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풍경

 

 

 

어느 전시회에서 밀레의 ‘첫 걸음마’를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을 떼려는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애가 넘어지지 않게 바로 뒤에서 붙들고 있고, 맞은 편에서는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아이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있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광경이나 나는 그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낮잠’ 이란 제목의 농민화도 좋았다. 부부가 일을 마치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것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그림처럼 인상적인 광경이 많이 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아 온 영상 중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모은다면 두꺼운 앨범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다. 그 추억의 앨범으로 지난 시절을 노년에도 회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일 것이다.

 

 

내가 열세 살쯤에 넋을 잃고 바라본 풍경이 있다. 우리 집 근처의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담벼락에 있는 흠집과 낙서조차도 정겨웠다. 그 지붕 아래 어디선가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이런 정경을 보고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지금도 삶의 풍경을 찾아 산책을 나설 때가 있다. 집들을 끼고 도는 골목길도 나에겐 좋은 산책로가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러 가옥들을 만난다.

 

 

푸른 나무들이 햇볕을 받으며 하늘을 가득히 맞이하고 있는 집,

옷들이 빨랫줄에 평화롭게 널려 있는 집,

꽃밭의 꽃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집,

앙증맞게 생긴 아기의 신발이 보이는 집….

이것들은 마음의 사진이 되어 가슴에 깊게 자리하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나는 때때로 친정의 마당을 그리워한다. 눈을 들면 하늘이 훤히 보이고 잠자리와 나비가 자유롭게 놀다 가는 곳.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침을 열어주고 밤에는 달과 별이 친구가 되어 주는 뜰.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거나 줄넘기를 한 곳도 마당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친구를 불러다 놀곤 하였다.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놀기엔 충분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간식거리를 만들면 풍겨 오는 음식냄새를 맡으며 노는 게 신이 났다. 찐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따위를, 혼자 먹는 것보다 함께 놀던 아이들과 경쟁하듯 앞다투어 먹으면 곱절은 더 맛있었다. 참으로 흥겨웠던 그 시절도 좋은 장면으로 새겨져 있다.

 

 

내가 여행을 즐기는 것도 멋진 경치를 가슴속에 담고 싶어서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는 늦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하고, 설경은 언제 보아도 설렌다. 산 그림자를 품은 호수를 보면 명상적인 분위기에 빠져 나도 사색에 잠기게 된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촌가나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골길이 눈에 띄면 마음의 고향을 보는 듯하다. 기적을 울리며 사라지는 기차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연인처럼 어떤 아쉬움을 남겨 놓는다. 철새들의 행렬, 해질녘 바람 부는 숲, 어둠에 서서히 묻히어 가는 섬에도 발걸음이 멈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역시 사람과 함께하는 풍경이다. 그것도 사랑을 담은 얼굴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얼굴은 그 사람의 심경과 같아서, 온화한 표정을 짓는 이를 보면 어떤 인생을 사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요즘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를 돌보며 함께 다니는 것을 자주 본다.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아기를 다루듯 할머니에게 과자를 조금씩 떼어 먹이기도 하고, 바람 부는 날이면 담요를 덮어주기도 한다. 마치 남은 인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노라고 할머니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두 사람의 웃음 띤 얼굴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것 같다. 어쩌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보다 주는 이에게서 더 흐뭇한 기쁨이 엿보인다. 행복이란 자신의 처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목욕탕에서 노인의 등을 밀어주던 젊은 새댁,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이를 위해 뒤에서 밀어주던 어떤 이, 병원에 진찰 받을 시어른을 모시고 온 며느리, 가족을 위해 푸짐하게 장을 봐 오는 주부, 연탄을 가득 재어놓고 흡족해 하던 옛 어머니의 표정 등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나는 사는 날까지 타인들에게 몇 점의 멋진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좋은 영상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듯, 이젠 남들이 간직하고 싶을 그림이 되어주고 싶다. 전화가 잘못 걸려 와도 상냥히 응대하고, 길을 묻는 타인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며, 가족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내기보다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늘 어떤 그림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산다면, 내 모습도 밀레의 작품같이 오랫동안 보고 싶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 pek0501 작, 2005년.

 

......................................

 

오늘 갑자기 이 글이 생각나서 꺼내어 올립니다. 제가 이런 글도 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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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4-12 0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좋은 마음으로 쓴 글은
언제 꺼내어 들추더라도
즐거웁지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4-12 15:49   좋아요 0 | URL
오우, 된장님이 무플이 될 뻔한 걸 구해 주셨네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어제 투표결과 방송을 보다가 그만 잠 잘 시간을 놓쳐 버렸어요. 이미 달아나 버린 잠이 쉬이 올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런 김에 컴퓨터를 켰고, 그러다가 돌발적으로? 이런 글을 올렸어요.

저의 부모님과 저는 서로 다른 당에 투표해서, 참 가족 간에도 의견 통일이 안 되는는구나, 하면서 그러니 남북통일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했답니다. ㅋ
방문에 감사 드리며...

신지 2012-04-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도 쓰시는구나 했는데 꽤 예전의 글이었군요.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저도 오랜만에 어릴 적 생각이 나는군요
"늘 어떤 그림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산다면"
그렇네요... 저도 이 말 꼭 기억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4-14 16:46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쓴 글이라 지금 보면 좀 웃겨요. 뭐 저런 글을 썼나, 싶고 그래요. 아마 그땐 제가 착했나 봐요. ㅋ
 

 

 

 

1. 즐기는 것 : 공자는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을 최고로 쳤다.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은 못하다.”

 

 

글쓰기를 예로 들면 이렇게 되겠다.

 

 

글쓰기를 아는 사람보단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낫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단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 더 낫다.

 

 

즐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다는 것.

 

 

 

 

 

 

 

 

 

 

 

 

 

 

 

 

 

 

 

 

2. 1만 시간의 법칙 : ‘l만 시간의 법칙’을 소개하고 있는, 말콤 글래드웰 저, <아웃라이어>라는 책이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어떤 일에 하루 세 시간씩 10년간 몰입하여 1만 시간을 보낸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책에 의하면, 다니엘 레비틴(Daniel Levitin)은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수준의 전문가, 마스터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스케이트선수, 피아니스트, 체스선수, 숙달된 범죄자, 그밖에 어떤 분야에서든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이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연습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결국 ‘1만 시간의 법칙’을 실천한다는 것은 성공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걸 말하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가 성공만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닐 듯싶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기만의 취미가 있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특히 쓸쓸할 수 있는 노년에 하루에 몇 시간씩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3. 자기만의 세계 :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취미로 게이트볼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데, 게이트볼이 없었다면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낚시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도, 낚시 없이는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에 기대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즐기는 일’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영화 감상, 음악 감상, 악기 연주, 등산, 낚시, 그림 그리기 등 든 무엇이든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즐거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무엇에 빠져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불행하진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무료하지 않게 살려면 꼭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세계(자기만의 취미)를 가질 것.’ (여기에 건강과 경제적 안정은 기본 조건.)

 

 

자기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은 그 세계를 즐긴다는 것이다.

 

 

 

 

 

4. 글쓰기의 즐거움 : 학창시절에, 심심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피아노를 치면 기분전환이 되곤 했다. 지금은 피아노 대신 글쓰기가 그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어느 쪽으로 마음을 둘까>의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리고 나서 이틀 뒤에 읽어 보니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고쳤다. 고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른 형식의 문장일 땐 반복하는 말을 피하기

 

 

 

 

초고 : 10년간 초중고 학생들에게 논술 수업을 해 주며 돈을 벌었어. 고3학생에게 개인지도를 할 때는 내 체중이 빠지기도 했지. 논술시험을 망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까 봐, 수업료도 적지 않았으므로 큰 돈 받고 그 결과가 나쁠까 봐. 그러면 그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으므로.

 

 

수정한 글 : 10년간 초중고 학생들에게 논술 수업을 해 주며 돈을 벌었어. 고3학생에게 개인지도를 할 때는 내 체중이 빠지기도 했지. 논술시험을 망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까 봐, 수업료도 적지 않았으므로 큰 돈 받고 그 결과가 나쁠까 봐. 그러면 그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잖아.

 

 

 

 

초고의 ‘없으므로’를 ‘없잖아’로 고쳤다. 이럴 땐 같은 말 반복이 거슬려서다.

 

 

2) 같은 형식의 문장일 땐 반복하는 말로 통일하기

 

 

 

 

초고 : (…) 이런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행복한 것이라고,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이라고.

 

 

수정한 글 : (…) 이런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니 행복한 것이라고,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으니 행복한 것이라고.

 

 

 

 

초고의 ‘받았다는 점에서’는 ‘받았으니’로 고쳤고, 초고의 ‘얻을 수 있어서’는 ‘얻었으니’로 고쳤다. 이럴 땐 같은 말 반복이 통일감을 주어서다.

 

 

나에게 글쓰기란 문장을 가지고 노는 일이며, 그리하여 나만의 세계를 갖는 일이다. 아마 난 늙어서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서 혼자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가 있는 한.

 

 

 

 

 

5. 독서의 즐거움 : 글쓰기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독서를 좋아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다음의 글은 글쟁이라면 누구나 관심 있게 읽을 만하리라.

 

 

 

 

나는 대개 차 안에서 오디오북을 듣고 (…) 어디에 가든지 책 한 권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느 때 탈출구가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을 때도 있고, 수강 취소 신청서에 지도 교수의 서명을 받으려고 어느 따분한 대학 건물의 복도에서 (…) 15분쯤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그밖에도 공항 대합실에서, 비오는 오후에 빨래방에서, 그리고 귀중한 신체 일부를 난도질당하려고 최악의 장소인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지각하는 바람에 꼬박 30분을 허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책은 필수품이 아닐 수 없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126쪽~127쪽.

 

 

 

 

이처럼 언제나 책을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집중력이 있어야 스티븐 킹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 그런데 스티븐 킹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책이 좋아서 읽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대개 일년에 책을 70~80권쯤 읽는다. 주로 소설이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읽는 게 아니라 독서가 좋아서 읽는 것이다. 나는 밤마다 내 파란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다. 소설을 읽는 것도 소설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176쪽.

 

 

 

 

그리고 그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의 아들 오웬이 일곱 살 때쯤에 색소폰 연주자에 관심을 가져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테너 색소폰을 사 주고 음악인 보위 씨에게 레슨을 받게 해 준 얘기다. 그리고 아들에게 연주의 재능이 있길 바랐다. 그런데 7개월 후 그는 색소폰 레슨을 중단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아들이 색소폰 연주를 좋아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오웬의 속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습을 중단해서가 아니라 정확히 보위 씨가 정해준 시간 동안만 연습을 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나흘은 방과 후 30분씩, 그리고 주말에는 한 시간씩이었다. (…) 그러다가 연습 시간만 끝나면 곧바로 색소폰을 케이스에 집어넣었고, 다음 레슨이나 연습 시간이 될 때까지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 아들이 색소폰으로 진짜 공연을 하는 날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연습만 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즐거움이 없다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가 더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고 재미도 있는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낫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181쪽~182쪽.

 

 

 

 

 

 

 

 

 

 

 

 

 

 

 

 

 

 

 

 

 

 

 

 

 

6. 논어를 음미하다 : 앞에서, 나에게 글쓰기란 문장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독서 역시 나에겐 문장을 가지고 노는 일이다. 문장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좋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독서를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독서를 하는 첫째 이유는 책이 그저 재밌기 때문이다. 책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 ‘논어 열풍’으로 논어를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 밑줄을 친 구절을 다시 음미하며 즐겼다. 여러분도 읽으며 즐겨 보시길.

 

 

(“ ” 안의 문장은 <논어>에서 발췌한 것임.)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 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남이 자기의 실력을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또한 군자답지 아니하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다.”

 

 

“사람으로 인자하지 않으면 예(禮)는 해서 무엇할 거며, 사람으로 인자하지 않으면 음악은 해서 무엇하랴.”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게 넓고, 소인(小人)은 노상 근심에 차 있다.”

 

 

“빈한(貧寒)하면서 원망하는 일이 없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기는 쉽다.”

 

 

“군자는 자기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소인은 남에게 추궁한다.”

 

 

“과오를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과오라 하겠다.”

 

 

“비루(鄙陋)한 사나이와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는 그것을 얻으려고 근심하고, 그것을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게 될까 근심한다. 진실로 그것을 잃게 될까 근심한다면 못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그것이란 벼슬자리를 말함.)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은 못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즐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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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4-0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루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단 한가지만 빼고요. 저는 소설이 제일 어려워요.^^;;

페크pek0501 2012-04-06 18:35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반갑습니다.
저도 소설이 어려워요. 그래서 한때 소설 평론집을 열심히 읽었어요. 그러면 공부가 되는 줄 알고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 많아요. 특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의 경우, 왜 받았는지 무엇이 훌륭한 것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물론 잘 쓴 건 알겠지만 어느 부분이 월등히 잘 쓴 것인지 ...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4-0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사람이 편하게 읽으려면 쓰는 사람은 고생해서 써야 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페크pek0501 2012-04-06 18: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님도 글을 많이 써 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저도 그걸 실감해요.
위의 글처럼 뻔한 내용의 시시한 글을 쓰는 것도 한 편의 완결된
글이 되기 위해 신중히 구성하고 편집한답니다. 아휴~~

그러나 글쓰기는 어려워서 매력적입니다. 쉽다면 아마 금방 흥미를 잃을 걸요.ㅋㅋ


잘잘라 2012-04-0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영에 빠졌어요. 전엔 도서관 옆으로 이사해야지 했는데, 지금은 수영장 옆으로 갈 생각만 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영장과 도서관 사이에도 집이 많아요. 거기로 이사가면 게임끝인데..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동네에선 거실에 앉아서 솔밭 하늘 위로 백로가 날아가거나 오늘처럼 미끈한 보름달이 떠오르는 멋진 풍경을 볼 수가 없을 것이고... 이런 바보! 내년에 고민하면 될 문제를 가지고 이러구 있네요^^;; (모처럼 길게 쓴 댓글이라 포기 못하고 이렇게 남기고 갑니다. 페크님 굿나이트^^!)

페크pek0501 2012-04-07 15:50   좋아요 0 | URL
반가운 메리포핀스님, 솔밭, 백로, 미끈한 보름달... 너무 시적이라 멋져요. 그런 곳에 살면 그렇게 되나요? 저의 집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옆에 있어서 그런 시적인 낱말들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래서 부럽네요.
수영에 빠지신 것도 부러워요. 저는 요즘 주부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발레를 배워 볼까 생각중인데 생각만 하고 실천은 안하고 있어요. 배우게 되면 일주일에 몇 번은 나가야 할 텐데 너무 바쁠 것 같아서요.
오늘도 일이 있어 나갔다가 왔더니 임파선이 조금 부었어요. 쉬라는 몸의 신호죠. 그래서 이제 댓글 쓰고 쉬려고 해요. ㅋㅋ
좋은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숲노래 2012-04-0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도 마음껏 좋아해 주셔요

페크pek0501 2012-04-08 14:37   좋아요 0 | URL
반가운 된장님. 저도 님처럼 부지런해져야 할 것 같아요. 게으르니까 하루 하루가 휙휙 지나가서 마음껏 좋아할 시간이 없네요.
오늘부터 부지런해져야겠어요. ㅋㅋ

굿바이 2012-04-0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봄은 즐기고 계신가요?

그저 이야기가 좋아서 소설을 읽는다는 저 유명한 분의 말이 오늘따라 너무 부럽습니다^^

페크pek0501 2012-04-08 14:35   좋아요 0 | URL
반가운 굿바이님. 봄을 즐기기보다 봄이 못 달아나도록 꼭 붙잡고 산답니다.
곧 5월이 되면 땀이 삐질삐질 날 것 같아요. 봄을 느끼는 것도 4월이 지나면 끝이라는 것. 그래서 꼭 붙잡고 있어요. 걷는 운동으로 봄을 많이 만나고 있
어요.ㅋㅋ

님이 쓰신 러셀의 에세이 - 런던통신~ -의 리뷰, 참 좋았어요. 저도 그런 리뷰를 쓰고 싶어요. ㅋ 너무 스티븐 킹을 부러워하지 마시길... ㅋ

프레이야 2012-04-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든 좋은 의미로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을 따라갈 순 없을 것 같아요.
페크님, 우리도 좋은 봄날, 마음의 부자로 살아요.^^

페크pek0501 2012-04-09 13:45   좋아요 0 | URL
반가운 프레이야님, 좋은 향기가 맡아져요. ㅋㅋ
즐기자, 라는 말에 나쁜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니 '좋은 의미로 즐기는 삶'이란 말이 꽤 괜찮은 말 같아요.
예,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요 우리...ㅋㅋ

글샘 2012-04-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논어... 논어 재미없어요. ㅠㅜ 시대가 논어를 필요로 하는 거 같은데... 말쫌 들어라~ 이러고... 말도 듣기 싫다구요. ㅎㅎ

2. 1만 시간의 법칙 ... 꼭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을까용? ㅠㅜ 초보때 얼마나 재밌는데... ㅎㅎ

3. 자기만의 세계... 음... 나이가 먹으면서... 글자를 읽는 데, 또는 글을 쓰는 데 곤란이 생기겠죠? 그래서 요즘 생각하는 게... 그림을 그려볼까 합니다. ㅎㅎ 1만 시간 그려볼까요. ㅎㅎㅎ

4. 글쓰기의 즐거움... pek님 정도면 즐겁게 쓰시는 거 같아요. ^^ 저는 좀 강박적으로 써요. ㅎㅎ 숙제처럼 쓰는 날도 있고, 신나서 쓰는 날도...

5. 독서의 즐거움... 이제 곧 눈이 책을 거부할 거 같아서... 이제 옛사랑은 잊을 준비를 해야겠다는...

6. 다시 논어... 논어가 싫어요. ㅠㅜ 소인은 소인대로 사는 법이 있다니깐요. ㅋㅋㅋ 장자나 노자가 자꾸 땡깁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어렸을 땐, 나도 나름 논어 팬이었는데 말이죠.

페크pek0501 2012-04-09 13:44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갑습니다 글샘님. 잘 지내고 계시나요?

1. 하하하... 논어가 싫으시다고요. 으음~~ 저도 공자와 맹자보다는 장자와 노자를 좋하합니다만 논어에서 뽑은 구절들은 좋하합니다. 그 이유는 꼭 군자답게 살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요. 저처럼 판단력이 약한 사람에겐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게 해 주거든요.

2. 저도 성공만을 지향한다든지 전문가만 지향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의 글에서 이렇게 썼죠. "하지만 내 생각엔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가 성공만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닐 듯싶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살자는 뜻이죠.

3. 5. 는 동의할 수 없는데요. 고 박완서 작가님은 80세까지 작품을 쓰셨는데, 저도 한 75세까지 책 읽고 글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건강인데 그래서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늙으면 노안이 문제인데, 노안 안경을 쓰면 될 것이고, 신문 보니 노안 수술도 성공적이라 하니 그리 걱정할 것은 못 된다고 봐요.(의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글샘님도 아마 책읽기와 글쓰기를 (나중에 늙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리라고 예상합니다. ㅋㅋ 꼭 그러시길 저는 바랄 것이고요. (글샘님이 서재 문을 닫는다면 저는 너무 섭섭할 것 같아요.)

추신 : 글샘님은 제가 서재인 초보시절에 아셨던 분이라 마치 옛날 친구를 만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요. 글샘님과 순오기님과 중전님이 저에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방문해 주시면 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ㅋㅋ

순오기 2012-04-09 22:17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글샘님 못 보면 정말 사는 재미가 없을거에요.^^

페크pek0501 2012-04-10 13:41   좋아요 0 | URL
딩 동 댕... 순오기님, 맞아요.
또 순오기님을 알라딘에서 못 보면 사는 재미가 없을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저를 포함해서요. 그러니 오래 오래 계셔 주세요. (저를 위해서라도요.ㅋ) 끄응...

2012-04-13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4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5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5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6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소설을 읽는 재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줄거리, 작가가 말하려는 메시지나 의도, 좋은 표현의 문장 등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것들보다도 소설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읽는 재미를 최고로 친다.

 

 

신형철의 해설에 이런 글이 있다.

 

 

“소설의 가치를 정서적, 미학적, 인식적 가치로 분류해 보는 일은 단순하나마 쓸모 있는 일일 것이다.”(박완서, <기나긴 하루>, 265쪽)

 

 

그에 따르면 소설에서 다음의 세 가지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정서적 가치 - 감동과 교화로 요약될 정서의 어떤 파고를 유발할 때의 가치.

미학적 가치 - 문장 세공술과 서사 건축술의 장관을 보여 줄 때의 가치.

인식적 가치 - 인간과 세계의 ‘숨은 진실’을 예리하게 제시할 때의 가치.

 

 

이를 쉽게 말하면,

정서적 가치란 감동과 교화가 있을 때 생기는 가치.

미학적 가치란 문장의 아름다움이 있을 때 생기는 가치.

인식적 가치란 숨은 진실이 있을 때 생기는 가치.

 

 

이 중에서 인식적 가치에서 말하는 ‘숨은 진실’이 내가 앞에서 말한 ‘비밀’에 해당하겠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에서 인식적 가치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소설가는 자신이 아는 ‘비밀’을 독자에게 알려 주는 사람인 셈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커다란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는 더듬거려 가며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밝혀 보려고 애쓰는 발견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또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도덕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인간의 비밀, 세계의 비밀 등 수많은 비밀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다 알지 못한다. 소설가는 자신이 포착한 그 비밀들을 작품을 통해 보여 준다. 이때 그 비밀이,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선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긴 하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일 때에 독자는 소설가의 통찰에 감탄한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2.

 

우리가 예상했던 일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소설이 있다. 박완서 저, <기나긴 하루>라는 소설집에 들어 있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소설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이 소설에서 화자의 아들 창환은 1987년 ‘민주화투쟁’의 거리에서 경찰의 쇠파이프를 맞고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아들이 죽은 것과 관련한 이야기를, 화자는 손위 동서와 전화로 통화하며 쏟아 낸다. 이 쏟아 낸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경험하지 않아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이름 붙이겠다. 그럼 이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비밀’이 무엇인지 정리해 본다.

 

 

비밀 1 :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화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배려해 주면 고맙기보다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화자의 친한 친구 명애는 아들 잃은 화자를 배려하여 자기 아들의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는다. 딴 동창을 통해 그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은 화자는 결혼식장으로 달려간다. 화자는 친구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남에게 배척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형님 제가 뭘 잘못했다구 이렇게 손도를 맞습니까? 제가 손도를 맞는다는 건 창환이의 죽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게 되거든요. 그럴 수는 없었어요. 저는 떨치고 일어나 즉시 준비를 하고 환하게 웃으며 결혼식장으로 달려갔죠. 명예가 어쩔 줄 몰라했지만 저는 늠름하게 굴었어요. 마음으로부터 축하도 했구요. 명애 아들이 장가드는 거 저 정말로 안 부러웠어요. 걔 아들하고 창환이하곤 댈 것도 아니니까요.”(185쪽)

 

 

“(아들 장가들일 때 저를) 따돌리는 것만 아니꼬운 줄 아세요. 너무 잘 해주는 것도 싫어요. 그게 다 한통속이거든요.”(187쪽)

 

 

 

비밀 2 : 아들을 잃고 나서 화자가 부러운 사람은 ‘남의 산 자식’이 아니라 ‘죽은 남편’이다.

 

 

“우리 그이가 회갑도 못 넘기고 세상 뜬 데 대해서도 여한 없어요. 창환이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가 휘딱 앞서갔으니 참 복도 많다 싶어 부럽다 못해 얄밉기까지 한걸요. 제가 부러운 건 오직 그이뿐이에요.”(189쪽)

 

 

 

비밀 3 : 아들을 잃고 나서 화자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달라진다.

 

 

“창환이를 잃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뭔 줄 아세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 증조모님 제사도 안 중요해진 것 중의 하나일 뿐이지, 다는 안녜요. 그런 변화엔 저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192쪽)

 

 

“(또)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내가 더 중요해요. 남을 위해서 나를 속이기가 싫어요. 무엇보다도 피곤하니까요. 가장 쓰잘데없는 걸로 진 빼기 싫어요. 또 있구말구요. 그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 게 더 중요해요. 형님보담은 좀 덜했지만 저도 물건 욕심이 꽤 있었잖아요. 누구네 집에 가서 예쁜 접시나 찻잔만 봐도 어디 쩨인가 물어보고, 역시 다르다고 감탄하고, 눈독 들인 건 기어코 장만하고, 그게 사는 재미였죠. (…) 갖고 싶은 걸 애써 장만하고 나면 그리 기쁘더니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짐스러워요. (…) 생각만 해도 타지도 썩지도 않을 물건들한테 치여 죽을 것처럼 숨이 답답해지네요.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내가 물건이 싫으니까 남에게도 물건을 선물한 적이 없어요. 물론 창환이 잃고 난 후에 생긴 새 버릇이지만서두요.”(193쪽~195쪽)

 

 

 

비밀 4 : 아들을 잃고 나서 화자는 젊어졌다는 소리가 욕같이 들린다.

 

 

“지금은 아네요.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는지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197쪽)

 

 

 

비밀 5 : 화자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들의 빈자리가 가장 크게 느껴질 땐, 안에서 맞아줄 사람이 없을 때가 아니라 있을 때이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할 때와 안에서 창숙이나 창희가 열어줄 때가 있잖아요? 안에서 맞아줄 사람이 있을 때가 없을 때보다 좋은 게 인지상정이련만 전 그 반대예요. 그들의 마중을 받으면 창환이의 빈자리가 왜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르게 무너져내리듯이 밖에서 꾸민 나를 포기해버리죠. 그러나 열쇠로 문을 따고 빈집에 들어섰을 때는 딴판이에요. 창환아, 에미 왔다. 그렇게 활기 넘치는 소리로 말을 걸며 들어가는 거예요. 핸드백을 내던지면서 옷을 벗으면서도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도 연방 말을 시키죠. 그럴 때는 집 구석구석이 창환이로 가득 차는 거예요.”(200쪽)

 

 

 

독자는 여기까지만 읽어도 자식을 잃고 나면 어떤 모습의 어머니로 살아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소설이 여기까지만이라면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이 소설을 평범한 작품에서 수작으로 끌어 올린 것은 다음의 비밀에 있다.

 

 

 

비밀 6 : 화자는 병든 청년인 아들을 웬수덩어리로 취급하는 친구를 보고서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친구를 부러워한다.

 

 

화자의 친구 명애가 화자를 어느 친구의 집에 데리고 간다. 그 집엔 몇 년 전에 차 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나서 하반신마비에다 치매까지 된 청년 아들이 있었다. 그 친구는 그 아들을 이름 대신 ‘아이구 이 웬수, 저놈의 대천지 웬수’라고 불렀다. 화자는 명애가 왜 그 집 모자의 비참한 꼴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 못한 경우를 보고 위로받아라’하는 것이었음을.

 

 

“인간성 중 가장 천박한 급소죠. 그 급소만은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아무리 잘나고 건강한 아들을 보고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미리 보호막을 친 거였는데, 딴 친구도 아닌 명애가 나를 그렇게 취급하다니, 정말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어요.”(205쪽~206쪽)

 

 

“(그 친구가 아들이) 욕창이 생길까봐 하루에도 몇 번씨 그 짓을 한다나봐요. (아들을) 엎어 뉘었다가, 바로 뉘었다가, 모로 뉘었다가, 그 장대한 아들을 자유자재로 굴리면서 바닥에 닿았던 부분을 마사지하는데, 그동안도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거였어요. 아이고 이 웬수덩어리는 무겁기도 해라. 천근이야, 천근. 근심이 있나 걱정이 있나, 주는 대로 처먹고, 잘 삭이고 잘 싸니 무거울 수밖에. 내가 이 웬수덩어리 때문에 제명에 못 죽지 못 죽어, 이 웬수야.”(206쪽)

 

 

“우리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명애가 먼저 아이 참, 하면서 손을 내밀어 거들려고 했죠. 나도 덩달아 환자를 뒤집는 일을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구요. 그러나 웬걸요. 우리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환자가 이상한 괴성을 질렀어요. 여지껏 흐리멍덩 공허하게 열려 있던 환자의 눈이 성난 짐승처럼 난폭해지더군요. 얼마나 놀랐는지요. (…) 그때 비로소 악담밖에 안 남은 것 같은 친구 얼굴에서 씩씩하고도 부드러운 자애를 읽었죠. 아이구, 이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 하는 친구의 말로 미루어 어머니 외에 아무도 그를 못 만지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닌가봐요.”(207쪽)

 

 

그리고 화자는 난폭해진 아들을 다루는 그 친구를 부러워한다. 이것이 반전이 있는 대목이다.

 

 

반전.

“저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한 적이 없는 제가 말예요.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형님, 날카로운 삼지창 같은 게 가슴 한가운데를 깊이 훑어내리는 것 같았어요.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더군요. (…)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207쪽~208쪽)

 

 

친구 명애가 화자를 위로하기 위해 '병든 아들이 있는' 친구 집에 데리고 갔는데, 위로는커녕 화자를 더 질투 나게 부럽도록 만들었다는 것. 놀라운 반전이다.

 

 

 

*****

나는 이런 여러 개의 비밀들을 음미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의 생각과 감정이 어떠할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이 빗나가기 십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게 해 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모처럼 수작을 읽는 좋은 독서를 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깐 예전에 어떤 소설집에서 읽은 거였다. 그래서 두 번 읽은 게 되어 버렸다.)

 

물론 독자마다 다른 시각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 해석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 이것은 문학의 매력이다.

 

끝으로, 작가는 실제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미 경험한 뒤에 이 소설을 썼음을 밝혀 둔다. 이 사실을 알고 읽는다면 독자로서 더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는다면, 그는 그 작가의 애독자일 것이다. 나 역시 애독자로서 박완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었다. 한때 그의 단편소설집을 ‘문학 교과서’로 생각하고 즐겨 읽은 적도 있다.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을 다 갖춘 작가 같다.

 

 

그의 작품 중, 추천할 만한 것을 골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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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3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란 군데라가 그런 말을 했군요.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생각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 하는 게 소설간 것 같아요.
박완서 소설은 나이들면서 정말 읽고 싶어지는데 이렇게 못 읽고 있네요.
다른 책에 치어서...ㅠ

페크pek0501 2012-03-30 17:24   좋아요 0 | URL
박완서 작가의 글을 좋아해서 8권쯤 읽었어요. 책장에 한데 모여 꽂혀 있지요.
전 그의 산문보단 소설이 좋았어요. 문장의 좋은 표현이 많아서 그의 소설을
베껴 쓴 적도 있어요. 고독을 잠깐씩 꺼내 먹는 맛있는 알사탕으로 비유한 문장이 인상에 남아요. (아, 내 기억이 맞나?)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3-3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씨도 아들을 먼저 보냈기 때문에 박완서 씨와 공감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박경리 씨가 아들을 잃은 체험담을 담은 단편으로 '불신시대'가 있죠.

페크pek0501 2012-03-30 18:27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 얘기 생각나네요.

작가는 그런 슬픔을 겪어도 그것을 가지고 작품으로 탄생시키면 위안이 될 것 같아요. 글 쓰는 동안은 어쨌든 몰입하게 되니까요. 슬플 때 다른 일에 몰입하는 것만큼 좋은 게 있겠습니까. 쓰면서 슬프기도 하겠지만 치유의 글쓰기가 되는 셈이죠.

프레이야 2012-03-3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기나긴 하루' 전 못 읽었어요.
그치만 님이 골라주신 책들, 그 중에서도 전 '친절한 복희씨'를 참 좋아해요.
생의 이면에 있는 이야기, 생의 비밀.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묵상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페크pek0501 2012-03-31 13:44   좋아요 0 | URL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문학적이면서도 쉽고 재밌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8권쯤 읽어서 더 구입할 생각은 없고, 그냥 집에 있는 책으로 한번 더 읽어야겠어요. 같은 책 두 번 읽는 건 다른 책으로 두 권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깊이 이해할 수 있거든요. 감사합니당. ~~

순오기 2012-03-3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은 1988년 5월에 남편을 보내고 같은 해 8월에 생떼같은 아들을 보내셨지요.
하늘이 무너졌던 그 해~~ 소설 속의 화자가 작가님의 체험이라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저런 참척을 안 겪었다면 어찌 저런 묘사를 할 수 있겠어요.ㅠ
이런 페이퍼는 아무나 못쓰는 페이퍼지요~~ 좋아요, 아주 많이!

페크pek0501 2012-03-31 13:45   좋아요 0 | URL
인기 블로거님이 그렇게 호평을 해 주시니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ㅋㅋ
사실 소설에 대한 저의 주관적인 느낌을 객관화해서 쓰는 것 같아 이런 글이 좀 부담스럽거든요.
감사합니다. 아주 많이!


숲노래 2012-03-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한테나 오늘 하루가 가장 좋은 날이라고 여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다 소설꾼이 되겠지요

페크pek0501 2012-03-31 13:46   좋아요 0 | URL
하루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삶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겠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마태우스 2012-03-3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경험을 그대로 쓴다고 좋은 소설이 되진 않는다,는 걸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박완서님의 저 소설은 제 머리칼을 쭈뼛거리게 만드네요. 어쩌면 좋은 소설가와 일반인은 유전저가 다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네요. 삶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느낌이랄까요.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됐어요 감사.

페크pek0501 2012-03-31 16: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30대 초반에 문학 강의 - 드라마, 소설, 수필, 시 등 - 를 들으러 문화센터,평생교육원 같은 데를 한참을 다녔는데(이런 공부하는 재미로 살던 시절임) 제가 내린 결론은 문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유전자가 다르고, 또 삶의 경험이 달라요.

한마디로 대체로 행복하게만 산 사람은 문학을 할 수 없어요. 마음고생, 고통, 불행 - 이런 것들을 많이 겪은 사람은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또 거기다 그것을 뛰어나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도 있어야 해요. 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죠.

행복보다는 불행이 삶의 스승이에요. 생각을 깊게 만들기 때문.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때문. (그래서 앞으로 불행한 일 겪더라도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ㅋ)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ㅋ

마녀고양이 2012-04-0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가슴이 찡해서....
마지막 부분에서 울었어요. 그렇군요. 그 부러움.

페크pek0501 2012-04-04 13:03   좋아요 0 | URL
예, 이미 고인이 되신 작가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슬픈 얘기예요.

세상은 즐거운 듯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지만, 슬픈 일들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죠. 우리가 할 일은 안 슬픈 척하고 씩씩하게 사는 것, 이죠. 그러다 보면 웃을 일 생기잖아요. 웃다 보면 행복해지고요.

마고님, 오랜만의 방문이신데요. 반가웠어요. ㅋ

삐리리 2012-04-0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페크pek0501 2012-04-08 14:42   좋아요 0 | UR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삐리리님의 닉네임이 아주 좋군요.
경쾌한 삶이 느껴지는 이름이에요. ㅋ

신지 2012-04-14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쉽게 받아들이는 생각을 굳이 책이나 작품에서 반복할 때 가장 맥이 빠지더군요. ( 이거 읽고 바로 '환각의 나비' 주문했습니다. 진득하게 책을 보는 편이 아니어서 정말 소설책은 안 사는데...이 페이퍼가 얼마나 좋았으면요 ㅠ)

페크pek0501 2012-04-14 16:49   좋아요 0 | URL
환각의 나비, 그 책의 목차를 보니까 제가 두 작품만 안 읽었고 다 읽은 것들이네요. 박완서 작가의 책은 8권을 읽어서 이제 단편집은 못 사겠더라고요. 읽은 것과 겹치게 되니까요.

아마 좋은 독서가 되실 거예요. 쉽고 재미도 있으면서 의미는 깊지요.
"이 페이퍼가 얼마나 좋았으면요 ㅠ " - 이거, 호평 맞지요?

신지 2012-04-15 09:57   좋아요 0 | URL
나중에 보니 제 댓글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당연히 호평이지요. 박완서님은 에세이만 몇 권 있는데요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근데 아직은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페크님의 글 보고 아주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누가 좋은 작품이나 책을 소개해주면, 저는 참 좋아하는 편이어서...

제 말 앞부분은 밀란 쿤데라의 말에 무척 공감이 되어서 한 말입니다. 이 소설의 앞부분을 소개해주실 때 화자에게 저는 좀 삐딱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자의 마음이 이해가 되더군요 ㅠ

페크pek0501 2012-04-15 21:11   좋아요 0 | URL
신지님의 댓글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아요. ㅋㅋ 그냥 제가 물어본 것이랍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에세이보다 소설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고 만족스러운 적은 드문 것 같아요. 항상 소설이 더 낫지요.

호평에 감사드려요. 님처럼 좋게 봐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어느 날 대학생인 큰애가 말했어. 교환학생으로 뽑혀 외국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로는 축하한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어.

 

 

돈 쓸 일만 생기는군.

 

 

10년간 초중고 학생들에게 논술 수업을 해 주며 돈을 벌었어. 고3학생에게 개인지도를 할 때는 내 체중이 빠지기도 했지. 논술시험을 망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까 봐, 수업료도 적지 않았으므로 큰 돈 받고 그 결과가 나쁠까 봐. 그러면 그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잖아.

 

 

이젠 그렇게 신경 많이 써야 하는 고등학생 말고 중학생과 초등학생만 가르칠 생각이야. 문화센터 강사를 할까 하다가 학교를 택했지. 학교에서 논술 강사로 일하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을 수업하는 거라서 별 부담이 없어 좋아.

 

 

그런데 교실에서 수업하면서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지.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 하는 생각. 이럴 때 초라해져.

 

 

그래도 이 나이에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는 생각. 이럴 때 자부심이 생겨.

 

 

나, 1962년생이야. 예전에 젊었을 땐 이 나이쯤 되면 사모님 소리 들으며 우아하게 살 줄 알았어. 현실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법. 수업하기 위해 학교에 갈 때 전혀 우아하지 않다고 느껴.

 

 

그래도 나, 이렇게 생각할래.

 

 

내게 중등학교 정교사 교원자격증, 논술지도사 자격증, 석사학위 등이 있는데, 이런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니 행복한 것이라고,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으니 행복한 것이라고.

 

 

다음의 글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한 가지가 불만족스러우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법이오. 당신이 어느 것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오.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에서.

 

 

 

 

 

 

 

그대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걱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뀌진 않을 테니까.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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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12-03-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요플레 포장지를 핥아먹으면서
저도 전혀 우아해지지 않는다고 느껴졌어요 ㅠ

좀 막연하고 일반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는 여성의 일 중에 '선생님' 참 좋아보이던데요

페크pek0501 2012-03-29 15:04   좋아요 0 | URL
신지님. 요플레는 그렇게 먹는 게 정 답 입 니 다.ㅋ
커피를 마실 땐 우아하게... 고요.
이 글 쓰고 나서 우아함, 이란 말에 꽂혔어요. 그동안 이 말을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초라하게 느껴질 때 신지님의 이 말을 기억해 내겠습니다. 여선생님이 좋아 보인다는... 말.
힘이 솟는군요.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12-03-28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니까 우린 걱정할 게 전혀 없는 거네요.ㅎㅎ
좋은 글 감사해요. 걱정을 덜었어요.
그나저나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따님, 축하해야 되는 거죠^^
좋으시겠어요. 아흐~ 우리딸도 그런 거 좀 앞으로 하면 좋을텐데요.
글고 페크님, 왠지 논술지도 쪽 일 하시는 것 같단 생각했는데 맞네요.^^

페크pek0501 2012-03-29 15:06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레이야님. 걱정할 게 없는 거예요.
교환학생에 대한, 님의 댓글 읽고 님 덕분에,
“말로는 축하한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어.”이걸 추가해 넣었답니다. ㅋ 이걸 빠뜨리고 쓴 거죠. 저 이렇게 엉터리예요. ㅋㅋ

따님도 잘 하고 있을 거예요. ㅋ

제가 좀 문학적이면 좋을 텐데, 논술적이어요. ㅋ 그래서 글이 안 되고 있다는....ㅋ

노이에자이트 2012-03-2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력이나 자격증이 화려하네요.페크 님 연배의 여자들 중 이 정도 경력인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페크pek0501 2012-03-29 15:08   좋아요 0 | URL
ㅋㅋ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격증을 써 먹게 될 줄 몰랐어요. 대학교 4학년때 한달간 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적이 있는데, 교사란 똑같이 수업을 합니다. 그때 여러 반을 돌아다니며 같은 내용으로 반복 수업하는 것에 질려서, 학교 선생은 되지 말자, 그랬거든요. 그래서 졸업 후 다른 데 취직했었죠.
그런데 결혼한 이후에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인생은 미스테리입니다.ㅋㅋ

숲노래 2012-03-29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마음이 좋은 마음을 낳을 테니까요.

페크pek0501 2012-03-29 15:09   좋아요 0 | URL
예, 된장님.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고 하더군요. 중요한 건 웃는 마음인 거죠. ㅋ

마태우스 2012-03-2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페크언니는 자격증도 많으시군요. 논술지도 자격증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거 몰랐어요. 기생충 강의하는 건 자격증이 필요없거든요. 그냥 배워서 하면 될뿐.. 글고보면 전 의사면허증 말곤 별다른 자격증이 없어요. 알라딘 명예의 전당도 자격증으로 쳐주려나요.^^

페크pek0501 2012-03-29 15:10   좋아요 0 | URL

아, 마태우스님. 의사면허증 있으면 다른 자격증이 필요없는 거예요. 게임끝이죠. 거기에다 알라딘에서의 명성, 그거면 된 거죠. 뭐가 더 필요하나요? ㅋㅋ

신지 2012-03-29 18:01   좋아요 0 | URL
논술? 시간도 많고 그래서 내가 공짜로 가르쳐주겠다고 여러번 말했는데 아무도 좋아하지 않더군요. 세상은 자격증을 믿지, 사람을 믿지 않는구나, 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 중의 하나 ㅋㅋ

2012-03-30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3-30 14:55   좋아요 0 | URL
신지님, ㅋㅋ 웃깁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자격증, 이라는 종이 쪼가리를 믿는단 말씀이죠? 그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지요.ㅋ

stella.K 2012-03-2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똑똑하고 든든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페크pek0501 2012-03-30 14:58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정말 그래요. ㅋㅋ 제 뱃속에서 어떻게 그런 똑똑한 딸이 나왔는지 제가 감탄한다니까요. 대학3학년인데 벌써 학교에서 보내 주는 미국 견학 2주일간 갔다왔어요. 새벽까지 공부하기도 하고, 자원봉사 100시간을 채우기도 하고, 토플 토익 공부도 하고... 매학기 장학금은 꼭 타 오고... 제가 "넌 누굴 닮아 그렇게 똑똑한 거니?"라고 묻곤 해요.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답니다.

ㅋㅋㅋ 여기까지 재수없게 딸자랑질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ㅋㅋ

stella.K 2012-03-30 15: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한테는 마음 것 하셔도 돼요.^^

꼬마요정 2012-03-3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는 따님이 부럽습니다. 저도 교환학생이든 머시기든 외국 가서 공부 한 번 해보고 싶네요...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냥 놀러 가고 싶구나..입니다.^^

페크pek0501 2012-03-30 15:00   좋아요 0 | URL
아, 꼬마요정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죠?

공부하든지 놀러 가든지,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꼬마요정님이 저는 부러운데요. 저는 외국 가는 게 싫거든요. 여행이든 뭐든... 집에 편안히 있고 싶어요. ㅋㅋ 큰애가 저와 달라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ㅋ 또 보 아 요.

2012-03-31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03-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글을 이제야 봤네요~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더 반가워요.
따님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기회를 얻었네요~ 부러워요, 축하하고요!^^

페크pek0501 2012-04-02 14:20   좋아요 0 | URL
ㅋㅋ 순오기님이 공감하신다니 기쁩니다. 너무 솔직한 글이라 괜히 썼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글을 올리고 나서 확 지우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렇게 제 자신이 너무 드러난다고 느낄 때 그래요. 꼭 이런 글 쓰고 나면 다음부턴 나를 드러내는 글 안 써야지, 다짐을 한답니다. ㅋ

자식은 잘해도 근심, 못해도 근심인 것 같아요. 외국 가서 얼마나 적응을 잘 할지, 그 공부가 도움이 될지, 어떨지... 등등 걱정이 되네요. 그래서 사실은 기쁜지도 모르겠어요. 본인은 아주 기뻐하고 있어요. 자신 없어했거든요.

순오기님, 지금 비 와요. 창문 열고 비 냄새 맡으며 커피 한 잔 해야겠어요. 저 오늘 늦잠 자고 일어났어요. 모처럼 달콤하게... 아, 저는 식구들 나가고 없는 월요일 아침이 너무 좋아요. 아마 순오기님은 이런 기분을 잘 아실 것 같아요. ㅋ 좋은 하루 보내세요. 비와 함께...
 

 

 

 

1. 부부들은 변한다 : 나이에 따라 부부들이 사는 모습이 변한다고 한다.

 

 

다음의 글을 읽고 웃었다.

 

 

 

 

부부가 저녁을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20대 신혼부부 : 바로 밥상을 치운다. 다 끝낸 후에 마저 밥을 먹는다.

 

30대 부부 : 서로 마주보고 살짝 웃으며 먹던 밥을 다 먹고, 커피도 마시고 로맨틱한 음악을 틀고 잠자리에 든다.

 

40대 부부 :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밥을 다 먹고, TV와 신문을 다 보고 샤워까지 하고 각자 잠자리에 든다.

 

50대 부부 : 잠깐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다 갑자기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밥이나 처먹지, 뭘 보냐?”

 

60대 부부 : 부인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고, 당황한 남편이 말한다. “알았어. 안 흘리고 조심해서 먹을게.” 그리고 먹다 흘린 밥알을 줍는다.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200쪽.

 

 

 

 

60대 부부의 이야기가 좀 과장된 것일지는 몰라도, 돈벌이를 하지 않는, 퇴직한 남편에 대해 푸대접하는 아내들이 많다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문과 TV 뉴스를 통해 ‘은퇴 남편 증후군’을 겪으며 힘들어 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로 인해 황혼이혼까지 일어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도 젊었을 땐 서로 열렬히 사랑하던 관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토록 과거에 사랑해서 생긴 현재의 결말이 결국 그런 모습이라니 좀 슬픈 일이 아닌가.

 

 

 

2. 변해야 한다 : 한때 남편에게 사랑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던 젊은 아내가, 세월이 흘러 나이든 뒤엔 남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 이것 충격적이다.

 

 

 

 

‘남편은 집에 두면 근심덩어리, 데리고 나가면 짐덩어리, 마주앉으면 웬수덩어리, 혼자 보내면 사고덩어리, 며느리에게 맡기면 구박덩어리’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229쪽.

 

 

 

 

나이가 들면 부부들이 사는 모습이 변하는 게 슬픈 결말이긴 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젊은 매력을 발산하는 남편과 은퇴해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늙은 남편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마음이 그냥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옳을까, 아니면 슬픈 결말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게 옳을까.

 

 

아내의 푸대접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면 함께 사는 게 서로 불편하고 싫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흐르는 대로 한다며 이혼하면 어떻게 될까. 한동안 편할지 몰라도 결국 각자 홀로 쓸쓸한 노년을 살게 될 것이다. 만약 서로를 위해 변하려고 함께 노력한다면 쓸쓸하지 않은 노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우선 남편들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남편들도 집안일을 배우려고 노력해서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아내에게 밥을 차려 달라고 귀찮게 구는 남편이 되지 말고, 혼자 밥 차려 먹을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요리를 배워서 오히려 가족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남편이 되면 참 좋을 것 같다. 요즘 요리학원에 할아버지 수강생들이 많이 몰린다고 하는데, 좋은 현상이다. 또한 아내도 그런 남편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 주고, 남편의 노력에 협조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식사문제뿐만 아니라 청소, 빨래 등 모든 집안일을 부부가 나눠서 한다면, 남편이 근심덩어리, 짐덩어리, 웬수덩어리, 사고덩어리, 구박덩어리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3. 두 세계의 공존 : 예나 지금이나 어느 책에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이란 제목의 글이 있을 법하다. 물론 아내들을 겨냥한 글이다. 남편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아내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글이 있겠다. ‘한쪽에선 남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선 남편을 귀찮아하는 아내들이 있는 세상’인 것이다. 두 세계의 공존.

 

 

또 홀로 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재혼하는 경우도 많다. ‘한쪽에선 남편을 갖고 싶어 하는 아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선 남편을 귀찮아하는 아내들이 있는 세상’인 것이다. 두 세계의 공존.

 

 

이렇듯 서로 정반대의 두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난 두 세계의 공존이 신기하다.

 

 

 

4. 행위자-관찰자 효과 : 우리는 자신과 남에 대해 판단할 때, 같은 행동을 할지라도 다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나쁜 행동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합리화하길 좋아한다.

 

 

나도 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해 ‘어쩔 수 없었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면, 어느 모임에 자신이 늦을 경우엔 ‘차가 막혀서 어쩔 수 없이 늦은 거야.’라고 생각하고, 남이 늦을 경우엔 ‘당신은 매너가 없기 때문에 늦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존스와 니스벳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오해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행위자-관찰자 효과’를 들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그 행동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또는 그걸 원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197쪽.

 

 

 

 

이에 대해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건 이렇다.

 

 

 

 

회식 때문에 늦은 남편은 항상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

 

“중요한 자리야. 안 가면 안 되는 분위기였어. 나라고 좋아서 있었겠어.” (…)

 

하지만 남편의 변명을 듣는 아내의 마음속에는 하나같이 구차한 거짓말로 들린다. (…)

 

“그놈의 분위기가 뭐가 중요해. 그럼 가정 분위기는 안 중요한가?”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197쪽~198쪽.

 

 

 

 

이렇게 부부 사이에서도 행위자와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시각이 같지 않다. 시각의 다름,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찰이 생기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불균형적인 사고가 잘못된 것임을, 즉 ‘착각’임을 뒤늦게라도 아는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제정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

 

 

 

<이 글을 쓰고 나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없다 :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있다. 자식이 없는 것이 도리어 걱정됨이 없이 편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자식이 있으면 자연 걱정이 따른다는 말이 되겠다. 또 재물이 많으면 걱정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자식이나 재물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행을 자초할 수 있다는 말이겠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을 주는 모든 것들은 불행을 잉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도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이나 사별로 인해 불행해질 수 있다. 둘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 (사랑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함께 끝까지 살아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차라리 사랑을 중요시하지 않는 독신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고독할망정 크게 불행할 일이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최소한 이별이나 사별 또는 책임의 문제로 불행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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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3-2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백>

오늘 서재에 들어와 보니 내가 글을 올린 지가 열흘이나 되었다. 아니,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다니... 부리나케 글을 써서 올렸다.

올해 계획을 세울 때 최소한 일주일에 한 편씩 새 글을 올리기로 했는데, 그 계획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합리화의 명수다. 글을 자주 올리지 못할 때마다 이렇게 합리화하곤 한다.
'글만 쓰며 살 순 없잖아...'ㅋㅋ

신지 2012-03-27 17:11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다니..."
ㅡ> 아 저도 이번에 시간 때문에 깜짝 놀랐는데요,
제가 '렛 미 인'이라는 영화(는 두 가지 버전 다 좋음)가 좋았다고 몇 번 말했는데 그 영화 보고 막 좋아했던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찾아보니 작년 1월 9일과 10일이었더라구요. (아마 그때 새해에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올해도 벌써 4월!)

또 영화 '악마를 보았다''아저씨'는 아마도 두어 달 쯤 전에 본 거 같거든요. 그런데 작년도 아니고 재작년, 8월에.... OTL
한 두세 번 영화 더 보고나면 저 혹시 노년? 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2-03-27 21:16   좋아요 0 | URL
신지님, 저 웃어도 됩니까? 이미 웃었어요. 하하...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셨군요. 아, 그런 분이시군요.
참, 훌륭한 다짐이라고 생각해요.ㅋ

영화, 전 집에서말고 극장에서 보는 게 좋던데요, 지난 1월 눈 많이 내리는 날에 댄싱퀸을 본 걸 끝으로 더 이상 극장에 가질 않았네요. 앞으론 가야겠어요.

노년, 저도 이렇게 빠른 세월의 속도라면 금방 노인이 될 것 같아 겁이 나요.
하지만 저는 늙어도 모자 쓰고 청바지 입고 다니며 안 늙은 척할 거예요.ㅋ
복장까지 노인답게 한다면 살맛이 안 날 것 같아요. 흐흐...
반가웠습니다.

마립간 2012-03-2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0대, 30대의 20년간 설령 귀찮아서 굶을지라도 어째거나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후 집안을 할 필요가 없어진 진화의 압력으로 급속도로 집안 일과 멀어졌습니다. 60대를 넘어서 다시 집안일을 해야 될 진화의 압력을 받을 경우 제가 변하게 될까요. ; 아마 추측하건대, 다른 방향으로 (생활이) 진화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도우미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어째든 그 방향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12-03-27 14:21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마립간님.

그런데 님의 말씀이 무얼 뜻하는지 잘 모르겠네요.ㅋㅋ 하시다 만 것 같아서요.

으음... 저는 60대가 아직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요. 제가 아는 선배님들이 60대인데, 그분들이 그러더라고요. 외출했다가 식사때마다 시간 맞춰 들어가는 게 귀찮다고요. 그래서 남자들도 자기 스스로 챙겨 먹을 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퇴직해서 60세부터 90세까지(장수시대니까 오래 살겠죠...) 집에 있게 된 남편이라면 좀 이 문제는 심각해요. 여자들도 수십 년 집안일을 해 왔기 때문에 하기 싫은데, 30년간이나 남편 밥을 챙겨 주려면 싫지 않겠습니까.
여자도 출산, 육아, 부엌일 등 수십 년 해오면서 살았는데, 그 나이쯤 되면 집안일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친구 만나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부엌에 들어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는데, 만약 자신의 딸이 미래에,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남자와 한평생 산다면, 하고 상상해 보면 답이 나올 듯해요.
상부상조가 답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들은 집안일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 반면에, 남자들에겐 새로운 취미를 붙일 수 있는 좋은 일이 될 수 있어요. 원래 소일거리 하면서 움직이며 늙는 게 건강에도 좋다잖아요.
저의 친정아버지도 집안일을 도우세요. 음식은 못 만드시지만, 엄마가 외출하면 장을 봐오기 하시고, 콩나물, 상추 같은 채소를 씼어 놓기도 하세요. 그래서인지 사이도 좋으세요.
자식으로서도 보기 좋은 것 같아요. ㅋ

마립간 2012-03-28 12:56   좋아요 0 | URL
미래에 관한 일이라 저도 딱히 어떠하다고 명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 단지 부엌일을 같이 하는 등의 현재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부엌일만 놓고 본다면 지금 부터 노력해야죠. (이 댓글은 안해 보지 않겠죠.^^)

페크pek0501 2012-03-28 14:10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안해님이 이 댓글을 보시지 않길 빌게요.
예, 더 이상적인 방법을 앞으로 모색해 나가야 하겠죠.

뭐 벌써부터 부엌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미래에 아내가 원할 때 해 주면 되죠. 저도 아직 남편에게 부엌일을 안 시켜요. 그냥 남편이 자기 스스로 청소기 돌리는 정도예요.

추신 : 어렵다고 하시던 '댓글쓰기'가 일취월장하심을 축하드립니다.ㅋ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든다는...ㅋ

gimssim 2012-03-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0501님.
저는 글을 올린지 한 달 만에 사진 한장 올렸어요.
아니,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다니..(동감)

페크pek0501 2012-03-27 14:28   좋아요 0 | URL
반가운 중전님.^^

저보다 더한 분이 계시네요. 위안이 되는 걸요.ㅋㅋ
앞으로도 서두르지 않을 듯해요. 천천히 가려 해요. 서두르면 숨이 차서 즐겁지 않아요. 좀 느리면 어떻습니까. 키득~~. 이건 느린 자의 여유인가요?

노이에자이트 2012-03-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디오 화제의 신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서 허태균 씨 말을 들어봤는데 말을 재치있게 잘하더군요.44살인데 목소리도 깨끗하고...요즘 김정운 씨와 함께 심리학 교수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남자인듯...

페크pek0501 2012-03-27 21:21   좋아요 0 | URL
아, 노자님이 방문하셨군요. 반가워요. ㅋ

<가끔은 제정신>이란 책, 재밌어요. 심리학자 허태균의 재치 있는 글솜씨도 볼 만합니다. 뻔할 것 같다고 여겨 이런 책을 보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제 생각엔 어떤 책이든 배울 게 있는 것 같아요. 뻔해 보여도요.
저는 인간의 심리와 관련 있는 책은 다 좋아해서 이런 책, 좋아합니다.

프레이야 2012-03-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 우스개 재밌네요.
변해야 되는 것 같아요.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죠.
저도 인간심리에 관련한 글 좋아하는데
요새 특히 그런 류의 책이 많이 나오네요. 결국 해답은 사람이니 그렇겠지요^^

페크pek0501 2012-03-29 15:11   좋아요 0 | URL
예, 프레이야님, 사람이 답인 것이죠.
인간심리의 글은 다 재밌어요. 요즘 이런 류의 책만 보고 있답니다.
또 대학을 간다면(그런 일 절대 없겠지만) 심리학 전공하고 싶어요.ㅋㅋ

마태우스 2012-03-2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무자식상팔자는 제가 지금 실천하고 있는 중...은 아니군요. 저희 강아지들도 엄연한 자식이니깐요. 그리고 그 중 둘째 녀석이 2, 3월엔 학원비의 몇배나 되는 돈을 병원 치료비로 썼답니다. 하지만 제가 받는 게 훨씬 많아서 다행입니다. 녀석의 미소가 얼마나 예쁜지요
2) 남편이 늙었을 때 아내는 남편이 평소 해준만큼 되돌려주는 것 같아요. 저희 엄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해도 그게 안된답니다. "뭐 잘해준 기억이 있어야 추억을 하지"라네요. 하지만 전, 지금처럼 산다면 늙어서도 아내한테 예쁨 받을 것 같아요 평소에 잘하거든요 호호.
3) 허태균이란 분도 주목해야겠군요 으음.... 글 잘쓰는 사람이 왜이리 많은건가요.

페크pek0501 2012-03-29 15:13   좋아요 0 | URL
1) 돈이 들어도 치료가 된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예쁜 미소 짓도록 다 낫길 빌어요.

2) 예, 꼭 그렇게 애처가 되세요. 저는 애처가들을 좋아해요. ㅋ

3) 맞아요. 글 잘 쓰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모르겠어요. 책 읽으면서 기 죽는다니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