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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어제 저녁, 당근마켓에 올려놓은 중고물품을 구매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오겠다는 말에 주소를 알려주고, 계좌이체 해도 되냐고 하여 계좌번호와 예금주명까지 알려주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오겠다고 한다. 남자인가..?(돌전에 사용하는 아기용품인데, 애엄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올 가능성은 0에 수렴..) 기다리는 약 30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는데, 남자인 것도 그렇고 당근마켓을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판매한 물건 내역도 없고 거래후기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집주소랑 이름까지 알았는데, 개인정보만 홀랑 털고 안 오는 거 아닌가? 내가 나가면 집에 남자가 없구나 싶어 밀고 들어오면 어쩌지? 판매할 물품을 미리 밖에 내놓고 괜히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기를 30여분, 드디어 1층에서 호출이 왔다. 애들 티비 틀어주고 얼른 나가서 엘베 앞에서 대기. 나타난 사람은 덩치 큰 남자였지만, 다행히 부인의 지령을 받고 온 선량한(?) 아기 아빠였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나는 지인들 여럿과 함께 봉고차 같은 걸 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상가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았다. 원래 자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꼭 꿈 속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어릴 떄는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쉬를 하는 순간 현실의 나도 시원하게 쉬를 했지.. 물론 지금은 양쪽이 잘 분리된다. 그런데 또 꼭 꿈 속에서 간 공중화장실은 더럽게 더럽다(이건 왤까? 내 무의식이 쉬 하지 말고 깨라고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건데 내가 굳이굳이 안 꺠고 쉬를 하고 마는 걸까??). 어쨌든 어찌어찌 찾아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문득 윗쪽을 보자 창문이 있고, 건너편 건물에서 한 남자(20 전후 정도의 젊은이?)가 나를 보고 있다. 악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 남자는 누군가를 부르며 어딘가로 갔다. 서둘러 나왔는데 봉고차가 그 자리에 없다. 그 남자를 찾아 혼쭐을 내야 마땅하지만, 어쩐지 쫓기는 쪽은 내쪽이다. 그 순간 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포스코 사건을 보면 착잡하다. 남직원들 사이에서 피해자는 홀로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지. 개선과 재발방지는 커녕 2차 가해를 당하면서 얼마나 좌절했을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를 낙인찍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가벼운 징계로 슬쩍 넘어가려 하면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론을 앞세운다(이 사건의 가해자가 젊은이인지는 모른다).
이것이 비교적 안전한 선진국이라고 여겨지는 한국의 현주소다. 몇년 전, 내 지인은 정말로, 리얼리, 육성으로, 모 남성상사로부터 "이슬람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에 만족하고 닥치고 있으라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이 부당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좀더 과거로 가보자.
일전에 <아주 오래된 유죄>에 관한 페이퍼에 쓴 적이 있지만, 1964년에 일어난 이른바 '혀 절단 사건'의 피해자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와 혼인하라는 지속적인 설득을 받았다. 이 사건에 관해 재심개시를 청구하였지만 2심까지 기각되었고, 현재 상고심에서 검토중이라고 한다.
좀더 과거로 가보자.
소설 <나는 고백한다>에서는 한 남자가 상인인 척 하면서 처녀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간다. 남자는 여자를 강간하고 목걸이까지 빼앗는다. 재판관 앞에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고 물건을 빼앗아 갔다고 호소하지만, 남자는 단지 여자에게 물건을 팔려고 했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자신을 꼬챙이(?)로 찔렀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땅에 목만 내놓고 파묻힌 채 가해자를 비롯한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여자와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이웃 남자들이 빗나가면 실망하면서 열심히 돌을 던진다. * 2011년, 우크라이나의 19세 소녀가 미인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사망했다(기사: https://www.asiae.co.kr/news/view.htm)
좀더 과거(아마도)로 가보자.
소설 <토지> 속 1905년의 평사리에서는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처녀를 숨어서 기다리던 남자가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녀의 부모는 집에 돌아온 딸의 행색을 보고 사건을 짐작하지만,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꾹꾹 삼키며 숨을 죽인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아버지가 현장에 가서 증거물을 처리한다. 대놓고 조롱하는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의 어머니는 무력하기만 하다. 서둘러 혼삿날을 잡은 딸의 신세를 망칠까봐, 그네들은 가해자가 입을 다물어 주길 바랄 뿐이다.
좀더 많이 과거로 가보자.
"유대법은 강간한 남성이 그가 강간한 여성과 강제로 결혼하도록 하였고, 그녀와 이혼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암묵적으로 이 규정은 한 여성이 그녀를 강간한 자와 해소할 수 없는 결혼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신명기 22:28~29)."(<가부장제의 창조>, 298쪽)
좀더 과거로 가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은 본성상 우월하며, 여성은 열등하다. 그리고 전자는 지배하고 후자는 지배당한다."(<가부장제의 창조>, 364쪽)
좀더 과거로 가보자.
* MAL은 중기 아시리아법
MAL§55는 처녀에 대한 강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만일 결혼한 남성이 친아버지 집에 사는 처녀를 강간하면
강간이 도시 내에서 범해졌건, 트인 벌판에서 일어났건, (공공의) 거리에서 밤에 일어났건, 혹은 도시의 축제에 서 일어났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범한 남자의 부인을 취해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는 그 부인을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가 취할 것이다. 아버지는 능욕당한 딸을 그녀를 능욕한 남자에 게 배우자로 줄 것이다.
만일 강간한 남자에게 부인이 없다면, 그는 그 아버지에게 숫처녀의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 소녀와 결혼해야 하며 결코 그녀와 이혼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소녀의 아버지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돈은 벌금으로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딸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간이 희생자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해를 입힌다는 개념이, 고통받은 여성들에게는 절망적인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강간피해자는 강간한 자와 해소할 수 없는 결혼을 할 작정이고, 전적으로 무죄인 강간자의 부인은 매춘부로 전락할 것이다. 법의 언어는 우리에게 그의 딸들에 대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 '처분권력'을 느끼게 해준다. 이 권력은 만일 강간당한 소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강간한 남자가 맹세하면 그의 부인은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그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벌금을 지불하고(...)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딸을 취급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MAL§56에 의해 강화된다. - 203, 204쪽
거다 러너는 가부장제가 창조된 연원을 찾아 수천 년의 역사를 헤맨다. 그 노력의 결실을 이렇게 한 권의 잘 정리된 책으로 읽어볼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행운이다. 특히 11장에서 앞의 내용을 요약정리하고 여성의 종속의 원인과 의미를 지적하며 왜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하는지 마음을 흔드는 웅변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솜씨는 몹시 훌륭하다.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380쪽)
어째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협조했고, 어째서 여성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지배에 대항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계급특전과 인종특전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응집된 집단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여성들은 특이하게도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같은 성격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여성들의 집단의식 형성은 다른 노선을을 따라 추진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다른 억압받는 집단에 적합했던 이론적 공식이 왜 여성들의 종속을 설명하고 개념화하는 데 그토록 부적합한가를 말해 준다. (381,382쪽)
여성들이 집단의식을 형성해 나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장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독립과 자율성을 재확인해 줄 수 있는 전통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 여성들에게는 역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믿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여성들을 가장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은 상징체계에 대한 남성의 헤게모니였다. (383쪽)
◆우리는 제각기 우리 머릿속에 최소한 한 명의 훌륭한 남자를 간직하고 있다. (394쪽)
페미니즘이 태동되고 여성들이 권리운동을 시작했는데도,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가?
(...)더 즉각적으로, 여성은 자신의 삶 속의 남성(혹은 남성들)과의 의사소통, 인정, 그리고 사랑이 단절될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의 철회와, 생각하는 여성들을 '일탈적인 사람'으로 지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지적 작업을 저해하는 수단들이었다. (...) 사고하는 남자들 중 누구도 생각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아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사고체계를 창조하는 과정에 여성이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 힘인 성별 통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394쪽)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누군가의 진술을 검증하기. (...)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지식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위대한 남성들을 없애고, 그 남성들을 우리 자신으로, 우리의 자매들로, 익명의 선대여성들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397쪽)
◆ 당신이 힘든 것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인간종의 반이 다른 반에 종속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면, 차이가 지배나 종속 그 어느 것도 함축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 페미니스트 세계관은 여성들과 남성들의 정신을 가부장적 사고와 관습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 지배와 위계가 없는 세상, 진정으로 인간적인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397, 398쪽)
최근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용어 하나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냐 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언어는 하나의 표시, 변화된 의식과 새로운 사고의 지표가 된다."(404쪽)
조금씩 바꿔 나가자. 우리 머릿속의 '위대한 남성'을 없애고, '여성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해보자. 여성들을 분열시키려는 가부장제의 노림수에 넘어가지 말자.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