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은 무얼 할 수 있나
김영하의 소설을 반나절 만에 읽었다. 이런 걸 아마 읽어 치웠다 할 것이다. 대단한 흡입력이다. 이 소설은 마치 폭주족이 질주를 하듯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특성을 가졌다. 2천 년대 중반에 극심했던 폭주족은 이제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추억의 컨텐츠로 읽혔다. (현실반영이 되어야 하건만...)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좀 다른 작품보다 먼저 출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욕심이었다. 최근의 장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달아 십대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남들이 못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거나,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거나 이번 소설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할 수 있는 주인공이 그들이다. 이른바 보이들의 놀라운 초능력이 만개되는 계절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은 원래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녔어야 할 심성이었다. 기본이 실력이 된 세상. 그러나 그 실력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게 된 세상. 세상이 변하다 보니 초능력이 아니어야 할 것들이 초능력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언젠가부터 남의 고통을 집단으로 구경하고 간간이 뒤에서 결과를 훔쳐보며 시간이 흐르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게 잊어버리는 일이 만연화 된 세상에 살고 있다. 한 때 힘들었던 사람을 위로는 못 할망정 은근히 패배자로 취급하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이제는 상처 받았고 고통스럽다 하는 것도 일종의 심리적 루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라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는 사람도 많은 듯 하다.(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직도 베스트셀러인 것이냐.....)
소설가들은 입을 모아 힘을 합쳐 남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람으로서 사람처럼 세상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주장한다.(톨스토이도 이 비슷한 말을 했다. 남의 고통을 냉담하게 외면한다면 인간으로 살 가치가 없다고) 어느 소설가가 그런 말을 안했을까 싶은 아젠다이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아프고 슬프지만 끝내 현실의 잔혹한 거울이 되는 이런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왜 요즘은 소설이 인기가 없을까. 전자책 소비자들은 대부분 자기계발이나 위로형의 에세이를 택하고 아저씨들은 경제나 자본주의, 시장이 들어간 책을 집어 들고, 주부들은 아이들 교육과 관련한 책으로 신경이 몰려 있다. 소설이 찬밥인 시대. 마음 아픈 것은 소설(바깥이 아닌)속에서도 밝혔듯이 소설이 이 시대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절망스럽다는 작가 김영하의 넋두리가 냉혹한 현실로 들린다는 것이다. 어제 트윗에서 박범신 작가가 자신의 작품 <은교>의 영화소식이 뜨자 바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사람들이 축하 문자를 주는데 나는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말씀을 남겼다. 책이 먼저고 다음이 영화여야 하는데 영화 때문에 책을 사보는 거꾸로 현상이 반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제 영화가 뜨면 후속으로 원작인 책이 자동으로 뜨는 것은 하나의 현상처럼 공식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차라리 이 책도 영화로 판권이 넘어간다면 좋겠다. 오토바이 폭주 장면이 식상하긴 하지만 영화 은교의 기사들을 보라. 마케팅에 치중하는 건 죄다 칠순 노인과 십대소녀의 치명적인 섹스이다.(어떻게 문학적 관용을 붙여도 그렇게 들린다. 원작에 상상하는 장면 아니었나? 은교 정말 간만에 좋은 소설이었는데 영화를 먼저 접한 독자들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될까 노파심이 먼저 든다. 뭐, 아직 영화도 개봉 안했는데 영화를 본 것처럼 말하는 나도 실례이긴 하나 영상미에서 어떻게 노시인의 고뇌가 전부 전달되리... ) 그러니 아마 이 작품에서도 알아서 그림이 되는 이슈거리를 만들어 주실 터이다. 암튼,
소설은 이제 이 시대에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은 이렇듯 독자에게도 전이되고 마는 작품이었다, 이번 고아 이야기는. 내 생각에 소설가의 할 일이나 소설가의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독자와 세상이 변한 것 같다. 이야기의 영역과 역할이 너무나, 엄청나게 축소화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젠 고아 이야기가 참으로 을씨년스럽고 뜬금없어 보인 하루였다.
#2. 에세이는 무얼 할 수 있나
지금 내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중에서 주말에 끝내겠다고 선택한 책은 가벼운 에세이 두권이다. 내용은 절대 가벼운 내용이 아닌데 이번 달에 자본주의와 경제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고민하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장하준의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잠시 제쳐두고 가방끈 긴 언니형(?)의 조언으로 턴했다. 에세이쪽도 트렌드가 확실 한 것이 남인숙 작가의 <어쨋거나 남자는 필요하다>가 빵 터진 후(처음에 읽었을 때 사실 내용이 알찬데 호응이 어떨까 싶었다.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 더욱 전문직 여성들의 여성의 노고 치하글, 여성의 우월적 감성 칭찬글은 봄을 맞아 날씨가 화창한 듯 하다.
<우리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김태경>은 광고판에서 잔뼈가 굵은 AE 출신 저자의 책이다. 구절구절 아주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일단 백 페이지까지의 느낌은 미혼직장여성들에게 안성맞춤인 듯하다. 지난 번 박에스더 기자도 그렇고 대부분 이런 책을 내는 여성들이 이제 조직에서 20년차(가 다 되었거나)를 넘긴 분들이다.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밥줄을 놓지 않고 투쟁하듯 여기까지 온 여성들이다. 얼마나 할말이 많겠는가. 웃긴 건 이제 조직도 때려쳤고 더 이상 상사눈치 볼일도 없고 애 낳을 일도 없는 내가 정작 이런 책이 필요해야 했을 때에는 거들떠도 안보다가 이제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책들에 열심인지, 참 사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끔 (같은 연배 작가의)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혹시 지나간 날을 추억하며 그땐 그랬지, 이러는 게 아닐까 싶어 순간 당황할 때가 있다. (지젝에 의하면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우린 그때 젊었지, 그땐 아름다웠어, 이러는 게 가장 패배적인 일상이라고 ㅠㅠㅠ). 암튼, 그렇더라도 젊은 여성들이 이 책의 주타겟인 건 변함없다.
다음은 ‘피해자의 덫’을 파헤치고 그 해결방안을 연구한 책이다. 완전 심리학 서적이라 보긴 어렵지만 집중적으로 한 가지만 파고들므로 나쁘지 않다. 가벼움 속의 무거움이라고 할까. 혹시나 스스로 피해의식이 많아 자꾸 상대에게 (결과적으로)상처를 준다거나 반대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면 꽤 유용한 책이다.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 중에 지독한 피해의식의 종결자가 있었다.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이별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이 나를 떠나가서 그럴 거라고 노래를 했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어떤 순간이 오면 무슨 생각이 나는 것인지 당신은 결국 나를 버릴 거라고 자주 예언하듯 말을 했다.(그래서 나는 그게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들려 이별해야 한다면 내가 떠나야지, 뭐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실제로 하게 되었다 ㅠ) 그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자주 받아 상처가 피해의식으로 발전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그 말 때문에 헤어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의 덫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두려움, 분노, 슬픔, 죄의식, 거짓힘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해결 방안으로 자기 내부에 (상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 여자들이 많이들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하게 되면 내가 충분히 상대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인데 살면서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고 나 역시도 그렇게 못했고 수많은 책에서, 안된다고 하더라.
가만 보면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의 고통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안 그럴려고 해도 자꾸만 과거의 고통을 되살리는 인간관계를 또다시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선택과정은 ‘과거에 끝나지 않은 관계를 완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왜 끝나지 않았을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만남을 단절했거나 그대로 세월만 흘렀기 때문이다. 아니 세월이 흘렀으니 해결됬다고 믿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피해의식의 원인도 공감갔지만 비슷한 방식의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가 반복되는 의식의 체계도 흥미로왔다.
사실 나는 그동안 온라인 서재에서 막연히 피해를 입은 쪽은 나라는 생각이 많았다. 칭찬과 비판을 적절히 섞어 적의감을 잘 포장한 댓글, 익명으로 내 글을 비난한 댓글, 나를 향한 비난에 동의를 한 또 다른 익명, 이간질과 음해성의 메시지, 이기심과 오만 가득한 육성의 목소리,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나의 불행을 바랄 것이라는 의심, 우연히 거짓과 위선을 목격하게 되는 난처함, 이런 것들은 조용히 앉아서 눈감고 귀 닫고, 책 읽고 글 쓴다고 해결되는 것들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해결이 안 되니까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버텼더니, 나도 모르는 ‘내적 힘’ 이 조금은 쌓여진 것 같기는 하다.(이곳에서 오래 버틴 분들은 ‘내적 힘’으로 부정적 요소들을 극복한 분들은 아닐까) 모두 털어버렸다고 하기엔 거짓말이고 적어도 바람이 불었다고 넘어지진 않을 힘은 기른 것 같다.(물론 이렇게 말하고 나는 또 쓰러질 것이다 ㅠㅠㅠㅠ)
덧붙임) 책말고 무얼 하는 것들 -
주말에 영화를 한편 볼 생각인데 아직 정하질 못했다. <건축학 개론>이 나는 첨부터 끌리질 않았는데 그냥 옛날 생각하며 추억에나 잠기다 와야 겠다. 아침 7시에 고릴라를 통해 ‘김소원의 SBS 전망대’를 듣는다. 시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인데 자주 김용민도 나오더니 이젠 안나온다. 전화가 안 터져서 - 우리집은 무슨 이유인지 SK가 잘 안 터진다 - 할 수 없이 통신사를 이동했다.(전화가 많이 와서가 아니라 오로지 택배 아저씨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느냐고 해서다) 그러면서 졸지에 스마트폰이 두 개 생겨버렸다. LTE폰의 위력은 광고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체감할 정도는 되더라. 그래도 나는 아직 인터넷은 되는 이전 폰으로 뭔가를 한다. 안타깝게도 기계적 삶의 노예가 된 듯하다. 이게 스마트한 삶은 아니잖아. 아이는 친구들과 별의 별 어플을 받아서 잘도 논다.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와는 완전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적 힘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건 디지털이 아니라 아나로그인데 달리 살아갈 방법을 모르겠다. 우울한 주말이 될 듯하다... 비도 내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