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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둔 바 있는 듯싶은데(사실 나는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쓰고자 하는 글의 소재로 염두에 두고 있는 정도다) 서평 하나를 더 스크랩해놓는다(람혼님의 서평 http://blog.aladin.co.kr/sinthome/2636449 도 참고하시길). 랑시에르가 반박하고자 하는 상대 중의 하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인데, 그 점을 잘 부각시키고 있는 서평이어서다. 제목은 그 점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교수신문(09. 03. 30) 지적 불평등? 부르디외, 당신이 틀렸어!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책이다. 철학,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심지어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루길래 이토록 반향이 큰 것일까. 저자인 랑시에르는 기존 학문의, 정치적 기획의, 교육적 실천의 전제조건이었던 지적 조건의 불평등이라는 테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며, 바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몸짓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다. 랑시에르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배경에는 지적 불평등의 격차 해소를 두고 지루하게 이어진 논쟁과 갈등이 있다. 진보주의와 공화주의, 과학주의적 강조와 대중 자발성에 대한 강조 등으로 대립해온 모든 논쟁의 역사 이면에는 대중은 무지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며,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전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잘못됐으며, 자코토의 예 등 무수한 사례가 노동하는 대중의 무한한 지적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준다는 점이 저자의 진단이다.(오주훈 기자)

지난 해 겨울 한국을 방문해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주요 저작 한 권이 또 번역돼 출간됐다. 『무지한 스승』이 그것이다. 번역은 이미 랑시에르의『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훌륭히 번역한 바 있는 양창렬씨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번역자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옮긴이 주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지한 스승』은 1818년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소개하고, 그가 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교훈들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더불어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자코토는 루뱅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그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코토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번역이 함께 실려 있는 책 한 권을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번역문의 도움을 얻어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도록 주문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학생들은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생각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됐던 것이다.  

자코토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낸다. 첫째, 스승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앎은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승의 덕목은 오히려 무지이다. 무지한 스승,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것에 대해 무지한 스승을 말한다. 그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그의 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인간들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 교육을 지식의 전달로, ‘설명’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그 불평등의 간격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설명 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설명을 듣는 자가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즉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평등은 목표로서, 달성해야 할 어떤 것으로 제시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이미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셋째, 지능들의 동등성은 어떤 것을 배울 때 따라야만 하는 어떤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터득하는 데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방식 및 절차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지한 사람들의 방법은 ‘우연의 방법’이다. 한번이라도 스승 없이 무언가를 알아가야만 했던 상황에 놓이지 않았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은 아주 일상적으로 그리고 세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코토는 이러한 학습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넷째, 지능들의 동등성이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을 알아가는 지적 과정들에 실행되고 있는 지능들은 본성적으로 하나이고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모국어를 익히는데 사용됐던 지능은 문학작품이나 수학의 증명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지능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코토는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전체의 어떤 임의의 부분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에 대한 앎을 다른 부분과 연관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에 대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둔 이 방법은 전통적인 교육모델과 대립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적 해방을 가능케 하는 교육 방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특히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이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이 갖는 중요성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치적 함의들을 갖는다.

전통적인 교육모델은 무엇보다도 진보의 이념을 전제하고 있다. 지식들의 전수와 그 축적 및 확산을 통해서 한 개인 혹은 한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실제로 자코토가 ‘무지한 스승’이란역설적인 주장과 함께 개입했던 시기는, 사회를 합리적 질서로 구성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라는 비판적 시대를 완수하고자 하는 기획이 시작됐던 시대였다. 이 기획의 바탕에 놓여 있던 것이 바로 진보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지적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분할,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분할을 하나의 사실로서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정치적 주체화와 해방은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해방은 다른 전제, 즉 지적 평등으로부터 출발해야 가능한 것임을 랑시에르는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법으로서의 ‘보편적 가르침’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 출간됐을 당시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중의 하나였던 부르디외의 이론과도 대립한다. 부르디외는, 보편적 교육이라는허울 아래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이 학교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자신의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적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및 정치를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에게 정치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적 틀에서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사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는 전위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이 존재한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이 전통에 대한 비판적 답변이며, 동시에 정치의 가능성이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과이다. 그가 찾은 ‘지적 평등’이라는 논제는, 정치가 점점 더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시대에 다소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논의는, 정치적 주체화를 사유하기 위한 전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박기순 서울대 강사·철학) 

09.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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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1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3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ctopus 2009-03-31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중 "번역자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옮긴이 주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 큰 불만이 있는 독자입니다. 대부분이 불필요한 역주, 그리고 '원문에는 이런 단어가 없지만' 하는 식으로 굳이 본문 중간중간 끼워넣은 괄호[ ]들은 독서의 속도감을 엄청나게 방해하더군요. 역자 본인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주렁주렁 달린 옮긴이주의 존재 자체가 이 책의 주장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역자 후기에 언급했지요. 그런 거추장스런 사족 없이도 술술 읽히고 잔뜩 영감을 주는 책인데 말입니다.

로쟈 2009-03-31 22:35   좋아요 0 | URL
라캉의 <세미나>와는 대조되죠. 밀레는 역주 자체를 엄격하게 제한(금지?)한다더군요...

푸른바다 2009-04-0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으로서의 평등, 아니 생명으로서의 평등은 인정하지만, 전 '지적 평등'은 동의하기 힘들군요. 제 경험상 사람들의 지적 능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4-03 08:41   좋아요 0 | URL
불한 대역본이라면 그런 '평등한' 지적 능력이 발휘될 수 없었겠죠. 자코토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문제는 제기해주는 것이죠...
 

이달부터 교수신문의 서평위원을 맡게 됐다. 주로 하는 일이 대략 한 달에 한 번꼴로 칼럼을 싣는 것이다. 첫번째로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마땅한 주제가 없을까 찾아보다가 그냥 어쩌다 손에 든 번역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교수신문(09. 03. 30)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몇 주 전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손에 든 책은 『번역, 권력, 전복』(동인, 2008)이다. 책은 여타의 번역서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딱딱한 문장들로 구성돼 있었다. 물론 딱딱하다는 게 흠이 될 수는 없지만, 경험상 이런 경우에 사소한 오류들도 동반하기 마련이다. 가령 리오타르의 ‘Grand Recits’는 ‘메타서사’라고 옮겼는데, 흔히 ‘거대서사’(혹은 ‘큰 이야기’)라 옮겨지는 표현이다. 'xenophobia and racism’도 ‘배타주의와 민족 우월감’으로 ‘의역’했는데,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란 ‘직역’을 왜 기피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정도야 의견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작 흥미로운 오역은 따로 있었다. 번역상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때때로 어떤 공백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다른 문화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매우 다른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란 지적을 한다. 같은 의미를 담은 대응어가 없거나 마땅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키겠다. 원천언어(출발어)와 목표언어(도착어)를 저울에 올려놓았을 때 한쪽으로 기우는 경우다.  



그러한 지적을 보충하기 위해 저자는 “에스키모인의 ‘횃불의 신’은 잘 알려진 예이다”라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원문을 찾아보니 이렇다. “thus, the well-known example of 'Lamb of God' in the case of the Eskimos.” 여기서 ‘Lamb of God’이 어떻게 ‘횃불의 신’이란 뜻이 되는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깨닫게 된 건 번역과정에서 두 단계의 치환이 있었으리라는 점. 먼저 역자는 ‘Lamb of God(하느님의 어린양)’을 ‘Lamp of God(신의 횃불)’로 잘못 보았고, 이어서 ‘God of Lamp(횃불의 신)’라고 어순을 뒤집어 읽지 않았을까.  

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양’이란 동물을 구경해봤을 리 없다. 따라서 번역어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고, 유목민족의 표현인 ‘하느님의 어린양’을 이해하기도 난감했을 것이다(그런 경우엔 ‘하느님의 물개’라고 옮겨야 할까). 이것이 문화적 차이와 그 ‘공백’이 낳는 문제이고 에스키모인의 언어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번역해야 하는 상황의 곤경이다.

결과적으로 ‘횃불의 신’이란 번역은 ‘잘 알려진 예’를 잘못 옮긴 예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글이 번역가의 역할과 함께 번역에서의 조작 문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조작하는 데에 따른 결과와 번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의 남용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번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이란 실상 번역과정에서 행사되는 ‘번역가의 힘’이다.  번역가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치하고 또 추가하고 생략하면서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저자’이며 ‘신’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횃불의 신’이란 오역 덕분에 상기하게 되는 신은 프로메테우스다. 번역가는 인간(독자)에게 횃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와 닮지 않았는가. 번역의 목적이 ‘소통과 나눔’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절반(소통)은헤르메스의 일이며, 나머지 절반(나눔)은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나는 헤르메스-번역가들의 겸손을 존중하며, 프로메테우스-번역가들의 소명의식을 존경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신적인 힘과 의지의 오용이나 남용을 경계할 필요도 있지 않나 싶다. 헤르메스-번역가들의 겸손이 혹 자신의 책임에 대한 방기는 아닌지, 프로메테우스-번역가들의 소명의식이 혹 도취적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하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이 번역서이거늘! 

09.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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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3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느님의 어린양을 저렇게 잘 못 보는 수도 있군요.

로쟈 2009-03-31 22:32   좋아요 0 | URL
희한한 오역들이 많습니다...

베토벤 2009-03-3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일화를 떠올리게 하네요. " 다음 곡은 A piece of dream 입니다, 평화의 꿈"

로쟈 2009-03-31 22:33   좋아요 0 | URL
유사 사례군요.^^
 

연세대학원신문 3월호에 실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번 학기에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란 연재물을 네 차례 싣게 될 예정인데, 그 첫번째 꼭지로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열린책들, 2009)을 다루었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종횡으로 엮어보는 것이 연재의 취지이며 대학원생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다.   

연세대학원신문(09. 03. 09) [당신 서재의 나침반] 번역의 탄생

책으로만 하는 공부를 사람들은 대개 높이 치지 않지만 적어도 대학원생의 공부라면 8할은 책으로 시작해서 책(혹은 논문)으로 끝난다(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필독 목록에 있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정리한 내용에 대해서 발표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대학원생의 일상사다. 한데, 그 책은 어떤 책인가? 책의 분야가 아니라 분류를 묻는다. 책은 출판지와 쓰인 언어에 따라 국내서, 국외서, 번역서로 분류된다.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이 세 가지 범주로 분류 가능하다. 이 중 국외서(원서)를 논외로 하면, 대학원생이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은 번역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추정에 근거를 대보자면 이렇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에 따르면, “해마다 통계가 들쭉날쭉하지만 우리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다. 의미 있는 인문사회과학서는 그 비중이 훨씬 높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서의 경우 번역서가 3분의 2 가까이 된다. 또 해마다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책의 절반쯤은 번역서다.”(<번역출판>, 머리말) 그 결과 어떤 경우엔 번역서 출간 속도에서 일본을 앞지르기도 하며, 전체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1위’다!   

  

말하자면 한국은 ‘번역 대국’이다. 한데, 이 ‘번역 대국’은 곧바로 ‘번역 강국’이기도 할까? 얼른 ‘그렇다’고 말하기가 좀 어렵다. 그 ‘강국’의 척도가 ‘주체적 역량’ 혹은 ‘자신감’의 문제라면 말이다. 예컨대 ‘real politics’란 말을 ‘현실 정치’라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굳이 ‘현실 정치(real politics)’라고 괄호 안에 원어를 넣어주면서 옮기는 것은 ‘친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번역’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서도 “배차(拜箚)에 참여하지 아니한 옥당들도 체직하였다”라는 식이라면 한문을 모르는 독자의 난감함은 여전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서 저자는 “해방 이후 두 세대가 지났지만 아직 한국은 정신적으로 독립국이 아니다 싶을 때가 많다”라고까지 토로한다. 번역서에는 한갓 번역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소위 ‘학문후속세대’로서 이 번역의 문제와 함께 학문 주체성의 문제도 고민해보는 것을 어떨까.   

먼저 우리가 쓰는 개념어들의 기원과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시사해주는 바대로, 사실 우리가 쓰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들은 주로 메이지 시대에 서양어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대 일본의 지식인과 번역가들이 ‘society’를 ‘사회’로 ‘individual’을 개인으로 ‘modern’을 ‘근대’로 옮긴 것이므로 이 말들이 모두 당시로선 ‘신조어’였다. 가령 ‘individual’이란 단어는 처음에 ‘독일개인(獨一個人)’, ‘단일개인(單一個人)’ 등으로 영일사전에서 풀이되다가 ‘일개인’으로 번역되었고 그 뒤에 ‘일’이 떨어져나가 ‘개인’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에겐 일본어 문헌과 영일사전을 베낀 영한사전 등을 통해서 유입되었다. ‘개인과 사회’라는 개념틀 또한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에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기조의 영향을 받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입수했다. 이들 개념어가 사고의 도구상자 역할을 하는 한, 우리가 정신적으로 ‘독립국’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본식 개념어(한자어)들을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2007)에서 고종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없으며 모든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다. 가령, ‘쓰메끼리’는 ‘손톱깎이’로, ‘벤또’는 ‘도시락’으로, ‘쓰리’는 ‘소매치기’로 대체한다지만 일본어에서 훈독을 하는 단어들, 예컨대 ‘다치바(立場)’에서 온 ‘입장’을 ‘처지’로, ‘데쓰즈키(手續)’에서 온 ‘수속’을 ‘절차’로 바꾸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유형의 일본제 말들인 엽서(葉書: 히가키), 입구(入口: 이리구치), 출구(出口: 데구치), 할인(割印: 와리비키), 취소(取消: 도리케시), 조합(組合: 구미아이), 견습(見習: 미나라이) 등은 대체할 말도 마땅치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오히려 언어민족주의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러한 언어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번역의 의의가 줄어들 수는 없겠다. <번역의 탄생>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령 일본에서는 10년쯤 전에 헤겔 <정신현상학>의 새로운 번역이 화제가 됐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헤겔의 저서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역자는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직역 그대로 ‘들이밀기’가 아니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의역하는 ‘길들이기’가 번역의 기본방침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개항 이후 외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던 시절에는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다. 하지만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도약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번역에서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것이 번역의 방법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경제 수준, 그리고 문화적 자신감과 연관된 문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미국으로 숭배대상이 바뀌었을 뿐, 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사무침>(푸른사상, 2008)과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고마움>(채륜, 2009)은 현재의 여건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 학문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다시 일깨워준다. 우리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 1-5>(지식산업사)와 이기상의 <우리말 철학>(지식산업사, 2003)은 그런 고민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회과학자들이 펴낸 <우리 안의 보편성: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한울, 2006)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한울, 2003)과 함께 일독해볼 필요가 있다.  

09.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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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3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유럽학문 용어를 한자문화권에 맞게 번역한 일본의 공헌은 한자문화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국적을 떠나서 인정해 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3-31 22:31   좋아요 0 | URL
'한자문화권에 맞게'란 표현은 어폐가 있지 않을까요?^^ 일단은 자신들을 위한 번역이었을 테니까요. 우리가 얻어쓰게 된 건 부수효과겠지요...

푸른바다 2009-04-01 19:52   좋아요 0 | URL
저도 '한자 문화권에 맞게'란 표현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번역이기도 했고, 그들에게 한자란 '지적 권위'의 상징이었기에 용어들이 매우 어려운 한자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understanding을 '오성'으로 번역한 경우겠지요. 이런 식의 예는 부지기수고 중국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학문 용어를 일상어에서 멀어지게 한 병폐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챔피언이 된 김연아 선수의 선전이 국민들을 기쁘게 한 휴일이었지만,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수원역 광장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단체 회원이 경찰에 연행돼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니까. 매일같이 '이런 나라, 이런 대통령이 어디 있나'라고 개탄해보지만, 알다시피 이미 눈하나 꿈쩍할 이들이 아니다. 이럴 땐 작년 여름의 시간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복잡한 반성'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최근에 나온 '촛불 관련서'에 대한 대학가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혹 참고가 될까 싶어서...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3. 23) 그래도 촛불은 뜨거웠습니다  

2008년 여름은 뜨거웠다. 너도나도 ‘뜨거운’ 촛불을 손에 들고 ‘뜨겁게’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1987년을 회상시키는 뜨거운 향연은 국내외 언론들의 주목을 받으며 약 두 달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촛불은 끝났다. ‘30개월 미만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연령 제한’이라는 석연치 않은 결과를 남기고 끝나버린 2008년의 여름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본 책이 출판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가 그것이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촛불 집회가 소통을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민주화의 효과가 중단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이 ‘운동’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p.8)

‘시민들은 광우병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진심 어린 서찰을 원했다. 그러나 빈번히 단단하게 막히 차벽 앞에서 소통을 말하는 정부의 민심과의 불통을 확인해야 했다.’(『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p.92)
 

특히 촛불에 대한 기록을 담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기본적으로 촛불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기억의 낭만화를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머리말과 달리 ‘평화롭게 아스팔트 길 위에서 유모차를 끌고 걷는 광경은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데모를 하러 나온 건지, 애들 데리고 마실 나온 건지 모르게 촛불시위는 유쾌, 상쾌, 통쾌와 발랄함이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등 기본적으로 촛불을 ‘우리 편’으로 가정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오히려 그 해의 촛불이 민주주의의 상징임을 남기기 위한 기록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반면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머리말에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촛불시위가 문제적이다’라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촛불 시민들은 운동권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되어갔다’고 표현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달리 촛불집회가 ‘현 정부를 길들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촛불집회가 진정한 직접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1부와 문화정치학적으로 분석한 촛불에 대해 다룬 2부, 그리고 촛불의 숨어 있는 주체에 대해 짚어 본 3부까지 촛불집회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이어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서 ‘촛불소녀와 더불어 촛불집회의 상징이 되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모차 부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인다. 1부 첫장 에서 저자는 유모차 부대의 등장을 ‘유모차에 탄 아이들의 절대적인 나약함을 ‘무기’로 삼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나약한 동료 시민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반적으로 ‘이론은 늘 비관주의적이어야 한다’는 1부 두 번째 장의 주장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로 빠지는 부분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1부 첫 장이다. 저자는 폭력이 수반되지 않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 다른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책에서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왜 그렇게 무기력 했을까’ 라는 비관적인 논조로만 첫 장의 끝을 맺어 아쉽다.

비판 일색으로 보이지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속에서도 촛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10일 집회 중 일어난 일이다. 컨테이너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에 대해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는 의견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연단으로 표출하자’는 의견이 갈렸다. 결국 컨테이너 높이의 스티로폼을 쌓았지만 경찰 해산 전까지 시민들간의 토론과 연설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자치의 힘을 과시했다’는 한 문장 외에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통해 조금씩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촛불집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을지 모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해 촛불은 언젠가 다시 타오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박고은기자)   

대학신문(09. 03. 28) 촛불을 그리워하는 그대에게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5%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에 신경 쓰기 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정치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 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는 촛불시위에 다시 주목한다. 경제 문제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정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거니와 ‘촛불에 대한 성찰’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을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를 비롯해 인터넷 논객, 기자, 교수 등의 필자들이 참여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를 성찰한다. 『당대비평』은 “그간의 촛불 담론이 긍정적 효과에 주목했다면 이 책은 촛불 주체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했다”며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촛불시위는 복잡한 쟁점들을 담고 있는 사안이었다. 저자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촛불시위를 분석한다. 그들은 촛불시위 때 과학 담론이 정부, 대중, 전문가 사이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비정규직 문제에 촛불 주체들이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당대비평』 한보희 기획위원은 촛불 주체들의 정체성을 ‘법’을 통해 살펴본다. 당시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범법자로 여겨지곤 했다.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형법의 원칙은 모든 실정법이 그 원리로 따르고 있는 ‘법들의 법’ 중 하나다. 이에 따르면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법들의 법’조차 국민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법의 속성을 고려하면 이는 섣부른 결론이 될 수 있다.

국민이 국민일 수 있는 자격은 법률로 그 요건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국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법률 판결의 주체가 국민보다 우선한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으로 제정된 권력의 주체인 ‘대한민국 국민’과 헌법을 만드는 권력의 주체인 ‘대한국민’을 구분해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법 속에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면 법 이전에 ‘대한국민’이 있는 것이다. 이런 법적 해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만 살아오던 이들이 촛불시위를 통해 ‘대한국민’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촛불은 꺼졌고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며 우리를 채근하지 않는다. 대신 촛불에 대한 관심 혹은 반성만은 끄지 말 것만을 당부한다. 행동에는 관심과 반성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유병준기자)  

09. 03. 29. 

 

P.S. 그간에 나온 '촛불 관련서'를 다시 '호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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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from Post-Modern Times 2009-03-29 19:39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2.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3-29 22:04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Sati 2009-03-29 22:02   좋아요 0 | URL
아는 분과 휴대폰 얘기하다가, 애니콜 기본 벨소리중에 "여보쪠요. 쪈와와쪄요." 이거가 좋긴 하지만 삼성꺼라 번번이 싸이언을 사게된다고 했더니, "긍정적으로 살아. 그냥 사. 삼성 없으면 어쩔려구? 우리나라 1위 기업인데."하더라는... 나로 말하면 삼성이 바다에 기름부어놓고 배째라 하고 있는 것이 미워서 불매운동중인데, 아무데나 지네 편한데 갖다 붙이는게 '긍정'의 '시크릿'이라는. 반말 ㅈㅅ요^^

로쟈 2009-03-29 23:28   좋아요 0 | URL
사회가 덜 성숙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호구 노릇이나 하지요...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 출간된 김에 '지젝의 주저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시차적 관점>의 출간을 앞둔 시기에 그가 자신의 '주저'라고 꼽은 책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를 포함한 네 권이었다. 모두가 국내에 소개돼 있으므로 바야흐로 읽어주기만 하면 되겠다. 읽기로 마음 먹으면 여름까지는 풍성한 읽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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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3-29 18:03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2판이 나와있군요. 지젝 스스로가 몇몇 부분은 비판했던 책이니만큼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큰 수정없이 표지만 바꾸고 서문만 덧대서 그대로 나왔을런지? 한국에도 2판이 번역되어서 나오면 좋으련만...요원한 일이겠죠?

로쟈 2009-03-29 18:21   좋아요 0 | URL
짐작엔 서문만 다시 썼을 듯싶은데요(원서의 편집 미스는 교정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한국어판이 절판된 마당인지라 2판의 번역판이 다시 나오면 좋겠어요. 제목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바로 잡아서...

[해이] 2009-03-29 18:19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도대체 언제 재판이 나올까요....

로쟈 2009-03-29 18:22   좋아요 0 | URL
이게 안 팔리는 책은 아니니까 다시 나오겠지요. 몇몇 오류를 바로 잡아서 빨리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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