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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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상대적 가치에 의한 인식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일한 '보편자' 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열자(列子)께서는 우주의 탄생을 태역-태초-태시-태소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太易: 만물의 분화 이전의 준비과정
太初: 우주의 모습이 구체화되어가는 찰나의 장면(서양의 빅뱅)
太始: 빅뱅 0.001초 후의 현상을 총칭함
太素: 變을 거친 化의 단계로 제모습을 갖춘 우주의 형태

등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열자는 기원전 4세기 인물이라던데요...

글을 읽고 언뜻 떠오른 생각이랍니다 한사람님..

2012-06-15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6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갑니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참 궁금했었거든요.
평소 한사람님의 좋은 글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좋은 글에 대한 반응이 제 예상과는 달라서 말이지요.

저는 리뷰대회에 글을 쓴 적이 없고
리뷰대회의 성격도 모릅니다.
겨우 알라딘에서 혼자 놀다가 가는 형편인지라^^

최근 일련의 상황들이 저로하여금 알라딘에 뜸하게 하더군요.
참새 방앗간 같던 알라딘이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해
무척 당황스러웠구요.

책을 가까이 하는 분들의 완고함이
제게는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졌다고나 할까요...

독서는 사람을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을
완전히 깨버리는....

역사는 이를 잘 증명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때론 제 자신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ㅠ.ㅠ
기대감에 대한 적나나한 배신을 자주 목도하면서도
도대체 바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딜레마랍니다 한사람님...ㅠ.ㅠ

친절하신 답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