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에서 여왕이 자기가 미워하는 의붓딸과 싸우는 데 무기로 사용한 빗, 코르셋 끈, 사과와 마찬가지로, 거식증이나 광장공포증 같은 고통은 가부장제가 정의한 ‘여성성‘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극단으로 몰고 간 결과이자, 사회적 처방에 대한 본질적이고 어쨌든 피할길 없는 패러디다.
그러나 19세기에 여성들을 아프게 한 것은 이런 질병이 패러디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처방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문화 자체가 여성들을 병들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고통받았던 ‘여성의 질병‘은 꼭 여성성 훈련이 낳은 부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질병이 바로 훈련 목표였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디어러 잉글리시가 보여주었듯, 19세기 내내 ‘상류층과 중상층 여성들은 ‘병든‘(허약한, 건강이 나쁜) 존재로 여겨졌으며, 노동자 계급 여성들은 ‘병들게 하는‘(감염시키는, 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숙녀란 약하고 병약한 존재라는 사회적 동의가 있음‘을, 그 결과 ‘여성의 병약함에 대한 숭배‘가 영국과 미국에서 발달했음을 지적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무자비한 자기 억제를 의미한다면 필연적으로 질병을 수반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는 디킨슨의 주장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수세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절망은 마카리에의 인생 같은 삶, 즉 ‘이야기를 갖지 못하는‘ 삶이라는 절망, 바로 그것이다. - P153~155



제2장 감염된 문장

: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 우리는 절망을 들이마시겠지." -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 시가 오싹하게 느껴진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유구한 억압의 역사 속에서 쓰이고 살아남은 문장들은 감염되었고, 우리는 읽음으로써 그 안의 절망을 들이마신다. 적절한 비평을 통해 감염된 문장이 '감염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고 내 안에 항체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특히 이 책에서 새롭게 깨닫는 부분은 여성혐오, 여성대상화로 가득한 남성작가들의 글 뿐만이 아니라 여성주체를 내세워 여성작가가 쓴 문장들 역시 감염되었고, 오히려 더 교묘한 방식으로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병약함에 대한 숭배, 예전 어느 미술관에서 여성 초상화 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시 창백한 피부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찬물에 손을 담가 일부러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일이 떠오른다. "영원이 여성적인 것이 무자비한 자기 억제를 의미한다면 필연적으로 질병을 수반하지 않겠는가?" 수세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는 여전히 절망을 들이마시고 있다. 10대 여자아이들이 거식증에 걸리는 사회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몸무게에 대한 걱정, 거부에 대한 두려움, 완벽주의에 대한 갈망 같은 특정한 주제는 여자아이 개인의 '병리 현상'이라기보다 여성에 대한 문화적 기대에 뿌리를 두는 듯했다. 여자아이들은 뒤섞인 메시지와 씨름해야 했다.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섹시해야 한다. 하지만 야해서는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다정해야 한다.' '똑똑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을 위협할 정도로는 안 된다.'  -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67쪽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기 삶의 주체였던 여자아이들이 다른 사람 삶의 객체가 된다"고 소녀들이 겪는 문제를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은 천천히 유년기를 땅에 묻고, 독립적이고 도도한 자아를 버리고, 순종적으로 성인이라는 존재가 되어간다."고도 했다.

 청소년기 여자아이들은 인간 존재로서의 지위와 여성으로서의 소명 사이에서 갈등한다. 보부아르 말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은 '존재하기being'를 그만두고 '보여지는seeming' 삶을 시작한다". - 같은 책, 36쪽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는 시기에 겪는 여자아이들의 혼란을 분석한 <내 딸이 여자가 될 때>의 내용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서술하는 여성 작가들의 혼란과 겹쳐 보인다. 어쩌면 사회 전체가 여성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던 19세기보다 상반된 메시지가 다양한 경로로 무분별하게 전달되는 21세기가 여성(소녀)들에게는 더 불안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정에서는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에 의하면, 남성 정신의 위대함을 그리는 이야기다. 상업광고, 뮤직비디오,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은 '섹시하지만 야해서는 안 되는' 등의 기준을 들이대며 이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을 조롱한다. * 그나저나 여기나 저기나 등장하여 적재적소 촌철살인을 날려주시는 보부아르님, 당신은 대체.. 내년엔 꼭 읽을게요. 



유사하게 『오이디푸스』에서 『파우스트』까지 전형적으로 위대한 비극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남자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남자 주인공은 지배하거나 반항하려는 강한 의지로(또는 둘 다를 원함으로써) 고귀해질 뿐 아니라 상처받는다. - P174


고귀한 자는 결국 맥베스이고 레이디 맥베스는 괴물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지만, 메데이아는 마녀일 뿐이다. 리어의 광기는 거룩하고 보편적이지만, 오필리아의 광기는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 P175


고전에 한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탐험하고, 모험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영화들에서는 남자캐릭터가 대세다. 한팀 중 한두명 여자를 끼워넣을 뿐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혼성팀에서 대장은 예외없이 남자다. 혼성팀 대장이 여자인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 옥토넛도, 퍼피구조대도, 미니특공대도 마찬가지다. 대장은 남자다. 과거에 반장은 남자였던 것처럼. 대다수의 대통령과 CEO가 남자인 것처럼. 등장하는 여성인물의 숫자가 적을 때, 문제는 해당 캐릭터의 '성별'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해당 여성캐릭터가 아무리 훌륭하게 묘사된다고 해도(여성캐릭터가 적을수록 그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있다. 여자아이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캐릭터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쉬운데, 동일시할 캐릭터가 적으면 그만큼 선택지가 적어진다. 남성캐릭터는 많기 떄문에 다양한 성격구현이 가능하다. 

많은 고위집단에서 소수인 여성들은 완벽을 요구받는다. 실패해도 그 사람의 문제로 여겨지는 남성들과 달리, 소수자 여성의 실패는 '여자라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1837년에 샬럿 브론테는 ‘저는 여자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고 말하며 로버트 사우디를 안심시켰다. 브론테는 ‘항상 성공한 것은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치거나 바느질할 때 가끔 저는 차라리 독서하거나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하고 부끄러운 듯 고백하고, ‘저는 저 자신을 부정하려고 애씁니다. 아버지의 인정은 그런 결핍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주고요‘라고 공손하게 덧붙인다. - P168


오, 샬럿 브론테가 나왔다. 이런 말을 했구나.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를 읽고 있는데, 여기서 느껴지는 강인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진다. 저런 말을 한건, 정치적 스킬이 아니었을지..? 



<빌레뜨> 너무 재미있다. 앤 브론테의 <아그네스 그레이>에 뒤이어 읽고 있자니, 언니쪽이 훨씬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싶다. 인물의 생생함이나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능력 면에서 특히 샬럿 쪽이 탁월해 보인다.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 얼마나 개성있고 입체적인지, 감탄하며 읽는다. "이해관계야말로 성격의 핵심이자 동기의 주요 원천이고, 삶의 알파이자 오메가"(112쪽)이며 "혼자서 수상과 검찰총장을 겸임할 수도 있었을 인물"(113쪽)이라는 베끄부인, "즐거움과 쾌락 만세! 위대한 열정과 엄격한 정조 따위 물러가라!"(140쪽)고 외치는 팬쇼 양, 또한 꽤나 도덕적이고 보수적으로 보이는 화자 루시 스노우도 자신의 앞길을 찾아 낯선 곳에 과감하게 발을 디디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에 용감하게 나서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말 매력적이다. 




그런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앤 브론테를 언급하는 부분을 보니, <와일드펠 홀의 거주인>(혹은 소작인)을 읽어봐야 그녀의 진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번역본이 없다..



앤 브론테의 『와일드펠 홀의 거주인』(1848)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가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여성 해방 이야기다. 특히 잘못된 결혼의 감옥 밖으로의 탈출, 그리하여 예술가로서 성공해 독립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소설의 주인공 헬렌 그레이엄은 남편을 피하려면 신분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전문 화가가 된 뒤 자신의 풍경화에 가짜 서명을 써넣고, (...)- P193


관람객 중에는 그녀가 도망치고자 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헬렌은 자신의 상황을 그려야 할 필요성과 자신의 위치를 숨겨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한다. 따라서 자신의 예술과 맺는 긴장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젠더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헬렌의 불안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통해 여성 예술이 여성성에 의해 어떻게 근본적으로 제한받는지 추정할 수 있다. - P196



어찌됐든, 감염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여성 작가들이 시대의 역경을 뚫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낸 데에는 큰 의미가 있다. 남성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남성작가가 쓴 여성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으므로.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써 근본적인 권위를 획득한 이런 작가들은 또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유명한 (그야말로 여성적인) 충고를" 따름으로써 이들 특유의 작가 됨에 대한 불안을 누그려뜨렸다. - P182


제인 오스틴과 메리 셸리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양피지에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것 같은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이런 작품들의 외관은 표면의 무늬가 훨씬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 어려운) 층위의 의미를 감추거나 흐려놓았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P183


숨겨진 이야기나 메시지는 ‘인류의 반이 꾸려가는 한낱 사적인 삶’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갖는 19세기 여성문학 대부분에 은폐되어 있는 단 하나의 플롯은 어느 정도는 자기 이야기에 대한 여성 작가 자신의 탐색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아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여성의 탐색이다. - P186


‘어떤 남자도 추측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감염과 질병을 치유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 P187


이 모든 선택, 즉 확실히 주류적인 것이 아니라 외관상 소품 같은것, 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영광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은 것을 선택한 데는 의식적이거나 반의식적인 아이러니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런 선택의 필요성은 아주 최근까지 영미의 거의 모든 여성 작가들이 처했던 상황, 즉 작가 되기의 병적인 불안을 강조해준다. 모든 여성의 삶과 시, 그리고 선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간단히 말해, 여성 문인이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적 현존을 규정해야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든 똑같이 항상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성 문인은 자신의 작품을 전적으로 억압하거나 작품의 출판을 필명이나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녀는 겸손하게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고, 열등한 능력에 걸맞게 숙녀들을 위한 ‘더 하찮은‘ 주제에 집중해야 했다. 후자의 선택이 실패의 인정으로 보인다면 여성 문인은 반항할 것이며 그 결과 불가피하게 추방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여성 작가는 당황스러운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여성 문인은 자신이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선택에 직면한 여자들이 문학작품을 창조하자 그들의 작품에는 제한된 선택에 대한 강박적 관심뿐 아니라 예외 없이 강박적 감금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 P168, 169


이런 혼란과 억압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감추고 비틀며 써냈다고 생각하니, 19세기 여성문학을 읽는다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냥 재미로 읽었던 과거 독서와는 달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빌레뜨는 그냥 재미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긴 하지만. 여기에도 감금의 이미지가 나오는지 잘 살펴봐야겠다.

<제인에어>에서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미친 전부인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분석은 흥미롭다. 샬럿이 제국주의자라는 비평도 있다는데, 이 부분 염두에 두고 재독하고 싶다.



심지어 표면상으로는 가장 보수적이고 얌전하게 보이는 여성 작가들조차 대단히 독립적인 인물들을 강박적으로 창조했으며, 이런 인물들은 작가나 작가의 순종적인 여자 주인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는 모든 가부장적 구조를 파괴하고자 한다. 물론 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반항적 충동을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미치거나 괴물 같은 소설이나 시 속에서 적절하게 벌을 받는) 여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분열, 즉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을 수용하고자 하는 욕망과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극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문학에 등장한 미친 여자가 남성 문학과 달리 단순히 여자 주인공의 적대자거나 들러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친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의 이미지다. - P189



3장: 동굴의 비유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아서 패쓰.

4장, 5장에서는 제인 오스틴 작품들을 본격 분석한다. 제인 오스틴 예습할 걸 그랬다고 후회막심 중. ㅠㅠ 5장 읽는 중인데, 모르고 읽어도 읽을 만하긴 하지만 답답한 지점도 많다. 또 언급되는 다른 작품 중 마리아 에지워스의 <래크렌트 성>이 궁금한데 번역서가 없다. 번역 좀 해주세요.. 19세기 문학을 원서로 읽을 자신은 더더욱 없다구?!! 





따라서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선배와 후배에 대한 갈증과 남성 선배로부터의 소외감, 남성 독자의 반감을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여성 독자에 대한 절박한 갈구, 문화적 조건 안의 자아를 극화시킬 때 튀어나오는 소심함,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등 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며, 자아 창조를 위한 그녀의 노력을 남성 작가와 구분해주는 현상이다 - P147

게다가 그런 여성들은 루퍼스 그리스월드 같은 사람의 주장("우리는 여성의 글을 읽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이 넘쳐날 뿐인데도 창조적인 지성을 피워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오인할 위험이 있다")에 깔려 있는 전제에 깊이 영향받았다. 이 말은 비록 여성이 펜을 드는 일이 부조리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병적(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신경증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 P162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 P166

자신의 문학적인 노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친 사람 내지 괴물로 취급받았다. 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기이하고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기이하다는 것이다. - P167

현대 여성들이 활력있고 당당하게 펜을 들어 써내려간다면,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의 여자 조상들이 병들 정도로 심한 고립 속에서, 미칠 듯한 소외감 속에서, 마비를 일으키는 모호함 속에서 자신들의 문학적 하위문화에 고질적으로 퍼져 있던 작가 되기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싸웠기 때문이다. - P148

남성 모델의 지속적 사용은 여성 예술가를 심리적 자아 부정이라는 위험한 상황으로 불가피하게 몰고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심리적 자아 부정은 키츠가 숙고했던 형이상학적 자아 상실을 훨씬 넘어선다. 배럿 브라우닝의 상드 소네트가 드러내듯, 자아 부정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로 치닫을 것이다. - P177

첫째, 많은 여성 문인이 여성의 ‘겸손함‘이나 남성 흉내를 벗어버리고 뛰어넘어 성장했다. 오스틴에서 디킨슨에 이르는 이런 여성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중요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 P181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괴물 여성은 자신을 표현할 힘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다. 메리 셸리는 창조자에게는 단지 ‘움직이고 말하는 더러운 덩어리‘에 불과한 괴물을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며 그런 인물의 내면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 P191

글자 그대로의 집이 된다는 것은 결국 몸을 정신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그런 초월성이야말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주장했듯, 인간을 고유하게 인간으로 만들어주는데 말이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출산에 갇혀 있는 것은(그리고 우리가 지금 ‘출산‘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19세기 단어가 ‘감금‘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는 집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다. - P206

배반당한 에우리디케는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주디스 셰익스피어’처럼) ‘무덤 동굴‘이라는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시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성 예술가는 이시스와 에우리디케를 복원하면서 문학 유산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즉 가라앉은 대륙을 재정의하고 되찾는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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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11-22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흐.... 독서괭님 명품 페이퍼 너무 좋네요. 저는 아직은 샬럿이 최애인데 에밀리는 독특한 느낌이 있잖아요. 앤도 그에 못지않는 특별한 매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P183

저는 183쪽의 이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당시 이 소설을 사서 읽을만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와 가부장제에 대한 고발, 조롱, 냉소를 ‘섞어서‘ 창조했다는 점에서요. 순응과 전복. 여성 작가들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도 페이퍼 쓰고 있어요. 곧 돌아오고 싶으나, 쩜쩜쩜.

독서괭 2022-11-22 17:29   좋아요 1 | URL
단발님 샬럿이 최애시군요! 전 아직까지는 완독이 딱 1작품 씩이라 ㅋㅋ 뭐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ㅋㅋ 그동안은 <폭풍의 언덕>이 최애였어요. 하지만 빌레뜨 읽으니 넘 좋아서 샬럿파로 갈수도.. 읽은 것도 재독하고 안 읽은 것도 읽어보려면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그 부분 넘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제인오스틴 4장 읽으면서 참 영리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단발님 페이퍼 기대할게요^^

거리의화가 2022-11-22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레뜨 재밌죠^^ 저는 역시 오스틴보다는 브론테 쪽인 것 같아요^^; 3부 들어가야 하는데 역시 안 읽고 진입하기는 답답한가보군요. 3장 동굴의비유는 인상적이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굳이 이 타이밍에? 라는 생각도 있었고 단 번에 이해는 잘 안갔어요. 수하님 댓글과 페이퍼 통해서 뒤에 관련해서 내용이 나온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괭님 좋은 페이퍼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2-11-22 17:31   좋아요 1 | URL
오 화가님에게 오스틴보다 브론테 승! ㅋㅋ전 오스틴은 좀더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만과 편견 나름 재밌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서;; 다미여 읽고 읽으면 또 달리 보일 것 같기도 하고요.
동굴비유 뒤에 또 나오는군요? 저도 수하님 페이퍼 보며 공부 좀 다시 해야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건수하 2022-11-22 18:33   좋아요 2 | URL
제가 페이퍼는 안 썼는데....
7장에서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이 나올 때 3장의 내용이 조금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2-11-23 13:11   좋아요 0 | URL
오, 네. <프랑켄슈타인> 읽었으니 7장은 조금 수월하려나요? 어렵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다락방 2022-11-22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어서 빨리 빌레뜨 시작해야 겠습니다. 저는 오늘 3장 들어갔어요. 독서괭 님의 진도가 훨씬 앞서있네요!

제2의 성 읽을 때 와 이런 얘기도 했어? 이런 얘기도? 하면서 온갖 얘기 다 들어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보부아르 님 대단... 아무튼 저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같은 책을 읽는 분이 이렇게나 근사한 페이퍼를 작성해주시다니. 감동이 밀려옵니다 흑흑 ㅠㅠ

독서괭 2022-11-22 17:32   좋아요 1 | URL
으흐흐 다락방님, 빌레뜨 책 딱 보고 넘 예뻐서 기분 좋았는데, 내용도 재밌어서 완전 씐나요^^
제2의 성에 엄청난 얘기들이 많군요. 밑줄 어마하게 긋게 될 것 같네요. 내년에 벽돌들 좀 깨 볼까 해서.. 제2의 성도 도전해보렵니다..! 다락방님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셔서 넘 감사해요^^

건수하 2022-11-23 13:25   좋아요 0 | URL
오, 저도 읽다만 제2의성 내년에 마저 읽으려고요! 독서괭님 같이 읽어요 ㅎㅎㅎ

독서괭 2022-11-23 13:43   좋아요 1 | URL
수하님, 좋아욧!🤩

건수하 2022-11-22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샬롯 브론테의 <셜리>도 번역되지 않아 매우 아쉬운 책 중 하나예요.
<실낙원>에서 넘어졌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집 안의 천사 죽이기> 읽으며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폭풍의 언덕> 나오는데 역시 넘 어려워요 ㅎㅎ 제가 왜 그 소설을 읽으며 혼란스러워했는지 정도만 이해하며 넘어가려고 해요 :)

독서괭 2022-11-23 13:1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셜리>는 왜 번역 안 해줄까요? 어서 해달라!
실낙원은 영 다들 어려우신가 봅니다. 전 시도 안하려고요;; <집 안의 천사 죽이기>는 읽어보고 싶어요!
<폭풍의 언덕> 읽은 책이라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어렵군요ㅠㅠㅠㅠ 역시 비평은 어렵다..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페미니즘 비평이라니ㅠ 수하님 파이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11-22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빌레뜨로 선택하셨었군요?
책 표지 이쁘죠??^^
다미여도 많이 읽으시고, 아까 바람돌이님 서재에서 디킨슨 시인의 정답 한 개도 맞추시고?? 괭님 너무 천재 아니신가요??
알고 보니 천재!!! 알천재????ㅋㅋㅋ

독서괭 2022-11-23 13:13   좋아요 1 | URL
네 나무님! 책이 넘 예뻐서 여러번 쓰담쓰담 했어요 ㅎㅎ 볼때마다 기분 좋네용^^
알천재라니 ㅋㅋㅋㅋㅋ 뭔가 어감이 요상하지만 ㅋㅋㅋ 그런 이미지로 밀어봐야겠습니다 ㅋㅋ

바람돌이 2022-11-22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와 에이드리언 리치는 무슨 책을 보든 어디에서나 튀어나오는 주인공들! 저는 내년에 이분들의 책을 목표로 해야 할 거 같아요. ^^ 후발주자의 이점은 앞선 사람들이 이룬 성과를 온전히 흡수하고 간다는거죠? 먼저 읽으신 분들의 이런 명품 글을 보면서 아 이런 면을 유의해서 봐야겟구나 막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인에어의 버사가 샬럿 브론테의 분신일수도 있다는 것,
또 샬럿 브론테가 제국주의자? 이것도 염두에 두면서 읽어볼게요. ^^

독서괭 2022-11-23 13:15   좋아요 0 | URL
오 에이드리언 리치도 그렇군요. 둘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명품 글이라니 과찬이십니다. 버사가 분신일 수 있다. 샬럿 브론테가 제국주의자라는 비평 등의 내용은 다른 분 페이퍼에서 봤어요 @_@ 참 해석이란 재미있습니다.
바람돌이님 파이팅입니다^^

scott 2022-11-22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빌레트 이토록 잼 나는데
영쿡인들은 오로지 오스틴 작품만 줄창 영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ㅎㅎ

독서괭 2022-11-23 13: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스틴만 편애하다니! 브론테도 사랑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