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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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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폐허를 연상시킨다. 불타 버린, 인적 없는, 누구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는 폐허. 

스베틀라나 알렉스예비치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가 잿더미를 뒤적인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던 거기엔 조용히 잊혀져 가던 형상들이 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이 있다. 더 깊이 파헤칠수록, 꺼져가던 불티가 날린다. 아직도 뜨거운 그 잿더미가 그녀는 무섭지 않았을까. 얼마나 많이 손을 데이고 마음을 데었을까. 

독자는 이 책을 두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가 정성스레 모아둔 잿더미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그 뜨거움을 느끼는 것, 한발짝 물러서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한가지 방법을 고수하기는 힘들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너무 고통스러워 독서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한 걸음 물러서면 책 속의 목소리들은 유령처럼 쉽게도 흩어졌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먼나라 일처럼 바라보게 되면 이 독서는 무용하다. 그걸 알기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적정거리를 찾으려 애썼지만, 적정거리라는 게 과연 있을까 의문스럽다. 결국 마음을 데여가며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이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기한에 맞춰 바쁘게 읽은 이번 나의 독서는 실패라 해야겠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무엇을 위해?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지금 이렇게 그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 187쪽


나는 전쟁을 모른다. 겨우 열 몇살짜리 소녀들이 전쟁에 필요한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조국을 지키겠다고 최선전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신념도 모른다. 동상이 무엇인지, 굶주림이 무엇인지, 고문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 가족을 죽인 이에 대한 들끓는 증오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몰라도 여성으로서, 딸로서, 어머니로서 이들이 토로하는 고통에 감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전쟁 상황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는, 나 역시 경험한 내용도 있었다. 바로 여성성을 버리라는 요구와 지키라는 요구 사이의 갈등, 그 사이에서 정체성이 분열되는 고통이다. 


"우리는 애를 참 많이 썼어...... '여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우리가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남자가 되겠어? 그럴 순 없는 거지. (...) 진군할 때였는데...... 여자병사들 200명 정도가 앞서가고, 남자병사들 200여 명이 그 뒤를 따랐어. 푹푹 찌는 날씨에 3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걸었어. 자그마치 30킬로미터를! 그렇게 계속 걷는데 우리가 지나간 자리, 모래 위로 빨간 얼룩들이 남는 거야...... 붉은 자국들이..... 그러니까 그건...... 왜, 우리 여자들의 그거 있잖아...... (...) 바지가 다리 위에서 그대로 말라붙는 바람에 꼭 유리바지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어. 살이 베어서 상처가 났더라고. 가는 내내 피냄새가 진동을 했어. 그런데도 우리에게 지급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 - 356, 357쪽


직업을 가지게 되면, 물론 직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요구되는 덕목들이 있다. 문제는 개인의 매력이라든지 사적인 영역에서 요구되는 덕목과 그것이 남성들에게는 (대체로) 일치하지만 여성들에게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치하기는 커녕 대척점에 있다. 적극적이고, 자기 주장을 잘 관철하고, 남자들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리고, 술을 잘 마시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강한 여성은 업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다만 그 와중에도 비슷한 남성은 있는 그대로 칭찬을 받는 반면 여성은 '저래가지고 결혼은 못하지', '여자가 저렇게 드세가지고' 등등 뒷말을 듣는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매력평가(주로 남성들에 의한) 면에서는 그 반대되는 특질들이 요구된다. 엄마로서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남자 옆에서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를 드높여주는 여성이 '현모양처'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비교당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어쨌든 여성인 우리는, 남성과 똑같아질 수는 없다. 남성 중심으로 구축된 세계에 들어간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남성 중심 세계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 그것도 전시의 군대에는 여성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고 그것은 남성병사는 몰라도 되는 여러 가지 불편과 괴로움을 여성병사는 겪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거 말고도 힘든 건 또 있었어. 여자라서 겪는 어려움이었다고나 할까. 나중에 분대장이 됐는데, 분대원이 전부 어린 남자병사들인 거야. 우린 하루종일 발동선에서 지낼 때가 많았거든. 그런데 아휴, 배는 작지,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병사들이야 남자니까 배 밖으로 볼일을 해결하면 그만이었지만 여자인 나는?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바다로 뛰어든 것만 몇 번이었다니까. 그러면 병사들이 '하사관님이 물에 빠졌다!'고 소리치면서 나를 끄집어올려주는 거야. 그래, 그런 사소한 어려움들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정말 사소한 일이었을까? 나중에 나는 그 일로 치료까지 받았는걸......  - 195쪽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네들의 노력과 고통이 전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선에서 싸워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동지의식이 있었던 전쟁터와 달리,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소녀병사들은 외면당한다. 남성들은 이들을 모른 척하고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더 천진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에게로 간다. 같은 여성들마저 이들을 적대시한다. 다만 전장에서 만나 결혼하여 삶을 꾸려간 이들도 있다. 이 책은 이런 다양한 개인의 경험들을 임의로 분절하여 주제별로 모으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언어 그대로 전달한다.  


- 하지만 그 여자들이 고국을 지킨 건 사실이잖아요? 조국을 구해냈다고요......

- 그건 그렇소만...... 그런 여자들이랑 정찰은 같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요. 그게, 그래요......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 엄마나 아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요. 결국은 아름다운 숙녀에게 익숙하다는 거요. (...)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오. 그런데도 남자들 이야기는 그렇게 쓸 게 없는 거요?  - 166쪽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 221 쪽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 429쪽


전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힘들었어. 그런데 전쟁 후에도 고통을 겪어야 했지. 또 한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까. 앞선 전쟁만큼이나 끔찍한 또 한번의 전쟁. 무슨 이유인지 남자들은 우리를 저버렸어. 모른 체했지. 전쟁터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 550쪽 


초반에는 소녀병사들이 동료병사들로부터 당했을 법한 성적 위협이나 적국의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 등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후반부에는 조금씩 언급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이들은 여전히 입 밖에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곁에라도 있어야만 했던 절박함.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안 생기더라고. 하지만 몇 달 후에 그 사람 막사로 거처를 옮겼지. 달리 어떡해? 사방이 남자들인데, 그 남자들이 무서워 떨며 지내느니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게 낫잖아. 오히려 전투에 나가는 건 무섭지 않았어. 전투가 끝나고, 특히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쉴 때가 무서웠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밤이면 막사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질 않았어......   - 411쪽


"독일군은 여자병사들은 포로로 잡지 않았어...... 바로 총살해버렸지. 아니면 자기 병사들 앞에 끌고 나와 '자, 여기 이것들은 여자가 아니다. 추악한 괴물이다'라고 하거나. (...)

우리 간호병 하나가 독일군에게 붙잡혔어...... 하루가 지나 우리가 그 마을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사방에 죽은 말이며 오토바이며 장갑수송차 등이 나뒹굴고 있더라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우리는 그 아이 배낭에서 가족이 보낸 편지들과 고무로 된 작은 파랑새를 발견했어.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고무새를......"   - 243쪽


이 부분은 가장 울컥했던 내용이다. 장난감 고무새를 소중히 간직하고 전쟁터에서 버티던 열아홉 소녀... 다시 읽어도 눈물이 난다. 모진 전쟁, 모질다. 독일군이라고 해서 특별히 잔인한 괴물일까? 열아홉살 소녀를 말뚝에 박아놓는 것은, 그것이 독일의 문제일까? 아니다.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가장 잔혹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생각나...... 성폭행당한 독일 여자를 봤어. 여자는 알몸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어. 다리 사이에 수류탄이 박힌 채...... 지금은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걸 보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어. (...) 독일인 아가씨 다섯 명이 지휘관을 찾아왔어. 흐느껴 울더라고...... 산부인과 의사가 아가씨들을 검진했더니 여자들 그곳이 많이 상해 있었어. 심하게 찢겨 있었지. 팬티는 온통 피로 물들고...... 밤새 성폭행을 당한 거야. 병사들이 줄을 서서 그 짓을 한 거지...... 

(...)

용서하는 게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멀쩡하고...... 새하얀....... 벽돌지붕의 집들을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 같냐고...... 장미가 탐스럽게 핀 집들...... 나는 그들도 고통스럽기를 바랐어...... 당연히...... 그들의 눈물을 보고 싶었지...... 한순간에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 지금 당신처럼 그런 훌륭한 사람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까지 나는 수십 년이 걸렸어......   - 517, 518쪽


전쟁의 참혹함은 밤새 성폭행을 당해 피로 물든 여성들을 보면서도 이들이 적국의 여성들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을 엉망으로 만든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조차 상실하게 만든다. 

지옥도 한복판에서도 엿보이는 연민과 사랑은 더욱 값지다. <완벽한 아이>에서 저자가 사랑 한점 받지 못하며 감금과 학대 속에 살아가면서도 개나 말 같은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며 버텨나가는 모습이 마음에 많이 남았는데, 이 책에 나온 고양이 이야기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4년 동안 난방화차를 몰았어. 아들도 데리고 다녔지. 우리 아들은 전쟁 내내 고양이도 한번 못 보고 지냈어. 그러다가 키예프 근처에서 우연히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 거야. 폭격기 다섯 대가 우리 기차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 있는데, 우리 아들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그랬어. '아유, 착한 우리 고양이, 너를 만나서 내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여기 우리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자, 내 옆에 앉아. 내가 뽀뽀해줄게.' 애는 애였어...... 아이는 언제나 아이다운 법이지...... 아들은 '엄마, 우리한테 고양이가 생겼어요. 우리도 이제 진짜 집이 생긴 거예요'라며 잠들곤 했어.   - 502쪽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순간을.   - 338쪽


이 책이 전쟁에 관한 거시적 시각은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평도 있던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른다. 

전쟁이 어떤 정치적 이유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여파를 미쳤고 등등은 이미 많이 다뤄졌다. 그런데 아주 큰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었으니, 전쟁을 겪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것이었고, 저자는 그 부분을 캐치하여 집중 조명함으로써 부족분을 채워 전쟁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전쟁은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총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빨래전담 병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자는 전선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을 지켜낸 이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우리 남편은 전쟁터로 가면서 서럽게 울었어. 어린 자식들을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가슴이 찢어졌지. 하지만 우리 애들은 너무 어려서 아직 자신들에게 아빠가 있는지조차 몰랐지. 중요한 건 모두 보살핌을 받아야만 했던 아이였다는 거야. 막내는 너무 어려서 내가 안고 다녀야 했어. 남편이 막내를 받아 안더니 가슴에 꼭 끌어안았어. 나는 남편을 쫓아 달려나갔어. 밖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지. '전원 일렬종대!' 남편은 막내를 품에서 떼놓지 못하고 그대로 안은 채 정렬했어...... 군인 한 명이 남편에게 소리소리를 지르는데도 남편은 아이를 안고 눈물만 펑펑 쏟았지. 아이의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밖까지 남편을 쫓아갔어. 아마 5킬로미터는 달렸을 거야. 다른 마을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어. 우리 애들이 넘어지는데도 나는 막내를 안고 계속 달렸어. 남편은 자꾸 뒤를 돌아보고, 나는 그런 남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지.   - 459쪽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어......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지...... 엄마가 온 가족을 살리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살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을 살렸지. 그리고 나도 살아 돌아왔고......

1년 후에 아빠도 돌아오셨어. 훈장을 여러 개 받아오셨더라고. 나도 훈장 하나와 메달 두개를 받아왔지. 하지만 우리 가족의 결론은 그랬어. 우리집에서 진짜 영웅은 엄마라고. (...) 결국 엄마가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전쟁을 치른 셈이지. 아빠는 단 한 번도 훈장을 달지 않으셨어. 훈장약장도 달고 다니신 적이 없지. 아빠는 엄마 앞에서 훈장을 내놓고 자랑하지 않으셨어. 부끄럽다고 하셨지. 불편해하셨어. 엄마는 훈장도 메달도 없었으니까......   - 535쪽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여자들은 조국을 지키는 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전쟁과 영웅과 총과 탱크에 대한 아주 조금의 로망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도 찬찬히 이 책에 다시 접근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때에도, 내내 고통을 감당하며 물러서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덧)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 


게토에 우리집은 따로 없었어. 어느 낯모르는 사람의 집 다락방에 얹혀 지냈지. 아빠는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값나가는 물건인 바이올린을 내다팔려고 했어. 나는 후두염이 심하게 와서 누워 있었는데...... 열이 펄펄 끓고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지. 아빠는 바이올린을 팔아서 먹을 걸 사올 요량이었어. 아빠는 내가 죽을까봐 두려워했지. 엄마도 없는데 내가 죽을까봐...... 걱정 어린 엄마의 말 한마디 못 듣고 따뜻한 엄마 손길 한 번 못 받고 죽을까봐. 당신의 귀한 응석받이 딸이...... 사랑스러운 딸이...... 아빠가 돌아오길 3일을 기다렸어. 아는 사람들이 와서 아빠가 살해됐다고 알려주기 전까지. 사람들 말이, 아빠가 바이올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거야......  - 131쪽


아니 이것은...!! <나는 고백한다>가 떠오르지 않는가? 스토리가 다르긴 하지만. 유대인, 비싼 바이올린, 바이올린 때문에 살해당한 아빠... 저 바이올린이 실화속 비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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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05 13: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엇보다 여성이라고 무시당하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서도 냉대받았던 그들의 이야기였어요. 너무 속상하더군요. 전쟁터도 하나의 사회구나~ 자기들의 무리에 껴주지 않고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태도가 괘씸했어요. 결국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구조도~ 이 책은 깊게 담그어야 얻을 수 있는 바가 많은 책임에 동의합니다.

독서괭 2022-08-06 10:10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렇게 아무것도 여성에게 준비된 것이 없는 환경에서 버텨가며 조국을 지켰는데, 남성들이 영웅대접을 받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오히려 숨겨야 했던 상황이 넘 속상했어요 ㅜㅜ 이런 문화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데 남자들만 군대가서 고생한다는 둥의 이야기랑도 같은 맥락 같아요. 화가님 공감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08-05 13: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의 글을 읽으며 전혀 실패한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이 정도의 글을 쓰려면 그만큼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는 거예요.
이 책 읽으며 제가 놀라고 경악했던 부분이 다 떠올라요.
여러 가지 쇼킹하고 슬픈 사연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소련군이 독일에 입성해서 한 행동들요.
인간들은 꼭 당한만큼 돌려준다는 그 마음들이 힘들었어요~~
바이올린, 진짜 나는 고백한다가 떠오르네요^^

독서괭 2022-08-06 10:13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 실패한 독서가 아니라는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전쟁터에서 시신이 나뒹구는 참혹함, 부상병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리뷰에는 많이 담지 않았어요. 소련군은 독일군과 달리 독일군 부상병들도 치료해줬다는 에피소드도 많이 나오지만 약간은 조국미화가 있지는 않을까 의심이 들었는데, 독일 입성해서 저지른 강간 이야기에 역시나 싶었습니다 ㅠㅠ
바이올린 이야기 재밌었어요. 자우메 카브레가 혹시 여기서 모티프를 얻었나?? 싶고 ㅎㅎ

단발머리 2022-08-05 13: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으셨을 때도 힘드셨겠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쉽지 않았을텐데 수고많으셨습니다, 독서괭님!
누이! 누이! 부르며 같이 전투에 참여하던 남자들이 밤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접근한다는 이야기가, 저도 오래 기억에 남아 슬펐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여자들과 결혼하겠죠. 여성은 끝까지 군인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현실, 하지만 여성들은 실제로 군인의 일을 감당했던 거고요.
전쟁의 추악함, 그 잔인함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데 이 책이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너무 좋은 리뷰였습니다. 혹.... 이 책이 부담되어 못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독서괭님의 이 리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잘 읽고 갑니다!!

독서괭 2022-08-06 10:19   좋아요 3 | URL
누이! 라고 부르다가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는 말이 저고 슬프게 느껴지더라고요. 말하는 여성들조차 “남자들이 여자 없이 4년을 보내는 건 쉽지 않다”는 다소 정당화하는 말을 전제로 깔더라구요. 그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의 문제인데.. 그래도 비열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소녀병사들을 잘 챙겨준 남자들도 많아보여 다행스럽긴 했어요. 당장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봤는데 여자들 군대 가면 당장 주변 남자들에게 성폭력 당할 것 같다고 예상되어 착잡하더라고요.ㅠㅠ
단발머리님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리뷰로 충분하지 않으니 꼭 직접 읽어보시라 말씀드려야겠네요 ㅎㅎㅎ

미미 2022-08-05 14: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잘 읽었습니다. ^^*
전쟁영화들이 참 많지만 전쟁속 여성의 비극을 주제로 한 영화는 최근에 와서야 더 만들어지고,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그런 영화중 한편의 댓글에도 어떤 남성이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더라구요. 남성들의 전쟁 이야기는 넘치는데 여성의 서사는 그것과 달라서 이해되지 않는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아 마치 부재한것처럼 여겨지고 멸시받던 여성의 목소리가 그 나름의 형태와 색체를 가지고요.

독서괭 2022-08-06 10:22   좋아요 3 | URL
어떤 남성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부인하고 보는 것 같아요. 여성의 고통이 인정되면 남성의 고통은 인정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자기가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고통 앞에서는 겸허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예요.
“나름의 형태와 색채를 가지고” 라는 말씀이 좋네요. 미미님 공감 감사합니다^^

건수하 2022-08-05 2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리뷰를 제가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좋아요.

독서괭님 리뷰를 보고 나면 아 나는 정말 머리로만 생각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마음을 쓰며 읽고, 그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걸 쓰시는게 좋아요.

독서괭 2022-08-06 10:26   좋아요 3 | URL
앗 수하님 제 리뷰를 좋아하신다니, 이런 과찬을 해주시니 넘 감사합니다😳 수하님 글 보면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느낌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여성주의책읽기 도서 리뷰는 좀더 공들여 쓰기는 합니다 ㅎ 분량도 많고, 읽으며 느껴지는 바가 많아서 머릿속에서 며칠 굴리다가 정리해요. 리뷰쓰고 나면 확실히 머리에 많이 남아 좋네요! ^^

책읽는나무 2022-08-06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늘 최선을 다하시는 괭님은 실패한 독서가 아닌 거죠^^
읽을 수록 또 세세하게 책 내용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만큼 괭님의 리뷰는 자세하고, 친절합니다.
수류탄 이야기는 아직도 끔찍합니다ㅜㅜ

근데 마지막 인용문 저도 그땐 그냥 읽고 지나갔었는데 <나는 고백한다>를 읽고 있으니 저도 순간 바이올린 이야기에 착각하며 읽었네요. 이 바이올린이 그 바이올린인 줄...작가는 혹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설을 구상한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소름 돋네요!!

독서괭 2022-09-04 13:47   좋아요 1 | URL
수류탄 끔찍하죠 ㅜㅜㅜ 늘 최선을 다한다고 칭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책나무님!^^
그쵸, 나는 고백한다 비알 얘기랑 이 얘기랑 비슷하죠!ㅎㅎ 근데 전에 작가인터뷰 하나 봤는데 왜 바이올린이냐는 질문에 특별한 계기는 없다고 했던 것 같아요. 우연의 일치?? 아무튼 재미납니다. 2권 읽고 계신가요? 저 2권 첫부분이 젤 헷갈렸는데 다시 읽으니 좀 이해가 되네요 ㅎㅎ
라고 아래 대댓글이 아닌 그냥 댓글로 달아버린 걸 단발님이 알려주셔서 다시 답니다😅

독서괭 2022-08-07 17: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류탄 끔찍하죠 ㅜㅜㅜ 늘 최선을 다한다고 칭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책나무님!^^
그쵸, 나는 고백한다 비알 얘기랑 이 얘기랑 비슷하죠!ㅎㅎ 근데 전에 작가인터뷰 하나 봤는데 왜 바이올린이냐는 질문에 특별한 계기는 없다고 했던 것 같아요. 우연의 일치?? 아무튼 재미납니다. 2권 읽고 계신가요? 저 2권 첫부분이 젤 헷갈렸는데 다시 읽으니 좀 이해가 되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2-09-03 08:43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안녕^^ 이 댓글 따로 달려서 ㅋㅋㅋㅋㅋㅋ 책나무님은 이 댓글의 존재를 영원히 모를 수 있다는 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려드립니다. 아침에 독서괭님 방에서 놀다가 발견했어요^^

독서괭 2022-09-04 13:47   좋아요 1 | URL
앗 제가 왜 그랬을까요 ㅋㅋ 복사해서 다시 달아야겠네요 ㅋ
감사합니다 ㅎㅎ 글이 안 올라오는 방이라 민망하네요..🫣

책읽는나무 2022-09-04 15:53   좋아요 0 | URL
모르고 넘어갈 뻔했는데 단발님 덕분에~ㅋㅋㅋ
역시 지적인 단발님!!!^^
괭님은 이제 코로나 괜찮아지셨나요?
울 아들 딱 괭님 리뷰 올리신 이즘 코로나 걸려서 방에다 격리시키고 관찰했는데 좀 심하게 하고 넘어가던데...괭님은 어떠셨나? 걱정됐어요^^
암튼 모두 자나깨나 건강 챙기기!!!

독서괭 2022-09-04 16:19   좋아요 1 | URL
크흑 나무님 저는 첫째가 먼저 걸렸는데 어려서 격리가 안 되니 저랑 둘째도 며칠 뒤 걸려서요. 곧 8월 마무리 페이퍼와 함께 안부 전할게요~!

scott 2022-08-09 0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의 리뷰를 찬찬히 읽으니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작가님이 인터뷰 하실 때 눈가에 눈물이 가득 ㅠ.ㅠ

현재 루마니아에서 피난 온 우크라이나 여성과 아이들 돕고 계신다고 하네요..


이분의 아연의~
책 읽으시면
괭님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ㅠ.ㅠ

독서괭 2022-08-12 14:56   좋아요 1 | URL
오 스콧님, 작가님 인터뷰를 봐야겠네요. 현재도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돕고 계시다니 대단한 분이세요!
<아연 소년들>이었나요? 스콧님 페이퍼에서 본 것 같은데,
가슴이 타들어간다니 섣불리 손대면 안 되겠네요ㅜㅜ 전쟁 이야기는 좀 시간을 두고 읽어야겠습니다ㅠㅠ
 
나는 고백한다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1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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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발카르카의 비에 젖은 거리를 걸으며 비로소 나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실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비오는 오늘, 3권 완독을 끝내며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읽기 시작하는 1권은 더 깊은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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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7-13 12: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앙 다 읽으셨다. 만세!!

독서괭 2022-07-13 12:35   좋아요 3 | URL
만세!! 다락방님은 언제 시작하세요? ㅋㅋ

다락방 2022-07-13 14:10   좋아요 3 | URL
... 네? ..... =3=3=3=3=3=3=3=3=3=3=3=3

공쟝쟝 2022-07-13 16:26   좋아요 2 | URL
만세! 만세! 만세!

잠자냥 2022-07-13 14: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첫 문장부터 확 사람 잡아댕기죠-
완독을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2-07-13 14:45   좋아요 3 | URL
3권에서 저 문장이 다시 나오는데.. 1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해요~!^^

책읽는나무 2022-07-13 16: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3 권까지 완독!!!
부럽네요^^
축하드려요^^
저도 오늘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저 첫 문장 다시 한 번 더 읽었는데, 저랑 동시간대에 읽은 첫 문장이로군요?? 신기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7-13 16:03   좋아요 2 | URL
근데 다시 1 권부터 읽기 시작하시는 건가요???
아싸~~~♡

독서괭 2022-08-02 12:36   좋아요 2 | URL
나무님, 진도 많이 나가셨나요? ㅎㅎ 전 1권 재독했습니다. 나머지도 재독 끝내고 리뷰 써야 하는데..하는데..

책읽는나무 2022-08-02 13:14   좋아요 2 | URL
벌써 1권도 재독 완독??@.@
전 이제 100여 페이지 남았어요^^

독서괭 2022-08-02 13:48   좋아요 2 | URL
오 책나무님 끝까지 파이팅입니다^^ 2권부터 더 재밌습니다!

scott 2022-07-13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완독 추카! 합니다!서울도 장맛비로 도로가 물바다 ㅎㅎ 괭님 다시 1권으로 돌아가신다에 사알짝 한!표를 ^^

독서괭 2022-08-02 12:36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1권 재독 끝냈습니다! 다시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이네요^^

그레이스 2022-07-13 22: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부러워요!
저는 언제 시작할지...;;

독서괭 2022-08-02 12:37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언제든 운명의 그날이 오겠지요! ㅎㅎ

mini74 2022-07-15 22: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독 축하드려요. 전 몇 번 더 읽었던. 가끔 좋았던 부분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

독서괭 2022-08-02 12:37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몇번 더 읽으셨군요!! 저도 1권 재독하고 나머지도 재독 예정입니다^^
 
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 윤보야아아아ㅏㅏㅏㅏ 너마저.. ㅠㅠㅠㅠㅠ 

4권 끝무렵에 질렀던 마음의 소리다. 한줄 처리된 윤보의 사망 소식. 아 작가님 너무해요.. 초독에는 몰랐던 윤보의 매력에 빠져있던 참인데.. 정들면 떠나보내시는 작가님 ㅠㅠ 윤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바른말 잘하는 곰보목수입니다. 

반면, 용이와 월선이, 임이네의 지긋지긋한 관계는 계속된다. 이 세사람 관계.. 아니 그전에는 임이네가 아닌 강청댁이 있는 삼각관계였는데, 여튼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탓으로 계속되는 삼각관계는 정말이지 아침드라마는 댈 것도 아닌.. 징글징글하다.. 아니 좀, 용이랑 월선이 둘이 맺어줬으면 이 길고긴 불행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무당딸이, 선영봉사가 뭐 대수라고 어휴.. 셋중 제일 꼴보기 싫은 건 임이네지만(갈수록 더 진상임..), 제일 미운 건 용이다. 니놈이 임이네 덜컥 임신만 안 시켰어도 이런 꼴은 안 보잖아! 야 이놈아! 떠난 월선이 기다리는 게 그리 힘들더냐! 월선이는 그토록 니 생각만 하는데.. 부인들에게 맞아가면서도.. 어이구 답답이. 


아이고 이 귀여운 것들, 하며 들은 부분 이제 성숙한 여자태가 나는 봉순이와 들끓는 청춘 길상이 사이의 미묘한 기류다. 잘생긴 길상이가 이제 남자로 보이는 봉순이. 시내 나가면 남자들 눈이 막 돌아가도록 예쁜 봉순이건만, 길상이는 슬슬 피하기만 한다. 길상이 마음은 뭣인가, 궁금해서 듣는데. 나무하러 간 길상이를 따라간 봉순이가 은근히 들이대자 길상이가, 

"니같이 화냥기 있는 가시나는 싫단 말이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 이노무 시키가..?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웠어! 이노므 자식 떼찌떼찌! 

하지만 곧이어 길상은 후회하면서 '화냥기는 내한테 있지..'라고 부끄러워한다. 그는 연모의 마음도 없으면서 봉순이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피해왔던 것. 그래, 역시 길상이는 괜찮은 놈이다. 휴. 


4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윤보를 앞세운 마을 사람들이 밤중에 조준구가 차지한 최참판댁으로 쳐들어가는 장면이다. 서희가 조용히 방관하는 가운데 이들은 고방을 열어 재물을 모두 가져간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쉬웠던 것은 조준구 부부를 끝내 찾지 못하고 떠난 것. 이들 부부는 잽싸게 사당 마루 밑에 숨어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삼수놈이 몰래 가서 속닥속닥 나한테 한몫 떼어 줄 것을 약속하라고 협박한 뒤 윤보 일행에게 감춰준 것이다. 끝까지 비열하고 나쁜 삼수놈.. 또 어리석기도 한 놈. 그는 조준구가 그 언약을 지킬 거라 믿었을까? 역시나 조준구에 의해 삼수는 일본경찰에게 끌려가 총살당한다. 그의 말로는 자업자득이지만, 조준구 부부와 남겨진 서희는 수모를 당한다. 

서희는 "길상이 놈이, 나를 죽으라고 내버려두고 갔다!"라며 분노하는데, 그 후 길상이, 용이, 김훈장, 이부사댁 도령 상현 등이 공모하여 서희 등을 데리고 간도로 떠나는 과정에서 서희의 길상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는 장면은 없다. 나중에 어떻게 둘의 관계가 전개될지 흥미진진. 홀로 떠난 봉순이는 또 어찌될지 궁금하다. 


4권으로 1부가 마무리되고, 2부부터는 간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런데 4권까지 듣고 나니, 아, 작가님이 짜놓은 이 구성에 소름이 돋는다.

1권 첫 장면이 한가위 잔치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나? 젊었던 서서방, 용이 등이 북치고 장구치며 마을을 돌아다니고 아낙들은 구경하고, 교과서에 실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토지>를 읽지 않았어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바로 그 장면, 서희가 머슴들을 피해 마당을 돌아다니는 분주한 모습과 대비되게 최치수의 방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마른 기침 소리.. 이때 '최참판댁'이라는 왕조를 가진 평사리 마을은 한없이 평화로웠고 풍요로웠다. 이것은 4권에서 한가위에도 꽹과리 소리 없이 한산하기만 한 장터를 보며 씁쓸해 하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로부터 새삼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다. '최참판댁'의 몰락, 그리고 대한제국의 몰락, 보수적인 전통의 몰락, 구세대의 몰락, 농민의 몰락. 1부는 하락 하락, 오직 하락만을 거듭해가다가 몰락에 이르러, 끝내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몰락의 씨앗은, 저 흥겨웠던 1권의 첫 장면에 이미 심겨져 있었던 것이다. 귀녀는 이미 최치수를 노리고 있었고, 구천이와 별당아씨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서희의 그 독하고 냉정한 성미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린 시절- 다섯 살인가?- 부터 이 아이를 지켜봐온 독자는, 서희를 미워할 수 없다. 이 꼿꼿한 양반의 자손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기대된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ㅎㅎ)

참, 별당아씨의 "진달래꽃을 따다가 당신께 화전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라는 애처로운 대사는 4권에서 나온다. 별당아씨의 죽음과 구천이의 꿈에서밖에 울지 못하는 지독한 슬픔. 

근데, 20대에 읽을 때만큼 사랑이야기에 가슴 아프지는 않네? 흠. 역시 나이와 상황에 따라 중점적으로 보고 느끼는 부분이 다른가 보다. 


오디오북으로 토지 듣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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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7-12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오 정들면 떠나보내는 건… 토지는 박완서판 <킹덤?>이란 말인가…. 우오오오….. 괜히 듣고 싶네요? ㅋㅋㅋㅋ 이따, 일하면서 들어야겠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7-13 12:14   좋아요 0 | URL
킹덤을 안 봐서 ㅋㅋ 거기서도 많이 떠나보내시나요 ㅋㅋ 워낙 장편인데다 시대배경도 그렇다 보니 좀비가 안 나와도 많이들 죽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2-07-12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토지 오디오북 시작했거든요~ 듣고 나서 댓글 달겠습니다ㅎㅎㅎ 괭님 계속 듣기 응원해요!^^

독서괭 2022-07-13 12:15   좋아요 1 | URL
오호호 화가님 반갑습니다~~ 재미있게 들으시면 좋겠네요^^ 응원 감사해요!

새파랑 2022-07-12 14: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시면 몇달 걸리실거 같아요. 차라리 이번에 약속을 깨시고 책을 구매하시는것도 좋을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7-13 12:15   좋아요 2 | URL
아니 새파랑님 요즘 댓글 일관성 무엇 ㅋㅋㅋ 알라딘 직원이신가요? ㅋㅋㅋ 근데 저 토지 전집 소장하고 있지롱~요! 둘 데가 없어서 본가에서 안 가져오고 있지만요^^

다락방 2022-07-12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진달래꽃이 4권에 나오는 겁니까!! 저는 6권이라고 생각했어요.
리뷰 읽고 나니까 토지 다시읽기 하고 싶네요. 그러나 21권... 두둥-

독서괭 2022-07-13 12:16   좋아요 1 | URL
네 4권에서 나오길래 다락방님에게 알려드려야겠다! 했어요 ㅋㅋ
1~4권까지의 1부만 다시 읽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물론 책구매 페이퍼 보면 재독하실 시간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2-07-18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20년 전에 읽어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ㅋㅋㅋ 그 최수지가 서희를 맡았던 드라마에서 (길상이는 제 스탈 아니었죠) 봉순이가 길상이 좋아하는데 길상이가 왕자님으로 변하는 순간에 봉순이의 절망감이...... 아, 눈에 선하네요. 저도 다시 읽고 싶은데 영 자신이 없네요. 그냥 독서괭님 리뷰로 갈음할까 ㅋㅋㅋㅋㅋㅋ 싶습니다.

독서괭 2022-08-02 12:40   좋아요 0 | URL
오 단발님. 저는 토지 드라마는 못 봤어요! 봉순이가 2부에서는 안 나오고 있는데 뒤에 다시 등장하겠죠? 제가 계속 오디오북 들으면서 리뷰 열심히 쓸테니 부족하나마 단발님 기억 상기용으로 써주세용 ㅎㅎ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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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당근마켓에 올려놓은 중고물품을 구매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오겠다는 말에 주소를 알려주고, 계좌이체 해도 되냐고 하여 계좌번호와 예금주명까지 알려주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오겠다고 한다. 남자인가..?(돌전에 사용하는 아기용품인데, 애엄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올 가능성은 0에 수렴..) 기다리는 약 30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는데, 남자인 것도 그렇고 당근마켓을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판매한 물건 내역도 없고 거래후기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집주소랑 이름까지 알았는데, 개인정보만 홀랑 털고 안 오는 거 아닌가? 내가 나가면 집에 남자가 없구나 싶어 밀고 들어오면 어쩌지? 판매할 물품을 미리 밖에 내놓고 괜히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기를 30여분, 드디어 1층에서 호출이 왔다. 애들 티비 틀어주고 얼른 나가서 엘베 앞에서 대기. 나타난 사람은 덩치 큰 남자였지만, 다행히 부인의 지령을 받고 온 선량한(?) 아기 아빠였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나는 지인들 여럿과 함께 봉고차 같은 걸 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상가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았다. 원래 자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꼭 꿈 속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어릴 떄는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쉬를 하는 순간 현실의 나도 시원하게 쉬를 했지.. 물론 지금은 양쪽이 잘 분리된다. 그런데 또 꼭 꿈 속에서 간 공중화장실은 더럽게 더럽다(이건 왤까? 내 무의식이 쉬 하지 말고 깨라고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건데 내가 굳이굳이 안 꺠고 쉬를 하고 마는 걸까??). 어쨌든 어찌어찌 찾아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문득 윗쪽을 보자 창문이 있고, 건너편 건물에서 한 남자(20 전후 정도의 젊은이?)가 나를 보고 있다. 악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 남자는 누군가를 부르며 어딘가로 갔다. 서둘러 나왔는데 봉고차가 그 자리에 없다. 그 남자를 찾아 혼쭐을 내야 마땅하지만, 어쩐지 쫓기는 쪽은 내쪽이다. 그 순간 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포스코 사건을 보면 착잡하다. 남직원들 사이에서 피해자는 홀로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지. 개선과 재발방지는 커녕 2차 가해를 당하면서 얼마나 좌절했을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를 낙인찍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가벼운 징계로 슬쩍 넘어가려 하면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론을 앞세운다(이 사건의 가해자가 젊은이인지는 모른다). 

이것이 비교적 안전한 선진국이라고 여겨지는 한국의 현주소다. 몇년 전, 내 지인은 정말로, 리얼리, 육성으로, 모 남성상사로부터 "이슬람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에 만족하고 닥치고 있으라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이 부당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좀더 과거로 가보자. 

일전에 <아주 오래된 유죄>에 관한 페이퍼에 쓴 적이 있지만, 1964년에 일어난 이른바 '혀 절단 사건'의 피해자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와 혼인하라는 지속적인 설득을 받았다. 이 사건에 관해 재심개시를 청구하였지만 2심까지 기각되었고, 현재 상고심에서 검토중이라고 한다. 


좀더 과거로 가보자.

소설 <나는 고백한다>에서는 한 남자가 상인인 척 하면서 처녀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간다. 남자는 여자를 강간하고 목걸이까지 빼앗는다. 재판관 앞에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고 물건을 빼앗아 갔다고 호소하지만, 남자는 단지 여자에게 물건을 팔려고 했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자신을 꼬챙이(?)로 찔렀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땅에 목만 내놓고 파묻힌 채 가해자를 비롯한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여자와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이웃 남자들이 빗나가면 실망하면서 열심히 돌을 던진다. * 2011년, 우크라이나의 19세 소녀가 미인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사망했다(기사: https://www.asiae.co.kr/news/view.htm)


좀더 과거(아마도)로 가보자.

소설 <토지> 속 1905년의 평사리에서는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처녀를 숨어서 기다리던 남자가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녀의 부모는 집에 돌아온 딸의 행색을 보고 사건을 짐작하지만,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꾹꾹 삼키며 숨을 죽인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아버지가 현장에 가서 증거물을 처리한다. 대놓고 조롱하는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의 어머니는 무력하기만 하다. 서둘러 혼삿날을 잡은 딸의 신세를 망칠까봐, 그네들은 가해자가 입을 다물어 주길 바랄 뿐이다. 


좀더 많이 과거로 가보자.

"유대법은 강간한 남성이 그가 강간한 여성과 강제로 결혼하도록 하였고, 그녀와 이혼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암묵적으로 이 규정은 한 여성이 그녀를 강간한 자와 해소할 수 없는 결혼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신명기 22:28~29)."(<가부장제의 창조>, 298쪽)


좀더 과거로 가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은 본성상 우월하며, 여성은 열등하다. 그리고 전자는 지배하고 후자는 지배당한다."(<가부장제의 창조>, 364쪽)


좀더 과거로 가보자.

* MAL은 중기 아시리아법


MAL§55는 처녀에 대한 강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만일 결혼한 남성이 친아버지 집에 사는 처녀를 강간하면


  강간이 도시 내에서 범해졌건, 트인 벌판에서 일어났건, (공공의) 거리에서 밤에 일어났건, 혹은 도시의 축제에    서 일어났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범한 남자의 부인을 취해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는 그 부인을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가 취할 것이다. 아버지는 능욕당한 딸을 그녀를 능욕한 남자에    게 배우자로 줄 것이다.


만일 강간한 남자에게 부인이 없다면, 그는 그 아버지에게 숫처녀의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 소녀와 결혼해야 하며 결코 그녀와 이혼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소녀의 아버지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돈은 벌금으로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딸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간이 희생자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해를 입힌다는 개념이, 고통받은 여성들에게는 절망적인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강간피해자는 강간한 자와 해소할 수 없는 결혼을 할 작정이고, 전적으로 무죄인 강간자의 부인은 매춘부로 전락할 것이다. 법의 언어는 우리에게 그의 딸들에 대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 '처분권력'을 느끼게 해준다. 이 권력은 만일 강간당한 소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강간한 남자가 맹세하면 그의 부인은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그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벌금을 지불하고(...)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딸을 취급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MAL§56에 의해 강화된다.   - 203, 204쪽


거다 러너는 가부장제가 창조된 연원을 찾아 수천 년의 역사를 헤맨다. 그 노력의 결실을 이렇게 한 권의 잘 정리된 책으로 읽어볼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행운이다. 특히 11장에서 앞의 내용을 요약정리하고 여성의 종속의 원인과 의미를 지적하며 왜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하는지 마음을 흔드는 웅변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솜씨는 몹시 훌륭하다.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380쪽)


어째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협조했고, 어째서 여성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지배에 대항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계급특전과 인종특전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응집된 집단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여성들은 특이하게도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같은 성격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여성들의 집단의식 형성은 다른 노선을을 따라 추진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다른 억압받는 집단에 적합했던 이론적 공식이 왜 여성들의 종속을 설명하고 개념화하는 데 그토록 부적합한가를 말해 준다.  (381,382쪽)

여성들이 집단의식을 형성해 나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장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독립과 자율성을 재확인해 줄 수 있는 전통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 여성들에게는 역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믿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여성들을 가장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은 상징체계에 대한 남성의 헤게모니였다. (383쪽)


우리는 제각기 우리 머릿속에 최소한 한 명의 훌륭한 남자를 간직하고 있다. (394쪽)


 페미니즘이 태동되고 여성들이 권리운동을 시작했는데도,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가?


(...)더 즉각적으로, 여성은 자신의 삶 속의 남성(혹은 남성들)과의 의사소통, 인정, 그리고 사랑이 단절될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의 철회와, 생각하는 여성들을 '일탈적인 사람'으로 지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지적 작업을 저해하는 수단들이었다. (...) 사고하는 남자들 중 누구도 생각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아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사고체계를 창조하는 과정에 여성이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 힘인 성별 통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394쪽)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누군가의 진술을 검증하기. (...)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지식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위대한 남성들을 없애고, 그 남성들을 우리 자신으로, 우리의 자매들로, 익명의 선대여성들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397쪽)


◆ 당신이 힘든 것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인간종의 반이 다른 반에 종속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면, 차이가 지배나 종속 그 어느 것도 함축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 페미니스트 세계관은 여성들과 남성들의 정신을 가부장적 사고와 관습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 지배와 위계가 없는 세상, 진정으로 인간적인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397, 398쪽)


최근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용어 하나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냐 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언어는 하나의 표시, 변화된 의식과 새로운 사고의 지표가 된다."(404쪽)

조금씩 바꿔 나가자. 우리 머릿속의 '위대한 남성'을 없애고, '여성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해보자. 여성들을 분열시키려는 가부장제의 노림수에 넘어가지 말자.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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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05 16: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엄지척!!!! 현재 시점에서부터 과거로 한 발자국씩 되짚어봐주셔서 더 소름이 돋네요. 왜 거다 러너가 가부장제의 탄생의 시점을 아주 먼 옛 고대의 시점으로 정해서 인용했는지 참 잘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참 좋은 책이었고 또 괭님의 리뷰를 읽으니 감동이 물밀듯 밀려옵니다!

독서괭 2022-07-05 16:48   좋아요 3 | URL
화가님, 엄지까지 척 세워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과거로 가는 되짚기가 되었네요. 인용하고 싶은 부분 너무 많은데 걸러내느라 힘들었습니다 ㅎㅎ 마지막 11장이 압권인 것 같아요!

공쟝쟝 2022-07-07 10:29   좋아요 2 | URL
아니 이 사람 이 독서괭님 이 분 시나리오 작가세요? 영화처럼 막 글이 편집이 막 앞으로 철컥 철컥 ㅋㅋㅋ 올라가면서 막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진 사람 ㅋㅋㅋ

독서괭 2022-07-07 17:09   좋아요 0 | URL
쟝쟝/ ㅋㅋㅋ 고맙습니다~ 당근마켓과 화장실 꿈이 한건 했네요(?) 이런 식으로 사례 찾으면 한도 끝도 없을 듯요? ㅎㅎㅎ

단발머리 2022-07-05 16: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따라 읽어가는데 우아! 몰입감이 장난 아니에요. 앞으로 모든 사회과학 도서는 독서괭님 따라 읽는 걸로 할까 봐요.
저도 <나는 고백한다> 읽었는데 저 에피소드 기억이 안 나요. 가물가물해서 시무룩합니다. 🙄

독서괭 2022-07-05 16:50   좋아요 3 | URL
단발님, 과찬 감사합니다^^; 제가 사회과학 도서를 많이 읽지 않고 소설 편향이었는데 여성주의 책읽기 덕에 이런 책도 읽었네요(그동안 사기는 많이 사뒀지만 완독을 못함ㅜㅜ).
<나는 고백한다>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는 에피소드라서 기억 안 나실 만 합니다^^; 전 얼마전 읽었고 너무 끔찍한데다가 그 가해자의 정체 때문에 너무 놀라서요..!!(뚜둥)

다락방 2022-07-05 16: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휴 독서괭 님, 주제 넘게 말씀드리자면, 독서괭 님의 글솜씨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리뷰는 뭔가 독서괭 님 그간 리뷰의 어떤 절정을 찍는 것 같아요. 역순으로 되짚어주셔서 그런데 그게 딱히 변한게 없어서 더 끔찍하네요. 저는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라거나, ‘페미니즘은 못생긴 여자들이나 하는거지‘ 라고 생각하는 많은 여성들이 한걸음만 페미니즘 안으로 들어오면, 그러고 나면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간 살아왔던 삶이,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거쳐 직장생활까지 그리고 연애까지, 그리고 우리가 숱하게 봐왔던 뉴스와 영화와 드라마까지, 감각이 깨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무엇보다도 여성에겐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건드려주기만 하면 다 깨어나버리는 그런 감각이요.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독서괭 님. 그리고 리뷰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독서괭 님, 계속 함께해 주세요. 이런 양질의 리뷰를 계속 읽고 싶습니다!!

독서괭 2022-07-05 16:53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저의 리뷰의 절정입니까! 칭찬 감사합니다^^(춤추는 중 두둠칫)
겉으로 드러나는 끔찍함은 줄어들었지만 속에 있는 기본 관념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주변에도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요..˝라면서 방패 하나 들고 페미니즘 발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만드는 사회니까요 ㅜㅜ 감각이 꺠어나는 것! 책을 포함한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여성들끼리의 교류를 통해서 감각을 꺠우고 연대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다 읽고 리뷰까지 쓰니 엄청 뿌듯하네요. 일하는 틈틈이 추가하고 수정하고.. 재밌지 않으면 못할 일인듯요^^ 이번달 책도 빌려다 놨습니다! 다락방님 우리 힘내요~!

새파랑 2022-07-05 16:54   좋아요 4 | URL
이젠 다락방님의 명성에 버금가는 독서괭님의 필력이네요~!

독서괭 2022-07-05 17:28   좋아요 3 | URL
아니ㅋㅋㅋ 왜 갑자기 다락방님의 명성에 버금가는 걸로 비약하시나요, 새파랑님 워워~!

햇살과함께 2022-07-05 2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글에 버금가는 몰입감입니다!!! 기승전결 딱 정리되는!

잠자냥 2022-07-05 21:19   좋아요 4 | URL
아니 이건 제가 좋아요 누르려다가 멈칫. ㅎㅎㅎ

독서괭 2022-07-05 22:46   좋아요 3 | URL
아니 햇살님 이런 과찬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쓴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7-07 10:31   좋아요 3 | URL
왜 멈칫해 자냥 ㅋㅋㅋㅋ 잠자냥 ㅋㅋㅋㅋ 멈칫하지말고 더 잘 쓰랑 말야!!!!! 독서괭님이랑 자칫하면 캐릭터 겹쳐요 ㅋㅋㅋㅋㅋ 둘다 소설파에 아이디도 냥이거든 ㅋㅋㅋ

독서괭 2022-07-07 17:10   좋아요 1 | URL
아유 잠자냥님과의 비교는 제발 접어주세요. 비교 불가능한 분입니다 ㅎㅎ 캐릭터 겹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요 ㅋ

잠자냥 2022-07-07 17:24   좋아요 1 | URL
괭님 왜 그러세요. 오줌싸개끼리 ㅋㅋㅋㅋ

독서괭 2022-07-07 17:56   좋아요 1 | URL
오줌싸개로 공통점을 찾을 바에야 그냥 포기하겠어요..! (울며 달려간다) - 이거 다락방님이 자주 하시던 것 같은데..?

잠자냥 2022-07-05 21: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귀신이 앞으로 확확확! 나오는 느낌! (그나저나 이 페이퍼에서 제가 가장 공감한 부분은 어릴 때 쉬 마려워서 꿈에서 쉬하면 걍 쉬….. 했다는 부분 ㅋㅋㅋㅋ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7-05 22:48   좋아요 4 | URL
여고괴담 ㅋㅋㅋㅋ 가부장제가 귀신보다 무섭죠, 암요!ㅋㅋ
그쵸? 잘 때 마려우면 꿈에서 쉬하고 그럼 실제로도 쉬하고,, 많이들 그러시죠? ㅋㅋㅋ 저는 늘 꿈을 꾸고 한번 잠들면 잘 일어나지도 못하다보니 꿈에서 화장실 가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실제로 안 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7-06 08: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고 자면 꼭 꿈에서 화장실 찾아요.ㅋㅋㅋ
리뷰 읽는데 제2의?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계속 과거로 과거로...여성들의 피해 역사는 끝없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네요.
우크라이나 19세 소녀 이야기는 모바일에선 열리지 않아 기사를 읽을 순 없었는데, 미인대회에 나갔다고 돌을 던져 사망시켰다는 건, 추측컨대 소녀를 동네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저변이 깔려 있었다는 거겠죠?
2011년이면...10 년 전인데...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일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팠지만, 열거하신 사건들도 마음 아프네요.ㅜㅜ
당근마켓...저도 그런 상황이라면 좌불안석이었을 것 같아요.
요즘엔 내가 느끼는 불안감과 불쾌함들 덕분에 아들과 남편을 교육? 시키는 중입니다.
엘베에서 여자와 단 둘이 탔을 때는 무조건 앞에 서고, 먼저 내려라!! 아니면 급한 일 아니면, 여자 먼저 태워 엘베 올려 보내라, 단 둘이 걸을 때는 여자 뒤에서 걷지 말고, 무조건 앞에서 걸으라고...괭님 리뷰 읽다 보니 더욱 철저하게 교육 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ㅋㅋㅋ

암튼 리뷰 잘 읽었습니다.
늘 양질의 리뷰, 양질의 디저트 먹는 기분입니다^^

독서괭 2022-07-07 17:17   좋아요 1 | URL
오오 꿈에서 화장실 가는 분 또 나오셨네요 ㅎㅎㅎ 괜히 반갑고 막 ㅋㅋ
제2의 가부장제의 창조라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아 기사가 모바일에서는 안 열리는군요? 기사 내용이 자세하진 않은데, 이슬람 율법에 따라 형을 집행한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끔찍하죠 ㅜㅜ 돌팔매 사건이 잊을만 하면 한번씩 나오는 듯 하더라구요.
책나무님 남편과 아들을 엄히 교육하고 계시군요 ㅎㅎㅎ 말씀하신 교육 내용을 제 아들에게도 가르쳐야겠어요^^ 특히 중요한 건 남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해야한다고 억울해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의 불편함보다 상대의 공포를 걱정하라고..
앞으로도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공쟝쟝 2022-07-07 1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좋네요. 진짜. 독서괭님 이 텐션 유지하면서 우리 쭉 갑시다 ㅋㅋㅋㅋ 좀 덜읽고 더 많이 쓸 시간 확보하세요!!!
제 깜냥에 괭님은 이미 충분히 읽으신 분인 듯 ㅋㅋ

독서괭 2022-07-07 17:19   좋아요 1 | URL
으아 요 며칠 체력이 바닥을 쳐서 너무 힘드네요 ㅜㅜ
읽는 건 목표치(월5권)만 달성하고 기록 남기는 데 좀더 신경을 써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쟝쟝님은 소설을 안 읽어서 그렇지- 아니 근데 제가 쟝쟝님 읽은책 중에 소설 뭐 있나 쭉 한번 봤는데 생각보다 많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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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피는 내 취향은 아니다. 묵직한 단맛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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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6-28 0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이거 마셨는데요 ㅋㅋㅋㅋ 전 맛을 잘 몰라서 그런가…. 알라딘 드립백이 다 한가지 맛 같은 ㅋㅋㅋㅋㅋ (알라딘 미안)

독서괭 2022-06-28 15: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저도 맛 잘 모르는데, 요건 좀 별로였어요. 블랙커피에 설탕 타는 거 안 좋아하는데, 고런 느낌?

scott 2022-06-28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의 맛은
드립 백 포장지에 가장 설명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각설탕 덩어리들 ㅎㅎ

독서괭 2022-06-29 00:03   좋아요 1 | URL
아 그러게요! 각설탕 덩어리 그림이 그려져 있군요 ㅋㅋ 스콧님 백자평에도 흑설탕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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