닉 혼비의 10대부터 30대에 이르는 스포츠 팬으로서의 삶.

스포츠 팬이란 합리적임 의사결정을 통한 선택이 아님을 - 대부분 내가 본 첫 홈구장이 어디인가에 의해 정해진다.

스포츠 팬이란 항상 우울하고 슬픈 종족임을 - 우승은 커녕 우리 팀은 언제 이길 수 있는지, 맘 편히 경기를 즐길 수 있는지. 돈 내고 시간 내고 마음 내고도 항상 슬픔과 분노와 안타까움과 울분과 욕설을 장착하고 산다.

인생을 아스널에 올인한, 아스널에 의존한, 아스널이라는 핑계와 함께 한 닉 혼비의 글은 시니컬함과 위트와 우울함과 독설이 어우러진 매력이 있다.

선수, 감독, 관계자 비판부터 훌리건에 의한 끔찍한 사건사고들에 대한 비판, 부록에 첨부된 92년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후 러시아, 아랍 왕족이 구단주가 되는 등 자본의 힘에 좌지우지 된 리그 비판까지.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보살팬 환화팬 생각이 많이 났다. LG도 29년만에 우승했으니 한화도 롯데도 우승해야지 하는 너른 마음(?)과 함께. 류현진은 과연 팀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올해의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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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직후, 나는 월터 테비스가 쓴 《허슬러>라는 책을 읽었다. 찰리 니콜라스가 셀틱에서 이적해오 - P317

자 내가 바로 캐넌볼 키드라는 착각에 사로잡혔듯이, 나는 이 책을각색한 영화에서 폴 뉴먼이 연기한 인물, 패스트 에디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뭐든 이루기 어려운 일 -글쓰기, 축구 선수 되기 등등-을 성취하는 것을 주제로 삼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각별히 꼼꼼하게 읽었다. 한번은 오 하느님, 오 하느님, 오 하느님!) 다음과 같은 대목을 타자로 쳐서 책상 앞에다 붙여놓기도 했다.

바로 이거다. 너는 자신의 삶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너 자신이 그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너는 똑똑하고, 젊고, 내가 전에 말했듯이 재능 있는 사람이다. - P318

나도 재난에 가까울 정도로 불편한 시각에 어떤 일을 해야 할 때가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인터뷰를 해야 할 수도 있고, 마감 날짜 때문에 수요일 저녁에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할 경우도 생길 것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작가 여행을 가기도 하고 토크쇼에도 출연하는 등온갖 위험천만한 일을 하게 되는 법이니, 나도 언젠가는 그런 일을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 책을 발행하려고 하는 출판사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식의 강박증에 대해 글을 쓰게 해놓고서 그들의 출판을 위해 축구를 못 보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사이코라고요, 그거 기억하시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다 그런 거라니까요! 난 수요일 밤에는 절대로낭독회를 할 수 없어요!"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 P334

하지만 영국에서는, 인프라가 붕괴되기 시작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수만 명의 팬들이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지하 터널을 걸어오르고, 골목길에 두 줄로 차를세우고 있지만, 해당 기관은 상황이나 팬 층, 교통수단, 심지어 지은지 50년이 넘어 초라해지기 시작한 축구장 자체의 상태마저, 그 어떤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이 밀어붙이고 있다. 해야 할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100년동안 줄곧 모두가 위태위태하게 지내오다가 힐즈버러 사태가 터진것이다. 힐즈버러 사태는 2차대전 이후 영국에서 네 번째로 일어난축구 재난이며, 관중 통제에 실패하여 일어난 압사사고 가운데 사망자 수가 세 번째로 많은 사건이었다. 또한 단순히 운이 나빠서 일어난 것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경찰이 부적절한 타이밍에 출입문을 열었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태의 핵심을 간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P339

1990/91 시즌 리그 우승 이후의 희망과 영광스러움으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축구팬으로서의 삶 대부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한 글을 쓰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하여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하이버리는 다시금 불만으로 가득한 선수들과 불행한 팬들이 모이는 장소로 되돌아가고, 미래는 너무나 암울해서 애초에 우리가 왜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는지 까닭조차 생각나지 않게 되자, 나는 도로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지금 1992년의 대몰락을 겪으며 글을 쓰고있노라니, 내용에 공감할 기회가 더러 있었다. 렉섬은 스윈던과 대단히 흡사한 복사판이라, 그들에게 진 경기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되새기게 할 정도로 창피한 사건이었다. 내가 그 옛날 1960년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의 지루하고 지루한 아스널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것과 동시에, 라이트와 캠벨과 스미스와 그 밖의 선수들은 친절하게도 골을 넣는 것을 딱 멈추고 역사 속의 선배들과 똑같이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렉섬과의 경기 일주일 후에 있었던 애스턴 빌라 전을 보는 동안, 나의 축구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뼛속까지 시린 1월, 안절부절못하고 이따금 화를 내보긴 하지만 대부분 지쳐서 - P380

참아주고 있는 관중 앞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경기, 별 볼일 없는 팀을 상대로 거둔 0 - 0 무승부………… 예전과 다른 것이라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이언 어가 보이지 않고, 내 옆자리에서 투덜투덜하는 아버지가 있지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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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때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 홈에서 브라이턴을 맞아 2-0으로 이긴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었고, 언젠가 또 아버지와 함께 경기를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내가 함께 본 첫 경기도 마찬가지로 별 볼일 없었으니, 그저 거기에 앉아 있던 우리 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아버지는 휴대용 술병을 꺼내 컵에 술을따르면서 아직도 늘 똑같은 저놈의 아스널을 보고 있다고 투덜투덜댔고, 나는 의자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몸을 꼬면서 좀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추위에 하얗게 질려 있던 아직어린 조너선은, 형과 아버지가 1968년에 봉착했던 문제를 축구 관람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있었을 것이다. - P212

결국 나는 축구를 보며 살아온 나날 중에서 다른 어떤 때보다도바로 그 기간에 상황이 나쁜 것은 나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경기 결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자기 지역 팀을 동네 레스토랑처럼 여기고, 그들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쓰레기 음식을 내놓으면 발길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나 같은 팬들이 아주 많다. (축구가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수습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 가운데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소비가 전부다. 제품의 품질은 중요하지 않다. - P234

이것과는 달랐다. 축구 인생을 통틀어 나는 축구로 인한 우울증을참아주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여자친구들, 룸메이트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 모두 성격도 좋고 요령도 있어서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자신이 축구 때문에 우울하다고 주장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내모습을 발견했고, 그 모습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87년 리틀우즈 컵 결승전에서 좋아 날뛰던 그녀의 모습… 하지만 그것은그녀의 ‘첫 시즌‘이었단 말이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녀는 그 일요일 저녁 아스널 모자를 쓰고 우쭐거리며 술집에 들어갈 수 있었단말인가? 그럴 권리는 전혀 없었다. 피트와 나에게 이것은 1979년 이후 첫 트로피였는데, 어떻게 고작 넉 달 동안 경기를 보러 다닌 그녀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시즌마다 우승을 하는 건 아 - P267

냐." 하고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초코바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아이가 전쟁 배급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쓸데없이 짜증을 느끼는 부모처럼 말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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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축구 경기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내가 아는 영국과 유럽 지명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원정 경기나 스포츠 신문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이고, 훌리건들을 통해 사회학에 대한관심과 현장학습 체험을 갖게 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는 일과, 비판적 시각 없이 온전히 같은 대상을 응원하고 그 소속감을 갖는 것의 가치도 배웠다. 그리고 친구 프록과 함께 셀허스트 파크에 맨 처음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 P105

물론 더비 전에서의 패배는 퍽 아쉬웠지만, 캐롤 블랙번에게 버림받은 것만큼 아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이 아쉬움은 아주아주 나중에서야 느낀 것이다-나와 아스널 사이에 방해물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내게 토요일은 일주일을 사는 이유였고, 그 밖의 시간에 학교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빅 매치 하프타임에 나오는 시시한 광고나 다름없었다. 그 시기 동안은 축구가 바로 인생이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인생이었다. 내가 겪은 커다란 사건 -상실의 고통(1968년과 1972년 FA컵 결승전), 환희(2관왕), 야망의 좌절(아약스와의 유러피언 컵 4강전), 사랑(찰리 조지), 울적함(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은 모두 하이버리에서 벌어진 것이다. 청소년 팀이나 이적 시장을 통해서새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런데 캐롤 블랙번이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삶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실재하는 삶이며, 아스널을 통해서 겪는 - P127

삶이 아니라 내가 몸소 체험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알다시피, 그런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 P128

어린 시절의 뚱한 내 모습 그대로인 마이클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3-0으로 지는 상황에서 맥없이 경기를 재개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아스널은 3-2로졌는데, 사실 경기 내용을 보면 두 골이나 넣은 것도 의외였다.) 나는 마이클의 얼굴에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을 보았고, 그 나이 또래 소년들에게축구가 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책은 골치 아파지기 시작하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아직 관심이 끌리지 않을때, 우리가 달리 어디에 마음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이제 하이버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하이버리가 필요 없어졌다. 물론 슬픈 일이었다. 하이버리에서 보낸 6,7년은 내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내삶을 구제해준 시기였으니 말이다. - P132

다시 이날의 경기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이버리에 되돌아와 본 첫경기, 브리스틀 시티 전이 끝나자 나는 속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경기 전 당당하게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던 말콤 맥도널드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아스널은 지난 2년 동안의 모습과 달라진 면없는 것 같았다. 아니, 2부 리그에서 올라와 4년 동안 1부 리그에서 고전했던 브리스틀 시티를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졌다는 사실로 보건대, 아스널의 상태는 한참 더 나빠졌다. 나는 8월의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며 욕을 퍼부었고, 한동안 잠자코 잘 있던 예전의불만이 몸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늘 딱 한 잔만 더 마셔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알코올중독자처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 P140

나는 얼마 전 《여성, 거세당하다》라는 책을 읽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절대절명의 승격 시합이 끝나기 직전몇 분 동안도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여성의 억압에 대해 분개할 수 있겠는가? 또한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3부 리그의 엑서터 시티를 상대로 골을 넣는 것에 더 큰 관심을갖는 남자는 또 어찌해야 할까? 둘 다 전혀 가망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 P160

축구팀들은 대단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서포터에게 슬픔을 가져다준다. 우선 웸블리에서 벌어지는 빅 매치에서 선제골을 넣었다가 지는 방법이 있다. 1부 리그 선두에 올랐다가 침몰하는 방법도 있다. 어려운 원정 경기에서 무승부를 이끌어낸 다음 홈경기에서 지기도 한다. 어떤 주에는 리버풀 같은 강팀을 이기고 다음 주에는 약체 스컨소프에게 지기도 한다. 시즌 중반이 지날 때까지 승격될 것처럼 잘나가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쳐서는 강등되기도 한다………… 이미 최악의 사태는 지나갔다고 안심하는 바로 그때, 축구팀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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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안드레 두버스의 소설 가운데, 이혼해서 두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겨울 아버지>라는 단편이 있다. 그 소설 속의 아버지와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사이가 나빠진다. 오후마다 그들은 재즈 클럽, 극장,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앉아 있다. 하지만 여름이 되어 바닷가에 갈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즐거워진다. "기다란 백사장과 바다는 그들의 잔디밭이었으며, 비치 타월은 그들의 집이었고, 아이스박스와 보온병은 그들의 부엌이었다. 그들은 다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시트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이 엄청난 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아빠들이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으로 나가서 프리스비 원반을 든 채 배회하는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겨울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단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고, 동물원 구경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을 평이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해주었다. - P19

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축구장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거나 어른들이 "이 변태야!"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 주위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축구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증오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 경기를 보는 내내,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킥오프 몇 분 만에 분노가 터져나왔다.
"굴드, 이런 개망신이 있나. 정말 망신살이 뻗쳤다!"
"주급 100파운드? 주급 100파운드라니! 그 돈은 너를 봐주는 값으로 내가 받아야겠다!" - P22

내가 지금까지 가보았던 공연이란, 관객들이 즐기기 위해 돈을 내고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공연장에 가보면 이따금 칭얼거리는 아이나 하품하는 어른은 있었을지 몰라도, 분노나 절망 혹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고통으로서의 오락‘이란 완전히 새로운개념이었고, 나는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바로 그 개념이 내 인생을 형성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책이나 음반도ㅡ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한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후진 음반을 듣거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분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하이버리의 웨스트 스탠드에 모여 있던, 절망으로 가득 차 신랄한 욕설을 퍼붓던 그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바로 그 덕분에 지금 내가 비평가로 약간의 용돈을 벌고 있는지조 모르겠다. - P24

그때부터 이런 식의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대학에서 맨처음 가장 쉽게 사귄 친구들도 축구팬이었다. 새 직장에서의 첫날, 점심시간에 신문 마지막 장에 있는 축구 페이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반응이 오게 마련이다.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이 손쉬운 기술에는 단점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외롭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떠랴?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전부 다 나보다 덩치가 큰 팔백 명의 사내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걸어들어갈 때, 단지 호주머니에 지미 허스번드의 스티커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죽지 않을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홍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P28

스윈던과의 비극적인 승부가 끝난 다음 주 토요일에는 퀸스파크레인저스와의 원정 경기가 있었다. 나는 그때의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1-0 승리의 골을 넣은 조지 암스트롱이 공중으로 솟구쳐 있고, 데이비드 코트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배경으로는 스탠드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아스널 팬들이 그라운드 뒤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도 역시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장면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딱 일주일 전에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까지그런 창피를 당하게 만들었던 선수들이 어떻게 이토록 기뻐할 수 있단 날인가? - P35

1970년까지, 내 또래뿐 아니라 한참 연배가 높은 사람들까지도 세계 최고의 펠레 선수보다는 이언 어 선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펠레가 꽤 쓸 만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실제로 그 사실이 증명되는 것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브라질은 1966년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포르투갈에 지는 바람에 탈락했지만, 사실 그때 펠레는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1962년 칠레 월드컵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를 써낸 지 6년이나 지난 때였지만, 잉글랜드 인구 4분의 3 이 족히 되는 사람들이 펠레라는 선수에 대해서 아는 것은, 150년 전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알고 있던 수준 정도였던 것이다. - P49

스윈던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도 그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우듯이 잠깐 동안 토트넘을 기웃거리는 아스널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면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 년 동안 아스널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스윈던, 트랜미어, 요크, 월솔, 로더럼, 렉섬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는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 - P47

그 시절, 축구 경기가 진짜로, 정말로 기억할 만한 경기가 되어서만족감에 들떠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 아버지와 함께 가야 했다. 우리는 피시 앤 칩스 가게에 들러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지 않고) 점심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웨스트 스탠드 위쪽(그곳이어야 하는 까닭은, 거기에 앉으면 선수들이 입장하는 터널을 내려다보면서 팀이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프라인과 노스 뱅크 사이에 앉아야 했다. 아스널이 좋은 경기를 펼치고두 골 차이로 이겨야 했다. 경기장이 만원 혹은 거의 만원이어야 했다. 즉 상대 팀이 꽤 중요한 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는 BBC의<오늘의 경기>가 아니라 일요일 오후 ITV의 <빅 매치>에 방송되어야했으며(아마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일요일 오후를 영하의 기 - P75

온에서 보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프랑스에서 외투를 챙겨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추워서 덜덜 떨어댔기때문에, 나는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응원하자고 조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졸랐다. 경기가 끝나 차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버지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골인 장면을 놓칠 위험을 무릅쓸 만큼 미안하지는 않았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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