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둔 바 있는 듯싶은데(사실 나는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쓰고자 하는 글의 소재로 염두에 두고 있는 정도다) 서평 하나를 더 스크랩해놓는다(람혼님의 서평 http://blog.aladin.co.kr/sinthome/2636449 도 참고하시길). 랑시에르가 반박하고자 하는 상대 중의 하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인데, 그 점을 잘 부각시키고 있는 서평이어서다. 제목은 그 점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교수신문(09. 03. 30) 지적 불평등? 부르디외, 당신이 틀렸어!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책이다. 철학,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심지어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루길래 이토록 반향이 큰 것일까. 저자인 랑시에르는 기존 학문의, 정치적 기획의, 교육적 실천의 전제조건이었던 지적 조건의 불평등이라는 테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며, 바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몸짓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다. 랑시에르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배경에는 지적 불평등의 격차 해소를 두고 지루하게 이어진 논쟁과 갈등이 있다. 진보주의와 공화주의, 과학주의적 강조와 대중 자발성에 대한 강조 등으로 대립해온 모든 논쟁의 역사 이면에는 대중은 무지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며,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전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잘못됐으며, 자코토의 예 등 무수한 사례가 노동하는 대중의 무한한 지적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준다는 점이 저자의 진단이다.(오주훈 기자)
지난 해 겨울 한국을 방문해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주요 저작 한 권이 또 번역돼 출간됐다. 『무지한 스승』이 그것이다. 번역은 이미 랑시에르의『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훌륭히 번역한 바 있는 양창렬씨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번역자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옮긴이 주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지한 스승』은 1818년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소개하고, 그가 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교훈들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더불어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자코토는 루뱅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그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코토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번역이 함께 실려 있는 책 한 권을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번역문의 도움을 얻어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도록 주문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학생들은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생각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됐던 것이다.
자코토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낸다. 첫째, 스승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앎은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승의 덕목은 오히려 무지이다. 무지한 스승,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것에 대해 무지한 스승을 말한다. 그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그의 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인간들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 교육을 지식의 전달로, ‘설명’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그 불평등의 간격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설명 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설명을 듣는 자가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즉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평등은 목표로서, 달성해야 할 어떤 것으로 제시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이미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셋째, 지능들의 동등성은 어떤 것을 배울 때 따라야만 하는 어떤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터득하는 데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방식 및 절차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지한 사람들의 방법은 ‘우연의 방법’이다. 한번이라도 스승 없이 무언가를 알아가야만 했던 상황에 놓이지 않았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은 아주 일상적으로 그리고 세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코토는 이러한 학습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넷째, 지능들의 동등성이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을 알아가는 지적 과정들에 실행되고 있는 지능들은 본성적으로 하나이고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모국어를 익히는데 사용됐던 지능은 문학작품이나 수학의 증명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지능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코토는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전체의 어떤 임의의 부분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에 대한 앎을 다른 부분과 연관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에 대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둔 이 방법은 전통적인 교육모델과 대립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적 해방을 가능케 하는 교육 방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특히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이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이 갖는 중요성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치적 함의들을 갖는다.
전통적인 교육모델은 무엇보다도 진보의 이념을 전제하고 있다. 지식들의 전수와 그 축적 및 확산을 통해서 한 개인 혹은 한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실제로 자코토가 ‘무지한 스승’이란역설적인 주장과 함께 개입했던 시기는, 사회를 합리적 질서로 구성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라는 비판적 시대를 완수하고자 하는 기획이 시작됐던 시대였다. 이 기획의 바탕에 놓여 있던 것이 바로 진보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지적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분할,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분할을 하나의 사실로서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정치적 주체화와 해방은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해방은 다른 전제, 즉 지적 평등으로부터 출발해야 가능한 것임을 랑시에르는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법으로서의 ‘보편적 가르침’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 출간됐을 당시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중의 하나였던 부르디외의 이론과도 대립한다. 부르디외는, 보편적 교육이라는허울 아래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이 학교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자신의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적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및 정치를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에게 정치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적 틀에서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사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는 전위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이 존재한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이 전통에 대한 비판적 답변이며, 동시에 정치의 가능성이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과이다. 그가 찾은 ‘지적 평등’이라는 논제는, 정치가 점점 더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시대에 다소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논의는, 정치적 주체화를 사유하기 위한 전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박기순 서울대 강사·철학)
09. 0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