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피츠제럴드 편이 출간되었다. 최민석 작가가 쓴 <피츠제럴드>(아르테). 오늘밤 영국문학기행을 떠나지만 내년에는 스위스(3월)에 이어서 프랑스(10월)에 갈 예정이고, 피츠제럴드는 미국 작가이지만 헤밍웨이와 함께 프랑스에도 행적을 남기고 있다. 리비에라 해안까지는 가보지 못하더라도(<밤은 부드러워라>) 파리에서는 그들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앞서 나온 백민석의 <헤밍웨이>(아르테)는 이미 통독했는데, 세계 각지를 누빈 헤밍웨이의 흔적을 뒤쫓는 일은 견적이 많이 나온다. 미국문학기행은 나중에 별도로 기획해봐야겠지만 프랑스문학기행 때 미국작가들의 파리 경험에 대해서 한 꼭지 다뤄볼 생각이다(대표작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되려나. 스페인으로의 투우 여행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피츠제럴드와 관련해서 아내 젤다의 책이 얼마 전에 나왔다. 그녀의 소설과 산문을 묶은 <젤다>(에이치비프레스). 1920년대 가장 떠들썩한 작가 커플의 뒷이야기와 함께 일부에서는 스콧에게 부당하게 가려졌다고 평가하는 젤다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건 내년의 일이고 지금은 당장 영국행(이자 아일랜드행) 가방을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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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 2019-09-2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로쟈 2019-09-25 19:39   좋아요 0 | URL
네.~
 
 전출처 : 로쟈 > 벤야민, 성에 눈뜨다

12년 전의 글이다. 요즘은 매일 ‘지난오늘‘을 들춰보는 게 일이 되었다. 나조차도 기억에서 잊은 글들과 마주치게 된다(물론 다시 상기하게 되지만). 그때는 긴 분량의 글도 예사로 쓸 수 있었는데, 지금보다 시간이 있었고 책은 적었던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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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고리키 휴머니즘의 최대치

9년 전에 썼던 글도 다시 읽어본다. 지난여름 오랜만에 연극을 관람하고 강의에서 다루기도 한 작품인데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에 대한 것이다. 러시아문학의 날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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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9-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을 꺼내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고쳤네요.
계몽의 열매란 톨스토이의 희곡이 궁금하네요.

로쟈 2019-09-25 08:37   좋아요 0 | URL
번역은 돼 있어요.~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대전예술의전당에서는 도스토옙스키 원작 <죄와 벌>을 전인철 연출로 무대에 올린다. 지난해 <백치>에 이어서 연이어 도스토옙스키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 나 역시도 작품해설 강의를 이번에도 맡아서 진행했다. 아래는 프로그램북에 실은 원작해설로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의 내용을 바탕삼아 재구성했다. 프로그램북에서는 작가명이 ‘도스토예프스키‘로 표기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장편소설 <죄와 벌>(1866)은 <카라마프가의 형제들>(1880)로 이어지는 창작여정의 첫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앞서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를 통해서 독자적인 인간관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이 무엇보다 욕망하는 것은 자유다. 자연세계의 인과율이 마치 돌벽처럼 버티고 있다 하더리도 그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인공은 내비친다. 자유로운 인간의 내면은 단순한 알고리즘에 지배되지 않으며 행동은 예측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존심의 근거가 된다.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더 밀어붙인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는 도입부의 설정 자체가 주인공이 관념적인 헛발질만 보여줄 뿐이었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사실 러시아어에서 ‘죄’라는 말 자체가 ‘한걸음을 내딛다’라는 뜻이다. 넘어가는 것이죠. ‘첫걸음을 내딛다‘는 표현이 작품에 자주 나오는데 이것이 ‘죄‘의 어원적 의미다. 라스콜니코프는 범행 이후 자신이 이 첫걸음을 견뎌내지 못한 데 대해 자책하는데, 이에 대한 자책감이 자수하기 전까지 그에게 주어진 ‘벌‘이다.

<죄와 벌>은 전체 6부와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을 첫걸음을 떼거나 떼려고 하는 인물이 세 명 등장한다. 라스콜니코프, 소냐,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들이다. 각각 살인자(라스콜니코프), 매춘부(소냐), 아내를 죽였다는 살인혐의를 받는 자(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인데 전체적으로는 라스콜니코프를 놓고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대립하는 구도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범죄이론에 따라서 자기가 범인(평범한 인간)인지 비범인(비범한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소냐는 이타적인 동기에서이긴 하지만 가족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몸을 파는 창녀가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의 권유대로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며 소냐가 자청하여 그를 동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꿈을 통해 자기 욕망의 역겨운 진실과 조우하고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부의 주된 내용을 살인 리허설이다. 라스콜니코프가 하숙집을 나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주인을 피해 몰래 하숙집을 빠져나와서는 전당포를 향한다. 전당포까지 거리가 730보라고 나오는데, 그만큼 라스콜니코프가 이미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준비해왔다는 뜻이다. 그는 한 달 전부터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궁리해 왔고 머릿속으로는 시나리오를 다 짜놓은 상태다. 다만 자기가 저지를 행동에 대한 혐오감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전당포에 찾아가 노파에게 장물을 맡기고 다음에 다른 물건을 갖고서 한 번 더 오겠다고 말한다. 전당포 노파가 의심이 많기 때문에 미리 안면을 익혀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치밀하게 범행의 시나리오를 마련하고서도 그는 머뭇거린다.

돌아가는 길에 관목 숲에서 잠시 잠이 든 라스콜니코프는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갔던 꿈을 꾼다. 꿈에서 그는 늙은 암말이 마부에게 학대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노쇠한 말이 끄는 마차에 사람들 가득 태우고서는 말이 일어나질 못하자 채찍질을 하고 나중에는 쇠공이로 내려친다. 그렇게 학대하는 말에게 달려간 어린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끌어안고 흐느낀다. 잠에서 깨어난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생각한다. ˝꿈에서 깨어나서, 아 다행이다. 맙소사! 그는 부르짖었다. 정말 정말로 나는 진정 도끼를 들고 노파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하는 것일까. 그 정수리를 부수려 하는 것일까?˝ 라스콜니코프는 꿈과 자신이 계획한 살인을 곧바로 연관 짓는데, 단순하게 보면 꿈에서 마부는 자신이고 늙은 암말은 전당포 노파를 상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부와 암말이 모두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스스로 초인사상을 통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던 라스콜니코프는 선술집에 들렀다가 마르멜라도프를 만나고 그의 가족의 비참한 삶과 소냐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듣는다. 라스콜니코프는 집안형편 때문에 변호사 루진과 결혼하려고 하는 동생 두냐를 소냐를 동일시하면서 탄식한다. 애초에 이러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욕망이고 범죄의 기획동기였다. 그렇지만 전당포 노파의 이복동생 리자베타가 가게를 비울 것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결행한 범행과정에서 노파를 살해한 데 뒤이어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리자베타까지 살해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라스콜니코프를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심리적으로 더욱 옥죈다. 라스콜니코프에 대한 의심의 발단은 그가 범행 전에 발표한 범죄이론이었다.

3부에서 라스콜니코프가 포르피리와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부터 범죄에 관한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화제가 된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는 범인과 비범인이 있다. 즉 평범한 사람과 뭔가 비범한 사람이 있는데 두 부류에게는 각기 다른 권리가 부여된다. 범인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도 비범인에게는 허용되는데, 세계사적 보아도 영웅들은 전쟁도 일으키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음에도 벌을 받지 않고 숭배되었다. 비근한 사례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반면에 평범한 사람들은 한 사람만 죽여도 살인자가 되고 처벌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부류는 종류가 다르고 각자의 역할도 다르다고 보는데, 이것이 라스콜니코프의 초인사상이다. 포르피리는 전당포 노파 살인사건이 범죄이론과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라스콜니코프는 그런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기획한 일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에도 시달린다. 3부 끝에 나오는 꿈에서 보면 사실 라스콜니코프는 알료나를 죽이지도 못했다. 꿈에서 그는 전당포를 다시 찾아가서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는 노파를 허리를 도끼로 내려친다. 하지만 노파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만 더 수그린다. 의아한 라스콜니코프가 밑에서 올려다보니 노파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서 내려치기 시작했지만 도끼로 치면 칠수록 침실에서의 웃음소리와 속삭이는 소리는 강하게 큰소리로 울리기 시작했고, 노파는 이제 아예 온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묘사가 암시하는 것은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죽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 꿈 장면은 라스콜니코프의 자존심이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바로 그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를 찾아온다. 두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니코프에게도 특이한 친밀감을 표시한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에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지극히 혐오스러운 인간일 뿐이다.

4부에서는 라스콜니코프가 마르멜라도프를 통해서 알게 된 소냐의 집을 찾아간다. 처음에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를 동료로 대한다.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소냐는 괴로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한다. 그의 생각에 창녀로 전락한 소냐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아니면 아예 음탕의 길로 들어서거나. 라스콜니코프가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예상을 비껴가는데 소냐는 ‘유로지비’(여성형은 ‘유로지바야‘)였다. 러시아어 유로지비는 ‘광신도’로도 번역되는데 ‘성스러운 바보’를 뜻한다. 정신은 나갔지만 신의 은총을 받아서 진리를 말하는 자가 유로지비다.

그런 소냐에게 라스콜리니코프가 성경에 나오는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촛불 아래서 소냐가 흥분된 목소리로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주고 라스콜니코프가 이를 듣는 장면은 범행 이후의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전환점에 해당한다. 비로소 자기 자신 외에 누군가와 소통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라스콜니코프라는 이름에서 라스콜(raskol)은 분리 혹은 분열이라는 뜻인데 어원적으로는 17세기의 분리파 교도들에서 나온 말이다. 분열적인 인물인 라스콜니코프는 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데, 이러한 분리 자체가 라스콜니코프에게는 벌에 해당한다. 이 분리는 그가 소냐에게 자신의 행위를 자백하고 그녀의 권유에 따라 대지에 입을 맞추면서 해소된다. 러시아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죄를 지은 자는 대지를 더럽힌 자이기에 먼저 속죄의 의미로 대지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 이렇듯 소냐와의 만남은 라스콜니코프의 갱생을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5부에 이르러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소냐의 길과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길이 선택지로 주어진다. 사실 범행 이후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세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도망가거나, 자살하거나, 자수하거나. 도망가는 것을 배제하면 남은 선택지는 자살이냐, 자수냐, 두 가지로 압축된다. 자살의 유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결국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로 자수를 선택한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의 길과 소냐의 길과 합치되는 것은 에필로그에 가서다.

에필로그에서 시베리아의 죄수들은 소냐와 라스콜니코프를 전혀 상반된 태도로 대한다. 나이도 많지 않은 소냐를 어머니라고까지 부르는데, 말 그대로 소냐는 성모의 이미지를 갖는다. 반면에 라스콜니코프는 무신론자라고 구박당한다. 이를 계기로 라스콜니코프는 비로소 소냐와 자신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재판에서 8년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니코프는 시베리아 유형을 가서 오히려 양심이 평안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라스콜니코프가 특이한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사람들이 선모충에 감염되어 모두들 자기 자신만 옳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므로 다툼이 벌어지고 전쟁이 일어나며 인류가 멸망해간다. 이러한 꿈을 꾼 뒤에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사상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다. ˝소냐의 길이 이제는 나의 길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그는 비로소 소냐에게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는다. 이 장면을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는 다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찾아왔으며, 따라서 의식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무엇이 형성되어야만 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찾아왔다는 진술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변증법은 오류로 판명됐고 그 대신 삶이 찾아온 것이라는 해석이 일례다. 하지만 삶이 변증법을 대신할 수 있으려면 삶 자체가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여기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삶과 변증법이 아니라 개념의 변증법과 구체적 삶의 변증법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삶의 변증법이란,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제나 고통과 수난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은 항상 우회의 과정을 거친다. 죄의 단계, 혹은 고통의 단계를 거쳐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삶의 변증법입니다. 따라서 <죄와 벌>의 메시지를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정리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야 한다 쪽에 가깝다. 이러한 작가의 사상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죄와 벌>의 현재성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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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12년 전에 쓴 글을 다시 공유한다. 당시 추석연휴에 작성한 모양이다. 마침 오전에 톨스토이 강의가 있어서 지방에 내려가는 참이다. 절판됐다고 언급한 스타이너의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서커스)는 이미 한번 언급한 대로 지난봄에 다시 나왔다. 그후로도 12년이 걸렸던 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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