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에서 여왕이 자기가 미워하는 의붓딸과 싸우는 데 무기로 사용한 빗, 코르셋 끈, 사과와 마찬가지로, 거식증이나 광장공포증 같은 고통은 가부장제가 정의한 ‘여성성‘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극단으로 몰고 간 결과이자, 사회적 처방에 대한 본질적이고 어쨌든 피할길 없는 패러디다.
그러나 19세기에 여성들을 아프게 한 것은 이런 질병이 패러디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처방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문화 자체가 여성들을 병들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고통받았던 ‘여성의 질병‘은 꼭 여성성 훈련이 낳은 부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질병이 바로 훈련 목표였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디어러 잉글리시가 보여주었듯, 19세기 내내 ‘상류층과 중상층 여성들은 ‘병든‘(허약한, 건강이 나쁜) 존재로 여겨졌으며, 노동자 계급 여성들은 ‘병들게 하는‘(감염시키는, 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숙녀란 약하고 병약한 존재라는 사회적 동의가 있음‘을, 그 결과 ‘여성의 병약함에 대한 숭배‘가 영국과 미국에서 발달했음을 지적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무자비한 자기 억제를 의미한다면 필연적으로 질병을 수반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는 디킨슨의 주장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수세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절망은 마카리에의 인생 같은 삶, 즉 ‘이야기를 갖지 못하는‘ 삶이라는 절망, 바로 그것이다. - P153~155



제2장 감염된 문장

: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 우리는 절망을 들이마시겠지." -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 시가 오싹하게 느껴진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유구한 억압의 역사 속에서 쓰이고 살아남은 문장들은 감염되었고, 우리는 읽음으로써 그 안의 절망을 들이마신다. 적절한 비평을 통해 감염된 문장이 '감염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고 내 안에 항체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특히 이 책에서 새롭게 깨닫는 부분은 여성혐오, 여성대상화로 가득한 남성작가들의 글 뿐만이 아니라 여성주체를 내세워 여성작가가 쓴 문장들 역시 감염되었고, 오히려 더 교묘한 방식으로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병약함에 대한 숭배, 예전 어느 미술관에서 여성 초상화 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시 창백한 피부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찬물에 손을 담가 일부러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일이 떠오른다. "영원이 여성적인 것이 무자비한 자기 억제를 의미한다면 필연적으로 질병을 수반하지 않겠는가?" 수세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는 여전히 절망을 들이마시고 있다. 10대 여자아이들이 거식증에 걸리는 사회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몸무게에 대한 걱정, 거부에 대한 두려움, 완벽주의에 대한 갈망 같은 특정한 주제는 여자아이 개인의 '병리 현상'이라기보다 여성에 대한 문화적 기대에 뿌리를 두는 듯했다. 여자아이들은 뒤섞인 메시지와 씨름해야 했다.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섹시해야 한다. 하지만 야해서는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다정해야 한다.' '똑똑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을 위협할 정도로는 안 된다.'  -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67쪽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기 삶의 주체였던 여자아이들이 다른 사람 삶의 객체가 된다"고 소녀들이 겪는 문제를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은 천천히 유년기를 땅에 묻고, 독립적이고 도도한 자아를 버리고, 순종적으로 성인이라는 존재가 되어간다."고도 했다.

 청소년기 여자아이들은 인간 존재로서의 지위와 여성으로서의 소명 사이에서 갈등한다. 보부아르 말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은 '존재하기being'를 그만두고 '보여지는seeming' 삶을 시작한다". - 같은 책, 36쪽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는 시기에 겪는 여자아이들의 혼란을 분석한 <내 딸이 여자가 될 때>의 내용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서술하는 여성 작가들의 혼란과 겹쳐 보인다. 어쩌면 사회 전체가 여성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던 19세기보다 상반된 메시지가 다양한 경로로 무분별하게 전달되는 21세기가 여성(소녀)들에게는 더 불안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정에서는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에 의하면, 남성 정신의 위대함을 그리는 이야기다. 상업광고, 뮤직비디오,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은 '섹시하지만 야해서는 안 되는' 등의 기준을 들이대며 이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을 조롱한다. * 그나저나 여기나 저기나 등장하여 적재적소 촌철살인을 날려주시는 보부아르님, 당신은 대체.. 내년엔 꼭 읽을게요. 



유사하게 『오이디푸스』에서 『파우스트』까지 전형적으로 위대한 비극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남자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남자 주인공은 지배하거나 반항하려는 강한 의지로(또는 둘 다를 원함으로써) 고귀해질 뿐 아니라 상처받는다. - P174


고귀한 자는 결국 맥베스이고 레이디 맥베스는 괴물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지만, 메데이아는 마녀일 뿐이다. 리어의 광기는 거룩하고 보편적이지만, 오필리아의 광기는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 P175


고전에 한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탐험하고, 모험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영화들에서는 남자캐릭터가 대세다. 한팀 중 한두명 여자를 끼워넣을 뿐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혼성팀에서 대장은 예외없이 남자다. 혼성팀 대장이 여자인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 옥토넛도, 퍼피구조대도, 미니특공대도 마찬가지다. 대장은 남자다. 과거에 반장은 남자였던 것처럼. 대다수의 대통령과 CEO가 남자인 것처럼. 등장하는 여성인물의 숫자가 적을 때, 문제는 해당 캐릭터의 '성별'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해당 여성캐릭터가 아무리 훌륭하게 묘사된다고 해도(여성캐릭터가 적을수록 그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있다. 여자아이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캐릭터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쉬운데, 동일시할 캐릭터가 적으면 그만큼 선택지가 적어진다. 남성캐릭터는 많기 떄문에 다양한 성격구현이 가능하다. 

많은 고위집단에서 소수인 여성들은 완벽을 요구받는다. 실패해도 그 사람의 문제로 여겨지는 남성들과 달리, 소수자 여성의 실패는 '여자라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1837년에 샬럿 브론테는 ‘저는 여자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고 말하며 로버트 사우디를 안심시켰다. 브론테는 ‘항상 성공한 것은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치거나 바느질할 때 가끔 저는 차라리 독서하거나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하고 부끄러운 듯 고백하고, ‘저는 저 자신을 부정하려고 애씁니다. 아버지의 인정은 그런 결핍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주고요‘라고 공손하게 덧붙인다. - P168


오, 샬럿 브론테가 나왔다. 이런 말을 했구나.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를 읽고 있는데, 여기서 느껴지는 강인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진다. 저런 말을 한건, 정치적 스킬이 아니었을지..? 



<빌레뜨> 너무 재미있다. 앤 브론테의 <아그네스 그레이>에 뒤이어 읽고 있자니, 언니쪽이 훨씬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싶다. 인물의 생생함이나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능력 면에서 특히 샬럿 쪽이 탁월해 보인다.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 얼마나 개성있고 입체적인지, 감탄하며 읽는다. "이해관계야말로 성격의 핵심이자 동기의 주요 원천이고, 삶의 알파이자 오메가"(112쪽)이며 "혼자서 수상과 검찰총장을 겸임할 수도 있었을 인물"(113쪽)이라는 베끄부인, "즐거움과 쾌락 만세! 위대한 열정과 엄격한 정조 따위 물러가라!"(140쪽)고 외치는 팬쇼 양, 또한 꽤나 도덕적이고 보수적으로 보이는 화자 루시 스노우도 자신의 앞길을 찾아 낯선 곳에 과감하게 발을 디디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에 용감하게 나서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말 매력적이다. 




그런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앤 브론테를 언급하는 부분을 보니, <와일드펠 홀의 거주인>(혹은 소작인)을 읽어봐야 그녀의 진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번역본이 없다..



앤 브론테의 『와일드펠 홀의 거주인』(1848)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가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여성 해방 이야기다. 특히 잘못된 결혼의 감옥 밖으로의 탈출, 그리하여 예술가로서 성공해 독립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소설의 주인공 헬렌 그레이엄은 남편을 피하려면 신분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전문 화가가 된 뒤 자신의 풍경화에 가짜 서명을 써넣고, (...)- P193


관람객 중에는 그녀가 도망치고자 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헬렌은 자신의 상황을 그려야 할 필요성과 자신의 위치를 숨겨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한다. 따라서 자신의 예술과 맺는 긴장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젠더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헬렌의 불안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통해 여성 예술이 여성성에 의해 어떻게 근본적으로 제한받는지 추정할 수 있다. - P196



어찌됐든, 감염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여성 작가들이 시대의 역경을 뚫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낸 데에는 큰 의미가 있다. 남성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남성작가가 쓴 여성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으므로.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써 근본적인 권위를 획득한 이런 작가들은 또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유명한 (그야말로 여성적인) 충고를" 따름으로써 이들 특유의 작가 됨에 대한 불안을 누그려뜨렸다. - P182


제인 오스틴과 메리 셸리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양피지에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것 같은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이런 작품들의 외관은 표면의 무늬가 훨씬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 어려운) 층위의 의미를 감추거나 흐려놓았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P183


숨겨진 이야기나 메시지는 ‘인류의 반이 꾸려가는 한낱 사적인 삶’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갖는 19세기 여성문학 대부분에 은폐되어 있는 단 하나의 플롯은 어느 정도는 자기 이야기에 대한 여성 작가 자신의 탐색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아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여성의 탐색이다. - P186


‘어떤 남자도 추측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감염과 질병을 치유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 P187


이 모든 선택, 즉 확실히 주류적인 것이 아니라 외관상 소품 같은것, 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영광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은 것을 선택한 데는 의식적이거나 반의식적인 아이러니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런 선택의 필요성은 아주 최근까지 영미의 거의 모든 여성 작가들이 처했던 상황, 즉 작가 되기의 병적인 불안을 강조해준다. 모든 여성의 삶과 시, 그리고 선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간단히 말해, 여성 문인이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적 현존을 규정해야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든 똑같이 항상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성 문인은 자신의 작품을 전적으로 억압하거나 작품의 출판을 필명이나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녀는 겸손하게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고, 열등한 능력에 걸맞게 숙녀들을 위한 ‘더 하찮은‘ 주제에 집중해야 했다. 후자의 선택이 실패의 인정으로 보인다면 여성 문인은 반항할 것이며 그 결과 불가피하게 추방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여성 작가는 당황스러운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여성 문인은 자신이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선택에 직면한 여자들이 문학작품을 창조하자 그들의 작품에는 제한된 선택에 대한 강박적 관심뿐 아니라 예외 없이 강박적 감금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 P168, 169


이런 혼란과 억압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감추고 비틀며 써냈다고 생각하니, 19세기 여성문학을 읽는다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냥 재미로 읽었던 과거 독서와는 달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빌레뜨는 그냥 재미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긴 하지만. 여기에도 감금의 이미지가 나오는지 잘 살펴봐야겠다.

<제인에어>에서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미친 전부인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분석은 흥미롭다. 샬럿이 제국주의자라는 비평도 있다는데, 이 부분 염두에 두고 재독하고 싶다.



심지어 표면상으로는 가장 보수적이고 얌전하게 보이는 여성 작가들조차 대단히 독립적인 인물들을 강박적으로 창조했으며, 이런 인물들은 작가나 작가의 순종적인 여자 주인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는 모든 가부장적 구조를 파괴하고자 한다. 물론 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반항적 충동을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미치거나 괴물 같은 소설이나 시 속에서 적절하게 벌을 받는) 여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분열, 즉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을 수용하고자 하는 욕망과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극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문학에 등장한 미친 여자가 남성 문학과 달리 단순히 여자 주인공의 적대자거나 들러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친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의 이미지다. - P189



3장: 동굴의 비유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아서 패쓰.

4장, 5장에서는 제인 오스틴 작품들을 본격 분석한다. 제인 오스틴 예습할 걸 그랬다고 후회막심 중. ㅠㅠ 5장 읽는 중인데, 모르고 읽어도 읽을 만하긴 하지만 답답한 지점도 많다. 또 언급되는 다른 작품 중 마리아 에지워스의 <래크렌트 성>이 궁금한데 번역서가 없다. 번역 좀 해주세요.. 19세기 문학을 원서로 읽을 자신은 더더욱 없다구?!! 





따라서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선배와 후배에 대한 갈증과 남성 선배로부터의 소외감, 남성 독자의 반감을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여성 독자에 대한 절박한 갈구, 문화적 조건 안의 자아를 극화시킬 때 튀어나오는 소심함,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등 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며, 자아 창조를 위한 그녀의 노력을 남성 작가와 구분해주는 현상이다 - P147

게다가 그런 여성들은 루퍼스 그리스월드 같은 사람의 주장("우리는 여성의 글을 읽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이 넘쳐날 뿐인데도 창조적인 지성을 피워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오인할 위험이 있다")에 깔려 있는 전제에 깊이 영향받았다. 이 말은 비록 여성이 펜을 드는 일이 부조리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병적(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신경증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 P162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 P166

자신의 문학적인 노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친 사람 내지 괴물로 취급받았다. 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기이하고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기이하다는 것이다. - P167

현대 여성들이 활력있고 당당하게 펜을 들어 써내려간다면,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의 여자 조상들이 병들 정도로 심한 고립 속에서, 미칠 듯한 소외감 속에서, 마비를 일으키는 모호함 속에서 자신들의 문학적 하위문화에 고질적으로 퍼져 있던 작가 되기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싸웠기 때문이다. - P148

남성 모델의 지속적 사용은 여성 예술가를 심리적 자아 부정이라는 위험한 상황으로 불가피하게 몰고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심리적 자아 부정은 키츠가 숙고했던 형이상학적 자아 상실을 훨씬 넘어선다. 배럿 브라우닝의 상드 소네트가 드러내듯, 자아 부정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로 치닫을 것이다. - P177

첫째, 많은 여성 문인이 여성의 ‘겸손함‘이나 남성 흉내를 벗어버리고 뛰어넘어 성장했다. 오스틴에서 디킨슨에 이르는 이런 여성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중요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 P181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괴물 여성은 자신을 표현할 힘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다. 메리 셸리는 창조자에게는 단지 ‘움직이고 말하는 더러운 덩어리‘에 불과한 괴물을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며 그런 인물의 내면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 P191

글자 그대로의 집이 된다는 것은 결국 몸을 정신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그런 초월성이야말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주장했듯, 인간을 고유하게 인간으로 만들어주는데 말이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출산에 갇혀 있는 것은(그리고 우리가 지금 ‘출산‘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19세기 단어가 ‘감금‘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는 집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다. - P206

배반당한 에우리디케는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주디스 셰익스피어’처럼) ‘무덤 동굴‘이라는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시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성 예술가는 이시스와 에우리디케를 복원하면서 문학 유산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즉 가라앉은 대륙을 재정의하고 되찾는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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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11-22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흐.... 독서괭님 명품 페이퍼 너무 좋네요. 저는 아직은 샬럿이 최애인데 에밀리는 독특한 느낌이 있잖아요. 앤도 그에 못지않는 특별한 매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P183

저는 183쪽의 이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당시 이 소설을 사서 읽을만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와 가부장제에 대한 고발, 조롱, 냉소를 ‘섞어서‘ 창조했다는 점에서요. 순응과 전복. 여성 작가들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도 페이퍼 쓰고 있어요. 곧 돌아오고 싶으나, 쩜쩜쩜.

독서괭 2022-11-22 17:29   좋아요 1 | URL
단발님 샬럿이 최애시군요! 전 아직까지는 완독이 딱 1작품 씩이라 ㅋㅋ 뭐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ㅋㅋ 그동안은 <폭풍의 언덕>이 최애였어요. 하지만 빌레뜨 읽으니 넘 좋아서 샬럿파로 갈수도.. 읽은 것도 재독하고 안 읽은 것도 읽어보려면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그 부분 넘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제인오스틴 4장 읽으면서 참 영리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단발님 페이퍼 기대할게요^^

거리의화가 2022-11-22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레뜨 재밌죠^^ 저는 역시 오스틴보다는 브론테 쪽인 것 같아요^^; 3부 들어가야 하는데 역시 안 읽고 진입하기는 답답한가보군요. 3장 동굴의비유는 인상적이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굳이 이 타이밍에? 라는 생각도 있었고 단 번에 이해는 잘 안갔어요. 수하님 댓글과 페이퍼 통해서 뒤에 관련해서 내용이 나온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괭님 좋은 페이퍼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2-11-22 17:31   좋아요 1 | URL
오 화가님에게 오스틴보다 브론테 승! ㅋㅋ전 오스틴은 좀더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만과 편견 나름 재밌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서;; 다미여 읽고 읽으면 또 달리 보일 것 같기도 하고요.
동굴비유 뒤에 또 나오는군요? 저도 수하님 페이퍼 보며 공부 좀 다시 해야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건수하 2022-11-22 18:33   좋아요 2 | URL
제가 페이퍼는 안 썼는데....
7장에서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이 나올 때 3장의 내용이 조금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2-11-23 13:11   좋아요 0 | URL
오, 네. <프랑켄슈타인> 읽었으니 7장은 조금 수월하려나요? 어렵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다락방 2022-11-22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어서 빨리 빌레뜨 시작해야 겠습니다. 저는 오늘 3장 들어갔어요. 독서괭 님의 진도가 훨씬 앞서있네요!

제2의 성 읽을 때 와 이런 얘기도 했어? 이런 얘기도? 하면서 온갖 얘기 다 들어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보부아르 님 대단... 아무튼 저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같은 책을 읽는 분이 이렇게나 근사한 페이퍼를 작성해주시다니. 감동이 밀려옵니다 흑흑 ㅠㅠ

독서괭 2022-11-22 17:32   좋아요 1 | URL
으흐흐 다락방님, 빌레뜨 책 딱 보고 넘 예뻐서 기분 좋았는데, 내용도 재밌어서 완전 씐나요^^
제2의 성에 엄청난 얘기들이 많군요. 밑줄 어마하게 긋게 될 것 같네요. 내년에 벽돌들 좀 깨 볼까 해서.. 제2의 성도 도전해보렵니다..! 다락방님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셔서 넘 감사해요^^

건수하 2022-11-23 13:25   좋아요 0 | URL
오, 저도 읽다만 제2의성 내년에 마저 읽으려고요! 독서괭님 같이 읽어요 ㅎㅎㅎ

독서괭 2022-11-23 13:43   좋아요 1 | URL
수하님, 좋아욧!🤩

건수하 2022-11-22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샬롯 브론테의 <셜리>도 번역되지 않아 매우 아쉬운 책 중 하나예요.
<실낙원>에서 넘어졌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집 안의 천사 죽이기> 읽으며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폭풍의 언덕> 나오는데 역시 넘 어려워요 ㅎㅎ 제가 왜 그 소설을 읽으며 혼란스러워했는지 정도만 이해하며 넘어가려고 해요 :)

독서괭 2022-11-23 13:1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셜리>는 왜 번역 안 해줄까요? 어서 해달라!
실낙원은 영 다들 어려우신가 봅니다. 전 시도 안하려고요;; <집 안의 천사 죽이기>는 읽어보고 싶어요!
<폭풍의 언덕> 읽은 책이라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어렵군요ㅠㅠㅠㅠ 역시 비평은 어렵다..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페미니즘 비평이라니ㅠ 수하님 파이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11-22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빌레뜨로 선택하셨었군요?
책 표지 이쁘죠??^^
다미여도 많이 읽으시고, 아까 바람돌이님 서재에서 디킨슨 시인의 정답 한 개도 맞추시고?? 괭님 너무 천재 아니신가요??
알고 보니 천재!!! 알천재????ㅋㅋㅋ

독서괭 2022-11-23 13:13   좋아요 1 | URL
네 나무님! 책이 넘 예뻐서 여러번 쓰담쓰담 했어요 ㅎㅎ 볼때마다 기분 좋네용^^
알천재라니 ㅋㅋㅋㅋㅋ 뭔가 어감이 요상하지만 ㅋㅋㅋ 그런 이미지로 밀어봐야겠습니다 ㅋㅋ

바람돌이 2022-11-22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와 에이드리언 리치는 무슨 책을 보든 어디에서나 튀어나오는 주인공들! 저는 내년에 이분들의 책을 목표로 해야 할 거 같아요. ^^ 후발주자의 이점은 앞선 사람들이 이룬 성과를 온전히 흡수하고 간다는거죠? 먼저 읽으신 분들의 이런 명품 글을 보면서 아 이런 면을 유의해서 봐야겟구나 막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인에어의 버사가 샬럿 브론테의 분신일수도 있다는 것,
또 샬럿 브론테가 제국주의자? 이것도 염두에 두면서 읽어볼게요. ^^

독서괭 2022-11-23 13:15   좋아요 0 | URL
오 에이드리언 리치도 그렇군요. 둘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명품 글이라니 과찬이십니다. 버사가 분신일 수 있다. 샬럿 브론테가 제국주의자라는 비평 등의 내용은 다른 분 페이퍼에서 봤어요 @_@ 참 해석이란 재미있습니다.
바람돌이님 파이팅입니다^^

scott 2022-11-22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빌레트 이토록 잼 나는데
영쿡인들은 오로지 오스틴 작품만 줄창 영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ㅎㅎ

독서괭 2022-11-23 13: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스틴만 편애하다니! 브론테도 사랑해달라!^^
 
아그네스 그레이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2
앤 브론테 지음, 문희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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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생인 앤 브론테는 생소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계기로 이 책을 사둔지 한참 되었으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기 시작한 후 비로소 펴들게 되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도 앤 브론테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비중은 적은데,

집에 있는 많지 않은 19세기 여성작가 소설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의 작품이 극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데 비해 

(제인에어는 차분한 분위기지만 감금된 전부인의 존재가 오싹하고 로체스터와의 사랑이나 마지막 화재 등이 강렬하며, 폭풍의 언덕은 폭풍우 치는 밤에 창을 열고 미친 듯이 캐서린을 부르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그린 시작 부분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떼기 힘든 폭풍같은 매력이 있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대단히 수수하고 평범하며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고 소소하고 솔직한 맛이 있다. 특별날 것이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주인공 아그네스에게 이입하기는 쉬울 듯.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그네스와 웨스턴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고 '온당해' 보인다. 


아그네스는 서로를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에게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가난한 그레이에게 반해 모든 걸 버리고 그와 결혼한다. 아버지는 때때로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머니는 전혀 불행해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이미 작가가 '부'라는 세속적 가치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그네스는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가족들에게서 떠나 스스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 그녀는 상당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나름의 교육 원칙이 있기에 부푼 마음으로 일터에 간다. 

그러나 그녀를 가정교사로 고용한 첫 집은 글러먹었다... 부모의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아래서 방종하게 자란 아직 어린 아이들(7살 남자아이, 6살 여자아이 등)은 거짓말을 하고, 가정교사를 골탕먹이기 일쑤, 공부에는 뜻이 없으며, 타인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라든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그네스는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바른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동동거리지만 소용이 없고, 아이들의 문제는 전부 가정교사 탓으로 취급된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 아그네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 두번째 집은 언뜻 첫번째보다는 나아 보인다. 일단 아이들 나이가 좀더 많다. 하지만 역시 부모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하고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이들은 가정교사를 무시한다. 첫째 딸 로잘리는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 났는데 그 용모를 가꾸고 거기 유혹당한 뭇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둘째 딸 마틸다는 말을 타고 쏘다니는 걸 좋아하고 거친 언행을 하며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어쨌든 이 여자아이들과는 나름의 애정과 신뢰를 형성해가며 버티던 아그네스 앞에, 목사관에 새로 부임한 부목사, 웨스턴이 나타난다.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드나들던 아그네스는 웨스턴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고, 그의 진지하고 올바른 성품에 큰 감명을 받는다. 실은 그는 군계일학인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그네스와 그녀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진실하게 하느님을 믿고(성경구절이 자주 인용됨) 올바른 일을 행하며, 타인에게 따뜻한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로잘리는 여러 남자들을 농락하며 즐기다가 웨스턴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아그네스는 크게 상심하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남주인공답게 웨스턴은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로잘리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아그네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집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가정교사 일을 그만둔다. 

웨스턴과 어떤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학교 일에 전념하던 그레이스는 어느날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거기에 짠! 웨스턴이 나타난다. 이후 그는 자주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고 결국 청혼하기에 이른다. 


대단히 교훈적인 내용이다. 

부를 쫓는다든가, 겉치레에 현혹된다든가, 생명을 함부로 여긴다든가, 자기 신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든가 하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행태에 대해 소설 전반에 걸쳐 비판하며, 반전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어가고 있는 영향인지 1847년도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병들어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어려워진 가정형편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여성. 부유한 귀족계급의 오만과 위선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버텨가는 여성. 남편이 앓다가 사망한 후에도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강인한 여성(아그네스의 어머니). 돈이나 외모, 지위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의 진실함을 알아보아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성. 

"여성도 생각할 수 있다. 고귀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얌전해보이는 여성의 눈빛에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 


언니들 소설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너무 '온당한' 탓이 아닐지) 당시에 실존했던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느껴지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브론테 자매들, 다들 일찍 죽어 안타깝다.. 

사람 마음은 인도산 고무 같아서 조금만 더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만 아무리 더해도 터지지는 않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생겨도 상심하지만 ‘있는 문제에서 조금만 덜어져도‘ 살 만하지요. 우리 몸 바깥에는 그 자체로 필요한 힘이 생겨서 외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우리를 흔드는 모든 힘은 우리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줘서 나중에 입을 타격에 맞서게 해주지요. - P167

사람이라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예쁜 얼굴이 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 아름답고 상냥한 여자는 두 가지 자질 모두에 대해 찬사를 듣지만 특히 아름다운 외모는 뭇 남성들의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외모와 성격이 모두 별로인 여자는 대단한 죄라도 지은 양 욕을 들어먹는데, 그 까닭은 평범한 외모가 보는 이에게 불쾌하게 비치기 때문이다. - P212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에겐 가족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가 없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고도 묵묵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슬픔을 이겨내고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확실한 처방이 아닐까? 제대로 된 위안거리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지 못할 휴식을 탐하기보다 열심히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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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18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으로 돌아가 학교 일에 전념 하다가 어느날 눈앞에 나타난 웨스턴... 의 부분을 읽어보고 싶네요. 크-

쨘- 하고 등장하는 웨스턴
아닛! 하고 놀라는 아그네스
그리고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

공쟝쟝 2022-11-18 18:56   좋아요 1 | URL
타오르진 않고 대단히 온건했을 것 같지만…ㅋㅋㅋ

독서괭 2022-11-22 15:59   좋아요 0 | URL
으하하 역시 로맨스 마니아 다락방님은, 그 부분에 꽂히시는군요.
쟝쟝님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대단히 온건합니다 ㅋㅋ
조심조심 오랫동안 얌전히 타오르는 불꽃이랄까요.. 나름대로 좋네요^^

새파랑 2022-11-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앤 브론테 책은 안읽어봤는데 리뷰만 봐도 왠지 착하고 교훈적일거 같아요 ㅋ

독서괭 2022-11-22 15:59   좋아요 1 | URL
네 되게 착하고 교훈적입니다 ㅎㅎ 슴슴한 맛이네요^^

레삭매냐 2022-11-18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 읽다가 말았는디 -

마저 다시 읽어야 하나요.

독서괭 2022-11-22 16:00   좋아요 1 | URL
매냐님 제인에어 재미없으셨나요? 저는 지금 빌레뜨 읽는데 제인에어보다 재밌는 것 같아요. 제인에어를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바람돌이 2022-11-18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 에밀리 브론테 말고 에밀리 디킨슨에서 헤매고 있어요. ㅠ.ㅠ
이 소설이 다른 자매들의 작품에 비해서 왜 덜 유명한지는 알겠네요. 굉장히 계몽적인 소설이라는 느낌? ^^
재능있는 이집 자매들은 왜 다 폐가 약해서 일찍 죽었는지.... 문학사의 안타까움입니다.

독서괭 2022-11-22 16:02   좋아요 1 | URL
오 디킨슨 읽으시나요! 저는 시랑은 친하지를 못해서 디킨슨은 손댈 생각도 못했어요^^;
언니들에 비해 앤 브론테의 이 작품은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가 전부인이었다니! 뚜둥- 뭐 이런 요소가 없어요 ㅎㅎ
정말 다 일찍 죽어서 안타깝습니다 ㅠㅠ

moonnight 2022-11-1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반갑습니다^^ 줄거리는 독서괭님 리뷰로 그런 내용이었군@_@; 이러고 있습니다만ㅎㅎ; 모슬린 드레스가 함께 떠오르는 책이에요 ^^

독서괭 2022-11-22 16:0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문나이트님^^ 저도 항상 다른 분 리뷰 보면서 앗 이런 내용이었나..@_@ 이럽니다 ㅋㅋ 참 착한 소설이었어요^^

단발머리 2022-11-19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글 읽으면서 제가 느낀 점은.... 아, 우리 브론테 세 자매 중에 앤이 제일 순한 맛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매운 맛 에밀리, 중간 매운 맛 샬럿, 그리고 앤이 순한 맛. 아니면, 착한 맛 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이 잘 정리해 주셔서 <아그네스 그레이>의 진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고마워요, 독서괭님!

독서괭 2022-11-22 16:04   좋아요 0 | URL
넵 단발님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시네요 ㅋㅋ 매운 맛 중간 맛 순한 맛 ㅋㅋㅋㅋ 어릴 땐 매운 맛이 젤 좋았는데 지금은 순한 맛도 나름? 중간맛 <빌레뜨>도 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단발님!
 
안녕, 나의 순정 (여름에디션) - 그 시절 내 세계를 가득 채운 순정만화
이영희 지음 / 놀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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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풍미한 순정만화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만화대여점을 뻔질나게 드나들어본 사람이라면, 밤새워 만화를 읽고 며칠간 제정신을 못 차려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달콤쌉싸름한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이들이 내 주체적 여성상의 롤모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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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9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말입니까? ㅎㅎ 진짜 그 때 그 시절 제가 좋아하던 작가들과 작품이 다 들어있는 책이네요. 여기 나오는 만화 다 읽었습니다. ^^

독서괭 2022-11-17 16:00   좋아요 0 | URL
오셨습니까? ㅋㅋㅋ 정말 그때 그시절을 휩쓸었던 작가들 대다수가 나옵니다. 다 읽으셨군요!! 바람돌이님 윈! 저는 문흥미 작가님을 몰랐어요. 오디션도 안 읽었네요^^

singri 2022-11-09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다시 다 보고싶네요
프린세스 넘 좋아했ㅋㅋ

독서괭 2022-11-17 16:00   좋아요 1 | URL
프린세스 진짜 대작인데 띄엄띄엄 나오니까 자꾸 잊어버려서 전 중도포기했더랍니다 ㅠㅠ

공쟝쟝 2022-11-14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ㅜㅜ 저도 책 목록 봤는 데요... 다 보진 않았지만 몇몇 작품들은 ㅜㅜㅜㅜ 벌써 부터 마음이 막............................. (안되겠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몰랑몰랑해질 수 없어.......어떻게 내가 나를 굳히고 있는 데!!!!!!!!!!!!!!!!!!!!!!!!!!! (그러나 저는 소녀시절에도 소년만화를 더 많이 봤다능...)!!

독서괭 2022-11-17 16:01   좋아요 0 | URL
소녀시절에도 소년만화를 더 많이 본 쟝쟝님 ㅋㅋㅋㅋ 전 순정만화 쪽을 압도적으로 많이 봤습니다.
몰랑몰랑해지지 않는 만화들도 있잖아요. 새삼 그때 그시절 치고 너무나 앞서 나간 만화내용들에 깜놀했어요^^

레삭매냐 2022-11-14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대여점, 이제 추억이네요.

웹툰과 모바일이 대세가 된
지금 만화대여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느낌입니다.

독서괭 2022-11-17 16:02   좋아요 1 | URL
아 정말 만화대여점 사랑했는데.. 그래도 지금도 만화방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집에서 읽는 걸 좋아해서 만화방은 잘 안 갔습니다. 역시 종이책이 더 좋은데 말이죠..!!
 


문학작품은 강제적이라는 (또는 적어도 설득을 강제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된 결론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남성작가가 반복적으로 규정해왔던 여성에 대한 은유를 (마치 그 은유가 암시하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라도 하듯) 자신의 작품에서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응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의 문학 연구 방법론은 문학사가 강력한 행위와 그에 대한 불가피한 반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블룸의 전제에 기초한다. 나아가 가스통 바슐라르, 시몬 드 보부아르, J. 힐리스 밀러 같은 현상학 비평가들처럼 우리는 ‘은유를 낳는 경험’과 ‘경험을 낳는 은유‘ 둘 다를 묘사하고자 했다. - P21, 22


문학작품은 설득을 강제한다!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 바와 같이, 1장에서부터 저자들은 또박또박 18~19세기 여성작가들의 창조를 가로막았던 문학(문화)의 압력을 진술해 나간다.


과학이 강하고 우리가 부드럽다면, 그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리가 캠퍼스에서 문화 변용과 사회화라는 점잖은 아내의 일을 하는 반면에, 남자 천체물리학자들은 화성에 우주선을 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상을 풍부하게 받는 과학자들이 습득하기 힘들고 어려운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는 세계에서 이전에는 평범하게 말했던 소박한 우리 인문학자들 역시 어려운 사적 담론(말하자면 우리끼리 쓰는 특수 용어, 우리 영역의 신참자들에게 미생물학자와 지질학자의 전문성을 나타내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언어적 통달을 제공해줄 전문용어)에 대한 유일한 접근권을 열망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철학적 사회문화적 상투어를 파괴하는 흥분과 함께 ‘이론‘은 일상의 언어를 ‘의문시해‘ ‘사람‘ 대신 ‘주체‘나 ‘주체성‘으로, ‘책들‘ 대신에 ‘언어의 장들‘로 대체함으로써 전문성을 보증하는 ‘담론‘을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이론‘은 심지어 캠퍼스 밖 우리의 고객이었던, 울프가 말한 교양 있는 ‘보통 독자‘로부터도 우리를 유리시켰다.

(...)  반면, 시인으로서, 또한 평범한 독자로서, 작가이자 교수로서 나는 일상의 삶과 비평을 위해 에이드리언 리치가 품었던 ‘공통 언어를 향한 꿈‘에 공명한다. -P62, 63


이 부분은 저자들이 쉽고 대중적으로 문학사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을 밝힌 것인데, 뭔데, 에이드리언 리치,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라니 멋있고 난리람.. 읽고 싶어지게.. 


1장, 첫 부분에서는 펜=페니스로 여겨지는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에 관해 설명한다. 

철저히 가부장적으로 전개되는 문학작품에 몰입할 때, '존재의 용해'가 일어난다는 말은 흥미롭다. 

20대까지 읽은 책 대부분이 남성 작가의 작품이었다. 특히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필독서들은 거의 남성 작가의 것이다. 그 안에 나를 이입할 때, 수동적이고 평면적인 여성 인물에 이입하든 마음에 드는 남성 인물에 이입하든 여성이 거기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전제에 깔린 남성 세계다. 여자아이들에게 우리는 여성작가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더 많이 읽힐 필요가 있다.



핀치가 (빈정대는 어조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성의 요구와 의도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구속의 강압적 힘과 더불어 그 힘을 구현한 문학작품의 강압적 힘까지 뚜렷이 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여성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배우기 때문이다. 리오 베르사니가 말하듯, ‘글은 단순히 정체성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 나아가 육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는 문학에 몰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존재의 용해, 혹은 적어도 존재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 P85


남성 작가들은 대대로 ‘말의 그 무한한 일람표‘에 새겨넣은 여성 ‘인물‘에 대해 가부장적 소유권을 취했다.
(...) 역사상 소설을 소설로 반박할 수 있는 도구인 펜/페니스가 없었던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재산으로, 또 남성 텍스트에갇힌 인물과 이미지로 환원되어 왔다.  - P87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사고에 따라 남성의 텍스트, 그림, 그래픽 속에 ‘갇혀' 있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우주론 속에서(죄 많은 결함투성이로) ‘날조되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자신이 문학작품의 소도구 이상이라고 느끼는 여성에게는 권위가 제기하는 문제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철학적일 수 없다. 여성에게 이 문제는 (앤핀치와 앤 엘리엇이 표현한 고통이 보여주듯이) 심리적이다. 여성은 그토록 철저하게 금지당했던 펜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가부장제와 문학작품에 의해 종속되고 감금당했기 때문에, 남성 텍스트들을 피해야 한다. 그 텍스트들은 여성을 ‘영’으로 규정하고, 여성에게 (여성을 가두고 펜을 들 수 없게 만드는 권위에 맞서 대안을 만들 자주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P89


‘예술가는 경험을 죽여서 예술로 만든다. 일시적인 경험이 죽음을 피할 유일한 길은 예술 형식의 ‘불멸성’ 속으로 죽어서 들어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 속의 고정적 ‘삶’과 자연 속의 유동적 ‘삶‘은 속성상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펜은 칼보다 더 강할 뿐만 아니라 죽이는 힘(그 필요성)도 칼과 다를 바 없다. - P90


1장 후반부에서는 천사와 괴물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로'만' 형상화될 뿐인 여성들에 대해 서술한다. 

작가에게 필수적인 '자아 정의', 그러나 남성 작가들의 시선에 의해 왜곡당한 문학들을 접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을 여성 작가들에게는 자아 정의 자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는 간단하게 '집 안의 천사' vs 혐오감을 자아내는 '괴물' 둘 중 하나다. 

이 부분을 읽으며 든 생각은, 예로부터 남자들이 "여자는 정말 모르겠다니까!" 하며 여성을 이해하기 어려워한 데는 자아상이 왜곡된 데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실제 모습을 숨기고 남성들이 원하는 모습을 추구해야만 하는 여성의 내면은 늘 복잡할 수밖에 없고 상반된 특성들이 불쑥불쑥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남성들 눈에는 그것이 여성의 변덕이나 복잡함, 비논리성으로 여겨질 뿐이었을 지도. 



(...) ‘천사‘와 ‘괴물‘ 이미지는 남성이 쓴 문학 전반에 퍼져 있을 뿐아니라, 두 이미지 중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게 죽인 여성은 거의 없을 정도로 여성문학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창조적인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면 언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에게 자아 정의의 본질적 과정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적 정의 때문에 복잡해진다.  - P95


다시 말해 오노리어의 본질적 미덕은 그녀가 남자를 ‘위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녀 자신은 위대하지도 않고 뛰어나지도않다.  - P103


빅토리아 시대의 천사 같은 여자는 가정 안에 갇힌 채 남편의 ‘의미 있는 행위의 삶‘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피와 땀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신성한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명상적인 순수함‘으로 신 같은 타자성을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06


여성을 괴물로 만드는 가부장제적 심리를 설명한 부분은 <여성 괴물>에서 접했던 내용이다. 

*역시 보부아르는 날카롭다.. 내년에는 꼭 <제2의 성>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스펜서의 ‘에러’나 밀턴의 ‘죄‘처럼 여신 비판은 새끼 치고 먹고 토하고 먹이고 다시 먹어 치우는 영원한 생물학적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세 시인 모두 이런 순환이 초월적 지적 삶에 파괴적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각각의 괴물 같은 어머니가 만들어낸 창조물은 전부 그녀의 배설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배설물은 전부 그녀의 음식이자 무기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새끼와 함께 자폐적인(서로를 잡아먹는 유아론적인)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  - P120


여성 괴물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본보기다. 남성이 자신의 육체적 실존, 즉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능감에 대한 모든 양가적인 감정을 바로 여성이 대변하도록 만들어왔다는 주장 말이다. 타자인 여자는 삶(파괴되도록 만들어진 삶)의 우발성을 나타낸다. ‘남자가 여성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육체적 우발성에 대한 남성 자신의 공포‘라고 보부아르는 말한다. - P121


모든 괴물 여자와 연관되어 있는 성적 혐오는 왜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여성 신체에 대해 혐오감을(또는 적어도 불안감을 끊임없이 표현해왔는지 설명한다. 예술 작품이 되도록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치장하고 꾸미고 광적으로 거울을 보는 일, 냄새와 노화 걱정, 항상 너무 곱슬거리거나 너무 반듯한 머리카락 걱정, 너무 야위거나 너무 뚱뚱한 몸 걱정)은 여성이 천사가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입증한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여성의 변덕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남몰래 품고 있던 여성에게는 위압적인 훈계의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 P122


예로 드는 '릴리스' 이야기와 백성공주 동화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다. 

릴리스는 얼마전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아담의 첫번째 부인이라고 알려졌다는 인(?)물. 호, 흥미로운데? 망겔의 책에서 봤을 떄는 신이 났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이브만 알고 있다가, 흙으로 직접 빚어졌다는 릴리스, 아담의 아래에 눕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음껏 말하고 행한 아담의 부인이라니! 하지만 이 책에서 릴리스 이야기를 해석한 걸 보니 우울해진다. 여성의 주제넘음에 대한 잔혹한 처벌의 이야기라니.. ㅠㅠ 



릴리스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의 말과 여성의 ‘주제넘음‘ (남성 지배에 대한 분노에 찬 저항)은 불가분하게 뒤엉켜 있으며 필연적으로 악마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는 물론 심지어 성경의 반신적인 공동체 연대기에서도 배제당한 릴리스는 여성이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보여준다. 실로 끔찍한 대가다. ‘달아났기‘ 때문에, 그리고 명명하는 행위에 암시된 문학의 권위를 감히 강탈하려 했기 때문에, 릴리스는 복수(아이 살해)에 갇히고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고통으로) 더욱더 고통스러워지는 저주를 받았다. - P123



백설공주가 가부장적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 동화라는 거야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해석하는 내용을 보니 몰랐던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특히 백설공주와 여왕(왕비?)이 한 사람의 양면과 같다는 해석. 그리고 늘 왕은 코뺴기도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는데, 거울의 목소리가 왕의 목소리라는 것. 그리고 죽었다고 표현되는 백설공주의 친모와 마녀인 여왕이 같은 인물일 수 있다는 것(그림형제 원작에서는 친모=마녀라고 하니..)에 관해서, 이제 그녀는 왕, 즉 가부장제의 목소리를 완전히 내면화했기 때문에 더이상 왕은 등장할 필요가 없고 그녀를 비추는 거울로 충분하며, 또 여왕이 그처럼 변모한 것과 마찬가지로 백설공주의 결말 또한 같은 길을 따르리라는 해석이 아주 흥미로웠다. 



두 여성은 가부장제가 그들 스스로를 죽여서 예술로 만드는 데 사용하라고 권하는 도구(마법의 거울, 마법에 걸린 유리 관, 마법을 거는 유리관 등)를 무기로 휘두르며 솜씨를 부려 문자 그대로 서로를 죽이려 한다.  - P125


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거울의 목소리는 분명 왕의 목소리다. 그것은 여왕의 (그리고 모든 여자의 자아 평가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다.   - P127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백설공주에 대한 증오심을 야기한 것은 자아도취 의식을 행하는 여왕의 강한 절망인 것 같다(또는 증오심인 것 같다). 순결하고 수동적이며 여왕을 소모시키는 거울에 대한 광기로부터 자유로운 자아-부재 상태의 백설 공주는 이야기 서두에서 여왕이 진작 내버렸던 체념의 전형을 표현한다.   - P128


여왕은 자신을 내세우고 과장할 양으로 세이렌의 빗과 이브의 사과 같은 여성적 계략을 전복적으로 사용해 천사같은 백설 공주를 죽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술수는 딸을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던 바와는 정반대 효과를 낸다. 한마디로 백설공주가 수동적인 처녀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공주를 영원히 아름답고 생명력 없는 예술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바로 가부장적 미학이 젊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광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왕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인습적인 기술은 죽을 만큼 고통을 준다. 그러나 온순하고 자아가 없는 공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여성의 기술이, 그 기술이 자기를 죽이긴 해도,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수단을 제공한다. - P130


일곱 난쟁이는 그녀 자신의 위축된 권력, 발육 부진의 자아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베텔하임이 지적했듯, 그들은 백설 공주를 여왕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하는 생활은 순종적인 여성성을 교육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백설 공주는 난쟁이들을 돌봐주면서 봉사, 이타심, 온순성이라는 기본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백설 공주가 작은 집에서 집안일을 해내는 천사라는 사실은 ‘여자의 세계와 여자의 일‘에 대해 이 이야기가 취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가정 영역이란 최상의 여자가 난쟁이처럼 되고 난쟁이의 하녀가 되는 왕국의 축소판이다. - P131


사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백설 공주가 드러내는 유일한 이기심은 변장한 살인자가 주는 코르셋의 끈과 빗과 사과에 대한 ‘자아도취적‘ 욕망이다.   - P131


백설 공주가 처한 운명의 순환은 냉혹하다. ‘명상적 순수성‘을 거부한 백설 공주는 이제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여성에게 그런 삶은 바로 마녀의 삶이라 규정된다. 그런 삶은 매우 괴물 같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에러, 두에사, 루시페라처럼 기괴한 백설 공주는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방에서 잘못된 기술을 연마할 것이다. 릴리스나 메데이아처럼 자기 파괴적인 백설 공주는 자녀 살해와 그 시도에 내재한 자기 살해를 결심한 살인자가 될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이 고안한 빗과 코르셋처럼 확실하게 여성의 복식인 불타는 구두를 신은 채 백설공주는 이야기, 거울, 자아상으로 만든 투명한 관 밖에서 끔찍한 죽음의 춤을 말없이 출 것이다. 이 죽음은 그녀의 유일한 행위는 죽음의 행위이며 자아 파괴라는 치명적인 행위임을 암시할 것이다. - P133, 134


「노간주나무」는 남자아이가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확신과 자기표현을 향한 성장이며 언어의 힘을 발전시키는 일임을 암시한다.   - P134


여자아이가 주인공일 때(백설공주)와 남자아이가 주인공일 때(노간주나무)의 차이를 지적한 점도 흥미롭다.

1장 마무리는 멋있게 끝내는 저자들.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밑줄을 많이 그어서 옮기는 것만도 한참 걸렸다(물론 이 많은 걸 타닥타닥 치지는 않았고, 북플의 기능을 이용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신난다. 이런 멋진 책 읽자고 한거, 대체 누구야? 누구?



 오늘 아침에는 4:30경 깨는 바람에(물론 귀염둥이 둘째 때문이다) 둘째는 금방 다시 잤지만 나는 금방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게다가 둘째가 또 6시쯤이면 깰 것 같아서, 그냥 책을 읽었다. 둘째가 6:30에 깨준 덕에 <아그네스 그레이>를 절반 정도 읽었고, 둘째와 함께 조금 더 잤다. 

 브론테 자매 중 막내인 앤 브론테의 작품 <아그네스 그레이>는 표지에 쓰인대로 '모슬린처럼 수수한' 작품이다(특히나 언니들 작품에 비교해보면). 작가 자신이 가정교사를 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풀어낸 걸로 보이는데, 전반부는 대체로 고생한 이야기다. 당시 가정교사는 집안마다 달랐겠지만 종종 하녀와 유사하게 무례한 취급을 당한 듯한데, 처음 간 집에서 어린아이들 (6세, 7세)을 맡게 된 아그네스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신분과 관계없이 제대로 된 가정교육(도덕성, 품행, 배려심 등)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당연히 그 부모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중반부, 드디어 아그네스의 높은 도덕적 품성과 어울리는 남성 목사보가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로맨스가 펼쳐질 것인가? 수수하지만 쉽게 술술 읽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오늘 저녁엔 얼른 퇴근해서 아이들과 개기월식을 봐야 한다. 잘 보일까? 두근두근!!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사회학적으로도 생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문학 권력과 끈끈하게 연관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19세기 사상가 오토 바이닝어의 표현에 의하면) ‘여성은‘ 문학 권력이 없기에 ‘존재론적 실재를 [남성과]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부권/창조성 은유가 나타내는 암시는 또 있다. 여성은 문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능의 대상으로서 남성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바이닝어와 사우디의 편지에 공히 드러나는) 생각이다. - P81

다시 말하면, 여성은 펜이 나타내는 자율성(주체성)을 부정당하기 때문에 문화로부터 (문화의 상징은 펜이니) 배제되는 한편 스스로 신비한 타자와 비타협적인 타자라는 양극단을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이 타자를 숭배와 공포, 사랑과 혐오로 마주한다. 여성은 ‘유령, 악마, 천사, 요정, 마녀, 정령‘으로서 남성 예술가와 미지의 것 사이를 중재하며, 동시에 남성 예술가에게 순수함을 가르치고 그의 타락을 지적한다. - P99

여성의 순종하는 삶, ‘명상적인 순수한 삶은 침묵의 삶이요, 이야기도 없고 펜도 갖지 못한 삶인 반면, 반항하는 여성의 삶,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은 침묵을 강요받고 괴물 같은 펜으로 끔찍한 이야기를 말하는 삶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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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08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장 길지만 저도 잼나게 읽었어요^^ 아그네스 그레이 수수해서 소소한 포인트가 있군요ㅎㅎㅎ

독서괭 2022-11-09 11:00   좋아요 0 | URL
아그네스 그레이는 아직까지는 뛰어난 소설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그래서 언니들만큼 안 유명한가) 그 시대 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좀 귀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다락방 2022-11-08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부르셨어요? 데헷~

많이 읽으셨네요 독서괭님! 부럽..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멋있고 난리람~ 네 풋 웃었어요 ㅋㅋ
독서괭님 이 글에서 독서괭님이 재미있어 하시는게 뽝 느껴집니다. 계속 화이팅!!

독서괭 2022-11-09 11:01   좋아요 0 | URL
오셨군요! ㅋㅋㅋ
1장 읽었을 뿐인데 많이 읽었다니 ㅎㅎㅎ 다락방님은 맘 먹으면 진도 쭉쭉 빼실 텐데요. 페미니즘 책 읽으며 멋진 언니들 많이 발견해서 좋습니다^^
다락방님, 함께 화이팅해요~!

책읽는나무 2022-11-08 1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미친 듯 재미나게 읽으시는 미친 독서괭님!!ㅋㅋㅋ
이런 내용이란 거죠??
저도 천천히 최대한 빨리 읽겠습니다.
브론테 자매들 작가 DNA는 참 대단하군요?
둘째는 엄마 책 읽도록 알아서 코~ 자 주고^^
괭님 몸 상할라~ 건강 잘 챙기세요^^;;;

독서괭 2022-11-09 11:04   좋아요 1 | URL
ㅎㅎ 책나무님, 제가 애들이랑 동화책을 많이 읽다보니 동화속 성차별 메시지에 관심이 많은데, 백설공주 자세히 분석한 내용이 너무 재밌었어요^^ 책나무님도 곧 시작하시겠군요!
브론테 자매들이 함께 책읽고 쓰고, 참 좋습니다. 하지만 에밀리브론테 죽고 얼마 후 앤브론테도 29세(?)쯤에 사망했다고 해요 ㅠ 찾아보니 그나마 샬럿 브론테가 38세로 가장 오래 살았네요..
걱정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겨야쥬!!

잠자냥 2022-11-08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요미 둘째는 엄마를 책 읽게하는군요! ㅋ

독서괭 2022-11-09 11:05   좋아요 1 | URL
엄마 책 읽으라고 깨운 걸까요. ㅋㅋㅋ 요즘 말썽 많이 부리는 귀요미 ㅠㅠ

잠자냥 2022-11-09 12:1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문제는 우리 귀요미 둘째도 요즘(?), 늘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저를 깨운다는 것입니다!
화장실 간다고 문 열어 달라고 하고는.......턱시도 입고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다............ -_-;;;
저는 그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 괭님 대단해요. 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8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 전에 먼저 읽으신 분들 글 보면서 미리 열심히 예습중입니다. 역시 약삭빠른 바람돌이!!! ㅋㅋ

독서괭 2022-11-09 11:06   좋아요 1 | URL
오 바람돌이님, 예습 후 바람처럼 빠르게 진도 나가시려고요! ㅎㅎ 같이 읽어요^^

공쟝쟝 2022-11-09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찌지뽕! 저와 진도 같습니다! 저도 1장 끝내고 2장 넘어가기 전에 제인 오스틴 밀린 거 읽을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오늘 밤에 책을 정리하면서 글을 쓸까 말까도 고민 중입니다...
독서괭님이 적어주신 릴리스, 저도 너무 흥미롭게 읽었어요. 릴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읽고 싶은 데,(악마의 자식을 백을 낳았다니 ㅋㅋㅋㅋㅋ) 있나 없나... 호홋.

독서괭 2022-11-09 11:09   좋아요 2 | URL
찌찌뽕! ㅋㅋ 제인 오스틴 저는 <오만과 편견> 밖에 안 읽어서.. 하지만 이 책 서문에 메인이 샬럿 브론테라고 한 걸 보고 <빌레뜨>를 주문했습니다. <제인에어>는 옛날에 두번 읽어서.. 안 읽어도 되겠..져? ㅋㅋ
릴리스 정말 놀라웠어요. 릴리스 관련 이야기 발견하면 공유하자구요 ㅎㅎ

잠자냥 2022-11-09 12:11   좋아요 2 | URL
쓰라!쟝쟝
쓰라쟝!

단발머리 2022-11-10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설공주 이야기 무척 인상깊었어요. 저는 왕비가 사실은 친모다... 이런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거울의 소리가 왕의 목소리다, 그 부분이 참... 가부장제의 내면화, 여기랑 닿아서 신기하면서도 놀라웠어요.

저는 읽는데 치중하느라 ㅋㅋㅋ 정리를 못 하면서 읽고 있는데 독서괭님 페이퍼 읽으니 쫘악 정리가 되서 넘 좋으네요. 앞으로도 많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근데, 어느 집이든 둘째들은 왜... 전부 귀염둥이인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1-17 15:55   좋아요 0 | URL
아이고 pc 접속이 오랜만이라 이제야 대댓을 답니다. 단발님 잘 지내시죠? ㅎㅎ
거울의 소리가 왕의 목소리라는 말에 소름이 쫘악 =ㅁ=;;
정리하면서 읽어가지 않으면 이 벽돌을 소화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ㅋㅋ 정리를 계속 하려고 하는데요, 지금 4장 읽는 중인데 2, 3장 묶어서 정리해야지 하고는 못하고 있습니다.
막내들은 귀엽둥이로 태어날 운명인가봐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2-11-11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그네스 그레이 오래전 읽었는데 수수하지만 똑부러지죠. 앤의 화신 아그네스. 앤도 너무 일찍 죽어서 안타까워요.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언니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좋은 작품을 냈을건데요. 불쌍한 세 자매. 1장 총체적이고 의미있는 내용이었어요

독서괭 2022-11-17 15:57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이미 오래전에 읽으셨군요! 자전적 소설이라는 게 딱 느껴지더라고요. 진짜 브론테 자매들 더 오래 살았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까워요 ㅠㅠ 셋이서 같이 작품활동도 하고 우애가 깊었을 듯한데..
1장 좋았어요. 4장은 오스틴 작품 여러개가 막 섞여나와서 예습을 할걸 그랬다 후회중입니다^^;;

레삭매냐 2022-11-14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참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타인의 해석이 아닌 자신
만의 고유한 해석을 추구하는
게 바로 독서인이 아닌가 싶네요.

독서괭 2022-11-17 15: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레삭매냐님! 어떨 땐 같은 책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우리가 같은 책을 읽은 게 맞나 싶을 만큼 서로 기억하는 부분이 다르고 중점을 둔 부분이 다르고 받아들인 해석이 다를 때가 있어 깜짝 놀랍니다.
나만의 고유한 해석을 한다는 게 매력적이네요~^^
 


뤼시의 가벼운 마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뤼시의 '가벼움'은 '경시'가 아니다. '회피'도 아니고 '무지'도, '무감각'도 아니다. 오히려 뤼시의 가벼움은 깊은 내적 사유에서 온다. 어릴 적 첫사랑인 늑대의 눈을 오래오래 들여다본 것처럼, 그녀는 세상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기 위해 집을 떠나 기웃거린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로망과의 결혼생활을 몇년이나 지속한 것도 결혼의 본질에 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정작 사랑에 빠진 건 단풍나무였는데, 그 단풍나무를 자르네 마네 하는 주민회의에서 단풍나무를 지키려는 뜻을 같이한 '괴물' 남자와의 사랑도 몇년 동안 깊게 이어졌다. 그녀는 로망과 괴물로부터 가볍게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 책을 읽으며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던 만큼 상처도 깊었을 것이다. 뤼시는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본질을 파악하고, 꼭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나가며, 그 외에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 돈, 명예, 안정 등- 을 가볍게 박차고 날아오른다. 


요즘 나를 사로잡는 생각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다. 

세상에 고통은 만연하고, 인간사 언제든 고통이 없었겠냐마는, 또 과거에 비해 현재의 고통은 객관적으로 줄어들었을 수도 있겠지마는, 요즘에는 범람하는 고통의 전시로 인해 오히려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매일매일 뉴스로 접하는 다양한 고통의 서사들, 그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기에 대고 혐오발언을 쏟아내거나 다른 고통을 끌고와 고통의 형량을 가늠하는 방식으로 다른 이의 고통을 쉽게 축소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생각이다.

첫번째는 아예 나와는 상관없다고 차단해버리는 방식.

두번째는 "나도 겪어봤는데" 하며 고통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방식. 


두 가지를 정확히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아예 차단하는 방식의 극단적 예가 이번 이태원 참사 때 구급차 앞에서 노래하고 춤췄다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자질인 타인에 대한 연민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보이는 이런 예를 목격하면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드러내놓지 않아도 내심으로 차단해버리는 사람들은 훨씬 많을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한 개인주의.

경력단절여성이나 전업주부의 돌봄노동에 관한 기사에 "우리 엄마는 더 힘들게 생활하면서 공부를 놓지 않았고 자녀 다 키우고 취업하셨다"면서 누군가의 호소를 뭉개버리는 댓글이나, 페미니즘 이슈만 등장하면 딸려 나오는 "남자도 힘들다"는 반박은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행하는 두번째 방식이라고 여겼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번째 방식에 더 가까운 듯 하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고통은 '직접적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무엇'이다. 내가 절대로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따지고 들기에 앞서 내가 모르는 고통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위의 예들은 겸손과 수용의 자세가 전혀 없다. 



나의 남편이 언젠가 말했듯,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기본적 주장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단순하고 그저 애처로운 두 가지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 '남자도 고통받는다' 그리고 '내 아내는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41쪽










특히 '우리 엄마는~' 어쩌고 하며 엄마의 서사를 갖다 쓰는 건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한다.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걸 안다면 그 결론은 엄마에게 효도하자, 가 되어야지(효도는 셀프), 어째서 엉뚱하게 '그러니까 잔말 말라'며 여성들에 대한 공격으로 튀는가. 고통을 임의로 형량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고통을 감소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태도로서는 장려될 수 있을지언정 타인을 폄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나아 보이고 언뜻 공감을 표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두번째 방식- '나도 겪어봤는데'가 아닐까.

흔한 예로 실연의 고통이 있다. 실연(짝사랑을 포함하여)의 상처를 노래하는 유행가는 얼마나 많고 많은가. 들으면서 '내 얘기 같다'고 느껴본 경험은 한번쯤 있으리라. 누구나 젊어서 한번은, 또는 두번, 세번, 그 이상 겪고 지나가는 일. 성인 대다수는 한번은 겪고 넘어갔을 일. 그런고로 누군가 실연의 고통을 호소할 때, "나도 겪어봤는데, 다 지나가"라는 말로 사랑과 실연의 모양새를 비슷비슷하게 퉁쳐버리고 고통의 개별성을 무시해버리는 공감의 방식. 

어떤 종류의 고통이 너무(?) 자주 눈에 띌 때, 너무(?) 자주 언급될 때, 사람은 점점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두번째, 세번째가 이어지면 점점 충격은 줄어든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 매일매일 뉴스에 터지는 사건사고들에 일일이 충격을 받아가면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뉴스가 지나치게 열심히 안 좋은 일들을 파헤쳐 물어나르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이 무뎌지는 것이다. 한 사건이 일어난 앞과 뒤, 원인과 결과 등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다음 뉴스가 잇따른다. 공포나 분노, 슬픔은 무뎌지고 애매한 불안만 끊임없이 촉발된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소설이 아닐까. 내가 결코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서사를 따라가보는 것, 내가 겪어본 종류의 고통이라도 들여다보면 제가끔 모양새가 다르다는 걸 깨닫는 것, 소설은 우리를 가장 멀리까지 데려다줄 수 있고 인간의 고귀한 자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조용한 친구다. 

그러나 또한 소설은 결국 소설가 자신의 한계 속에 있다. 


 핀치가 (빈정대는 어조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성의 요구와 의도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구속의 강압적 힘과 더불어 그 힘을 구현한 문학작품의 강압적 힘까지 뚜렷이 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여성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배우기 때문이다. 리오 베르사니가 말하듯, '글은 단순히 정체성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 나아가 육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는 문학에 몰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존재의 용해, 혹은 적어도 존재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85쪽 


 앨버트 겔피가 간명하게 말했듯이, '예술가는 경험을 죽여서 예술로 만든다. 일시적인 경험이 죽음을 피할 유일한 길은 예술 형식의 '불멸성' 속으로 죽어서 들어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 속의 고정적 '삶'과 자연 속의 유동적 '삶'은 속성상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펜은 칼보다 더 강할 뿐만 아니라 죽이는 힘(그 필요성)도 칼과 다를 바 없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90쪽 



이 말들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어째서 더 편협한 경우가 있는지 설명해 준다. 이 책에서 든 예로서 제인 오스틴의 <설득>의 등장인물 하빌 대령은 여성의 변덕에 대해 주장하면서 '여성의 변덕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책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답니다.'라며 책을 근거로 댄다.(<다락방의 미친 여자> 86쪽)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떤 작품을 봐도 그 자신의 편견을 지지하는 내용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건만, 그 자신의 편견과 꼭 일치하는 편견을 가진 작가가 쓴 책을 읽는다면? 확증편향이다. 결국 소설이 유일한 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답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열고 본다면.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80~90% 이상 공감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관용을 터득하고 싶다. 그게 내가 이 만화를 시작하기 전에 잡아놓은 포인트고, 그에 따른 전개 방식과 연출 방식을 택했다"라고.    -  <안녕, 나의 순-정> 161쪽 

 

 이건 만화가인 유시진 작가가 <쿨핫> 서문에 적었다는 내용이다. <쿨핫>을 나도 참 좋아했었다. 완결을 내주지 않는 작가를 원망도 많이 했더랬다.. 아무튼 이런 마인드로 작품을 내는 사람의 이야기는, 믿고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포르노랜드>를 읽으며, 사방에 전시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생각한다. 그것이 슬금슬금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의 내면을 파고들어 포르노 시장의 농간에 모두가 놀아나고 있는데, 너무 흔하여 무감각해진 것이 아닌지. 나이 지긋한 남성 아나운서와 젊고 아름다운 여성 아나운서의 조합에, 대형서점에 턱하니 비치된 <맥심>의 헐벗은 표지에, 허벅지 살을 걱정하며 밥 먹기를 거부하는 초등학생에, 온 사방에 붙어있는 성형 광고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은 무섭다. 우리에게서 문제의식을 빼앗고, 분노의 힘을 빼앗고, 타인의 정당한 외침에 냉소하게 만든다.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는 힘, 생각하는 힘, 성찰하는 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에게 그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세상에 순응하는 방법이 아니라. 





캠퍼스에서 걷고 있는데 신문 앞면에 실린 통계가 눈에 들어왔다. 여성 네 명 중 한 명이었나,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캠퍼스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여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장실 안내판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여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모두 회색으로 페이지 전면에 그려져 있고 다섯 중 하나만 빨간 잉크로 칠해져 있는 그래픽이었다. 

 (...) 나는 캠퍼스 곳곳에서 검은 레깅스에 귀마개를 하고 청록색 배낭을 멘 소녀들을 보았다. 우리 몸에 말 그대로 빨간색 페인트가 칠해진다면 이 중 4분의 1이 빨간색 몸일 것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앞에 신문을 흔들어 보이고 싶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전염병이었다. 위기였다. 당신은 어떻게 이 헤드라인을 보고도 계속 걸어갈 수 있나요? 우린 그 심각함에 둔감해진 것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   - 221, 222쪽 






다시, 뤼시의 가벼운 마음을 생각한다. 둔감하지 않은 마음, 그렇지만 절망하지 않는 마음을 생각한다. 

어떻게 거기에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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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1-04 18: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통에 대한 반응들.. 특히 남자들의 반응들… 구구절절 너무 감동적이고 와닿는 글이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쿨핫나와서 넘어짐…. (아 독서괭님 ㅠㅜㅜ 내 밀레니얼 칭구 ㅠㅠㅠㅠㅠ 가끔 너무 어른 같아 잊고 있었 ㅋㅋㅋ) 아니 뭐예요? 새 책이 나온 거예요? 나 쿨핫 진짜 ㅋㅋㅋ 넘나 좋아햇다구요 ㅋㅋㅋㅋ

건수하 2022-11-04 20:44   좋아요 2 | URL
아니 쿨핫은… 저도 좋아했다구요… (낑겨보자) ㅋㅋㅋ

독서괭 2022-11-07 14: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쿨핫 진짜 넘 좋죠 ㅋㅋㅋ 쟝쟝님도 학창시절 만화 좀 탐독하셨나요? <안녕, 나의 순-정>이라는 책에 90년대를 풍미한 만화들 총출동합니다. 그냥 추억팔이 책인 줄 알고 후딱 읽고 처분하려고 했는데 작가가 글을 재밌게 잘 썼고 역시 추억이 돋아나.. 소장각.. ㅋㅋ

독서괭 2022-11-07 14:59   좋아요 2 | URL
수하님도 쿨핫!! >ㅁ< 유시진으로 대동단결 ㅋㅋ

공쟝쟝 2022-11-07 16:00   좋아요 1 | URL
만화 대여점 흥하던 시절이라 많이 읽었죠!! 저는 이시영의 필소굿과 유시진의 쿨핫을 최고로 칩니다 … 서문다미 그들도 사랑을 한다랑 ㅋㅋㅋ (일본 순정 만화는 잘 안봄 ㅋㅋㅋㅋ)

독서괭 2022-11-09 10:58   좋아요 1 | URL
만화대여점 ㅎㅎㅎ 정말 열심히 드나들었는데.. 엄마 몰래.. 지금도 가끔 몰래 만화책 빌려보고는 잊어버리고 한참 반납을 안하다가 퍼뜩 생각나서 어떡해 하며 동동거리는 꿈을 꿉니다 -_-;;; 전 강경옥 작가님을 최고 좋아했어요 ㅎㅎ

건수하 2022-11-04 2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자도 힘들다, 내 아내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제가 동료들한테 자주 듣던 말..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아요) 보며 코웃음을 쳤더랬죠…

<가벼운 마음> 가볍게 읽고 싶어 샀지만 읽지 못하고 있고… 언젠가부터 저의 마음은 무겁고 불만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런게 가능한 걸까…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공쟝쟝 2022-11-04 22:11   좋아요 3 | URL
제가 그 몸으로 안살아봤는데 생리안하는 몸으로 근육 잘 붙는 몸으로 다음 생에는 ….

독서괭 2022-11-07 15:02   좋아요 3 | URL
헉 동료들한테 그런 말 자주 들으셨군요ㅠㅠㅠ 자기들은 군대 힘들다 얘기할 때 여자들이 여자도 힘들다, 하면 안 받아들일 거면서 -_-;;
수하님 마음이 무겁고 불만으로 가득차 있으시군요 ㅠㅠ 전 페미니즘 책 읽으면 시원하고 좋을 때도 있지만 스트레스 받고 화가날 때도 많아서 연달아 읽기는 힘들기도 하더라구요. <가벼운 마음>이 저는 아름다운 음악 듣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마음 무거울 때 오히려 시도해보심이..!
쟝쟝님/ 후, 저도 생리 안 하는 몸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ㅠ

단발머리 2022-11-05 08: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고통을 이해하는 좋은 방식이지만 유일한 답일 수 없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아는 건 많아지겠지만 마음까지 넓어지는 건 아닌 거 같고요. 상황 전체를 이해하는 안목은, 특히 첨예하게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책 많이 읽은 거 소용없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디어 마이 네임> 자주 보여서 관심 갔는데 인용해주신 부분 보니 더 읽고 싶네요. 잘 읽고 갑니다, 독서괭님^^

독서괭 2022-11-07 15:04   좋아요 1 | URL
단발님, 공감 감사합니다. 책이란 것도 워낙 종류가 다양하고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고 하니, 편협한 독서는 편협한 마음을 만들 뿐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애초에 양서를 고르는 안목도 필요하고, 작가의 편협함을 적절히 걸러낼 줄도 알아야하겠고요. 역시 독서교육이 중요하구나 하는 결론이..?!
<디어 마이 네임> 읽어갈수록 감탄입니다. 글 너무 잘썼어요!

바람돌이 2022-11-05 16: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책을 굉장히 많이 읽고, 따라서 좋은 책도 많이 읽는 분이 있는데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저분은 책을 발로 읽으시는걸까라고 말입니다. 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데 얘기하는건 들어보면 국민학교 졸업 학력에 평생 책 한권 안 읽으신 우리 어머니랑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카톡에 도는 온갖 가짜뉴스 진짜 말도 안되는 뉴스들을 완전 맹신하면서말이죠.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똑바로 읽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이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네요.

독서괭 2022-11-07 15:06   좋아요 1 | URL
책을 발로 읽 ㅋㅋㅋㅋㅋ 진지한 댓글에 웃어버렸네요 ㅎㅎ 정말 그런 분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다독=지혜는 절대 아닌 것 같고요. 뭐든지 마음을 닫고 하는 경험은 소용이 없고 ˝나 그거 읽었다˝˝나 그거 해봤다˝ 수준의 의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님의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면˝ 소용없다는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mini74 2022-11-07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가가서 효도할게. 왜? 남자들은 결혼해야 사람이 되는건가요? 그 전엔 왜? 하다가 아. 그들이 바라는 건 대리효도 ㅎㅎㅎ구나 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과 위로만 그것도 적정선에서 ㅠㅠ 그게 쉽지 않네요.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일에 벗어나는 방법이 소설이란 괭님 글에 공감합니다 ~~

공쟝쟝 2022-11-07 15:59   좋아요 2 | URL
저 한국의 효자들 진짜 싫은데 그들은 대리효도 자들이거든요 ㅋㅋㅋㅋ 으윽ㅋㅋㅋ

독서괭 2022-11-09 10:59   좋아요 0 | URL
장가가서 효도할게 = 착한(만만한) 며느리 데려올게 ㅎㅎ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고통에 감응하도록 마음이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해주는 좋은 도구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니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