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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사랑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의 이십대를 참혹하게 관통하고
나머지 세월도 그 흔적으로 자주 놀라게 하던
한 사람을.
나 그대를 몰랐었네
그는 꼭 유하감독과 같은 나이였다. 유하 감독과 같은 공부를 했다. 같은 시기 이소룡에 열광하고 존 덴버를 들었던 사람. 만화 가게에서 흑백 TV를 시청하고 해적판을 찾아 청계천과 세운상가를 돌아다녔을 사람. 동시상영관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나 한자리에서 보았을 사람. <미워도 다시 한번>의 여배우 문희의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 육영수 여사의 마지막 가는 날에 비가 왔다는 걸 아는 사람. 백마가 없어지기 전 해후의 풍경을 아는 사람. 생애 첫차가 프라이드나 엑셀이었을 사람. 나의 뜨거웠던 90년대가 자신의 가장 멋져 보인 삼십대였을 사람. 그래서, 이제는 그도 유하처럼 쉰 줄에 들어섰을 사람. 그러나, 다시는 만나기 힘들어 그리워만 해야 될 사람.
유하와 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추억은 이렇듯 삶의 경계를 허물며 거미줄처럼 인연의 손을 내민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유하의 추억을 매개로 나의 한 시절을, 나아가 그의 한 시절을 고스란히 겹쳐보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 정확히 말하자면 유하와 동시대인으로서 같은 추억을 가졌을 그를 회상하는 시간이었지만 - 어떻든 추억은 꼬리를 물고 연대를 이어 관계를 확장하는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유하는 나의 옛사랑을 불러 들였고 나의 그 사람은 유하를 더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감독의 첫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어느 저녁 (아마도)압구정동 근처에서 구경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한 겨울이었다. 그땐 커다란 극장이 모두 강 건너 있을 시절이었는데 씨네하우스라는 어정쩡한 크기의 영화관이 강남에 있긴 했다. 당시엔 한국영화가 그리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라 연인들이 아니면 평일 객석은 썰렁하기만 했다. 물론 지금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고 성형하기 전의 발연기 수준의 엄정화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유하 감독이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게 별다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의 감독이었다는 사실도 인상 깊게 기억하진 않았다. 유하라는 이름은 대중문화예술의 영역에 위치한 사람이긴 했으나 ‘압구정동’으로 대표되는 유행현상과 소비문화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아티스트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얼마 전 개봉한「하울링」과도 유하를 연결 짓지 못했다.
웃긴 건 그 당시 ‘바람 부는(이하 중략)’ 이후로(그것이 시집이든 영화이든 혹은 기사 제목이든) 정말로 바람이 불면 압구정동에 가고 싶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청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압구정동을 모르고 그곳에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관심이 없던 사람도 ‘바람 부는’이라는 제목의 범국민적 확산효과 덕에 압구정동의 홍보만 더 강화되기도 했다. 제목 특유의 시적 감성이 압구정동을 천박한 소비문화의 쓰레기통이 아닌 어쩐지 고급스런 문학적 아우라가 입혀진 장소로 격상시키는 꼴이었다. 계층 간 위화감은 만약 제공하는 쪽이 내 쪽이라면 충분히 무시될만한 분위기였다. 저자도 언급했지만 당시 우리에겐 속으로는 매혹을 느끼면서 겉으로는 거부감을 표시하는 이중적 심리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 속에서 압구정동을 향한 욕망을 인정하고 매혹의 원인에 의문을 제기했는지는 몰랐었다. 우리들 욕망의 다양한 모습을 반성하고 스피드 문화 대신 쉼의 문화를 제시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유하 감독의 시집이든 영화든 어떤 현상으로만 정보를 받아 들여왔지 그것의 원작자로서 작품세계 같은 건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관객이자 독자였다. 그러면서 세간에 많이 회자되고 소비되었으므로 내심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의외로 단 방향으로 해석되어진 언론의 정보로만 작품과 작가를 이해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듣고 보았으니 많이 안다고 믿는 것. 나는 이 책을 덮고 내가 저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이름 두 글자였다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우린 꿈이 있었다네
돌이켜보면 나의 이십대로 상징되는 90년대는 엄청난 대중문화의 양적 질적 팽창의 시기였다. 광고에선 연일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라 부추겼고 뮤직비디오는 핑크 프로이드의 그것처럼 감각적으로 발전했다. 영동대로와 도산대로에 나가보면 빠르게 전파되던 외국계 자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즐비했고 주차장엔 굉음을 과시하던 스포츠카를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퍼머의 여성들은 삼삼오오 로바다야끼와 재즈카페로 모여 들었고 어쩌다 물주가 등장하면 럭셔리 가라오케로 이동했다. 동호대교 남단에서 성수대교 입구까지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유흥문화는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활기차고 밝았던 것 같다. 적어도 IMF 전까진 희망의 프레임 안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시도 읽었다. 지금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같은 서바이벌,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 메인으로 등장하는 노래는 언제나 90년대 중반의 히트곡들이다. 핑계, 일과 이분의 일, 마법의 성, 그냥 걸었어, 넌 할 수 있어, 사랑할수록, 나는 문제없어, 달의 몰락, 날 떠나지마(이상 1994년), 날개 잃은 천사, 가질 수 없는 너, 잘못된 만남, 이별공식, 사랑을 할거야(이상 1995년) 같은 노래가 한국가요 발전의 정점에 있었던 노래들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한다. 노래 한곡마다 추억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하면 당신도 혹 나와 같은 세대는 아닐까.
그때 우리는 신입이었고 유하 세대는 회사의 실질적인 허리들이었다. 그들은 민주화 투쟁을 지나온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입시지옥을 통과한 경력에다가 본고사를 보았거나 본 사람을 형으로 두었기에 엘리트에 대한 야망도 남달랐다. 우리는 선경의 스마트 자전거를 준다는 장학퀴즈를 시청만 했지만 그들은 직접 참가하고 장학금을 받아본 세대였다. 우리는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고 주윤발과 장국영만 외쳤지만 그들은 성인이 된 후 영화의 ‘의리’, ‘신념’, '충성'의 가치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여 주요 기업 창업자들의 비전을 뒷받침하는 실행의 고수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70년대 후반 콩나물처럼 지어진 아파트 아스팔트에서 서필로 땅따먹기를 했지만 그들은 지방 농촌 출신으로서 땅과 흙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하 역시 고향의 대나무 숲과 뛰어놀던 들판을 유년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햇빛, 꽃들의 아우성, 바람의 감촉을 에너지 삼아 길 위에서 희망을 품고 청춘의 한때를 배회했다. 그 떨림의 에너지가 곧 시적 영화적 상상력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뒤늦게 삐삐라는 통신수단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던 시절 투박한 아나로그 매체와 통기타의 낭만으로 첫사랑을 경험한 세대였다. 그들과 우리는 대체로 국가와 사회가 주입하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차이가 있었다면 억압의 정도와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 우린 그들의 눈에 띠는 투쟁 때문에 사실 그들에게 빚졌다고 해야 맞을지 모른다. 또 하나 우린 80년대 컬러TV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들은 흑백이었다는 것도 다르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 까까머리로 극장을 드나들었지만 우린 교복자율화에 핀컬 퍼머를 하고 성인영화를 보았다는 것도 달랐다.(십년의 차이가 꼭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문화적으로 서구화된 그림의 차이일 것이다)
아무튼, 그때 우리가 그들과 함께 꾸었던 꿈이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진입에 대한 ‘장밋빛 로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건 유하 감독이 어린 시절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핑크빛 꿈’의 포로가 되었다는 느낌과 유사할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외제차도 탈수 있고 번듯한 아파트도 장만하고 크리스마스에 북유럽 해외 여행 같은 특별한 추억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막연히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옳지 않다거나 진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회 대다수의 행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벌어서 잘 먹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 이상을 해보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대학을 간다고 하듯 직장도 열심히 다니면 당연히 승진도 하고 집도 사게 되는 줄 - 물론 중간에 변수는 있겠지만 참고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 알았다. 아... 당시 우리가 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지극히 평범한 생각들이 오늘 나를 울게 한다. 나처럼 한때나마 가졌던 꿈이 슬프다면 당신도 혹 나와 같은 세대는 아닐까.
다시 미래를 나누겠네
그 후로 이십년이 지났고 이제는 그들이나 우리나 (누구 말마따나)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이 자꾸 슬퍼지던 이유는 이소룡 세대라 불리우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있다. 55년~63년생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베이비 부머들은 이제 코앞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청춘을 바쳤고 헐리우드 영화대로라면 이태리 어느 해변에 근사한 별장 하나쯤은 마련해두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들의 대학등록금과 결혼자금으로 걱정이 태산이다. 노후은퇴 자금은 어느 나라의 이야기인 것일까. 우리나라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이들 중에 나의 옛사랑이 있고 유하 감독이 속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우리가 백 살까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 모두가 이소룡을 우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조용필이 제일이라 해도 꼭 전영록이나 이용을 들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었듯이. 모두 존 덴버만 듣진 않았을 것이다. 간혹 팝송보다 샹송이나 클래식에 뜻을 둔 매니아도 있었으리라.(이 책의 후반부에 소개되는 재즈평론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희망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추억은 이 순간의 생명성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현재가 절실한 사람만이 그 유한성을 견디기 위해 추억을 꺼내든다고. 추억은 한 시절의 절실했던 이미지들을 고이 보관하는 가슴의 영토라고. 우리가 오늘 추억이라는 영토를 함께 서성이는 이유는 과거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미래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어느 세대건 자신의 빛나는 시절을 더 빛나게 해준 영웅이 있다. 그들이 한때 자신들의 영웅이었던 이소룡을 잊지 못한다면 그건 아마도 그때 보았던 희망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소룡 세대에게 이소룡을 회상하는 일은 단지 청춘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아닌 것이다. 굵고 짧은 인생을 살다간 이소룡은 배우이기 이전에 미국 워싱턴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무도인으로 살다간 사람이었다.(나는 그가 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역시 무술에 인문학적 성찰이 배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들에게 이소룡의 죽음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제임스 딘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겉멋없는 이소룡의 정직하고 단단한 진정성, 몸과 정신이 하나되는 진실성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소룡은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조작이 아닌 맨몸으로 단련한 자기만의 리얼리티로 영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의 죽음은 영화배우를 넘어 진정한 무도인의 길을 가던 동양인 지도자의 죽음을 의미하진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는 유하의 산문집은 같은 시기를 체험한 동시대인들에게 삶의 진정성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유하 세대와 인연을 맺은 우리 세대에게 강렬한 향수를 드리운다. 같은 유형의 추억 속에서의 진정성은 같은 사람을 향한 희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맹활약 하던 시기는 한국 정치사의 암흑기였다. 이소룡이 사망한지 사십년이 다 되가는 오늘날도 불황이긴 마찬가지다. 이소룡이라는 진정성에 열광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꿈꾼 세대라면 아직도 이소룡의 추억은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들에게 커다란 현재진행형의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추억은 과거만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미래를 공유하는 희망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한 시기를 같이 겪었던 사람들은 한 시절이 남긴 절실함을 알고 있다. 기억의 창고에서 그 절실함 들을 꺼내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들만은 알 것이다. 아니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에 십분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추억의 풍경들은 우리 아픈 현실을 껴안는다. 그리운 시절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미래로 복원된다. 우리는 점점 진부해진 미래, 과거화된 미래, 박제화된 미래를 견디기 위해 그때를 더욱 추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공감에서 시작한다면 추억은 바로 그 시작인 것이다. 추억하고 나눈다면 함께하는 그곳에 희망의 미래가 있다고 믿어 본다. 그들이 그리운 봄이다. 더불어 봄 이었던 나의 그 시절도 사무치는 밤이다...(아마도 나는 살면서 혹시 이 글을 보게 될지도 모를 한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의 위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그저 추억이라는 불변의 믿음 하나만 가지고...)
사랑할 것이다. 앞으로 더 오랫동안.
나의 이십대를 추억으로 물들이고
나머지 세월도 그 기억으로 자주 그립게 하던
한 시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