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2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이언 매큐언의 <넛셸>(문학동네)에 대해 강의하기 전에 간단히 작성한 리뷰다. 소설에서 더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지만 스포일러에 해당하기에 리뷰에서는 <햄릿>의 패러디만 주로 언급했다...














 


주간경향(17. 05. 27) 태어나느냐 마느냐, 햄릿적인 태아의 고민


영국 작가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 작품을 쓰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대표작 <햄릿>을 다시 쓴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언 매큐언의 <넛셸>은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므로 특이하지도, 놀랄 것도 없는 소설이지만 그것은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까지만이다.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고 말하는 화자가 태아여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궁 속 태아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햄릿을 태아로 설정한 전례는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이 <넛셸>에서는 태어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태아로 바뀌었다.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자궁 속에 있으니 ‘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태명도 없고 특별한 태교도 받지 않는다. 그의 탄생에 관한 준비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젊은 어머니 트루디가 아이보다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다. 이미 의식을 갖고 있는 ‘나’는 자궁 속에서 전해듣는 정보만으로 사태를 파악하는데, 트루디는 남편 존의 동생 클로드와 불륜에 빠졌다. 존은 가난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고, 클로드는 옷과 자동차밖에 모르는 부동산 개발업자다. 형제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그것은 마치 “내가 베르길리우스나 몽테뉴를 닮지 않은 것”과 같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숙부인 클로디어스가 부왕 햄릿을 닮지 않은 것은 마치 자신이 헤라클레스를 닮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하는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 형제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넛셸>은 <햄릿>을 패러디하고 있지만, 트루디와 클로드가 공모하여 존을 독살한다는 전개는 <맥베스>를 비튼 것이다. 태아인 ‘나’는 두 사람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하지만 자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두 사람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나’는 그들 관계의 걸림돌로 버려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어머니와 감방에서 인생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해 탯줄을 목에 감고 자살할 궁리까지 한다. 하지만 자살은 숙부에 대한 결정적인 복수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책 <나의 21세기 역사>를 끝까지 읽고 싶어한다. 자살 대신에 삶을 선택하는 이유다.

<햄릿>에서 아들 햄릿은 부왕의 유령을 통해서 숙부의 암살행위를 알게 되지만 <넛셸>의 ‘나’는 이미 어머니와 숙부의 음모와 그 결과를 알기에 부왕의 유령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유령이 등장해 두 악인을 응징할 수도 없다. 과연 어머니와 숙부의 범죄는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는 완전범죄가 될 것인가. 사건의 해결은 조사차 이들을 찾아온 경찰의 몫이 된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 비극을 따라가던 <넛셸>의 결말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바통을 넘겨준다.

햄릿적인 태아를 화자로 설정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넛셸>은 아무래도 태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언 매큐언의 이야기다. 작가 매큐언의 존재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성 정체성부터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슈에 대해서 박학한 식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리 허구적 설정이라 하더라도 공감을 떨어뜨린다. 매큐언의 햄릿도 너무 생각이 많다. 


19.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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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 소설이 한권 더 번역돼 나왔다. <검은 개>(문학동네). 올해 나온 새로운 장편을 포함해서 매큐언의 장편소설은 모두 열다섯 권인데 1992년작이 <검은 개>는8 다섯번째 소설이다. 바로 전작이 <이노센트>(1990)이고 후속작이 <이런 사랑>(1997)이다. 매큐언은 연이어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1998)과 대표작 <속죄>(2001)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검은 개>는 이러한 여정 혹은 경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한 독자도 있는 법.

열다섯 권 가운데 번역된 작품은 모두 열두 권이고, 이 가운데 네 권이 절판된 상태다. (소설집을 제외하고) 현재 읽을 수 있는 장편은 여덟 권이라는 얘기다. 이번 강의에서 세 권을 읽고 있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순서대로 더 읽어봐도 좋겠다. 현재로선 <이노센트>부터다(얼마전에 적었듯이 <암스테르담>은 절판되었다)...

<이노센트>(1990)
<검은 개>(1992)
<속죄>(2001)
<토요일>(2005)
<체실 비치에서>(2007)
<솔라>(2010)
<칠드런 액트>(2014)
<넛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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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문학동네)를 강의에서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내 인생의 소설‘로 지목하여 화제가 되었던 소설인데(그 때문에 재출간되기도 했다) 한국문학에 견주면 일종의 ‘후일담소설‘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한국 독자가 반응한 건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였다)와도 견줄 만하다. 다만 세대는 다른데 1935년생 시바타 쇼가 육전협(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 세대라면 1949년생 하루키는 1960년대 말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에 해당한다. 그 사이에 1960년 안보(투쟁)세대가 자리하는데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대표적이다.

넓게는 전후세대에 속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소설속 인물들이 그렇듯이 육전협 세대의 경험과 그 후일담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분량은 얇지만 내면 고백의 밀도와 순도는 <상실의 시대>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이 ‘내 인생의 소설‘이라는 평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그 이면에서 한국 후일담문학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도 읽게 된다). 대중성에 있어서도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1960-70년대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래도 <상실의 시대>가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거둔 폭발적인 반응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니 더 나아가서 <상실의 시대>에 대한 반응에 견주면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 대한 반응은 미미한 편이지 않을까. 나는 이 차이가 한국 독자의 특징이면서 한국문학의 풍토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주요 인물들이 일본 공산당과 관련되어 있어서 자연스레 러시아문학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넓게 보자면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일종이고 좁게 보자면 주인공이 대학원생이라는 점에서 ‘대학원생 문학‘에 속한다. 사례가 많지는 않을 듯싶지만 대학원생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가 매우 잘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근대문학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가 ‘대학생 소설‘의 좋은 선례라면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대학원생 소설‘의 모범이다. 대학원생 독자가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소설이란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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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되는 날도 있고 반대로 안 되는 날도 있다. 이번주는 모든 것이 안 돼 보이는 주였는데 (아직 주말의 지방강의가 남았지만) 지나고 나니 또 그럭저럭 선방한 한 주로 여겨진다(이주의 강의책 가운데 네 권을 다시 구입해야 했다). 휴일까지 강의가 있지만 내주엔 원고가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매달 3개의 원고가 있어서 나는 한주 쉬어 간다). 네 권의 책을(이번 휴일강의까지 포함하면 여섯 권) 새로 강의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자주 겪다 보니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다만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이다.

강의의 보람으로 치는 건 스스로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관런서를 구입하는 것이다. 오늘은 서평강의에서 부르디외의 대담집을 다룬 김에 그의 마네론과 정치평른을 주문했다(영어본이다). 로제 샤르티에와의 대담집 <사회학자와 역사학자>(킹콩북) 마지막 장에서 부르디외는 마네와 플로베르의 미술사적/문학사적 의의를 자신의 사회학 이론에 맞춰서 설명하는데 이 두 사람에 관한 논의는 각각 <마네>와 <예술의 규칙>으로 출간되었다. <예술의 규칙>(동문선)은 번역돼 있지만 <마네>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한때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1920년대 러시아문학사에 적용해보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책을 누군가 써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얼마든지 읽어줄 용의가 있다. 그때까지는 부르디외의 플로베르론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수밖에. 대담자인 샤르티에는 확인해보니 2006년부터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의 역사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권위자라는 뜻이겠다. 그의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도 생각난 김에 읽어봐야겠다(예전에 일부만 읽었는데 그 사이에 영어판도 구했다). 이렇게 한주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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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5-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강의 못들어서 너무 아쉽네요.
샘의 부르디외에 강의를 또 들을수 있는게 아니라서.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적당한 책이 나오면 다시 다룰수도.~

wingles 2019-05-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나 불어로 읽을 여력은 없어서 번역된 ‘예술의 규칙’을 찾아봤더니 절판이더군요..ㅠㅠ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네 주요 저작들이 절판.^^;
 

미국의 인지신경학자 매리언 울프의 신작 <다시, 책으로>(어크로스)의 부제다. ‘읽는 뇌‘ 분야의 권위자로 독서와 난독증에 관한 첫번째 책 <책 읽는 뇌>(살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저자다. 나부터도 관심을 갖던 주제로 디지털 매체가 읽는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는 게 <다시, 책으로>다.

˝매리언 울프는 역사와 문학,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자료와 생생한 사례를 토대로 오늘날 기술이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나아가 문자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가장 커다란 공헌인 비판적 사고와 반성, 공감과 이해, 개인적 성찰 등을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살펴본다.˝

핵심 요지 가운데 하나는 ˝‘순간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뇌가 인류의 가장 기적적인 발명품인 읽기(독서), 그중에서도 특히 ‘깊이 읽기’ 능력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독서 현장에서의 추정과 다르지 않은데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점이 책의 의의로 보인다. 제목을 보완하자면 이렇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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