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 58호, 2009년 봄.

1) 『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 기고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 국역본 출간에 부친 글이다. 지난해 12월 랑시에르 방한 강연 시기에 발맞춰 간행된 이 책은 현재까지 나온 몇 종의 랑시에르 국역본 중 최선의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짧은 기간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던 랑시에르의 수용사(受容史)를 되짚어 보자면, 그 짧은 '역사'에는 번역에 있어서 과거 1990년대 초중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수용과 전유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번역-인프라' 혹은 '독자-인프라'라는 측면에서 그때와 지금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1990년대 당시 우리가 오역되고 오도된 푸코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읽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작금의 랑시에르 수용 현황은 그보다 크게 나아진 점이 없다는 게 또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에 '이론의 수입'이라는 '식민지적 풍경'을 둘러싼 어떤 환경(milieu)을 생각해볼 때, 번역의 수준이나 독자의 수용 환경에서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는가 하는 물음에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현재는 당시보다 '관련 전공자'도 더 많아졌고 수입된 이론의 요체를 '체득한' 이들도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현재에도 과거 못지않게 부주의한 번역들, 잘못 옮겨진 번역들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야 할까? 이는 흔히 말해서ㅡ하지만 이는 또한 흔하다고 해서 진부하게 여겨서는 안 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문제일 텐데ㅡ어떤 '시스템'의 문제이다.

2) 물론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하면 여러 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을 텐데, 그 중 내가 여기서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서로 연결되는 두 개의 문제, 곧 글의 호흡과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라는 문제이다. 먼저, 글의 호흡 문제: 일간지나 주간지 단위로 작성되고 배포되고 소화되는 어떤 이론의 자리란, 오직 짧은 단위의 호흡으로만, 다시 말해, 기껏해야 서너 개의 단락 안에서 '소개하고 해석하고 진단하는'ㅡ혹은 '그렇게 해야 하는'ㅡ일련의 극히 짧은 호흡을 통해서만, 스쳐지나듯 나타났다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글 자체의 물리적 분량이 아니라 그러한 분량 안에서 덩달아 짧아지는 어떤 사상(思想)의 호흡이다. 또한 이렇게 짧아진 글의 호흡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이론에 대한 '소화불량'과 '주마간산'의 양상이다(아래 나의 글이 실린, 소위 '문예 계간지'에서도 이러한 글의 호흡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체계적인 구조를 가진 저작이 '실종'되고 조각 글들의 병치와 합본으로서의 책이 '창궐'하게 된 배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물론 '책'이라고 하는 유형/무형의 실체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경제적' 변화의 요소들이 고려돼야 하겠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글쓰기의 호흡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역시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3) 다음으로,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 문제: 글의 호흡 문제는 사실 이러한 '최신의' 글쓰기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인터넷 공간의 저작권 문제에 있어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물론 여러 측면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글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옮겨온ㅡ역시나 짧은 호흡의ㅡ글들을 수록하고 배열하기만 하는 공간은 자칫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ㅡ글 '올리기'라고 해야 할 것인가ㅡ를 공허한 형식으로 만들 수 있다(글의 분량이 아무리 짧다 해도, 그리고 그 글이 담고 있는 생각이 내 자신의 것과 대척점에 서 있다 해도, 자신의 생각과 글로 이루어진 공간을 보고 만나는 일은, 그래서 내게 가장 흐뭇하고 기분 좋은 일 중의 하나이며, 그러한 공간들이 서로 교류해 이루어내는 하나의 '공동체'는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ㅡ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집단적인ㅡ'이카리아(Icaria)'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보의 공유와 확산에 있어서 인터넷이 지닌 긍정적이고도 활동적인 역할은 자명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매체로서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한다면 쓰레기가 넘치는 세상에 쓰레기 하나를 더할 뿐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기'란, 그러므로 내게는 하나의 '징후적' 기만인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최근에 유명해진 어떤 한 책을 읽지 않고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기'에 관해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는 나 또한, 아마도 그러한 기만적인 술책을 행하고 있는 자들 중 하나일 것인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조차 읽지 않고 말하기란, 그러므로 또한 얼마나 역설적이고 징후적인가, 하여 다시 묻자면, '읽기'라는 행위는 무엇이며 또 그 행위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규정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여기서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지극히 '반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주체성을 강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체성'과 '주체화'의 문제는, 지금, 여기서, 새롭게, 다시, 사유되어야만 한다.

4) 반면 번역자들이 자신의 번역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에 대한 정오표를 과거에 비해 신속하게 올리고 또한 그에 대한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게 된 환경은, 인터넷 공간과 책의 공간이 만나는 장에서 이루어진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일 것이다. 랑시에르의 번역과 관련된 어떤 구체적이고 특수한 '지층'과 '환경'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이 번역과 수용이라는 지층과 환경 '일반(überhaupt)'에 대한 하나의 '바로미터' 혹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고 또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랑시에르의 사유 내용이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이론과 실천 영역에서 전유되는 방식과 양상도 중요하겠지만, '랑시에르'라는 고유명과 그 '형식' 자체가 우리에게 '징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수용'과 '번역'의 구조 혹은 현황 역시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곱씹어야 할 문제라는 것 역시 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내가 현재 한국의 이론적/실천적 현황에서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역설적이게도, 글의 초입(初入)부터 사족(蛇足)이 길어졌지만ㅡ그것도 번호까지 매겨 가며ㅡ, 주지하다시피, 이는 내 몹쓸 고질병이다. 이하 기고문 전문을 관련된 이미지 몇 장과 함께ㅡ역시나 내 몹쓸 예의 사족들을 첨부해ㅡ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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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ques Rancière, Le maître ignorant, Paris: 10/18, 2004(1987¹).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 지적 해방이란 무엇인가
ㅡ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궁리, 2008) 서평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영화 <13번째 전사(The 13th Warrior)>(1999)에서 우리는 '번역'이라는 개념 혹은 '학습'이라는 경험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을 하나 목격하게 된다. 북구인들의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한 아랍인(안토니오 반데라스)이 단지 이들의 대화를 끈질기고 주의 깊게 듣는 과정만을 통해서 그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웅얼거림을 점차 분절된 언어로 파악하게 되는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반데라스에게 단지 웅얼거림으로만 들리던 그 말들은 이제 그도 관객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 곧 영어로 바뀌어간다).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런 '영화'와도 같은 사례가 1818년 루뱅 대학에서 실제로 일어났으며, 심지어 그러한 '학습'의 방식을 "보편적 가르침(enseignement universel)"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기적'이나 급작스런 '개안(開眼)'도 아니고 '천재적인 어학실력' 같은 것은 더 더욱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겪게 되는 어떤 과정에 대한 한 탁월한 사례라는 것이다. 지능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며 그 자체로 위계를 갖지 않는다.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하나의 고유명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러한 평등의 원리를 시험대 위로, 교단 위로 올려놓는다. 그 고유명은 바로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이다. 

 

▷ 안토니오 반데라스(Antonio Banderas) 주연, 영화 <13번째 전사>의 포스터.

왜 자코토라는 이름이 문제가 되는가? 망명한 혁명가이자 교육자였던 자코토는 루뱅 대학에서 하나의 '지적 모험'을 감행한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프랑스인 선생 자코토는 반대로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 교재 한 권을 건네주었고, '놀랍게도' 학생들은 단지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비교와 그 반복을 통해 프랑스어 구문들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던 것이다. 자코토의 이 '우연한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정식화하게 된 '보편적 가르침'의 내용은, 교사와 학생 사이 혹은 개개의 학생들 사이에 지능의 차이가 존재함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던 당시 유럽의 교육계에는 하나의 '추문'에 가까웠다(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쉽게 '잊혀지는' 진실이며 또한 여전히 추문이기도 하다). 지적 해방의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설명자'가 아니라 단지 '무지한 스승'이라는 이 역설과도 같은 주장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랑시에르는 설명자에 의한 교육을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라는 말로, 무지한 스승에 의한 교육을 '해방(émancipation)'이라는 말로 명명하면서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교육과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Jacques Rancière, La nuit des prolétaires, Paris: Hachette, 2008(Fayard, 1981¹).
Jacques Rancière, Le philosophe et ses pauvres, Paris: Flammarion, 2007(Fayard, 1983¹).
*)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아마도 랑시에르의 책들 중 가장 먼저 소개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개념은 물론 '정치와 미학의 관계'라는 랑시에르의 중심적 주제에 있어 이 책은 하나의 이정표, 하나의 전환점을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원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찾는다고 하는 어떤 순진하고 적극적인 정체성 탐색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아포리아'를 가장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ㅡ그리고 그 이론적 진행 안에서 가장 '수행적으로'ㅡ전복함으로써, '노동자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행위 자체를 보다 '징후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가장 '미학적'인 것 안에, 곧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의문과 재사유 안에, 가장 '정치적'인 혁명과 해방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랑시에르의 기본적 입장은 이미 이 책에서 정립되고 있는 것. "프롤레타리아라는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 이러한 변절자들이 어떠한 우회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노동자 정체성의 이미지와 담론을 형성하게 되었는가(par quels détours ces transfuges, désireux de s'arracher à la contrainte de l'existence prolétaire, ont-ils paradoxalement forgé l'image et le discours de l'identité ouvrière)?"(La nuit des prolétaires, p.10)라는 물음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지식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확장/심화시키고 있는 『철학자와 그 빈자들』 역시 일독을 요하는 책(그러므로 또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노동자에게 '온전하게' 되찾아주는 것으로 상정되고 설정된 어떤 '지식인의 임무'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허구이며 기만이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 의한 '보편적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보편적 가르침은 무엇보다 비슷함에 대한 보편적 입증이다. 이는 모든 해방된 자들, 즉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이들과 비슷한 인간으로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Jacques Rancière, Le Maître ignorant, Paris: 10/18, 2004(1987¹), p.71, 국역본 86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이하에서는 인용문 뒤 괄호 안에서 원서 쪽수와 국역본 쪽수만을 병기하기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라고 말하는 원칙은 일견 지당한 말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 자신의 일을 제외한 다른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제한적이고 분할적인 명령이며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지적 해방과 정치적 주체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서 오히려 지배적 질서의 억압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랑시에르가 다른 책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1981)과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Le Philosophe et ses pauvres)』(1983)에서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문제 역시 바로 이러한 '플라톤의 거짓말', 곧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수행하며 각자의 분수와 조건에 맞게 살아가라는 억압적 명령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천착했던 문제 중 하나는 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란 어떤 것인가, 곧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결론은,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자체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자적' 정체성은 없다는 것, 오히려 노동자의 정체성 자체가 부르주아적 정체성과의 모방적/대항적 관계를 통해 구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랑시에르가 노동자들의 문서고 연구를 통해 낮 동안의 노동을 마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밤의 시간, 곧 전혀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는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와 혁명의 심급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라는 개념을 통해 감성학/미학의 차원에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랑시에르의 근본적 문제의식도 사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경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발견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란 곧 철학/사유하는 자와 생활/노동하는 자를 가르는 분할의 방식에 대한 도전의 시간이었으며, 또한 그렇기에 그 밤 자체가 이미 어떤 '감성적/미학적 전복'을 준비하고 잉태하는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2006년에 새롭게 덧붙인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의 서문에서 "노동자의 해방은 무엇보다 하나의 감성적/미학적 혁명(une révolution esthétique)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Jacques Rancière, Le Philosophe et ses pauvres, Paris: Flammarion, 2007(1983¹), p.vi). 이러한 지적 해방의 주제와 평등의 원리는 『무지한 스승』 안에서 자코토의 경험과 교육의 문제를 중심으로 특화되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저 '플라톤의 거짓말'을 비판하듯 『무지한 스승』에서 교육 안의 '소크라테스주의' 또한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쉽게 전제되는 지능의 우열이 아니라 오직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만나는 곳에서, 곧 평등의 원리가 실천되고 입증되는 곳에서, '보편적 가르침'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63/78) 이렇듯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에게 어떤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해방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무지한 자는 더 적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54/68)이라는 역설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지능의 평등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오히려 학습과 대화 자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해방은 이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68/83) 

   

Alain Faure & Jacques Rancière(éds.), La parole ouvrière, Paris: La Fabrique, 2007(1976¹).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Paris: La Fabrique, 2000.
*) 랑시에르가 알랭 포르와 함께 편집한 『노동자의 말』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으로 가는 일종의 가교 역할로서도 중요한 책이지만, 그 자체로 랑시에르가 알튀세르(Althusser)와 '단절'한 이유와 향후 천착했던 작업의 요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또한 중요한 '자료집'이다(랑시에르가 편집한 루이-가브리엘 고니(Louis-Gabriel Gauny)의 책 『평민 철학자(Le philosophe plébéien)』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일독을 요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뒤지는 랑시에르의 이미지는 여기서, 광기와 감금의 역사적 기록물들 속에 거주했던 푸코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아마도 '푸코'라는 고유명과 함께, 그리고 다시금 '랑시에르'라는 고유명과 함께, 우리는 저 '역사'라는 작업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시 묻자면, 왜 자코토의 이름은ㅡ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넘어ㅡ왜 하나의 '고유명'일 수밖에 없는가? "자코토는 진보의 기치 아래 평등이 지워지고 지도라는 미명 아래 해방이 지워지고 있음을 생각했던 유일한 이였다."(222/252, 번역 일부 수정) 이러한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자코토 이후 그 제자들이 행한 교육에서 어떤 '진보주의적 오염'의 요소를 발견하고 다시금 자코토를 참조할 것을, 그의 저 '우연한 경험'의 내용과 '무지한 스승'의 개념으로 돌아갈 것을, 그래서 다시금 지적 해방과 평등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권유한다. 진보주의적 교육자들조차도 저 자코토의 평등의 원칙을 쉽사리 잊고 다시금 불평등의 전제에 기초해 평등을 쟁취해야 할 하나의 목적으로 삼는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보편적 가르침'은 해방보다는 지도(instruction)를 중시하는 저 '설명자'의 교육에 다시금 봉사하게 될 위험이 크다(소위 '진보주의적' 교육에 있어서도 상황이 이럴진대 하물며 '보수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만, 다만 『무지한 스승』이 진보론자들의 교육론에 대한 보수적 교육론의 비판 근거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굳이 덧붙여두는 것은 아마도 나의 노파심 때문일 터). 자코토가 행했던 교육적 모험은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다시금 새롭게 사유하고 재전유해야 할 무엇이다. "자코토는 진보의 표상과 제도화를 평등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모험에 대한 포기로, 공교육을 해방에 대한 애도작업으로 지각했던 유일한 평등주의자였다."(222-223/252, 번역 일부 수정) 따라서 마치 제도화된 타성적 기독교를 넘어서 예수의 이름이 언제나 다시 참고하고 회귀해야 할 하나의 '원점'인 것과도 비슷하게, 랑시에르에게 자코토의 이름 또한 평등의 원리와 보편적 가르침, 그리고 그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적 해방의 문제에서 언제나 다시금 되돌아가고 재사유해야 할 하나의 출발점의 위치를 점한다. "자코토라는 이름, 그것은 진보라는 허구 아래 매장돼버린 이성적 존재들의 평등을 한탄하며 동시에 비웃는 이러한 앎이 지닌 고유명이었다."(223/253, 번역 일부 수정)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자코토의 이 '특수한' 사례는 유일무이한 돌연변이와도 같은 어떤 '예외'가 아니다. 랑시에르에게 자코토의 이름이 하나의 '고유명'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평등의 원리를 확인하고 입증하는 하나의 '보편적' 사례를 증언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 '무지한 스승'의 고유명,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

그런데 자코토는 이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그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231/261) 자코토가 했던 예언, 그리고 그 예언을 '자리바꿈'하면서 다시금 랑시에르가 반복하고 있는 이 예언을 오늘날 한국 교육의 몇몇 사례에 '성공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일제고사에 반발하며 학생들과 체험학습을 나갔던 교사에게 해임과 파면을 선고하고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우열반의 편성을 마치 개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인 양 으스대며 국제중과 자사고의 설립이 소위 '교육선진화'의 지름길인 것처럼 선전하는 이 땅의 척박한 공교육 풍토는 그 자체가 지능의 평등이라는 전제와 보편적 가르침의 원칙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걸림돌이다. 또한 소위 '국가정체성'의 확립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특정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관점들을 '자학적'이고 '좌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고 말소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그 스스로가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는 일본 우익 교과서들의 행태와 어떻게 다른가? 정부는 '국민'이라는 '열등한' 학생을 대상으로 특정한 국가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려 드는 '유식한' 스승과 '설명자'의 위치에 섬으로써 오히려 그 자신의 '무식함'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미네르바의 학력을 문제 삼아 그 '자질'을 비판하는 보수언론들 또한 이러한 '무식함'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은 소위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자칭 진보 역시나 자코토가 예언한 저 보편적 가르침의 '좌절'을 허투루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예언의 다른 한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이러한 보편적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227/257)이며, 따라서 "평등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228-229/258)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자코토'의 이름을, 그리고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을 우리의 자리로 소환해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자크 랑시에르, 『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상 몇 부분의 인용에서 번역을 일부 수정했으나, 『무지한 스승』의 국역본이 그간 오역의 문제로 말이 많았던 몇몇 랑시에르 국역본들과 비교했을 때 가독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스럽고 긍정적이다. 작년에 랑시에르의 한 국역본을 두고서 번역자가 오역을 비판한 이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도 있었던바, 여기서 내가 랑시에르 책의 '번역'에 대해 개인적으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이 하나의 반문(反問)을 던져보기 위함이다. 만약 한국의 독자들에게 랑시에르 책의 프랑스어-한국어 대역본을 건네준다면? 그런데 그것이 오역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라면? 우리의 독자들은 과연 저 자코토의 학생들처럼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바꿔 묻자면, 그럴 때 번역자는 독자들에게 과연 '무지한 스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번역자들이 이 반문을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것은 물론이겠지만, 또한 '무지한 스승'이라는 개념을 그 스스로 '오용'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용어를 차용해서 말하자면, 무지한 스승이란 결코 자신의 오역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훈을 안겨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 같은 것이 아니기에.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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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3-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면에서 읽지 못한 서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계간지들이 랑시에르로 도배돼 있더군요. 대단히 '한국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람혼 2009-03-03 01:16   좋아요 0 | URL
서론이 길어지는 것, 글이 가는 골목 어귀 혹은 마주치는 그림마다 사족을 붙이게 되는 것, 이게 제 '병증'의 요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계간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는데, 지난 겨울 방한 강연도 있고 했으니, 아마도 봄호들에서는 랑시에르를 많게든 적게든 다뤄줄 거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이도 어쩌면 지극히 '한국적인' 예상을 하게 된 경우에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2009-03-03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4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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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9-03-0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것은 칸트의 보편윤리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네요.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설령 그것이 "뿌리 내리지 못"하더라도 실질적인 '평등'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을 가로지르는, 관철시켜내야만 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보편)원칙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주는 것으로 랑시에르를 이해해도 될까요?

람혼 2009-03-05 02:14   좋아요 0 | URL
지난 몇 년 동안 랑시에르의 책들을 계속 읽어 오면서 제게도 또한 그가 가장 예리하게 주석하고 내밀하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가 바로 칸트라는 생각이 거의 심증과 물증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랑시에르가 지닌 어떤 '급진성'이 바로 이러한 칸트 독해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느낌인데요, 특히나 리오타르의 칸트론을 비판하면서 칸트의 숭고론과 판단력 비판의 문제의식을 새롭게 재전유하고 있는 랑시에르와 마주치게 되면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강화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시대ㅡ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단어인가요, '이 시대'ㅡ에는, 래디컬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래디컬한 '칸트주의자'가 더욱 간절히 요청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 그런 느낌이 들면서, 랑시에르와 가라타니 고진을 잇는 어떤 접점에 다시금 시선을 보내게 됩니다. 오랜만의 yoonta님 댓글이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