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부들은 변한다 : 나이에 따라 부부들이 사는 모습이 변한다고 한다.
다음의 글을 읽고 웃었다.
부부가 저녁을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20대 신혼부부 : 바로 밥상을 치운다. 다 끝낸 후에 마저 밥을 먹는다.
30대 부부 : 서로 마주보고 살짝 웃으며 먹던 밥을 다 먹고, 커피도 마시고 로맨틱한 음악을 틀고 잠자리에 든다.
40대 부부 :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밥을 다 먹고, TV와 신문을 다 보고 샤워까지 하고 각자 잠자리에 든다.
50대 부부 : 잠깐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다 갑자기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밥이나 처먹지, 뭘 보냐?”
60대 부부 : 부인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고, 당황한 남편이 말한다. “알았어. 안 흘리고 조심해서 먹을게.” 그리고 먹다 흘린 밥알을 줍는다.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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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부부의 이야기가 좀 과장된 것일지는 몰라도, 돈벌이를 하지 않는, 퇴직한 남편에 대해 푸대접하는 아내들이 많다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문과 TV 뉴스를 통해 ‘은퇴 남편 증후군’을 겪으며 힘들어 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로 인해 황혼이혼까지 일어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도 젊었을 땐 서로 열렬히 사랑하던 관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토록 과거에 사랑해서 생긴 현재의 결말이 결국 그런 모습이라니 좀 슬픈 일이 아닌가.
2. 변해야 한다 : 한때 남편에게 사랑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던 젊은 아내가, 세월이 흘러 나이든 뒤엔 남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 이것 충격적이다.
‘남편은 집에 두면 근심덩어리, 데리고 나가면 짐덩어리, 마주앉으면 웬수덩어리, 혼자 보내면 사고덩어리, 며느리에게 맡기면 구박덩어리’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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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부부들이 사는 모습이 변하는 게 슬픈 결말이긴 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젊은 매력을 발산하는 남편과 은퇴해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늙은 남편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마음이 그냥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옳을까, 아니면 슬픈 결말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게 옳을까.
아내의 푸대접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면 함께 사는 게 서로 불편하고 싫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흐르는 대로 한다며 이혼하면 어떻게 될까. 한동안 편할지 몰라도 결국 각자 홀로 쓸쓸한 노년을 살게 될 것이다. 만약 서로를 위해 변하려고 함께 노력한다면 쓸쓸하지 않은 노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우선 남편들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남편들도 집안일을 배우려고 노력해서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아내에게 밥을 차려 달라고 귀찮게 구는 남편이 되지 말고, 혼자 밥 차려 먹을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요리를 배워서 오히려 가족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남편이 되면 참 좋을 것 같다. 요즘 요리학원에 할아버지 수강생들이 많이 몰린다고 하는데, 좋은 현상이다. 또한 아내도 그런 남편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 주고, 남편의 노력에 협조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식사문제뿐만 아니라 청소, 빨래 등 모든 집안일을 부부가 나눠서 한다면, 남편이 근심덩어리, 짐덩어리, 웬수덩어리, 사고덩어리, 구박덩어리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3. 두 세계의 공존 : 예나 지금이나 어느 책에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이란 제목의 글이 있을 법하다. 물론 아내들을 겨냥한 글이다. 남편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아내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글이 있겠다. ‘한쪽에선 남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선 남편을 귀찮아하는 아내들이 있는 세상’인 것이다. 두 세계의 공존.
또 홀로 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재혼하는 경우도 많다. ‘한쪽에선 남편을 갖고 싶어 하는 아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선 남편을 귀찮아하는 아내들이 있는 세상’인 것이다. 두 세계의 공존.
이렇듯 서로 정반대의 두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난 두 세계의 공존이 신기하다.
4. 행위자-관찰자 효과 : 우리는 자신과 남에 대해 판단할 때, 같은 행동을 할지라도 다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나쁜 행동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합리화하길 좋아한다.
나도 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해 ‘어쩔 수 없었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면, 어느 모임에 자신이 늦을 경우엔 ‘차가 막혀서 어쩔 수 없이 늦은 거야.’라고 생각하고, 남이 늦을 경우엔 ‘당신은 매너가 없기 때문에 늦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존스와 니스벳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오해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행위자-관찰자 효과’를 들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그 행동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또는 그걸 원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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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건 이렇다.
회식 때문에 늦은 남편은 항상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
“중요한 자리야. 안 가면 안 되는 분위기였어. 나라고 좋아서 있었겠어.” (…)
하지만 남편의 변명을 듣는 아내의 마음속에는 하나같이 구차한 거짓말로 들린다. (…)
“그놈의 분위기가 뭐가 중요해. 그럼 가정 분위기는 안 중요한가?”
- 허태균, <가끔은 제정신>, 197쪽~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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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부 사이에서도 행위자와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시각이 같지 않다. 시각의 다름,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찰이 생기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불균형적인 사고가 잘못된 것임을, 즉 ‘착각’임을 뒤늦게라도 아는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제정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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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나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없다 :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있다. 자식이 없는 것이 도리어 걱정됨이 없이 편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자식이 있으면 자연 걱정이 따른다는 말이 되겠다. 또 재물이 많으면 걱정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자식이나 재물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행을 자초할 수 있다는 말이겠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을 주는 모든 것들은 불행을 잉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도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이나 사별로 인해 불행해질 수 있다. 둘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 (사랑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함께 끝까지 살아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차라리 사랑을 중요시하지 않는 독신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고독할망정 크게 불행할 일이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최소한 이별이나 사별 또는 책임의 문제로 불행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