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풍경

 

 

 

어느 전시회에서 밀레의 ‘첫 걸음마’를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을 떼려는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애가 넘어지지 않게 바로 뒤에서 붙들고 있고, 맞은 편에서는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아이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있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광경이나 나는 그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낮잠’ 이란 제목의 농민화도 좋았다. 부부가 일을 마치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것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그림처럼 인상적인 광경이 많이 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아 온 영상 중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모은다면 두꺼운 앨범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다. 그 추억의 앨범으로 지난 시절을 노년에도 회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일 것이다.

 

 

내가 열세 살쯤에 넋을 잃고 바라본 풍경이 있다. 우리 집 근처의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담벼락에 있는 흠집과 낙서조차도 정겨웠다. 그 지붕 아래 어디선가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이런 정경을 보고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지금도 삶의 풍경을 찾아 산책을 나설 때가 있다. 집들을 끼고 도는 골목길도 나에겐 좋은 산책로가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러 가옥들을 만난다.

 

 

푸른 나무들이 햇볕을 받으며 하늘을 가득히 맞이하고 있는 집,

옷들이 빨랫줄에 평화롭게 널려 있는 집,

꽃밭의 꽃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집,

앙증맞게 생긴 아기의 신발이 보이는 집….

이것들은 마음의 사진이 되어 가슴에 깊게 자리하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나는 때때로 친정의 마당을 그리워한다. 눈을 들면 하늘이 훤히 보이고 잠자리와 나비가 자유롭게 놀다 가는 곳.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침을 열어주고 밤에는 달과 별이 친구가 되어 주는 뜰.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거나 줄넘기를 한 곳도 마당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친구를 불러다 놀곤 하였다.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놀기엔 충분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간식거리를 만들면 풍겨 오는 음식냄새를 맡으며 노는 게 신이 났다. 찐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따위를, 혼자 먹는 것보다 함께 놀던 아이들과 경쟁하듯 앞다투어 먹으면 곱절은 더 맛있었다. 참으로 흥겨웠던 그 시절도 좋은 장면으로 새겨져 있다.

 

 

내가 여행을 즐기는 것도 멋진 경치를 가슴속에 담고 싶어서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는 늦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하고, 설경은 언제 보아도 설렌다. 산 그림자를 품은 호수를 보면 명상적인 분위기에 빠져 나도 사색에 잠기게 된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촌가나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골길이 눈에 띄면 마음의 고향을 보는 듯하다. 기적을 울리며 사라지는 기차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연인처럼 어떤 아쉬움을 남겨 놓는다. 철새들의 행렬, 해질녘 바람 부는 숲, 어둠에 서서히 묻히어 가는 섬에도 발걸음이 멈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역시 사람과 함께하는 풍경이다. 그것도 사랑을 담은 얼굴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얼굴은 그 사람의 심경과 같아서, 온화한 표정을 짓는 이를 보면 어떤 인생을 사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요즘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를 돌보며 함께 다니는 것을 자주 본다.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아기를 다루듯 할머니에게 과자를 조금씩 떼어 먹이기도 하고, 바람 부는 날이면 담요를 덮어주기도 한다. 마치 남은 인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노라고 할머니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두 사람의 웃음 띤 얼굴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것 같다. 어쩌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보다 주는 이에게서 더 흐뭇한 기쁨이 엿보인다. 행복이란 자신의 처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목욕탕에서 노인의 등을 밀어주던 젊은 새댁,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이를 위해 뒤에서 밀어주던 어떤 이, 병원에 진찰 받을 시어른을 모시고 온 며느리, 가족을 위해 푸짐하게 장을 봐 오는 주부, 연탄을 가득 재어놓고 흡족해 하던 옛 어머니의 표정 등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나는 사는 날까지 타인들에게 몇 점의 멋진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좋은 영상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듯, 이젠 남들이 간직하고 싶을 그림이 되어주고 싶다. 전화가 잘못 걸려 와도 상냥히 응대하고, 길을 묻는 타인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며, 가족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내기보다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늘 어떤 그림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산다면, 내 모습도 밀레의 작품같이 오랫동안 보고 싶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 pek0501 작,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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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이 글이 생각나서 꺼내어 올립니다. 제가 이런 글도 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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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4-12 0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좋은 마음으로 쓴 글은
언제 꺼내어 들추더라도
즐거웁지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4-12 15:49   좋아요 0 | URL
오우, 된장님이 무플이 될 뻔한 걸 구해 주셨네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어제 투표결과 방송을 보다가 그만 잠 잘 시간을 놓쳐 버렸어요. 이미 달아나 버린 잠이 쉬이 올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런 김에 컴퓨터를 켰고, 그러다가 돌발적으로? 이런 글을 올렸어요.

저의 부모님과 저는 서로 다른 당에 투표해서, 참 가족 간에도 의견 통일이 안 되는는구나, 하면서 그러니 남북통일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했답니다. ㅋ
방문에 감사 드리며...

신지 2012-04-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도 쓰시는구나 했는데 꽤 예전의 글이었군요.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저도 오랜만에 어릴 적 생각이 나는군요
"늘 어떤 그림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산다면"
그렇네요... 저도 이 말 꼭 기억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4-14 16:46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쓴 글이라 지금 보면 좀 웃겨요. 뭐 저런 글을 썼나, 싶고 그래요. 아마 그땐 제가 착했나 봐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