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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ㅣ 푸른사상 소설선 44
배명희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2월
평점 :
이 소설집에는 광장, 페트병, 노란 가로등, 어둠 그 너머, 엄마의 정원, 재건축, 롤러코스터 등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시위대의 함성과 대기를 뒤흔드는 커다란 노래에 섞여 들면 무당이 공수받고 펄쩍펄쩍 뛰고 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만큼은 며느리가 집을 나간 사실을, 대리운전을 나간 아들이 새벽녘 길바닥에서 서성이는 것을, 손주 녀석이 강의실 대신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씹으며 계산대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깡그리 잊었다. 칠십을 넘긴 자신에게 밥상 한 번 차려줄 사람이 없다는 게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20쪽, 광장)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늙은이도 광장 집회에는 대환영이었다. 컵라면도 주고 그럴싸한 명분도 있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집회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았다.(26쪽, 광장)
⇨ 광장 집회는 노인 박씨에게 모든 불행을 잊게 해 준다. 광장 집회에 참여하면 집회가 끝난 후에 식권을 받을 수 있고 그럴싸한 명분도 있다. 외로운 이들에게는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가 광장이다.
뜻을 같이하는 노인들이 광장에 모이는 게 아니다. 광장에 모일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광장 집회의 이면을 그린다.
하루에 두 번 병원에 다녀오고 시장을 봐 동생 밥을 챙겨주고 나면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읽으려고 챙겨 온 책은 표지조차 들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나이에 비례해 시간이 흐른다는 게 사실일까. 그렇다면 남아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도 나도 동생도 커다란 틀에서 보면 조만간 소멸할 존재들이다. 그런데 삶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걸까. 10년이나 5년, 좀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의 어긋남 때문에 인간은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며 사는 것 같다.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77~78쪽, 노란 가로등)
⇨ 어머니, 남편, 동생, 게다가 키우는 개까지 모두 화자를 힘들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화자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묵묵히 견뎌 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인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듯이.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는 듯이.
금방 기가 죽는 그와 내가 측은했고, 무엇 하나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공허한 시간과 답답한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오늘 카페에만 가지 않았더라면, 골목 안 낡은 모텔에는 갈 수 있었다. 따뜻하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마셨던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가 느닷없이 위를 후볐다. 추위에 떨던 우리에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호사를 부린 것은 겨우 커피 한 잔이 주는 잠시의 안락이었다. 내게는 지난주에 이미 한도를 넘은 신용카드, 그에게는 내 손을 넣어줄 빈 주머니가 있었을 뿐이었다.
(중략)
“다음 주에 월급 받으면 우리 여행 가자.”
그는 선뜻 대답이 없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90쪽, 어둠 그 너머)
⇨ ‘나’는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사원이다. ‘나’와 연애 중인 남자는 공무원 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나서 계속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모텔의 숙박료가 없어 공원 벤치에서 추위에 떨며 사랑의 애무를 나눌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 사랑의 애무마저도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중단하게 된다. 돈이 없으니 단 둘만이 함께 있을 곳이 없다.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주말에 여행 가서 하룻밤만 지내고 오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그와 만난 날 그는 주말에 시험을 대비한 특강에 참석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에 ‘나’는 실망한다.
오토바이는 가로등도 없는 초라한 길을 달렸다.
하늘에는 희미한 별빛만 있고, 앞에는 지독한 어둠이 놓여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길 끝에 역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따위 고물 오토바이로 아무리 달려봤자 결코 바다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나는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 채 얼음덩어리가 되어 산산이 부서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을 안고 달리는 동안은, 그게 누구든, 길이 뻗어 있는 한 달리고 싶었다.(110쪽, 어둠 그 너머)
⇨ 집에 들어간 ‘나’는 남동생과 남동생의 친구인 기수와 셋이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술을 마신 뒤 ‘나’는 기수가 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린다. “누군가의 몸을 안고 달리는 동안은, 그게 누구든, 길이 뻗어 있는 한 달리고 싶었다.”라는 문장은 화자가 답답한 현실과 채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외롭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으로 읽힌다. 꼭 연인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주는 위로가 필요할 만큼 당장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할매, 이카다 딸이 먼저 죽겠어요. 하루도 안 빼고 똥 치우고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침대 시트를 갈아대니, 사무실에 앉아 책을 만들던 사람이 우예 견디겠어요? 기저귀 차면 서로 편할 텐데. 창가에 노인 싸제, 할매 싸제. 하루이틀도 아이고 다른 사람 생각도 좀 해야지요.”
어머니는 허리를 틀어 벽을 향한 채 여자를 등지고 누웠다.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침대 난간을 꽉 잡고 있었다.(133쪽, 엄마의 정원)
⇨ 남의 일 같지 않아 주목하여 읽었다. 부모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은 나도 앞으로 언젠가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정원’은 병원에서 어머니를 병간호하는 딸 기화의 모습을 그렸다. 어머니의 똥오줌을 치우며 하루하루를 용케 견디어 가고 있는 기화에게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집값 절반은 대출이 나와요. 집값은 계속 오르니 이자를 내도 남는 장사죠. 재건축하면 돈방석에 앉는 거요. 사두면 무조건 돈이 된다니까.”(161쪽, 재건축)
남편이 직장을 그만둘 때, 대출금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남편은 퇴직금으로 대출금을 다 갚았다. 삶을 갉아먹는 대출금을 갚았는데 홀가분하지 않았지만 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 일자리를 구할 테고, 우리에게는 재건축을 기다리는 알짜 아파트가 있었다. 남편과 내 피와 살을 먹고 자란 아파트.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태생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피와 삶을 갈아 넣지 않은 아파트가 얼마나 되겠는가. 남편과 나는 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세상에 피보다 진한 것은 없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생명 같은 존재,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165쪽, 재건축)
⇨ 재건축으로 인한 갈등과 의견 충돌을 다루고 있다. 재건축으로 이득을 볼 거라는 쪽과 손해를 볼 거라는 쪽이 맞서고 있다. 화자는 재건축을 축으로 하여 생긴 남편과의 이별을 슬퍼한다.
중3 때 내가 수없이 당한 일이었다. 식판을 들면 발아래는 사각지대였다.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발을 걸면 식판과 함께 나동그라진다. 운이 좋으면 무릎이 깨지지는 않고 식판만 나동그라진다. 그날 일진이 나쁘면 누구가의 머리나 몸에 식판이 날아간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모두 슬슬 피한다. 벼락을 맞을 줄 뻔히 알면서 천둥 치는 날, 비바람 몰아치는 벌판으로 나갈 바보는 없었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리는데 가연의 발을 건 진이는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진이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187~188쪽, 롤러코스터)
약하게 보였다가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내 과거는 깨끗이 세탁되었다. 이곳은 내게 새로운 삶의 장이다. 가끔 중3 때를 떠올리면 맨손으로 칼날을 잡은 느낌이었다.(195쪽, 롤러코스터)
⇨ 화자는 여고 시절 왕따를 당하는 가연이를 돕고 싶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과거에 화자도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자신도 왕따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가연이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20년이 지났지만 화자는 그 여고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일곱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두 편 고른다면 ‘광장’과 ‘롤러코스터’다. 특히 왕따 문제를 다룬 ‘롤러코스터’는 학교 폭력에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학교 폭력에는 언어폭력과 왕따(집단따돌림)도 포함된다.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학폭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화제를 모으면서 학교 폭력의 심각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 글로리>는 고교 시절에 아이들한테서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나타나 그들에게 ‘치밀하게 계획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정치권에서도 언급될 만큼 <더 글로리>는 최고의 화제작이다.
미투 운동이 범국민적 지지를 얻었듯이, 학폭 문제도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범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냈으면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학폭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작가가 사회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만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므로, ‘롤러코스터’의 가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소설이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문제의 개선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세상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문학의 힘을 나는 믿는다. 문학이 있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