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이가 강으로 추락할 때 사람들은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말했다. 마술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한 것일까. 마술사는 제이의 몸을 토막 낸 다음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뼈를 발라냈을 것이다. 피로 범벅된 뼛조각에 다시 살을 입혀 제이를 소생시키고 밧줄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을 것이다. 관객들은 제이가 밧줄을 사용해 승천하는 묘기를 신기한 듯 지켜보았을 것이다. 티벳 신화에 의하면 밧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치였다. 밧줄을 타고 왕래를 하는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밧줄이 끊어진 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영혼만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다고 믿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면 좋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비록 마술이라도 누군가 실종이 되거나 충격을 받아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모른다. 마술은 실패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닌, 꼭 성공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제이였을까. 제이는 분명 선택받은 사람인 듯하다. 비록 어리지만 자신도 일찌감치 그걸 알고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영혼을 이탈시켜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갇혀있는 개의 붉은 눈을 보고 눈물이 맺히고 밧줄로 묶여진 의자에서도 사물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체감했다. 친구들에게 흉기를 휘둘렀지만 그 고통이 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지만 그가 느끼는 분노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저 하늘에서 누군가 제이에게 밧줄을 묶어 놓았다면 그건 고통의 탯줄, 그 속박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제이는 고통 하는 존재들과 소통하는 자유를 누렸지만 과거에 속박당한 채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밧줄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구속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제이가 쇠바늘의 바리케이드에 몸이 잘려 나갈 때 그만 내게도 달려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우리는 신들이 밧줄을 매달아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는 아닐까 하늘에선 우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위해 인형극을 연출한 건 아닐까, 하는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내면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끊어지고 나니 비로소 그 장면은 먼 훗날 우리의 마지막은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삶이라는 이 길의 끝에서 죽음과 마주칠지 알면서도 달려가는 나, 그리고 당신, 그리하여 멈추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제이를 닮았다고 느꼈다. 제이가 느낀 고통의 무게가 소름끼치듯 선명하고 둔중하게 다가왔다. 우리도 혹 제이와 보이지 않는 밧줄로 연결된 존재들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묘기를 연출한 마술사는 제이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마술사로 분한 소설가는 제이의 죽음을 구경한 관조자 동규도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제이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끔찍한 마술 현장의 관객이었던 우리는 남겨진 동규의 절망과 충격을 헤아리지 못했다. 소설가는 동규의 고통을 배려하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제이가 죽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동규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제이라는 배우의 이야기가 아닌 제이가 출연하는 공연을 관람한 동규의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소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도 결코 마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마술의 고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듯 했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람답지 못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문하는 듯 했다.

 

 

 

제이(提耳)는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제이의 속삭임은 이제 폭주족의 굉음이 되어 최후의 비명으로 남았다. 환청이나 이명이 아니고 화인처럼 선명하게 각인되는 슬픔의 낙인으로. 오늘 우리가 슬픈 것은 우리 존재가 모두 고아(孤兒)와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고아(苦我)로 살아갈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제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이었듯이 소설가는 신음하는 고아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세상을 이어주는 단단한 밧줄이길 소망한다. 소설이 사라진 시대, 소설가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네 고아 같은 지독한 고통을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아인 우리를 이승의 부활로 이끌어줄 가장 튼튼한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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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2-04-0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역시.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이 작품 읽어줬는데
처음 부분과 제이와 동규가 만나는 부분을 읽어줬어.
마지막을 못들었는데, 혹시 마법사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으이.

너의 한자 명명 솜씨는 최고야!
어릴때 서당을 다닌게야??
논어를 읽으면 잘 읽을 사람이야.^^

서평 잘 봤어. 등긁어 준 느낌이야~

보물선 2012-04-04 18:36   좋아요 0 | URL
난 요즘 나온 논어는 너무 방대해 보이고
신정근 교수의 <마흔, 논어...>를 봐볼까 해^^
(마음은 원이로되, 쉰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라나...ㅋㅋ)

가연 2012-04-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서두를 마술사 이야기로 시작했었던가요. 저는 다 못읽고 프롤로그부분에 해당하는 마술사이야기만 읽고 내려놓았는데,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부활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한다..ㅋㅋ 하지만 왕이 보고 즐거워서 마술사가 다시 살려줄거라고 하면서 칼로 베어버렸던 신하는 끝내 못살아났으니... 부활하려면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하나봐요, 풋. 끝까지 못읽어서 어떻게 내용이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