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나는 한 가지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 보통 월초에 나가다가 이달엔 월말에 나가게 됐는데, 낮에 천안함 구조 속보를 계속 클릭해가며 쓴 것이다(끝내 원고를 보낼 때까지 좋은 소식은 뜨지 않았다). 칼럼의 제목은 '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로 나갔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행복'은 정치적 공약이 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는 점이다. 정치의 장에서 행복은 언제나 계량화된 행복, 정량적인 행복일 수밖에 없으며(행복의 비교급은 그런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곧 '행복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미처 거기까지 다 쓰지 못한 탓도 있다...    

경향신문(10. 03. 30) [문화와 세상]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 

중국의 부유층 사이에서 티베트의 토종개 ‘짱아오’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사자의 갈기처럼 긴 털로 덮여 있어서 일명 ‘사자개’라고도 불리는 이 희귀종 개는 원래 유목민들의 양치기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신흥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하면서 몸값이 한국 돈으로 십수억원까지 치솟았고, 중국의 고가품 10대 아이템에서도 1위로 꼽혔다는 소식이다. 사치품 과소비의 전형적 사례로 이제 자본주의 중국도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했다는 의미일까.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 곧 도구적 용도보다는 행복이나 위세 같은 기호적 가치가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 되는 사회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한다. 더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 소비사회에서 행복은 구원과 동의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이런 갈망은 인간의 타고난 성향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조건에 의해 배태된 것이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1970)에서 내민 통찰에 따르면, 행복의 신화는 근대의 정치혁명이 표방한 평등의 신화를 구체화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이념이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전이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 행복이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즐거움은 평등의 척도로 부적합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행복은 무엇보다도 측정 가능한 복리와 물질적 안락이라는 내용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인간이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그 전제다. 그렇게 해서 똑같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똑같은 TV프로그램을 보고 하는 생활수준의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짝이 되었다. 더 높은 성장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행복의 신화’는 한갓 ‘신화’에 불과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멜라네시아의 원주민들은 미군의 보급기지를 본떠 어설픈 활주로를 만들었다. 물자를 잔뜩 싣고 드나들던 화물기가 자신들의 ‘비행장’에도 착륙하기를 고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의 ‘화물 숭배’는 아무런 효력을 보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주술적인 미신이었을 뿐일까? 하지만 이것은 소비라는 활주로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행복이 착륙하기를 필사적으로 기다리는 소비사회의 우화이기도 하다고 보드리야르는 꼬집는다. 개발과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대책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행복지수가 언제나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그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살더라도 마실 물과 먹을 것이 있으면 감사하며 행복해한다고. 이것은 ‘행복지수’란 말 자체가 난센스이면서 동시에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걸 시사해준다. 



절판 유언에 따라 품귀 현상이 벌어진 법정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의 중고판이 20억원대까지 경매가가 치솟았다가 110만5000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무소유’라는 가치조차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소비사회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소유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진다면, 다가오는 정치의 계절에 혹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도 해본다. 적어도 ‘7·4·7’ 같은 구호에는 더 이상 현혹되지 않으리란 기대다. 사회적 진보는 오히려 행복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10. 03. 29. 

 

P.S.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1991/2002)는 강의를 할 기회가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본 책인데, 그의 중요한 논쟁상대가 <풍요한 사회>(한국경제신문, 2006)의 저자 갤브레이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풍요한 사회>의 초판은 1958년에 나왔으며, 보드리야르는 갤브레이스의 성장사회론에 대한 검토와 비판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갤브레이스의 책으론 1967년에 나온 <새로운 산업국가>(홍성사, 1979)도 다뤄진다. 모두 당시에 불어로 번역된 책들이다. 전에 포스팅한 바 있지만, 리포베츠키의 <행복의 역설>(알마, 2009) 또한 <소비의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으로 같이 읽어볼 만하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3-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요한 사회>가 요즘도 나오는군요.우리나라에는 예전에 갤브레이스의 책이 꽤 번역이 된 편이지요.

로쟈 2010-03-29 20:46   좋아요 0 | URL
지금은 거의 씨가 말랐습니다. 지금의 <풍요한 사회>는 98년에 나온 40주년 기념판을 옮긴 거네요...

구보 2010-03-3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적 진보가 오히려 행복에 대한 무관심에 비롯되지 않을까"란 구절이 번쩍 들어오네요. '행복(웰빙)강박증사회'로 진입한 듯 합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백치의 언어일 터,진정한 행복을 전유하는 길은 원래 있었던,그러나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행복의 순간들을 다시 사후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벤야민>-마침 아침에 이 구절을 읽고 있었습니다.

로쟈 2010-04-01 09:46   좋아요 0 | URL
네, 벤야민을 읽게 되면 '진보'란 말을 조심스럽게 쓰게 되죠...

비로그인 2010-03-3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에게 행복추구는 '자연스러운' 동기일 텐데요, 과연 그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을지... 각자 자신의 행복의 정의와 기준을 명확히 하든지, 공동체 혹은 사회가 행복을 대신할 가치와 동기를 제시하든지 해야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빈 상태'를 견디지 못하니까요...

로쟈 2010-04-01 09:47   좋아요 0 | URL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말도 있는 것처럼, 저는 '행복'이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수사로는 계속 애용되겠지만...

비로그인 2010-04-01 17:00   좋아요 0 | URL
여전히 '행복에 관한 한 무신론자'시군요... 기표의 무의미함으로 치자면 '사랑'만큼 기만적인 것도 없겠지만요.

로쟈 2010-04-01 20: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사랑'은 정치적 구호로 남용되진 않지요.^^

비로그인 2010-04-02 21:26   좋아요 0 | URL
종교의 정치적 측면은 그렇다 쳐도 '나라 사랑'은 충분히 남용되었지 않나요?
여담이지만 언젠가 지나가며 언급하신 로쟈님의 네 가지 키워드 중에 사랑이 있던 것 같은데, 언제쯤 그 사랑관 혹은 사랑론을 접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데요.^^

kumun 2010-03-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1위 였다는게 꽤나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니... 그러나 조사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수많은 조사결과에서 국가간 행복정도에 차이는 거의 경제발전도와 비례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사결과까지 가지 않더라도 실제로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대체적으로 좀 더 잘사는 아이들이 안정적이고 행복한 자아와 인생을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죠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로쟈 2010-04-01 09:49   좋아요 0 | URL
칼럼은 중학생 독자까지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에 눈높이를 조금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잘사는 집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건 너희들이 행복한 거란다고 주입하기 때문이겠죠. 아이들이야 맛있는 걸 먹고, 자기들끼리 맘껏 놀 수 있다면 행복해하죠...

코나투스 2010-03-3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유' 책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진다면..."이라고 기대해 보셨는데, 이 문장이 좀 맘에 걸렸습니다. '무소유' 책에 대한 붐은 위에 언급하셨던 듯이 품절되는 무소유 책 조차 소유함으로써 소유를 통한 행복의 경쟁에 나선 사적 소유, 사적 소비의 극단을 보여주는 아이러니 일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법정스님의 타계로 새삼 궁금해진 무소유 사고를 접해 봄으로써, 소유/소비 그리고 이를 위한 경쟁의 끊임없는 연쇄고리를 벗어나 행복을 추구해보고 싶은 현대인의 절박한 심정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 행복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거나 추구되는 것이지,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기대해보는 것은 상당히 거리가 먼 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걸 시사해준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이 말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으로도 그리고 보수적으로도 역시 쉽게 차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에 대한 무관심' 역시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습니다. 왠지 로쟈님의 말씀 속에서 '행복에 대한 관심' 자체가 본질적으로 문제를 지닌다는 것으로 오해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마도 지적하신 점은 소비를 통한 행복의 추구, 계량화된 행복에 대한 환상에 대한 비판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행복에 대한 관심인가 무관심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행복으로 보는가와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에따라 환상일수도 희망일수도 있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4-01 09:57   좋아요 0 | URL
원래는 초점을 '행복은 진보와 무관하다'는 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행복 담론'은 '성장 담론'과 마찬가지로 진보의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요(상상력이란 이럴 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행복'론도 별로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행복에 대한 무관심' 역시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행복은 일반적으로 '보수적 가치화'의 경향이 있는 만큼 방향을 좀 트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픽션들 2010-04-01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유' 책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면...">,

과도하게 형성된 '무소유'라는 집단무의식적 코드를 통해서라도, 현대인들의 과도한 행복찾기가 와해되는, 그런 경험이 주어진다면 의미가 있겠지요.

저는 로쟈님의 글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로쟈 2010-04-01 09:58   좋아요 0 | URL
네, 소유에 대한 무관심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물질적 소유(경제성장)가 행복의 중요한 척도로 돼 있으니까요...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있다. 거의 20년만이 아닌가 싶다. 강의를 위해서 예전에 소개되지 않았던 데뷔작 <만년>과 <사양>, <인간실격> 정도를 읽어보는 것인데, 참고로 몇 권 더 읽을지도 모르겠다. 나쓰메 소세키와는 달리 국내에 연구논문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거기에 출간된 연구서는 한권도 없어서 의외다(국내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어로 쓰인 연구서는 있다). 다자이 오사무 이후에 다룰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는 좀 나을지 모르겠다. 똑같이 자살하긴 했지만, 상극이었던 두 작가.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생에 대한 친밀한 고백의 기록
유숙자 지음 / 살림 / 2008년 5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10년 03월 28일에 저장
절판
만년
다자이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8년 8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10년 03월 28일에 저장
품절

만년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7,000원 → 6,650원(5%할인) / 마일리지 200원(3% 적립)
2010년 03월 28일에 저장
품절

나의 소소한 일상-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10년 03월 28일에 저장
품절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10-03-28 14:5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사람들이 은근히 좋아하는 다자이 오사무.왜 그럴까요? 퇴폐주의에 대한 호감때문일까요?

로쟈 2010-03-28 19:59   좋아요 0 | URL
죄의식이나 부끄러움 등을 건드리고 있어서 같은데요. 일본에서도 호오가 분명히 갈리는 작가로 돼 있습니다...

2010-03-28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3-30 10:49   좋아요 0 | URL
다자이 오사무를 머리는 좌파, 몸은 우파로 살았던 사람으로 살펴봐도 좋을 듯 합니다.
우리나라엔 그의 정사(情死)만 기억되는데 소설 속 사상의 진폭도 꽤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양> 같은 소설은 참 좋은데 편폭을 늘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사양>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가족사 소설을 그의 딸인 쓰시마 유코가 <불의 산>에서 해냈다는 생각도 하구요.

로쟈 2010-03-30 09:38   좋아요 0 | URL
재산가에서 태어났지만 4남이었기 때문에 '우파'라고 해도 주변부지요. 공산주의에 잠시 투신했던 것도 심정적인 것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시고 2010-04-01 12:57   좋아요 0 | URL
리스트와는 관계없는 내용입니다만, 질문 하나 드려도 될런지요...

평소 로쟈님의 서재를 통해 인문서적을 읽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때때로 이렇게 리스트를 만들어 올리시거나 특정 작가와 분야에 대해 소개글을 적으실 때 언급하는 책이 다양한 판본인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문예판 사양, 소화판 사양 이런 식으로-)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로쟈님은 같은 책이라도 판본이 다르면 일단 읽어보시는 건가요? (강의때문이든 아니든) 제 경우 같은 책을 다른 판본으로 두 번 읽을 땐 대체 어떤 점에 중점을 두면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다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어서... 로쟈님의 경험담이 살짝 듣고 싶기도 하구요.

로쟈 2010-04-02 10:20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여러 번역본으로 읽는 걸 선호합니다. 그게 같은 노래라도 여러 가수가 각기 다르게 부르는 것과 비슷해서요. 그럴 때 줄거리보다 디테일이 중요하죠. '오역'인 듯싶어서 대조해보는 경우도 있고요...
 

'감각의 독서가 정헤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란 부제로 나온 책이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민음사, 2010)이다. 눈에 띄는 제목이고 표지다(개인적으로 <런던을 속삭여 줄게>의 표지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언젠가 저자를 한번 만났을 때, 연재중인 원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묶어낸 것이다. 책은 <위대한 개츠비>부터 <위대한 유산>까지 15편의 고전에 대한 독서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나도 이런 유형의 책을 기획하고 있기도 해서 많은 참고가 된다.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27) 고전 속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똑똑! 누군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새벽 3시다. 마음문을 열어보니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 로테를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 베르테르’다.

‘감각의 독서가’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시비에스 라디오> 프로듀서 정혜윤씨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독특한 고전 읽기 책이다. <세계가…>에는 지은이가 2008년 10월부터 온라인 서점 예스24 웹진과 민음사 누리집에 연재해온 독서 칼럼 중 가려뽑은 15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겨레>에 ‘정혜윤의 새벽 3시 책읽기’를 연재하고 있는 그의 고전 읽기는 마치 고전 속의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같다. 그의 글에 유난히 슬픔, 기쁨, 분노, 안타까움 등 감정의 묘사가 많은 것도, 지은이가 고전 속 주인공과 이렇게 감정적 교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른 달려나가 가련한 청년 베르테르를 껴안는다. 그 또한 “흠모하는 이의 가벼운 뿌리침 한번만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 너무나 가련하고 나약한 몸뚱이가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관능 그 자체였던, 그런 어린 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베르테르뿐이랴. 그는 <위대한 개츠비>,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984>, <설국>, <주홍글씨> 속의 상처 입은 주인공들에게도 문을 열고 손을 내민다.

이 주인공들과의 만남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15살에 처음 <폭풍의 언덕>을 대했을 때, 그는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히스클리프가 죽기만을 바라면서 책을 읽어나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다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깨닫는다. 아니, 적어도 그 열정에 매혹된다. “지상에 있는 동안 한번만이라도 내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끌고 가보고 싶기 때문”인데, 이런 변화는 아마도 두 번의 만남 사이에 그 자신이 “격렬하고 쓰라린” 세상살이와 사랑을 겪었던 탓이었으리라.

그가 만나는 주인공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금 되돌아보라고 조언해주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통제된 빅브러더의 세계 <1984>에서 과거 기억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윈스턴 스미스와의 만남에서 그는 “사상경찰, 통제, 전쟁, 권위주의, 전체주의” 등 소설 속 세계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지은이는 오히려 “우리가 이미 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윈스턴이 어딘가에 끌려가 경험했던 것은 전기고문과 약물 투여, 벌거벗겨짐, 그리고 얼굴을 물어뜯으려는 쥐의 위협인데, 우리는 쥐보다 무서운 개가 위협하는 관타나모 수용소라는 현실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새벽 어스름이다. 마음의 문을 두드렸던 고전 속 주인공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고전 속 주인공은 떠나가더라도,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지은이를 이미 바꾸어 놓았다. 그 깊은 절망과, 그 벅찬 기쁨과, 그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지은이의 가슴속에 계속 울림으로 남아 그를 ‘어제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출근길 북적이는 사람들은 어제와 같아 보여도, 이미 세상 또한 어제의 그 세상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고전 읽기를 통해 날마다 세상을 두번 살아간다.(김보근 기자) 

10. 03. 27. 

P.S. 기자의 지적대로 "그의 고전 읽기는 마치 고전 속의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 같다." 내 생각엔 그게 저자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 같다. 그는 고전과 그 주인공들에게 너무 관대하다. 그래서 인용이 많아진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다 보니 저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새벽 3시'의 책읽기라면 크게 떠들지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몇 편의 '읽기'를 읽어봤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저자의 프롤로그다. 가령 이런 저자의 고백들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때부터 고독은 시작되었다. 말 못 하는 고민 때문에 나는 집을 빠져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거의 매일 두 코스를 달렸다. 하나는 학교 운동장, 하나는 겨울이면 겨울이면 미끄러지지 말라고 늘 연탄재를 뿌려 두던 지독히 가파른 언덕.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동안 서서히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뭉클한 기운이 밀려오고 심장이 뛰었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조그만 입으로 아름답다 조아리며 멈춰 서서 지켜볼 때 이미 아름다움은 육체적 감각에 속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달리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도 달리기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100미터를 13초대에 뛴다는 저자의 달리기 얘기가 무용담처럼 들린다.  

언덕을 달리는 것은 좀 더 힘들었지만 오랜 연습 끝에 꽤 긴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다. 언덕 정상에 거대한 보름달 대신 그보다 유혹적인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뛰고 난 다음 구멍가게의 온갖 물건들, 우유, 보름달 빵, 두부, 빗자루, 쓰레받기, 고무장갑, 세탁비누 같은 것을 천천히 구경하다 보면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서 집에 돌아갔다. 그때 구멍가게의 물건들이 언덕 밑 나의 집으로 끌어주는 나만의 중력이었다.

달리는 것만 빼면 나도 그렇고 다들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을 법하다. 하지만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체험도 저자는 갖고 있다.  

체육 시간 전날이면 서점에 가서 얇은 문고판 책 한 권을 사고 엄마의 커다란 팬티를 한 장 빼돌렸다. 체육 시간엔 체육 선생의 작고 예리한 눈을 피하기 위해 엉덩이와 헐렁한 엄마 팬티 사이에 문고판 책 한 권을 끼워 넣고 그 위에 체육복을 입고는 운동장에 나갔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친구들이 편을 가르고 공놀이를 시작할 때 나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엉덩이 아래서 책을 꺼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독서가 정혜윤의 독서 편력의 시작이었다. 핵심은 엉덩이로 하는 독서였다는 것.  

나는 아직도 엉덩이의 힘을 믿는다. 세상의 어떤 자리에 앉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야 하는 것니까. 그렇게 읽은 책이 대개 고전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책이 엉덩이 밑에 숨기기게 좋았느냐. 즉 사이즈의 문제가 나의 독서 방향을 결정했다.  

독서가 정혜윤의 개성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한데, 저자는 그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한 번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관련된 문제 같다"는 문제의식을 철저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한 번뿐인 인생의 가벼움을 다루고 있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저자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건 좀 기이한 일이다. 저자의 '고전'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독서의 흥미를 돋우는 저자의 대범한 주장.

만약 우리에게 세계가 한 번만 진행된다면(보이는 그대로만 보는 데서 멈춘다면)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자신이다. 확실히 우리는 한 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한 순간에도 과거와 미래를 산다.  

하지만 여기에 이어지는 건 좀 평범한 문장이고 통념이다(징후적이게도 문장 또한 늘어지고 있다). 즉, 그는 더 진행하지 않고 멈춘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무너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인데, 어떤 고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적합한 대화 상대인가는 너무나 상대적인 것 같다.

 그리하여 주저앉는 문장들. 

어쨌든 정말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살갗을 부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은 쾌감을 줄 테니 그런 순간을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린 모두 지독한 쾌락주의자로 사는 시기를 겪을 테니까.

사실 내가 기대하는 건 '극복의지'이지 '쾌감'이나 '쾌락주의'가 아니다. 책읽기가 "한 번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과 책읽기란 "살갗을 부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란 주장은 과연 같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건 나의 취향이 아니다. '어쨌든'이란 부사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취향('어쨌든'은 우리를 관대하게 만들고 게으르게 만든다). 나는 저자가 겹쳐읽는 감각보다는 엉덩이의 힘을 '실제로' 더 신뢰하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phie 2010-03-27 21:24   좋아요 0 | URL
ㅋㅋ 엉덩이로 하는 독서라니요.. 주저앉는 문장이란 평을 보니 왠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글쎄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제 자신도 석연치 않게 끝나는 문장들... 이 있지요.

비로그인 2010-03-28 00:44   좋아요 0 | URL
지성적 둔부와 심미적 복부를 양립시키려면 달리기라는 실천의지가 필요하겠는데요.
 
부르주아 좌파와 우파 아나키스트의 만남

프랑스의 고전학자인 자클린 드 로미이와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같은 프랑스인이라는 것 말고는 마주할 일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의 <왜 그리스인가?>(후마니타스, 2010)와 <공공의 적들>(프로네시스, 2010)을 어제오늘 구한 터에, 원서의 이미지가 궁금해서 찾아봤다(알라딘은 아직 프랑스 원서까지는 판매하지 않는다).  

먼저, 자클린 드 로미이는 1913년생이므로 거의 100세에 육박하는 나이다. 1988년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프랑스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으며, 작년 레비스트로스 서거 이후엔 최고령 회원이라 한다. 소르본느 대학 교수를 거쳐서 1973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리스 고전학' 담당교수로 재임했다고 하니까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석학이다(2007년에 레지옹 도뇌르 최고훈장을 받은 걸로 돼 있다).   

놀라운 것은 90세가 넘은 후에도 거의 매년 한권씩의 저작을 발표하고 있다는 점이고, <왜 그리스인가?>는 1992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여든에 펴낸 책이다. 국내에 프랑스의 고전학자로는 장 피에르 베르낭이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합동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프랑스 고전학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해서 소장도서로 손색이 없겠다. 드 로미이의 책은 영어로도 몇 권 번역돼 있다(<왜 그리스인가?>는 아직 영역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어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서신교환선을 펴낸 미셸 우엘벡. "출간하는 책마다 거센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프랑스 문단의 대표 작가"로 소개된다.   

1985년에 시인으로 데뷔했고, 첫번째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1994)으로 주목받은 뒤에 두번째 소설 <소립자>(1998)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전세계 3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고 한다). 영상 수필집 <란사로테>(2000)와 소설 <플랫폼>(2001)을 더 펴냈고(<란사로테>는 소설로도 분류된다), 현재는 <어느 섬의 가능성>(2005)을 영화화하고 있다고(이미 끝낸 듯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rIA-_XOZeH8&NR=1 참조). 국내에는 그의 소설 네 편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리고 영역본들. <소립자>를 뺀 세 권의 소설 표지다.  

  

그리고 대표작인 <소립자>의 한국어본과 영어본 표지. 

  

그리고 아래는 프랑스어본의 표지와 영화 <소립자>(2006)의 포스터(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QlxuE0pQ 참조).

    

마음에 드는 표지는 영화의 스틸컷을 집어넣은 영어판이다.

  

그리고, <공공의 적들>의 프랑스어판 표지.

  

표지 이미지들을 둘러보는 것이 머리가 무거울 때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여흥이다... 

10. 03. 27.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3-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엊그제 구내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발견하고 잠시 놀란 책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이응과리을, 2010)이다. 20세기 독일문학의 '전설'로 회자되던 책이고, 아래 기사에서도 언급되지만 국내에서는 무엇보다도 밀란 쿤데라의 격찬을 통해 존재가 알려진 작품이다(쿤데라를 통해서 알게 된 작가가 로베르트 무질과 <몽유병자들>의 헤르만 브로흐이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선뜻 엄두를 못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출간을 준비중인 곳도 있었다) 이번에 무질 전공자인 고원 교수의 번역으로 일단은 1/3이 소개됐다(나머지는 2/3는 연차적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고원 교수는 출판사 이응과리을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한국일보(10. 03. 27) "20세기 미완의 걸작… 80년 만에 처음 소개합니다" 

"20세기를 통틀어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실존의 백과사전이다. 소설의 형식을 풍부하게 하고 소설만이 발견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했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 작가 밀란 쿤데라가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의 장편소설 <특성 없는 남자>(이응과리을 발행)에 바친 찬사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독일 작가인 무질이 1920년께부터 집필에 착수, 1930년 제1권, 2년 후 제2권을 출간했으나 끝내 미완의 유작으로 남은 이 소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1922),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와 비견되는, 20세기 전반 유럽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난해한 내용, 방대한 분량 탓에 국내에선 오랫동안 제목으로만 회자됐던 이 소설이 한국어로 처음 번역됐다. 번역자는 독일에서 무질 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원(59) 서울대 독문과 교수. 고 교수는 무질 생전에 출간된 제1, 2권을 내년까지 모두 세 권으로 번역하기로 하고 이번에 첫 번째 책을 냈다. 분량은 총 1,700여 쪽에 이른다. 



고 교수는 "<특성 없는 남자>가 처음 세상에 나온 지 80년 만에 한국어판이 나온 셈"이라며 "출간된 분량보다 오히려 많은 미출간 유고는 번역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1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식인 청년 울리히가 밟은 행적을 따라간다. 황제 즉위 7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며 빈의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귀향했다가 여동생 아가테에게 근친애를 느낀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이 소설은 울리히가 기존의 도덕에서 벗어나 진정 '올바른 삶'을 모색하는 과정이 뼈대를 이룬다. 고 교수는 "독자 스스로 울리히가 되어 그가 새로운 예술적, 언어적 체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동참한다면 어떤 작품보다도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도 번역된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1906)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무질은 1930년대 나치 독일의 박해로 스위스로 망명, 가난과 싸우며 창작에 매진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고 교수는 "미완성의 폐허로 남아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전망을 열어준 <특성 없는 남자>의 운명은 작가의 불우한 생애를 닮았다"고 말했다.(이훈성기자) 

10. 03. 27.  

P.S. 20세기 독일문학 작품 가운데 또 소개되면 좋겠다 싶은 것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1929)이다(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함께 1920년대의 3대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예전에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있었는데, 이후론 자취를 찾기 어렵다(그간에 연구서들만 몇 권 나왔다). 세계문학이 경쟁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즈음인지라 기대를 가져본다. 참고로, 이 작품은 1980년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 의해 텔리비전 시리즈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15시간이 넘는 분량이다). 최근에 디지털판이 다시 나왔다(http://www.youtube.com/watch?v=qTjFWAvJTvI&feature=related).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3-27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7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2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고 있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로쟈 2010-03-28 19:58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학원사판까지 3종이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3-28 21:33   좋아요 0 | URL
학원사 세계문학전집도 괜찮았는데 헌책방에도 잘 안 나오더군요.